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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9화 (9/255)

제 9화. 비현각에서, 이향 (1)

양씨는 윤서의 뺨을 한번 쿡 찌르더니 자리에 앉으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아름다운 눈 때문에 승려도 아니시면서 금욕을 하시는 우리 세자 저하께서 관심을 보이신 것일까?”

“오! 세자께 보내시는 것이군요.”

이향이라면 뻗대볼 여지가 많지. 금욕적인 세자가 아니시던가.

윤서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양 귀인이 옷 수발을 마친 나인들에게 모두 물러가라고 손짓을 했다.

“치마 구겨지면 곤란하니 서서 듣거라.”

양 귀인은 권가 나인의 날씬한 몸매가 근사하게 드러난 남색 치마와 붉은 끝동 옥색 저고리를 만족스럽게 훑으며 매정하게 말했다.

“세자빈께서 승하하신 후 세자 저하께서는 여색을 멀리하신다. 지난 겨울 승휘를 둘이나 새로 들였는데, 그들도 겨우 한 번 안는 둥 마는 둥 하고 끝이셨어.”

그중 하나가 권 승휘로, 내 아들 한남군 처의 막냇동생이다.

나는 권 승휘가 회임을 해 장차의 세자빈이 될 수 있도록 오랫동안 공을 들였어.

그러면 뭐 하니, 세자께서 눈길도 안 주시는 걸.

목도 안 아픈지 우아하게 윤서를 올려다보며 귀인 양씨가 말했다.

“그러니까 너의 바람도 이루고, 나의 바람도 함께 이루자는 것이다. 최근 몇 달간 세자께서 다정한 말씀을 건넨 여인이 딱 너 하나이니.”

대단한 오해였다.

“···그런 게 아닙니다, 마마님.”

세자빈께서 끼셨던 금가락지 때문이라고요.

수백 번을 껴도 다시 현대로 데려가 주지 않는, 그 망할 금가락지!

“아니긴. 아니면서 감히 원손 아기씨를 앞세워 세자 저하께 말을 걸었느냐? 엄 상전하고 이야기가 다 되었다. 오늘 밤 그가 널 세자 저하의 시침을 들 수 있게 해 줄 것이야.”

엄 상전이면 승언색 엄자치 내관이었다.

연산군 때의 김처선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충성스러운 내관으로 손에 꼽히는 인물로, 훗날 단종을 위해 애쓰다 죽은 이였다.

그런 내관이 대체 왜 나 따위를 세자 저하의 침전에 밀어 넣을 하수나 쓰고 있는가. 미인계는 양귀비나 서시나 신빈처럼 절대적 미를 가진 이를 이용해야지.

자기 객관화가 철두철미한 윤서는 속으로 흥흥 비웃었다.

“엄 상전 나리가 왜 이런 일에 손을 댄다는 것입니까?”

“왜겠느냐? 원손 아기씨를 지킬 사람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지. 여기 궐에서는 이유 없이 행동하는 자는 하나도 없단다. 모두 다 자기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때로 연대하고, 때로 배신하지.”

“하오나 저는.”

“너는 오늘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 앞에서도 아기씨를 위해 나섰다. 그것도 아주 총명하게 나서 전하의 환심까지 얻었지. 그래서 엄 상전이 너를 중히 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될 일은 결코 없겠지만, 혹시라도 제가 세자빈이 된다고 해서 마나님께 무엇이 좋은데요?”

“네가 세자빈까지 올라가면, 나중에 왕비가 되고, 또 대비가 되어 차기 왕을 지명할 수 있는 옥새를 손에 넣지. 내 아들들을 위해 난 그런 이가 필요하다.”

오, 대단한 선견지명이었다.

실제로 문종이 승하하였을 때 대비로 올라설 왕비만 있었어도 수양 대군이 그렇게 쉽게 왕위를 빼앗지 못하였을 거란 의견이 있었다.

그렇지만.

“전 가문이 보잘 것 없습니다. 어머니도 재가하셨고요. 대단한 가문이 수없이 많은데 저처럼 나인 따위가.”

“사람이 꿈을 크게 가져야지. 신빈을 봐라. 어미가 노비이고 본인도 내자시 여종이었는데 신빈이 되지 않았느냐? 넌 가난하긴 해도 천인은 아니잖니.”

양 귀인이 혀를 찼다.

