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양 귀인의 기회
“허나, 우리 홍위는 장차 세손이 되고 세자가 되고 국왕이 될 고귀한 아이거늘, 누가 감히 머리를 때리고, 예를 갖추지 않는단 말이냐!”
소헌 왕후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중전마마!”
“할마마마!”
신빈과 윤씨와 도원군이 납작 엎드렸다.
“아직 어린 현동이를 보필하지 못한 죄가 크니, 그날 따랐던 상궁과 나인에게 태장 스무 대씩을 때려라. 감히 원손을 능멸한 죄다!”
“···분부 받잡사옵니다.”
부부인 윤씨가 엎드려 중전마마의 명을 받았다.
원손의 일로 자신의 궁인들이 태장을 받다니, 이는 현동을 내리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만천하에 선언하는 바이기도 했다.
‘원손은, 장차의 국본은 홍위지 왕실의 첫 손주 현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친정의 막강한 금력을 바탕으로 촘촘하게 은자를 뿌려온 덕에 윗전께는 귀여움을 아랫것들에겐 두려움 섞인 존경만을 받아온 윤씨는 지금 저 천한 나인의 몇 마디에 이리된 사정이 믿기지가 않았다.
‘권가 나인이라고 했지. 너는 조만간 내 앞에서 개처럼 기며 살려달라 빌게 될 것이다.’
윤씨의 마음에 윤서에 대한 경계와 원한이 짙게 쌓이는 순간이었다.
“신빈도 마찬가지야. 담양군에게 원손에 깍듯하게 예를 갖추라 이르고, 그날 담양군을 따랐던 나인들에게 태장을 때리게.”
“예, 중전마마. 그리하겠습니다.”
“권가라 하였느냐?”
소헌왕후가 윤서를 불렀다.
“예, 마마.”
“이리, 앞으로 오너라.”
“예, 마마.”
윤서는 엎드린 채 중전과 세종께서 계시는 곳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들라.”
윤서는 고개를 들었다.
고아한 위엄을 풍기는 소헌 왕후께서 홍위를 무릎에 앉힌 채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윤서를 내려다보았다.
기분에 따라 아랫것들을 막 때려죽이고 하는 잔혹한 눈빛은 아니었다.
“잘하였다, 권가 나인. 네가 우리 홍위의 아픈 마음을 잘 보살폈구나.”
다행히 칭찬이었다.
하아. 윤서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깊게 고개를 숙였다.
“황공하옵니다.”
“앞으로도 우리 홍위를 잘 보필하길 바란다. 여봐라, 최 상궁.”
“예, 중전마마.”
문가에 시립 해 있던 중궁전의 최 상궁이 한 발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혔다.
“기특한 권가 나인에게 명주 비단 스무 필을 상으로 내리게. 그리고 월봉을 보모 상궁에 준하도록 올려 지급하라 하고.”
“예, 중전마마.”
“감사합니다, 중전마마.”
“홍위야, 권가 나인과 함께 돌아가거라. 할미가 또 부르마.”
“예, 할마마아.”
홍위는 한결 씩씩해진 얼굴로 앙증맞게 절을 하고 윤서에게 달려왔다.
이날 중궁전에 모인 사람들은 똑똑히 알게 되었다.
중전께서 첫손주 현동을 무척 귀애하시긴 하나, 원손 아기씨의 권위를 넘보는 자는 그게 누구든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모두들 양 귀인의 양화당에서 없는 듯 살던 원손의 존재를 똑똑히 각인하는 순간이자, 원손을 지키는 권가 나인의 존재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윤서가 원손의 손을 잡고 알현실 문을 나오려 할 때였다.
“권가야.”
세종께서 윤서를 부르셨다.
“예, 전하.”
윤서는 원손과 함께 다시 엎드렸다.
세종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까 말했던 나이와 거짓말과 사고 능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언제 상세히 듣고 싶구나.”
학구열이 대단하시다더니, 정말로 그러하였구나.
윤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성심성의껏 답을 올렸다.
“예, 전하. 불러만 주시면 아는 대로 모두 다 고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리고 홍위야."
세종께서 다정하게 우리 홍위를 부르셨다.
"권가 나인과 함께 천추전으로 놀러 오너라. 할애비가 우리 원손한테 보여줄 것이 있느니.”
“······!”
“······!!”
“······!!!!”
교태전 안이 다시 충격의 침묵에 휩싸였다.
천추전은 사정전에 딸린 전각으로 세종께서 개인 서재와 연구실로 쓰는 공간이다.
