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화. 어린 단종은 용기를 내어
“하바마아, 함마마아!”
세종과 소헌 왕후에게 가는 대신 원손은 윤서 곁에 서서 두 손을 이마에 대고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하바마아, 함마마아, 밤대 강넝하딤니까?”
혀짧은 소리로 문후를 여쭌 원손이 윤서 옆에 철퍼덕 앉았다.
그러자 원손 곁에서 같이 절을 올린 귀인 양씨가 민망한 얼굴로 대신 변명했다.
“소첩이 그간 중전마마께서 주관하시던 일들을 처리하느라 속절없이 분주하였습니다. 그래서 권가 나인과 주로 계시다 보니 원손 아기씨께서 오늘 낯을 가리십니다.”
“아이구, 외로웠구나, 우리 원손 아기씨께서. 이리로, 이리로 오세요, 원손. 이제부터 할미가 놀아줄 터이니.”
중전마마가 부르셨다.
그런데 홍위는 도리어 뒤로 몸을 빼며 불안한 눈으로 전하와 중전마마가 계신 쪽을 곁눈질했다.
“우리 홍위, 보고 싶었다. 어서 이 할애비한테 오거라.”
중후한 목소리가 인자하게 원손을 불렀다.
세종 대왕이셨다.
고개를 들어 위대하신 분의 용안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윤서는 몸을 살짝 일으켜 홍위의 얼굴을 살폈다.
천자문도 다 외울 정도로 영민한 우리 홍위가 왜 이리 고집인가.
“······.”
홍위는 입술을 삐쭉거리며 윤서의 저고리 소매를 왼손으로 꽉 잡고, 전하께서 계신 측면을 곁눈질로 보고 있었다.
쿵쾅쿵쾅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 옆에서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두려운 것이 저기 있다는 몸짓 언어이자, 자신도 이제 믿을 만한 사람이 여기 있다는 표식 언어이기도 했다.
홍위의 믿을만한 이로 지목당한 윤서는 슬쩍 고개를 들어 원손의 시선이 향한 곳을 살폈다.
소헌 왕후의 왼쪽 측면에 도원군이 앉아 있었다.
그 옆에 화려하게 성장한 채 앉아 있는 여인은 필시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이리라!
‘그래서 우리 홍위가!’
윤서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홍위는 저 모자, 도원군과 윤씨 부인에게 남모를 고통을 당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늘 원손이라 의젓하고 총명하고 흠결 없어야 한다고 강요해대는 어른들 틈에서, 어린 아기 홍위는 이 괴롭힘을 이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윤서는 자신의 치맛자락을 꽉 쥐고 있는 작은 주먹을 보았다.
엎드린 몸을 조금 뒤로 물리고, 윤서는 가늘게 떠는 홍위의 주먹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나, 여기 있어, 홍위야. 더 이상 혼자 떨지 않아도 돼.
“우리 개똥이, 이리, 할미한테 오세요.”
소헌 왕후가 다시 홍위를 아명으로 불렀다.
그러자 원손은 일어나 할머니께 가는 대신 작은 손가락을 들어 도원군을 가리켰다.
“때어쪄요.”
“······?”
“······!?”
모두의 시선이 원손의 귀여운 손끝을 따라 도원군으로 향했다.
“때어쪄요, 여기.”
홍위가 앙증맞은 손가락으로 사모를 쓴 머리를 짚으며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자 도원군 옆에 앉아 있던 수양 대군의 부인 윤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원손 아기씨, 우리 현동이가 그리했을 리가요.”
윤씨가 강한 어조로 홍위의 말을 부정했다.
윤씨의 맞은편에 어여쁘게 잡고 앉았던 신빈도 세종과 중전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원손 아기씨께서 꿈을 꾸셨나 보옵니다. 저맘때는 꿈과 현실을 잘 구별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도원군과 부부인 윤씨를 편드는 말이었다.
“맞습니다. 우리 현동이하고 원손 아기씨는 요새 도통 만난 적도 없사옵니다.”
신빈의 지원을 얻은 윤씨가 원손을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감히!
윤서는 몸을 일으켜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 홍위를 꽉 안아 무릎 위에 앉혔다.
