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화. 비현각에서 이향 (3)
이향이 태어났을 때 세종께선 아직 세자로 책봉되기 전이고 다른 첩도 없었다.
그래서 이향은 장자로서 세종과 소헌 왕후의 안정적인 사랑을 듬뿍 받았다.
뇌의 신경 발달, 정서 발달의 방향이 거의 완성되는 생후 두 돌까지, 이향은 아주 운이 좋게도 왕가 내의 살벌한 권력 투쟁과 음모와 모략이 부재한 희귀한 환경에서 자라나, 여덟 살 때부터 고귀한 세자로 확고한 지지를 받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보통 사람이 가진 ‘원망’ ‘미움’ ‘시기’ 등의 감정을 잘 몰라 결국 수양 대군을 견제하지 못했다는 것이 윤서가 짐작하는 이향의 심리 상태였다.
“저하께선 너무 고귀하게만 자라나셔서 무엇인가를 열망하는 인간이 어디까지 사악해지고 잔혹해질 수 있는지 잘 모르시지요. 그러나 보통 명문가의 자제도 그리 고귀하신 심성만 가지고 태평하게 있다간 가문을 지키지 못합니다.”
심리 상담을 하면서 윤서는 인간이 어디까지 비열해질 수 있는가를 너무 많이 보고 들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기에 잔혹하고 이기적인 본성을 제어할 법과 제도와 규율이 필요한 것이었다.
이향은 스스로가 너무 고결해 왕위에 욕심을 내는 동생들의 욕망을 눈여겨보지 않았고,
“군주가 지나치게 고결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이면, 그 밑의 선량하고 능력 있는 신하와 백성들은 간계와 야망을 품은 이들에게 희생되기 쉽습니다.”
그 결과 아들의 참혹한 죽음은 물론 아버지 세종과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낸 무수히 많은 인재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윤서의 거침 없는 말에 이향은 깊게 침묵했다.
부왕을 따라 한 시도 게을리하지 않고 쌓아온 학문의 세계를 반추한 후,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네 말은 사도(邪道)다. 인간의 품성을 소인배의 것으로 모는 이단이다. 성현의 말씀에 따르면 군자는,”
“성현의 도만 따랐으면 조선이 건국될 수 있었습니까? 성현의 도만 따랐으면, 선대에서 세자가 바뀌었겠습니까?”
“너! 너!”
윤서는 납작 엎드렸다.
그러나 말은 거침 없었다.
“임금의 길은 보통 인간의 길과 달라야 합니다. 각자의 이익과 욕망을 위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인간들을 중재하고 조율하고 다스려야 합니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 이상적인 성현의 말씀을 표층적으로만 따르시면, 저하는 스스로도, 그리고 우리 가여운 아기씨도 지키지 못하실 것이고.”
윤서는 크게 한숨을 쉬고, 힘차게 고했다.
“전하와 저하께서 집현전을 통해 어렵게 어렵게 키워낸 인재들도 죽음에 이르게 하여, 사직 앞에 대죄인이 되실 것입니다. 그것이 세자빈께서 제게 보여주신 저하의 미래이자, 조선의 미래입니다!”
“······.”
“······.”
방안엔 아주 짙은 침묵이 내렸다.
이향은 꽃처럼 단장한 채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한 법가의 이론을 살벌하게 읊어대는 권가 나인을 바라보았다.
‘사직 앞의 죄인이라.’
저 아이가 말한 대로 모두를 잃는다면, 자신은 분명히 사직 앞의 대죄인이 될 것이다.
역모만이 대죄가 아니다. 지켜야 할 이들을 지키지 못해 조정과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는 것 또한 군주가 사직에 꾀하는 역모이니.
나는 처음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아왔으니, 저 아이 말대로 이런 복잡한 측면은 떠올려보지도 못했구나.
이향은 통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향은 세 치 혀에 놀아나는 호락호락한 범인은 아니었다.
“내일 당장 홍위를 여기 자선당에 데려오겠다. 그런데 좀 궁금하구나.”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세자의 권위가 엄혹하게 풍기는 말투에도 권가 나인은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다.
