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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12화 (12/255)

제 12화. 서성이는 박 상궁의 초조

내내 냉철함을 유지하던 윤서는 막판에 이향의 잘난 몸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엄 내관이 붙여준 내관의 등롱 불빛을 따라 정신없이 박 상궁의 처소로 향했다.

박 상궁 처소에 가까워졌을 때.

“권가야!”

어둠 속에서 툭 검은 형체가 튀어나와 윤서의 팔을 잡았다.

“···마마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아이고, 정말로! 정말로!”

승은이라도 받은 게냐. 살피려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박 상궁은 일단 작은 은붙이 조각 하나를 등롱을 들고 온 내관 손에 쥐여주며 뱀처럼 쉭쉭거렸다.

“엄 상전더러 날이 밝는 대로 나 좀 보자 전하거라. 대체 이 중요한 일을 나도 모르게. 내 가만있지 않겠다 전하거라!”

“예, 예. 마마님.”

동궁전의 나인을 총감독하는 박 상궁은 성질이 괄괄하고 또 재물을 모으는 재주가 비상한지라 궐에서 다들 어려워하는 존재였다.

그런 사람이 불같이 화를 내며 손에 은덩이를 쥐여주니, 무서우면서도 좋아서 내관은 코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고 온 길을 마구 달려갔다.

“들어가자.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권가 나인이 세자의 시침을 들러 동궁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박 상궁은 뒤늦게 알았다.

내내 어리숙하다 요새 좀 똘똘해져서 둘이서 함께 재물 모아가며 권세를 누릴 꿈을 야무지게 꿨던 박 상궁으로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영악한 것들도 제 꾀에 넘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는 것이 궐이거늘. 그 순진한 것을.”

분노한 박 상궁은 저녁도 제대로 못 먹고 자정이 넘도록 처소 밖을 서성이며 진짜 권가가 세자의 후궁이 되면 누구를 시종 상궁과 나인으로 붙여주어야 하나 고심하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오자 박 상궁은 윤서의 질 좋은 나인복과, 몸에서 나는 좋은 향기에 얼굴이 허옇게 질렸다.

“정, 정말로 승은을 받은 것이야?”

“승은 받으면 치마 뒤집어 입는다면서요. 제대로 입고 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치마도 제대로고 머리도 단정한 것이 어디 뒹굴고 그러지는 않은 듯해서, 박 상궁은 마음이 놓이다가 다시 또 화가 났다.

“아니 넌, 이렇게 차리고 가서도 소박을 맞고 왔단 말이냐? 하아, 참.”

미련곰탱이 같은 것.

기껏 꾸미고 부푼 마음으로 세자 처소에 들었다가 매정하게 거절당하고 왔을 애를 생각하니, 그건 또 그것대로 마음이 아파 부아가 치밀었다.

“향낭까지 달고 가서도 소박맞고 왔다고 온 궐에 소문이 다 날 텐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히죽히죽 웃어. 넌, 속도 없냐.”

자신이 거절당하고 돌아온 것처럼 속상해하는 박 상궁의 마음 씀씀이가 뻔히 들여다보여서 윤서는 쿡쿡 웃고 말았다.

가슴이 말랑하게 따스해지며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이 스륵 풀렸다.

15세기 기준으로 아무리 대단한 지식을 가진 현대인이라도 21세기 인간이 중세에, 그것도 반상의 위계와 노비제도가 엄혹한 신분 질서의 정점인 궐에서 하찮은 나인 나부랭이로 사는 것은 결코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겉으로는 대범하게 굴었지만 언제든 일이 잘못될 수 있다는 위기를 염두에 두고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궐 안에 이렇게 진심으로 자신을 챙겨주는 어른이 있다니, 적이 위안이 되었다.

“마마님, 원래부터 승은 받으려고 갔던 것이 아니에요. 엊그제 제가 마마님 뒤를 따라서 우리 아기씨 잘 보필해 ‘행복은 돈과 권력’을 실현하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흥, 퇴짜 맞고 온 것을 잘도 포장하는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윤서가 여전히 씩씩한 것에 박 상궁은 적이 안심되는 눈치였다.

그래도 또 소박맞은 것은 맞은 것이니 위로를 해주고 싶으셨는지.

“곡주 한 사발 할래? 가뭄이 심해서 술 빚는 것이 금지되긴 했지만, 엊그제 종묘에 제사 지냈던 거 설리 내관이 몇 잔 몰래 챙겨주었다.”

“그, 그럴까요?”

‘곡주’란 말을 듣자 허기가 훅 몰려왔다.

대범한 척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권가’의 몸이 키가 크고 늘씬하고 볼륨도 있고 얼굴도 반반해서.

때 빼고 광낸 몸에 이향이 휙 돌아서 자자고 달려들까 봐 내심 걱정을 했더랬다.

