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화. 꽃들의 살벌함 속 홍위는 (2)
신빈의 공격에도 양 귀인은 여유만만이었다.
“중전마마께서 온천에 가 계시는 동안 제가 내명부의 일을 주관해야 하지 않았습니까? 신빈 자가께옵서 글을 아셔서 여러 문서에 대리 결제를 하실 수 있었더라면 제가 우리 아기씨 곁을 지킬 수 있었을 텐데요.”
“······!”
이제는 글을 모른다는 비웃음까지.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불리한 구석으로 내몰리자 신빈의 얼굴이 활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창백하던 얼굴에 핏기가 돌아 오히려 소녀처럼 더 풋풋해 보였다.
미인은 어떻게 해도 미인이었다.
“자가, 중전마마께옵서 기다리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더 입씨름 해 봐야 윗전만 더 불리해지는 걸 확인한 신빈의 상궁이 나섰다.
신빈은 양 귀인을 매섭게 쏘아보고, 팽그르 아름다운 치맛자락을 부풀리며 교태전으로 향했다.
신빈의 상궁과 나인들도 양 귀인의 상궁과 나인들을 쏘아보고 종종종 상전의 뒤를 따랐다.
“가자꾸나. 중전마마께서 얼마나 원손을 그리워하셨겠느냐.”
양 귀인은 신빈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명하고 우아하게 걸음을 떼었다.
윤서는 고개를 숙여 저고리 섶을 하얗게 질리도록 꽉 움켜쥐고 있는 작은 손가락을 보았다.
‘이미 벌어지고 있었구나.’
이미 궁중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후궁들이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살벌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냉혹한 암투의 언어와 날선 분위기를 두 돌도 되지 않은 아기가 적나라하게 보고, 듣고 있었다.
생후 두 돌까지는 파충류의 뇌라고 하는 변연계가 맹렬하게 발달하는 시기다.
이때 아기는 ‘정서의 뇌’라고 하는 변연계를 통해 세상이 즐거운 곳인지 두려운 곳인지를 낙인이 찍히듯 인지하며, 그에 기반하여 뉴런이 맹렬하게 형성되면서 앞으로 발달할 기질이 정해지게 된다.
안전한 느낌, 사랑받는 느낌을 가진 아이의 뉴런은 탐구와 놀이, 협력 등 긍정적인 특질로 폭발적으로 나아가고, 거부당하고 불안한 분위기라고 인지한 뉴런은 공포와 위협을 관리하도록 수동적이고 회피적 기질로 나아간다.
홍위가 바라본 세상은 어떤 곳인가.
그렇지 않아도 엄마가 없어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가지기 어려운 가여운 아이가.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듬뿍듬뿍 애정만 받아도 모자랄 장차의 국본이!
‘이렇게 날 선 환경에서 자랐으니 빼어난 자질을 가지고도 맥없이 수양 대군에게 당했겠지. 홍위가 수양 대군 앞에서는 음식도 제대로 못 삼키고 구역질을 하며 극도로 두려움을 보였다더니, 이게 다 이런 개 같은 성장 환경 때문이야.’
윤서는 벌써 수백 번도 더 어린 아기 앞에서 살벌한 싸움을 벌였을 신빈과 귀인을 향해,
이 사태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세종의 정비 소헌 왕후를 향해,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지경이 되도록 제 어린 아들을 귀인의 처소에 맡겨둔 세자 이향을 향해 맹렬한 적의를 느꼈다.
“아기씨!”
그래서였다.
윤서는 충동적으로 원손의 귀에 속삭였다.
“제가 지켜 드릴게요. 아기씨는 제가 지켜요. 그러니까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마세요.”
제가, 아기씨를, 지킵니다!
그러니까, 홍위야. 나만 믿어.
나를 믿어.
격정적으로 속삭이는 윤서에게 세 살의 원손, 비극적인 운명을 짊어진 장차의 국왕은 딱 한 마디를 했다.
“기 간지여워.”
(귀 간지러워.)
“······.”
윤서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아기씨를 더욱 단단히 안고 교태전으로 향했다.
교태전 뜰에는 화려하게 성장한 왕실 여인들과 상궁, 나인, 내시로 가득하였다.
모두 두 달 만에 궐에 돌아오신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께 문후 인사를 올리기 위해 온 후궁과 그들을 모시는 궁인들이었다.
신빈과 양 귀인, 원손이 나타나자 이들은 황급히 길을 내주며 허리를 굽혔다.
이곳은 지엄하신 중전마마께서 거하시는 공간, 공식적인 의례가 촘촘하게 적용되는 공간이다.
원손은 장차 지존이 되실 몸, 정1품 신빈도 걸음을 멈추고 옆으로 비켜 서 원손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였다.
“아기씨, 내려서 걸으셔야 합니다.”