하지만 되지도 않는 꿈을 꾸는 걸, 전문 용어로 ‘망상 장애’라고 하는데.

그냥 가서 처리할까 하다가 앞으로도 이러면 귀찮아질 것이어서 윤서는 툭, 본심을 밝혔다.

“동궁에 가 세자 저하를 뵙겠으나, 동침을 하진 않을 거에요. 저는 박 상궁 마마님처럼 되겠습니다.”

박 상궁은 일간 휴가를 내서 재산관리인 노산대와 소리 잘하고 칼춤 잘 추는 기생 두셋과, 또 악공 몇 데리고 금강산에 놀러 가실 계획이라고 하셨다.

궐 안에서 무엇이 되고자 하면 그런 상궁이 되어야지 의무는 겁나게 많고 책임만 막중하고 언제든 군주가 변심하면 냉궁 신세 못 면하는 후궁 따위가 되어서 무엇하겠는가.

윤서가 단호히 거절하자, 양 귀인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어머나, 동침은 네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저하가 결정하시는 것이지. 네가 오늘 갑자기 꽃처럼 피어났다고 해서 저하가 꺾으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잖니.”

저리 냉정한 말을 저리 달콤한 어조로 늘어놓다니.

궐에 살면 누구나 양 귀인처럼  우아한 독사가 되는 것인가.

궁금해 하며 윤서는 박 상궁 마마님께 한 시진 정도 있다가 가겠노라 말씀을 전해 달라 부탁하고.

맑은 국밥으로 대충 배를 채우고.

어둠이 내린 궐을 사락사락 걸어 동궁에 갔다.

“엄 상전, 권가 나인이 왔소.”

윤서를 동궁전에 데려간 허 상궁이 자선당 옆 작은 행각 앞에서 고했다.

그러자 창호지 문에 그림자가 비치더니, 아까 보았던 엄 내관이 나왔다.

“허 상궁은 이만 가 보시게. 권가는 안으로 들고.”

그러자 허 상궁은 윤서의 귀에 속삭였다.

“오늘 밤이 네 일생 최대의 기회임을, 잊지 말거라.”

그리곤 들고 온 등롱을 치켜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아기씨는 어디 계십니까?”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윤서는 홍위의 안부부터 물었다.

“자선당 서온돌 방에서 주무시고 계신다. 아까 세자 저하께서 안고 재워주셨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예에.”

이향은 정말로 아들에게 각별하구나. 그럼 이야기도 잘 풀리겠어.

윤서가 세자를 만나 할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짚어볼 때였다.

“저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겠구나.”

꼼꼼하게 윤서를 살핀 엄 상전이 만족스러운 듯 콧소리를 내었다.

“가락지는 해령 부부인께서 주신 것이지? 부부인께서 집에 따로 빈 마마의 빈전을 차려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며 몸을 상할 정도로 애통해 하신다기에, 우리 세자 저하께서 부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자개함에 만시와 함께 담아 내리신 것이니, 응당 그러하겠지.”

긴 설명 속에 아주 큰 뼈가 들어 있다.

“그렇게 저하께 해명하라는 조언이신가요?”

“아핫핫핫!”

의도를 간파당한 엄자치 상전이 상체를 들썩이며 한참 웃었다.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한참을 웃고서야 엄 상전은 다시 정색을 했다.

“···배포가 큰  나인이라고 양 귀인께서 극찬을 하시더니. 차 한잔 드시면서 천천히 이야기하세. 어차피 저하께선 지금 한창 장계와 상소 읽으시느라 당장 만나실 짬이 없네.”

엄 내관은 화로에서 폴폴 끓고 있는 청동 주전자 속 물을 주발에 부어 식히고, 식힌 물을 찻잎이 들어 있는 작은 찻주전자에 부어 차를 우리는 과정을 유려하게 진행했다.

‘내시라면 몸 선이고 목소리고 모두 다 얇아 여성적일 거란 선입견이 있었는데.’

진짜 조선에 와서 보니 엄 내관도, 다른 내관들도 보통의 사내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수염만 없다 뿐이지 오히려 키가 길쭉하게 크고 팔다리가 길어 현대 기준으로 보면 유니섹스 미남의 조건에 가까웠다.

“들게.”

엄 내관이 연한 하늘색 도자기 잔에 내 준 차는 산뜻한 풀 향에 뒷맛이 달았다.