그렇지만 이향은 끝도 없이 올라오는 상소에 조정 업무에, 완벽한 군주 세종만큼 해야 한다는 강박적 의무감에 짓눌려 성욕을 느낄 겨를도 없어 보였다.

세자가 여자한테 도통 관심을 안 보인다는 소문은 중압감 때문에 흔히 생기는 심인성 발기부전 때문이 아닌가, 하고 윤서는 짐작했다.

그런 자를 덮칠 뻔하다니.

하마터면 군주 모욕죄에 (그런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괘씸죄까지 더해져, 악명 높은 내수사 감옥에서 참혹하게 죽을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을 부르르 떠는데, 방자 중금이가 입에 침이 절로 고이도록 맛난 냄새를 풍기는 주안상을 차려 왔다.

물푸레나무 옻칠 소반에는 청자 술병 하나, 청자 도자 잔 두 개, 그리고 감자처럼 생긴 덩어리 세 개, 소고기를 꿰어 구운 적까지.

박 상궁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한잔 마시거라.”

몸을 돌려 한 모금 마시니, 도수가 높아 짜릿하게 뜨거운 기운이 식도를 넘어 위장까지 내달렸다.

깨끗하면서도 단아한 향이 온 입안 가득 퍼지는, 향기가 대단히 좋은 술이었다.

“와, 좋은데요.”

윤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하자, 박 상궁이 뿌듯한 얼굴로 내력을 설명했다.

“향온주다. 궁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귀한 술이지. 요동에서 가져온 통밀에 녹두 가루를 넣고 누룩을 띄운 뒤, 덧술을 열두 번이나 대고,”

허기가 졌던 데다 도수 높은 술에 머리가 핑 돈 윤서는 박 상궁의 장황한 설명을 대충 흘려들으며 묵묵히 소고기를 입에 넣었다.

중금이가 요리를 정말 잘하네. 나중에 요릿집이나 내자고 할까.

“저하께서 뭐라고 하시더냐?”

윤서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듯하자 박 상궁이 오늘 밤의 내용을 물었다.

“아기씨를 이제 자선당 서온돌에 거처하게 하시겠다고요.”

“아기씨가 동궁으로 오신다고? 그것 참 잘 되었······, 으흠.”

반색을 하던 박 상궁이 갑자기 말을 끊고 술을 한 모금 들이마셨다.

캬, 하고 인상을 쓰면서.

“왜요?”

“홍 승휘를 비롯해서, 저하의 후궁들이 있지 않느냐?”

“아!”

그러고 보니 후궁들이 있었지.

이향의 후궁들 처소는 자선당 뒤쪽으로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그 위쪽에 각각 독립된 전각을 가지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홍 승휘가 성깔이 장난이 아니다. 네가 오늘 동궁전에 있었던 사실을 알면 네 머리털을 다 뽑아놓으려고 할 거다.”

“별일도 없었는데요”

“별일이 없어서 더 별일이 되는 거지.”

“···예에?”

알아듣게 좀 말씀하시지.

아이, 술기운 올라온다.

윤서가 점차 꼬여가는 발음으로 묻자 그것도 모르냐는 듯, “술이나 한잔 더 마시거라.” 하며 술을 더 따라주고는 박 상궁이 차분하게 설명해주셨다.

“네가 오늘 거기에 있었던 시간이 한 시진(2시간)이 훌쩍 넘는다. 평소 저하가 어떤지 아니? 여인들은 무식해서 말 길게 나눌 것도 없다고 후궁 처소에 가서도 딱 볼일만 보고 오시는 분이야.”

딱 볼일만 보고 오다니. 심인성 발기부전이 아니라 조루인가.

“···볼일은, 자주 보시나요?”

이게 왜 궁금하지.

의아하면서도 윤서는 불현듯 아까 보았던 단정한 콧날과 곤룡포를 찢어발기고 싶도록 넓었던 어깨를 떠올렸다.

이향, 수염만 깎으면 진짜 키스를 부르는 얼굴일 텐데.

윤서가 발그레한 얼굴로 히죽거렸더니, 박 상궁이 놀란 눈으로 윤서를 보았다.

“이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박 상궁이 또 젓가락으로 정수리를 내리쳤다.

“아, 쫌! 이거 나인 다섯이 들러붙어서 되게 귀한 향기름을 한참이나 발라 만들어준 머리입니다.”

“그, 그러냐? 하긴 너 오늘 굉장히 어여뻐 보인다. 너 그 중전마마께 받은 비단 또 그 거머리 같은 이부 형제들 가져다 줄 생각 말고 네 옷 좀 해 입자. 내 벌써 침방의 구 상궁한테 부탁을 해 놓았다.”

“아니, 침방에서 한낱 나인의 옷을요?”

“어허, 한낱이라니! 권가야, 권가야. 너 오늘부터 이제 궁인 세계의 실세 계보에 이름이 올라간 것을 모르느냐? 중전마마께서 상을 내리시고, 전하께서 어여삐 보신 나인이 아니더냐. 게다가 세자 저하까지!”