이향은 아주 오랜만에 여인이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잠시 잊고 있던 육체의 욕망이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다.
너무도 빼어난 부왕과 신하들 틈에서 세자 노릇을 하는 동안 옷깃 한번 제대로 풀어본 적 없이 삼가며 살아온 세자는 문득 권가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빈이 들어올 때 이 아이가 열 살이었으니, 올해 열여덟 살이겠구나.’
전에는 덜 여문 풋밤처럼 어리버리하더니, 지금은 잘 익은 알밤처럼······.
이향은 큼큼, 목을 가다듬어 위험하게 뻗어가는 생각의 줄기를 잡아채 현안으로 돌렸다.
“너 또한 계속 우리 홍이 곁에 있지 않느냐? 양 귀인이 받던 시기와 질투가 이제 너로 향하지 않겠냐는 말이자, 네가 그 자리에서 무얼 얻고 싶은지를 묻는 말이다.”
“에이, 그렇지 않습니다.”
윤서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후궁이 아니라 보모 나인에 불과한 것을요. 게다가 저는 변변치 못한 가문 출신인지라 멸시나 안 당하면 다행입니다.”
“···권가, 너는 참······.”
다르다.
저 아이는 다르다.
하찮은 출신으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라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잘 보이기 위해 없는 사실이라도 지어내 잘 포장하려 애쓸 것인데, 저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비천한 출신을 당당하게 밝힌다.
‘다른 나인들과도 너무나 다르다.’
같은 질문을 받으면 보통 나인들은 가련한 표정으로 자신의 애매한 처지를 호소하고, 그래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 호소할 것이다.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뽀얀 가슴골이 더욱 잘 보이도록 몸을 비틀 것이고, 교태와 유혹이 가득한 눈물 젖은 시선과 살짝 벌린 입술로 자신의 욕망을 자극할 것이다.
그런데 저 아이는 아예 고개를 푹 수그려 뽀얀 목덜미나 보이며,
홀로 맹수처럼 당당하게 온몸으로 ‘저는 저하께 아무런 관심이 없사옵니다’를 외치고 있다!
그래서였다.
매사 계획적이고 신중하고 금욕적인 이향이 충동적으로 명령을 내린 것은.
“알았다. 네가 그리 제 분수를 잘 알고 오로지 홍위만 위한다니, 그 마음이 제법 어여쁘구나. 내일 당장 여기 자선당 서온돌에 홍위가 옮겨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다. 그리고.”
“예, 저하.”
세자와의 만남에서 얻어낼 것은 다 얻어내었으니 이제 박 상궁 거처로 돌아가 편히 쉬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를 들썩이는 윤서에게 이향이 말했다.
“피부가 숨을 못 쉰다고 했었지? 용포를 벗어야겠구나. 의대 시중을 들거라.”
“···예, 예?”
이게 무슨 말이야. 너무 뜻밖의 말에 윤서는 예법도 잊고 세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저는······.”
의대 시중 따위는 들어본 적 없다고 말하려던 윤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홍위에게 단령을 입히고 옥대도 매어 주고 했으니 할 수 있다.
할 수는 있는데.
“내, 내관을 부르셔서······.”
옷을 벗기라는 명령을 듣자 반사적으로 화려한 붉은색 곤룡포 속 몸이 그려졌다.
벙벙한 용포 속 어깨는 튼실하게 넓은 것이고,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쏜다니 근육도 적당히 잡혀 있겠지.
그러자 갑자기 이향이 다르게 보였다.
한 점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냉철한 세자의 모습은 옅어지고
그 자리에 깎은 듯 수려한 사내의 모습이 자리했다.
태어날 때부터 귀하기에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흐르는 가운데,
조금은 장난스럽게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사내가.
“어서.”
이향이 일어나 팔을 벌리고 섰다.
다시 재촉하는 말에 윤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이향에게 다가섰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제가 아기씨를 모셔온 터라 능숙하지 않을 것입니다.”
윤서가 갑자기 머뭇머뭇 말하니, 이향은 대꾸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겹겹이 껴입은 옷의 가장 겉옷만 벗기는 것인데, 심장이 쿵쾅거렸다.