만 두 돌이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이토록 용기를 낸 홍위에게, 너는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고 내가 곁에 있다는 확인이자 위로를 주기 위해서였다.
“홍위야, 꿈을 꾼 게냐? 현동이가 어찌 감히 너를 때리겠느냐?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이리, 할미한테 오너라.”
“으아앙, 낙찌하 때 연모데서 때여쪄여어!”
원손이 서럽게 울며 윤서의 목을 안았다.
순간 커다란 칼이 쑥 가슴에 박히는 듯했다.
윤서는 원손을 더욱 힘주어 껴안고 고개를 숙이며 단호히 고했다.
“미천한 보모 나인 감히 아룁니다. 이틀 전 원손 아기씨께서 명례궁 아기씨와 희락당 아기씨를 만나셨습니다. 원손 아기씨께서 뜰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낚시 놀이를 할 때였습니다.”
“방자하구나!”
윤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신빈 김씨와 윤씨가 윤서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나인 주제에 어찌 내 아들을 모함하는 게냐? 전하, 중전마마, 억울하옵니다. 소첩이 그제 신빈 자가와 함께 두 분 마마의 마중 준비를 하기 위해 현동이와 함께 입궁한 것은 맞습니다. 허나 우리 현동이가 원손 아기씨를 괴롭히다니요. 천부당만부당한 모함이옵니다!”
윤씨가 적극적으로 아들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신빈은 그저 그 아름다운 눈으로 서늘하게 윤서를 노려보기만 하였다.
원손이 자신의 아들은 지목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섞인 우아한 분노였다.
윤서는 기억을 다시 한번 더듬었다.
도원군이 홍위를 때리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간식 상을 보느라 잠시 눈을 돌렸던 직후, 홍위는 무어라 말도 못하고 그저 울먹거리며 안아달라고만 했었다.
‘이 어린 게, 그간 편 들어줄 이가 없어서, 하소연을 못하고!’
아이들은 놀랄 만큼 눈치가 빠르다.
어린 판단으로 진심으로 지키고자 하는 이도, 지켜줄 수 있는 이도 그곳엔 없다고 결론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 교태전에서 임금과 중전에게 고하고 있다.
내 무릎에 앉아서.
지켜준다고 약속했던 나의 말을 의지 삼아서. 나의 체온을 디딤돌 삼아.
저기 도원군이 자신을 괴롭혀왔음을.
윤서는 홍위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원손 아기씨께서 낚시 놀이를 할 때 두 분 아기씨께서 오셨고, 원손 아기씨께서 머리를 문지르며 울먹이시는 걸 본 궁인은 많습니다. 하문해 확인해 보소서. 우리 원손 아기씨께서는 아직 정교한 거짓을 꾸며내실 만한 나이가 아니십니다.”
“···정교한 거짓말을 꾸며내는 나이가 아니라니, 그것이 무슨 말이더냐?”
갑자기 세종께서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으셨다.
“거짓말에도 나이가 필요하다는 것은 무슨 근거냐?”
세종께서 물으시다니!
홍위 때문에 가슴이 활활 타오르는 와중에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떨렸다.
윤서는 홍위를 안은 손에 힘을 주고 깊은 심호흡을 서너 번으로 과도하게 흥분한 교감 신경을 이완시킨 후 차분하게 다시 고했다.
“거짓말을 꾸며내기 위해서는 정교한 사고 능력이 필요합니다. 이틀 전 일에 대해 장소는 정확히 고하면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꾸며 말할 나이는 우리 아기씨께서 되지 못하셨다는 뜻입니다.”
“네 말은 그럼, 거짓말을 가지고도 아이의 사고 능력이나 발달 단계를 유추할 수 있다는 뜻이더냐?”
세종께서 또 물으시는데,
“전하, 지금 중요한 것이 그게 아니옵니다!”
갑자기 소헌 왕후께서 세종께 팽 화를 내셨다.
지금이 새로운 지식을 탐구할 때와 장소냐는 강한 질책이었다.
“······.”
세종께선 침묵하셨고, 윤서는 피식 새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홍위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그 틈을 타 줄곧 침묵하던 귀인 양씨가 나섰다.
