제 15화. 우리 홍위는 눈이 부시게
“낮번은 저와 윤가 나인이옵고, 밤번은 최가 나인과 이가 나인입니다.”
윤서가 고하자 홍 승휘가 으흥,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아지(왕자들의 유모를 부르는 말)는 아직 입궐 전이니······.”
그러더니 홍위와 뭐라 뭐라 이야기 하고 있던 자신의 딸 금아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금아를 다정하게 당겨 안으며 홍위에게 속삭였다.
“우리 금아는 밤마다 내 옆에서 자는데, 아기씨께선 쓸쓸하셔서, 어찌하나요? 빈께서는 돌아가셨고 아지도 아직 입궐하지 않아 홀로 주무셔야 하니, 가여워라. 신첩의 마음이 참으로 아프옵니다.”
“!”
저런 썅년이 있나. 저도 자식 키우는 것이.
윤서는 속으로 쌍욕을 날리며 홍위를 바라보았다.
“······.”
홍위는 홍 승휘의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는 못한 눈치였다.
그렇지만 홍 승휘의 눈빛과 어조 속에 든 경멸과 조롱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바로 입술을 비죽거리며 윤서를 올려다보았다.
동궁 뜰에 거북한 침묵이 내렸다.
홍 승휘의 비열한 의도에 기쁜 듯 입꼬리를 살짝살짝 올리며 표정을 관리하는 후궁도 있고. 또 언짢은 듯 입술을 비죽이는 후궁과 나인들도 많았다.
그러나 홍 승휘는 세자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아 동궁전의 안주인 행세를 하는 최고참 후궁이니, 그 누구도 나서서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홍 승휘가 딸을 안고 끙 일어서서 몹시도 조롱하는 눈빛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손을 긁었기로서니 네깟게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야. 비웃는 눈빛이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거지.’
장차 도모할 일을 위해 세자의 신뢰는 필요하나 여인으로서 총애를 받을 의도는 전혀 없기에 후궁들이 무슨 난리굿을 어떻게 피우든 안전과 관계된 것만 아니라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듯 지내려고 했는데.
감히 우리 홍위를 건드리다니.
윤서는 홍위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아기씨.”
윤서가 부르자, 홍위는 기어이 눈물을 한 방울 또르르 흘리더니 눈물이 창피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다.
“···아기씨······.”
“······.”
“아기씨, 밤에 저희 나인들이 번을 서잖아요.”
“···응.”
사실 밤에 계속 번을 서는 것은 몹시 피로한 일이어서, 월별로 순번을 바꾼다.
권가 나인은 윤가 나인과 3월에 밤번을 섰고, 그래서 윤서는 지금 4월에 낮번을 서고 있다.
홍위는 왕족인지라 홀로 잠을 잤다.
그렇지만 조선에 영혼이 오게 된 날, 박가 나인과 한가 나인에 속아서 권가 홀로 밤번을 서다 죽어감을 깨닫고 홍위 곁에 누워 있었을 때. 그래서 윤서가 그 몸에 깃들어 깨어났을 때.
홍위는 권가 나인의 옷고름을 꼭 잡고 자고 있었다.
홍위는 아직 분리 불안이 있어 혼자 잘 준비가 덜 된 어린 아기에 불과했다.
아기들은 주양육자라고 느끼는 존재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하길 본능적으로 갈망한다.
동물 중 가장 오랜 기간 보살핌을 받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성장 조건이 양육자와의 긴밀한 유대를 갈망하도록 DNA에 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아동 심리를 공부한 적 없는 홍 승휘가 본능적으로 후벼판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홍 승휘는 엄마 없는 홍위의 불안정한 애착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톡 건드려, 홀로 잠들어야 하는 밤의 시간을 두렵고 서럽게 만들었다.
감히 우리 홍위를!
윤서는 홍위 앞에 바싹 다가앉아 눈높이를 맞추고 속삭였다.
“아기씨, 오늘부터 제가 밤에 번을 설까요?”
“···으응?”
“밤에 아기씨 곁에 있어 드릴까요?”
“응!”
홍위의 얼굴이 단번에 환해졌다!
“아나저.”
하며 홍위는 윤서에게 팔을 쭉 내밀었다.
윤서는 일어나 홍위를 안아 올려 단단히 품에 안았다.
내가 여기 있어, 홍위야. 너를 지킬 거야. 생생하게 느끼게 하기 위한 위안의 몸짓이었다.
윤서의 마음에 응답하듯 홍위도 윤서의 목에 팔을 단단히 두르고 고개를 돌려 홍 승휘를 똑바로 내려다았다. 방금까지 서럽게 젖었던 눈동자가 냉철하게 빛을 내었다.