“!”

윤서는 자신이 궐의 실세 계보 끝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는 말에 술이 확 깼다.

‘좋지 않아.’

중궁전에서 홍위를 위해 나설 때 수양 대군과 윤씨 일당에게 찍히는 것은 이미 각오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두각을 나타내면 궁인들 사이에서도 경계와 시기의 대상이 되고, 그러면 홍위를 없애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경계의 표적이 된다.

멍청할 때도 죽이려 들었는데 더 큰 권력과 끈이 생긴 총명한 권가 나인을 저들이 그냥 두고 볼 리 없다.

“마마님, 아기씨께서 서온돌로 옮겨가시면 저도 동궁전에 머물 수 있게 해주세요. 자선당과 가까운 행각에요.”

“···왜? 세자 저하 주변에 얼쩡거려 오늘 못 받은 승은을 기어코 받아보려고?”

반쯤 농담인 것처럼 말씀하지만, 살짝 찌푸린 미간의 주름엔 의심이 옅게 배어 있다.

“마마님은 궐에서 그리 오래 사시고도 제 처지를 모르시겠습니까? 멍청하던 권가가 갑자기 주목을 받는다고요!”

“···아!”

그제야 윤서가 무엇을 염려하는지 눈치챈 박 상궁의 얼굴에서 농끼가 싹 빠졌다.

“엄 상전이 거처하는 행각에 비어 있는 방이 서너 개 있다. 그중 하나에 머물면 감히 네게 손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반을 손톱으로 딱딱 두드리며 뭔가를 궁리하던 박 상궁이, 마음을 정했는지 입을 꽉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방자 하나를 붙여주마. 동궁의 방비가 삼엄하긴 하다만 만일의 경우에 그 아이가 널 지킬 게다. 밖으로 심부름 보내기도 좋고.”

그 방자의 이름은 매금이라 하였다.

박 상궁의 재산 관리 노비 노산대가 겨울날 평양에 일보고 돌아오다가 주워온 여자아이인데 과거에 무얼 했는지 말은 거의 못하지만 몸놀림은 고양이처럼 은밀하고 담력은 호랑이처럼 거침없다던가.

박 상궁께서 이렇게나 신경을 써주니, 윤서도 마음 놓고 계획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마마님, 큰 재물을 벌면서 동시에 수양 대군과 그의 부인 파평 윤씨 가문을 견제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 자본과 함께 동궁전 차원에서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

“듣자니 소금이 아직 관에서 전매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만들어 유통하고 있더라고요. 소금 생산과 함께 은광 개발에 나서볼까 합니다.”

“뭐어?”

박 상궁은 세자 한번 독대했다고 이게 돌았나, 하는 표정으로 윤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윤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위의 사안은 치밀하게 준비해서 움직일 것이구요. 당장은 마마님 반송방 저택에서 몇 가지 만들어 팔 것이 있어요. 노산대와 일꾼 대여섯을 붙여주세요. 그리고 노산대의 양딸이라는 대원각의 행수 기생 매향을 빠른 시일 내에 만나보고 싶습니다.”

“무얼, 만들어서 판다고?”

“마마님께 큰돈 벌어드릴 수 있는 물품이에요. 시제품을 만드는 데 보름 정도 걸리니, 보시고 반송방 저택을 빌려주실지 말지 결정하시면 됩니다.”

박 상궁은 윤서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 보더니, 하 탄식하며 말했다

“매향이는 일전에 전하와 중전마마 환궁하실 때 맨 앞에서 환영의 소리를 한 일패 기생이야. 신분은 기생이라도 관적에 오른 기생이 아니라서 양반 나리들에게도 꿀리지 않는데, 너를 만나주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걸 내놓으라 할 터인데.”

“아니, 마마님. 어찌 그리 대단한 자를 노비로 두셨습니까?”

그러자 박 상궁이 쯧쯧, 혀를 차며 젓가락을 들다 도로 놓고는 윤서에게 엄히 말했다.

“궁인이 궁궐 노비니 뭐니 하며 겉으로는 무시하나 조정의 대신부터 종친들까지 친하게 지내려 애쓰며 의형제, 의남매를 맺는다고 아주 난리들이지. 최고 권력자의 지근거리 시종이 아니냐.”

오오.

권력의 크기는 최고 권력자와의 거리와 반비례한다더니. 지근거리 문고리 권력을 가진 궁인의 힘이 이다지도 컸다.

“그래. 자식도 없는데 내 재물 아껴 무엇하겠느냐. 시간 나는 대로 반송방에 가 일을 추진하거라.”

박 상궁은 선선히 허락했다.

배포가 아주 대단했다, 우리 박 상궁님은.

그리고 파루가 울린 후 이향은 잘 익은 앵두가 든 그릇을 들고 천추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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