“좋은 차네요.”

“지리산 쌍계사에서 딴 작설차네. 왕실에 진상된 것을 저하께서 조금 나눠주셨지.”

‘저하’라는 말을 할 때 유독 뿌듯한 충성심이 뚜렷했다.

“자네, 원손 아기씨가 태어나시던 날, 대전 옥좌 옆에 꽂아둔 초가 부서진 걸 아는가?”

이 양반도 또 그 이야기시네. 양 귀인도 그 이야기를 하며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러나 윤서는 그 징조에 대해 달리 생각했다.

왕이 탄 연이 부서져 내리는 일도 있는데, 촛대 하나 부서진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상전 나리는 ‘자기실현적 예언’이란 말을 아십니까?”

“······?”

“어떤 징조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두려워하게 되면 자꾸 자신의 행동을 그 일이 일어날 경우를 염두에 두고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그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나리께서, 또 양 귀인께서 그 초 사건을 두려워하시니, 다른 이들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우리 원손 아기씨를 멀리하는 거 아닙니까?”

엄자치가 무릎을 탁 쳤다.

“이래서 자네라는 거야. 자네네.”

“······?”

“아기씨를 위해 분노하고, 아기씨를 위해 윗전 앞에서도 나설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현상 이면의 것을 당당하게 파헤치며 나설 수 있는 사람. 여보게, 권가 나인.”

엄 상전의 눈빛이 천년을 산 구렁이처럼 진중해졌다.

“내가 잡은 줄이 썩은 줄이 아니기 위해서는 자네 같은 사람이 필요해. 그러니까!”

윤서가 원손을 진심으로 위하고 지키려 하니, 자신도 훗날의 생존과 영화를 위해 윤서를 후궁, 장차의 세자빈으로 밀겠다는 소리였다.

그러나 윤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홍위를 지키는 방법이 어디 후궁만 있나. 다들 상상력이 정말 빈곤하시네.

“좋아요. 나리와 제가 아기씨를 지켜야 한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뜻을 같이 해야 한다는 것, 잘 알아들었습니다. 나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다만 저도 조건을 하나 걸겠습니다.”

“말씀만 하시게.”

이제는 반존대까지. 엄자치는 정말로 윤서는 각별하게 대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나 보다.

“제가 가끔 궐을 나가야 할 때 묻지 마시고 출입패 좀 내어주십시오.”

“···으흥?”

“후궁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상전 나리.”

“아니, 권가 나인.”

“감정은 변덕스러운 것이에요. 더구나 손만 내밀면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무수히 취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궐입니다. 그러니 저는 그런 허랑한 지위 말고 실체적인 것들을 쥐고 뜻을 이룰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지식과 산더미 같은 재물로 말이지요.

윤서가 자신 있게 선언했다.

“오오오!”

그런데 어째서인지 엄 상전은 실망은커녕 더욱 신뢰가 충만한 표정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박 상궁에게 시험대에 오르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지?”

“아니, 마마님께서 그런 말씀도 전하셨습니까?”

“자네도 마찬가지야. 궐은 인간을 탐욕스럽게, 등불로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오로지 권력을 향해 내달리게 하지. 내 지켜보겠네. 자네가 어떤 길을 갈지. 이 길에서 어떤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엄 상전이 의뭉스럽게 눈빛을 빛내며 으히힛 웃었다.

*****

“부부인께서 네게 그 가락지를 주셨다고?”

세자의 집무실인 비현각의 동쪽 방에 들어서니 이향이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널따란 책상엔 이미 처리한 상소와, 아직 처리하지 못한 상소가 키 높이로 쌓여 있다.

벌써 삼경(밤 11시)이 가까워진 밤인데.

새벽 네 시 전에 시작되는 궐 생활에서 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게다가 시중드는 어린 내시 외에 아무도 없는데도 붉은 곤룡포와 익선관까지 모두 단정히 갖춰 입은 채였다.

등에 종기가 나 급사하게 되는 걸 아는 윤서로서는 복장이 터지는 광경이었다.

죽은 부인과 산 남편이 쌍으로 나를 엿 먹이시네!

“밤낮없이 그렇게 꽁꽁 싸매고 계시면 종기가 쉽게 납니다. 홀로 계실 때라도 좀 얇게 입으세요. 피부도 숨 쉴 시간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느닷없이 쏟아지는 잔소리에 이향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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