“텬자무네 망당피단 미디기당이난 마니 잇떠요. 남으 단덤에 대해 마하지 마고 다기 당덤을 믿디 마라는 마디에요. 호 씅이는 텬자무느 다디 배우데요.”
(천자문에 망담피단 미시기장(罔談彼短 靡恃己長)이란 말이 있어요. 남의 단점에 대해 말하지 말고 자기 장점을 믿지 말라는 말이에요. 홍 승휘는 천자문을 다시 배우세요.)
남의 약점을 후벼파지 말고, 스스로의 처지를 자만하지 말라는 꾸짖음이었다.
흥분해서 다른 때보다 더 심하게 뭉그러진 발음이었지만 그러나 그 어느때보다 더 당당한 말이기도 했다.
“오오.”
자선당의 뜰에 감탄의 소리가 퍼져나갔다.
박 상궁과 엄 상전, 그리고 홍위를 모시는 환관과 나인들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감동의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아이들의 이 눈부신 회복 탄력성이란!’
홍위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맞고도 이르지도 못하고 혼자 울먹거리는, 눈치를 심하게 살피는 위축된 아이였다.
그러던 아이가 자신을 정서적으로 학대하려는 어른에게 천자문의 어귀를 정확하게 인용하며 당당하게 맞서고 있다.
윤서는 문득 상담실에서 만났던 많은 아이들을 떠올렸다.
양육자에게 학대당하거나 방임당하는 아이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기 위해 포기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감각을 죽여 고통을 아예 차단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변을 무감각하게 견디는 것이 굳어지면 점차 자신의 내적 상태를 감지하고 구분하는 능력도 잃어버리게 되고, 그 무엇도 마음속 깊게 느낄 능력 자체를 잃게 된다.
그렇게 정서와 육체 모두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공허한 상태로 망가졌던 아이들이, 걸핏하면 무엇이라도 느껴보려고 자기 몸에 자해를 하거나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아이들이 상담을 통해 점차 세상이 폭력과 적대감만으로 가득찬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할 때,
그래서 간신히 눈을 맞추며 ‘고마워요, 선생님.’ 하며 변화를 시작할 때.
그런 날이면 윤서는 이런 아이들을 망가뜨렸던 어른들에 대한 분노와, 그럼에도 스스로 회복하기 시작하는 우리 뇌와 마음과 육체의 찬란한 회복력에 전율하며 홀로 울고는 했다.
우리 홍위는 그렇게 학대당한 것은 아니지만 단단한 정서적 애착이 없이 버려진 강아지처럼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는데.
그러했던 아이가 이렇게 당당하게 왕손의 위엄을 내보이며 저를 괴롭히는 못 된 것을 응징할 정도로 성장하다니.
윤서는 너무도 뿌듯한 마음에 더욱 힘주어 홍위를 안고 건을 쓴 머리통에 남모르게 재빨리 입술을 꾹 찍었다.
“거가 나잉야······.”
홍위도 윤서의 목을 꽉 껴안으며 자신을 깊게 아끼는 윤서의 존재를 몸으로 각인했다.
“!”
“!”
그 모습을 훔쳐본 후궁들은 원손과 권가 나인이 보이는 깊은 심리적 유대에 충격을 받았다.
또한 홍위가 내보이는 근엄한 왕재(王才)에 불현듯 두려움을 느꼈다.
어린 아이라 업수이 여기고 함부로 굴었다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수도 있단 경계심이 들었다.
그러나 홍 승휘만은 오랫동안 쌓아온 시기와 질투로 사태 파악이 밝지 못했다.
자신보다 사랑받지 못했던 양원 권씨가 어쩌다 먼저 아이를 낳아 세자빈이 된 것을 여전히 분하게 여기는 홍 승휘는 그 자식이 준 이 치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도 딸 금아를 낳아 생산 능력을 증명하였으니 이제 조만간 사내아이도 낳을 것이고, 그러면 비어 있는 세자빈 자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인데.
그러면 저 밉살스러운 원손에겐 반드시 불행한 일이 생길 것이고, 장차 대통은 내 아들이 잇게 될 것인데.
저 어린 애새끼가 천한 나인 따위의 품에 안겨 나를 능멸하였겠다!
“함부로 번을 바꾸다니. 안 될 일이다.”
홍 승휘가 윤서를 노려보며 기어이 소리쳤다.
“나인 따위가 어찌 제 마음대로 번을 바꾼단 말이냐. 넌 정해진 대로 낮번을 서거라.”
“크음, 저 승휘 마마님.”
윤서가 무어라고 답을 하기 전에, 이제까지 뒤쪽에 고요히 서 있던 박 상궁이 스르륵 앞으로 나와 홍 승휘 앞에 허리를 굽혔다.
“자넨 또, 뭔가?”
홍 승휘가 사납게 소리쳤다.