허리에 맨 옥대부터 풀어야 하는데 어디에 손을 대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떨고 있자니, 세자가 윤서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이 너무 뜨거웠다.
“여길 누르면 안에서 풀리느니라.”
“예, 예.”
이향의 손가락이 옥이 붙어 있는 앞쪽을 누르니, 안에서 툭 풀리는 소리가 났다.
정신도 함께 풀리는 것만 같아 윤서는 입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왕실의 것들은 늘 이렇게 예상 밖으로 움직이는구나.
옥대를 풀어 반닫이 장 위에 놓고, 목 옆의 단추를 풀어야 한다.
키가 크니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데, 단추를 풀고 나면 옷고름을 풀어야 할 것이고.
옷고름을 풀고 나면.
21세기 권윤서는 사내를 알고, 욕망과 육체의 기쁨을 알았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난 후 슬픔을 잊기 위해 일에만 열중하느라 오랫동안 이어온 금욕이, 여기서, 풀어지면!
“저, 저하.”
“오냐?”
“제가 안 하면, 안 되겠습니까?”
윤서는 다급하게 물었다.
옥대를 벗기는 것만으로도 욕망이 불타오르는데, 금빛 용보가 찬란하게 달린 곤룡포를 벗기고 나면.
자제하지 못할지 모른다.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불경한 소리를 마구 지껄였는데, 여기서 이성을 잃고 덮치기까지 하면, 진짜 오늘 밤 나는 살아서 여길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윤서는 필사적으로 쿵쿵쿵 격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과,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고개를 푹 숙여 감추며 공손하게 고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귀한 용포 어디 한 귀퉁이가 뜯어질까 두렵습니다.”
제가 막 저하 옷을 찢어발길까 봐 두렵다고요.
이향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숙이고 손을 비비고 있는 나인을 바라보았다.
아까 말할 때엔 거침이 없었는데, 옷 시중 드는 것은 이리 어려워하는지.
“너는 참, 재미있는 여인이로구나.”
다른 나인이라면 옥대를 벗길 때부터 눈치를 보아가며 팔에 슬쩍 가슴을 스친다든가, 곤룡포의 단추를 풀 때 등 뒤에서 안 듯 몸을 밀착한다든가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이젠 이향이 민망한 몸 상태가 되었다.
군주는 무치(無恥)라 나인 하나 취하는 것쯤은 찰나의 여흥으로 꺼릴 일은 아니나, 권가 나인을 그렇게 취하기는 여러모로 껄끄러웠다.
“이만 가 보거라.”
이향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명했다.
“예, 저하. 물러가옵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윤서는 후다닥 문으로 내달렸다.
“내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어 당분간 무척 바쁠 것이다. 일이 좀 정리되는 대로 부를 터이니, 홍위가 잠들면 이리로 건너오거라.”
세자의 명령이 도망치듯 문을 여는 윤서의 등에 떨어졌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사뭇 위험하게 들렸다.
권가 나인이 물러간 후.
자선당 동온돌에 돌아와서도 이향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세자빈이 죽고 나서 잠들어버렸던 육체의 욕망이 슬금슬금 깨어나서만은 아니었다.
- 저하가 일찍 돌아가시어 어린 아기씨가 보위에 오르시자 대군들이 왕권을 탐내 역모를,
-군주가 지나치게 고결하고 지나치게 이상적이면, 그 밑의 선량하고 능력 있는 신하와 백성들은 간계와 야망을 품은 이들에게 희생되기 쉽습니다. 선량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군주는 냉혹해질 필요가 있어요
권가 나인이 했던 말이 쟁쟁 귀에 울렸다.
그래서 함길도 체찰사로 나가 있는 황보인 대감이 두만간 유역의 성을 축조하는 문제에 대해 올린 상소도, 세자 이향의 남면(임금이 남쪽을 향해 앉아 신하를 접견하고 정무를 처리하는 것) 어명을 거둬달라는 신하들의 거듭되는 상소에 어찌 대처할까 집중하지 못했다.
이향은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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