홀로 집중할 때 사용하시는 곳이기에 세자인 이향만 부름을 받아 드나들 뿐, 다른 대군들도 겨우 일 년에 한두 번 들어갈까 말까 한 곳인데.
차를 올리고,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씻어 오는 시중을 드는 이도 말을 못하는 농인으로 구했을 정도로 세종이 철저히 홀로 있는 공간으로 쓰시는 곳인데.
‘나도 못 들어간 곳을 저 나인 따위와 원손을 부르시다니.’
신빈은 아름다운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고.
‘우리 현동이도 한 번도 못 들어가 본 곳에, 왜 저 말도 데데한 애새끼를.’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는 새삼 이를 악물고 권가 나인에 대한 원한을 태산처럼 쌓았다.
“그때 우리 정의 공주도 부르시어요, 전하. 권가 나인의 지식이 자식 키우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으니 말입니다.”
고귀한 원손이면서도 눈치를 심하게 살피던 홍위가 제법 당당해진 걸 눈여겨 본 소헌 왕후께서 세종의 말씀을 슬쩍 거들었다.
“!”
“!”
“!!”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이제 교태전 안의 모든 사람들이 권가의 얼굴을 똑똑히 새기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어심이 닿는 곳에 출세와 재물이 따르는 것이니. 장차 권가 나인과 줄을 대어야 하나 아니면 없애야 하나 고심하는 사이,
양 귀인은 입꼬리를 광대뼈 끝까지 쭉 올리며 화사하게 웃었다.
‘확실한 줄을 잡았구나! 엊그제까지 맹하던 저 아이가 어찌 저리 총명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모두 제각기 계산과 원한으로 윤서를 바라볼 때.
“예, 하바마아. 거 나이이양 가께여.”
홍위만 발랄하게 엉덩이를 쑥 올리며 절을 올리고 일어나 윤서의 손을 잡았다.
******
교태전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니, 세자의 후궁 넷이 기다리고 있었다.
‘꽃처럼 아름답네, 다들.’
윤서는 서둘러 안고 있던 홍위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분홍색과 연두색, 하늘색, 자색의 비단 당의를 화려하게 차려입은 어여쁜 여인들이 원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원손 아기씨를 뵈옵니다. 그간 강녕하였지요?”
“잘 디내떠요. 강넝하딥니까?”
원손은 좀 전에 울었던 표시는 하나도 내지 않고 의젓하게 인사를 받았다.
“아유, 우리 아기씨는 어쩜 이렇게 말씀도 잘하시는지.”
“우리 저하를 닮으셔서 여간 총명한 것이 아니시네요.”
“인물도 어쩜 이리 어여쁘실까요?”
네 후궁이 질세라 원손을 칭찬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윤서를 매섭게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벌한 꽃들이로구나.’
윤서가 감탄할 때.
“권가 나인, 원손 아기씨께서 아침 수라를 드셔야 하니, 이만 전각으로 뫼시거라.”
한발 늦게 교태전에서 나온 귀인 양씨가 윤서를 부르고 먼저 앞장섰다.
네 후궁의 관심 공세가 부담스러웠던지 홍위도 어서 가자고 윤서의 손을 끌었다.
윤서는 홍위를 안아 들고 양 귀인 뒤를 따랐다.
“너희는 스무 걸음 뒤로 물러서라. 허 상궁만 이리 오고.”
교태전을 빠져나왔을 때 양 귀인이 뒤따르는 내관과 나인들을 뒤로 물리고 자신의 최측근 상궁을 호출했다.
“이따가 말일세.”
양 귀인은 원손을 안아 든 윤서를 힐끗힐끗 보며 자신을 모시는 허 상궁에게 무언가 명을 내렸다.
*****
그날 점심을 먹고 난 후.
세자의 명을 전하는 승언색 엄자치 내관이 원손 아기씨를 동궁으로 모셔갔다.
“권가 나인은 제가 당장 시킬 일이 있습니다. 아기씨, 지금은 여기 한가 나인이 대신 모실 것입니다.”
원래는 윤서도 함께 가야 하는데 양 귀인이 막아섰다.
“빠이 와야, 빠이.”
홍위는 울먹거렸지만, 아바마마 이향을 본다는 기쁨이 더 컸던지 결국 엄자치의 등에 업혀 동궁으로 먼저 떠났다.
‘의리가 없네, 우리 홍위가. 끝까지 날 데려가야 한다고 떼를 썼어야지.’
양 귀인이 뭔가를 꾸미는 것 같아 꺼림칙한 윤서는, 멀어지는 홍위의 뒷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런 윤서의 귀에 양 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봐라!”