“여기 동궁전의 내명부는 내 소관일세. 감히 상궁 따위가!”
그러나 박 상궁은 제조상궁과 더불어 궐의 실세 중 실세였고, 세자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 존재였다.
“동궁전 나인의 번을 정하는 것은 소인의 소관입니다. 제게 맡겨두시지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자네, 감히!”
“이런 하찮은 일에 관여하시면 승휘 마마님의 위신만 떨어지십니다.”
말은 공손하였지만 사실은 통보였다.
상궁과 내관은 윗전의 변덕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당하게 맞거나 괴롭힘 당하는 내관이 있으면 먹는 물에서 냄새가 난다거나 세탁물 상태가 좋지 않거나 하는 사소한 것에서 심하게는 독이 든 음식까지 올려 응징하기도 했다.
먹는 것에서 입는 것까지,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 모두를 궁인에게 의존하는 왕족들에게 휘하 궁인이 불순한 마음을 먹는 것은 일상의 안전이 송두리째 위협에 처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걸 모르지 않는 홍 승휘는 박 상궁이 나서자 흠칫 한발 물러섰다.
“그렇게 하시지요, 홍 승휘 마마님.”
동궁전 내시부 수장 엄 상전까지 나서서 홍 승휘를 압박했다.
이렇게 되면 일단 한발 물러서야 한다.
“···내 오늘 일을 잊지 않을 것이야. 가자!”
홍 승휘는 입술을 떨며 금아의 손을 거칠게 잡아채고 후궁으로 향해야 했다.
홍 승휘의 마음 속엔 세 살 혀짤배기 원손보다, 그 원손을 안고 세자빈이라도 된 양 서늘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권가 나인에 대한 미움이 단단히 뿌리내렸다.
궐 안에서 소문은 궁인과 궁인의 입을 거치며 빠르게 퍼진다.
반 시진도 안 되어 원손 아기씨께서 동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사실과 함께 얼마나 영특하시게 홍 승휘의 비열한 수작질을 물리쳤는지 각 전에 퍼져나갔다.
심지어 동궁으로 홍위에게 글을 가르치러 왔던 성삼문까지 이 일을 듣게 되어 집현전으로 돌아가 원손 아기씨의 천자문 이해가 얼마나 심오한지 침을 튀기며 칭찬했다.
반쯤은 스승인 자신이 잘 가르쳐드렸다는 자랑이기도 했다.
이 소문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수양 대군의 거처 명례궁에도 들어갔다.
“하! 말도 데데한 것이.”
그렇지 않아도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대전 내관 전균이 은밀하게 자신의 양자인 어린 내관을 보내왔었다.
“오늘 새벽 천추전에서 전하와 세자가 은밀하게 독대를 하였습니다. 소인이 서쪽 창문 아래서 엿듣다가 내금위한테 발각될 뻔해서 겨우 앞부분만 조금 들었사온데, 세자 저하께서 내년에 원손을 세손으로 책봉하는 것과 책봉 도제조를 곧 정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부대부인 윤씨는 일단 은자 몇 냥을 주어 어린 내관을 보낸 후, 수양을 마주했다.
수양 대군의 얼굴이 실망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원손이 세손으로 정식 책봉이 되면, 형님께 무슨 일이 생겨도 보위가 곧장 그애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대감, 아직 애송이에 불과한 것을요. 그 아이가 무사히 성장하기까지 새털처럼 무수한 날들을 넘어야 합니다.”
윤씨가 위로하자 수양 대군은 크흠, 언짢게 미간을 찌푸리곤 사랑채로 나갔다.
계양군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윤씨는 선바위 밑 굿당이 있는 영험한 무당 무가이를 불러들였다.
“대체 어찌 된 일이야? 비방을 한다 하지 않았더냐?”
윤씨는 작년부터 주변의 인물들을 떼어내서 원손을 심약하고 병약하게 만들기 위한 계획을 착착 실행해오고 있었다.
무가이가 유모 부인 이씨에게 지속적으로 살을 날려 병이 들게 하고, 헌신적으로 원손을 위하는 권가 나인을 독살할 준비도 꼼꼼히 했다.
마침내 주상 전하부터 세자까지 궐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온양으로 떠난 지난 두 달의 적기가 찾아왔다.
그런데 원손의 아지(유모) 이씨는 살을 맞아 골골하며 사가로 떠밀려 나갔는데, 독까지 쓴 권가는 오히려 더 쌩쌩하게 살아 썩은 생선 같던 눈동자가 형형히 빛을 내고 있다.
“대체 그 보모 나인은 어찌 된 것이야?”
윤씨가 서슬 퍼런 기세로 추궁하자 들어올 때부터 눈 밑이 시커멓게 퀭했던 무당 무가이는 엎드려 벌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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