“양화당 내에서 일어난 일이니, 제가 아랫것들에게 확인하여 아뢰겠습니다.”
“귀인 마마님······.”
부부인 윤씨가 당황한 듯 양 귀인을 불렀다.
그러나 양 귀인은 정치 감각이 예리한 여인이었다.
지금 이 기회가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슬금슬금 왕족과 대신들을 포섭하기 시작한 수양 대군과 부부인 윤씨의 행보를 막아설 절호의 기회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명례궁 아기씨와 희락당 아기씨의 연치가 아직 어리다고는 하나, 원손 아기씨께 예는 바로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일이 밖으로 새 나가면 왕실 내 기강이 흐트러졌다는 비난이 날아들 것입니다.”
양 귀인은 경쟁 후궁인 신빈의 자식까지 한꺼번에 얽어넣었다.
그러자 양 귀인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 신빈은 재빨리 아름다운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입술을 바르르 떨며 엎드렸다.
“송구하옵니다. 다 소첩이 미욱하여 일어난 일이옵니다.”
신빈이 너무 쉽게 인정을 하자 더는 부정할 수 없어진 수양 대군 부인 윤씨도 납작 엎드렸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송구하옵니다.”
“할바마마, 할마마마, 용서해주세요.”
여섯 살 도원군까지 엎드렸다.
“······.”
“······.”
세종께선 ‘크흠’ 언짢은 소리만 내신 채 입을 꾹 다무셨다.
내명부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소헌 왕후는 원손과, 원손을 안고 있는 윤서를 살폈다.
윤서를 바라보는 왕후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왕실 내 분란이 일으켰다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윤서는 확신했다.
‘소헌 왕후는 첫 손주인 도원군을 무척 아끼시지만, 원손의 위치가 흔들릴 정도로 아끼시진 않으신다. 내명부의 수장이시니까. 왕실의 존엄이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지 잘 아는 분이니까.’
그리고 윤서의 예측은 적중했다.
“원손, 이리 오세요. 할미한테 오세요.”
소원 왕후가 다시 홍위를 불렀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윤서는 재빨리 홍위의 귀에 단호히 속삭였다.
“가셔야 합니다.”
원손이 가슴을 파고들었던 얼굴을 들고 윤서의 눈을 바라보았다.
윤서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아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 가서 네 입지를 굳혀!’
그러자 세 살의 원손은 윤서의 무릎에서 내려 짧은 다리로 도도도 중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할머니의 품에 폭삭 안기며 다시 한번 소리쳤다.
“함마마아, 소존 아파쪄요.”
“···그랬누. 우리 개똥이가 아팠누.”
왕비의 한숨 섞인 대답엔 복잡한 심정이 녹아 있었다.
아끼는 첫 손주 도원군의 편을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장차 보위를 이을 원손의 말을 거짓으로 몰 수도 없는 딜레마였다.
“······.”
“······.”
“······.”
교태전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렸다.
짙은 침묵 속에서 윤서는 왕실 여인들이 가지는 공통의 두려움과 공포를 읽어냈다.
왕권이 향하는 곳을 따라 생사의 칼날을 딛고 사는 삶.
당장 원손을 안고 계신 소헌 왕후조차 친정아버지 심온의 목숨과 친정어머니, 형제자매가 노비로 떨어지는 비극을 제물로 바치고서야 중전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럼 나는.
‘가문도, 그 무엇도 없는 한낱 나인인, 차원 이동자인 나는.’
살아서 광영을 누리기 위해 제 모든 것을 걸고 전력을 다하고 있는, 이 살벌한 투쟁의 장에서.
무엇을 제물로 바쳐야 저 어린아이를 무사히 살리고, 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가.
윤서는 조용히 자신에게 물을 때였다.
“···현동이가 놀자고 그랬을 것이다, 홍위야.”
기나긴 침묵은 중전마마께서 입을 떼면서 깨어졌다.
더 이상 제물 따위를 바칠 필요가 없어진 내명부 최고 권력자의 추는 첫 손주 도원군 쪽에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미세한 무게가 결국 저 아기의 목숨값이 되었지.
윤서는 다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실망감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때 이른 실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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