그러자 건장한 여자 나인 다섯이 다짜고짜 윤서의 팔다리를 잡더니 어디론가 끌고 갔다.
“왜 이러세요? 왜 이래? 귀인 마마님! 양 귀인! 내 당신과 당신 자식들을 살릴 방도를 알고 있단 말입니다!”
버둥거리며 몸부림을 쳐도 아랑곳없이 다섯 나인은 윤서를 전각 끝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 휙 밀어 넣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봄꽃이 가득한 목욕물이 윤서를 맞이하였다.
이, 이거 많이 본 장면인데. 설, 설마!
이 다음에는 이불에 둘둘 말려서······!
‘하지만 뭐, 이향을 설득할 자신은 있으니. 즐겨야지.’
조선에 온 후 윤서는 박 상궁의 처소의 비좁은 나무통 속에서 쭈그리고 앉아 씻는 것에 감질이 났었다.
그래서 어서 돈을 벌어서 박 상궁 마마님처럼 궐 밖에 집 하나 마련해서 널따란 욕탕부터 짓고 싶다고 간절하게 꿈꾸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침향이 진한 목욕탕에 발을 뻗고 앉아서, 다섯 명의 나인들이 몸을 씻어주다니.
다섯 명의 나인들을 세신사 이모님이라고 생각하니 별로 부끄러울 것도 없다.
윤서는 눈을 감고 느긋하게 몸을 맡겼다.
다섯 명의 나인들이 곡물 비누로 윤서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주었다.
‘곡물 비누!’
윤서가 눈을 떠서 보니 녹두와 청포 가루를 섞은 곡물 비누는 세정력도 좋지 않고, 무엇보다 비릿한 녹두 냄새가 너무 거슬렸다.
‘오호! 하루빨리 집을 장만할 방안을 찾았다.’
비누 만들기.
심리 상담 센터에서 일하면서 우울감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내담자들에게 로즈 오일, 라벤더 오일, 프랑킨센스 오일 등을 발향하는 아로마테라피를 활용했었다.
심리에 미치는 영향도 좋고 천연 향이라 거부감도 적어서, 윤서는 아로마테라피스트에게 식물성 오일을 끓여 여러 오일을 넣고 천연 비누, 천연 로션, 여러 한약재를 온침해 자운고를 만드는 법을 배웠었는데.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식물성 오일과 소금, 재를 이용해 비누를 만들고, 여러 한약재를 온침해 밀랍과 돼지기름을 섞어 끓이면 상처 치유에 탁월한 효과를 내는 자운고도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래서 사람은 뭐든 다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 세종 대왕처럼.’
궐에서부터 쓰기 시작하면 세도가들 마케팅은 확실히 될 터이고.
나인들이 여러 번 머리를 감긴 후 은목서 향유로 머리칼까지 윤기 나게 손질하는 동안, 윤서는 장차 조선의 재물을 쓸어 담을 꿈을 야무지게 꾸며 느긋하게 졸았다.
잘 씻고 나오니, 양 귀인께서 말씀하셨다.
“아까 중전마마께서 널 아주 흡족히 여기셨다. 전하께서도 눈여겨 보시었고.”
“예!?”
설마, 저를 세종께!
“아니, 마마님! 귀인 마마님!”
윤서가 희게 질려 소리치는데, 양 귀인은 듣지도 않고 허 상궁에게 외쳤다.
“허 상궁. 전에 내가 입었던 나인 복 있지 않나. 벙벙한 거 말고 옷 선이 아름답게 딱 떨어지는 거.”
양 귀인의 말씀에 허 상궁이 후다닥 달려가더니, 이십 년이 지났어도 색이 하나도 안 바랜, 한눈에 보기에도 옷감이 아주 고급진 나인 복을 들고 왔다.
“그거 입히고 사향이 들어간 향낭도 하나 달아주거라. 피부는 깨끗하니 되었고, 입술에 연지만 칠해주면 되겠구나.”
“저는 전하를 모실 수 없다고요! 저는 우리 원손 아기씨의 보모 나인입니다!”
세종 대왕을 모신다니. 그런 분은 멀리서 뵈며 눈빛으로 존경을 표하는 것이지, 몸으로 존경을 표하는 법은 없단 말입니다!
당황한 윤서가 황당해서 온몸으로 거부하는데, 양 귀인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그간 눈동자가 흐리멍덩해서 어여쁜 얼굴이 참 못나 보였었는데. 비법이 무엇이냐, 이리 별을 담은 것처럼 총명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게 된 비법 말이다.”
귀인 양씨가 까치발을 들고 서서 윤서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