양 귀인이 원손에게 허리를 굽히며 고했다.
그리고 쓰린 마음으로 윤서에게 ‘네가 원손 아기씨 손을 잡고 앞장서거라.’ 빠르게 말했다.
양 귀인은 몹시 아쉬웠다.
‘본시 내가 원손의 손을 잡고 모든 후궁의 인사를 받으며 나아가야 하거늘.’
신빈조차도 허리를 굽히는 길이거늘.
윤서는 다리를 굽혀 원손을 땅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이의 눈에 눈높이를 맞추고 조용하게 고했다.
“아기씨, 제 손을 잡으셔요.”
“응, 가다. 거 나인.”
원손이 윤서의 손을 잡고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세웠다.
윤서도 자세를 바로 하고 허리를 굽힌 자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갔다.
원손 뒤를 신빈이 턱을 살짝 치켜들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원손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양 귀인은 예를 표하는 후궁과 궁인들에게 살짝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신빈의 뒤를 따라 중앙의 대청마루로 향했다.
윤서가 계단을 올라, 아기씨의 신발을 벗겨드릴 때였다.
“세자 저하 나오십니다.”
하는 가느다란 내관의 음성과 함께 교태전의 합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열린 문으로 붉은 곤룡포를 입은 훤칠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자 저하를 뵈옵니다!”
교태전 뜰과 계단에 있던 모든 사람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윤서도 원손 아기씨의 어깨를 잡은 채 허리를 굽혔다.
윤서 뒤에 서 있는 신빈과 귀인도 허리를 깊게 굽히며 동시에 인사를 올렸다.
“세자 저하, 먼 길 다녀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세자는 어제 태종과 원경 왕후의 능인 헌릉에 들러 제사를 지내고 오느라 늦게 환궁하였기 때문에, 마중을 나갔던 두 후궁이 뵙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궐의 대소사를 처리하시느라 두 분께서 참으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사흘 전 밤 윤서에게 호통치던 때와 달리 참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였다.
“아밤마마!”
원손이 짧은 다리로 종종종 제 아비를 향해 달려갔다.
“홍위야.”
대청마루에 나온 순간부터 곁눈질로 원손을 눈에 담던 세자가 성큼 걸어와 원손을 번쩍 안아 올렸다.
허공에 들썩들썩 아들을 던졌다 받으면서, 이향이 말했다.
“어젯밤 늦게 도착했단다. 그래도 보고 싶어 찾아갔었는데, 홍위가 자고 있어서 보지 못하였다.”
“네에, 아밤마마.”
홍위는 신이 나 발까지 동동 구르며 까르르 웃었다.
“우리 원손 아기씨께도 세자 저하를 무척 그리워하였어요. 어찌나 영특하신지 어제 환궁하신다는 말을 듣고, 하루 종일 남쪽만 바라며 저하를 기다렸답니다.”
양 귀인이 슬며시 나서 원손을 칭찬하는 동시에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원손을 키우고 있음을 생색냈다.
‘아닌데, 어제 홍위는 나랑 낚시 놀이하고, 도화서에서 가져온 색색 물감으로 색칠 놀이 하면서 하루 종일 즐겁게 보냈는데.’
고개를 숙인 채 윤서가 양 귀인의 공치사를 홀로 반박할 때였다.
“권가 나인.”
이향이 윤서를 불렀다.
순간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든 여인의 귀가 쫑긋, 세자와 윤서를 향했다.
“네가 우리 홍위를 참 잘 모시고 있더구나.”
말투가 사뭇 의미심장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칭찬으로 듣겠지만, 윤서는 조만간 가락지에 대해 해명하라는 숨겨진 요구를 잘 알아들었다.
“···황공하옵니다, 저하.”
윤서는 코끝이 대청마루에 닿도록 허리를 깊게 굽혔다.
“황공은 무슨. 더 열심히 모시라는 말이었다.”
삐딱하게 말한 세자가 성큼 걸어와 윤서 품에 홍위를 넘기며, 한 마디를 더 붙였다.
“일간, 너를 부를 것이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헙’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윤서가 끼고 있던 쌍가락지에 얽힌 일을 묻기 위해 부르겠다는 의미인 걸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세자의 후궁들은 경악했다.
‘여인은 학문의 깊이가 얕아 영 상대할 의욕이 안 생긴다’ 말씀하시며 꽃처럼 어여쁜 후궁들도 소 닭 보듯 하는 우리 저하가!
어째서,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멀대처럼 키만 큰 나인 따위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것인가!
소리 없는 아우성이 교태전 뜰을 휘몰아쳤다.
그러나 윤서는 좀 전에 느꼈던 분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네 아들, 구박받는 개새끼처럼 비루하게 두지 말고 좀 잘 키우라고.
“세자 저하.”
그래서 윤서도 원손을 받아안으며 이향을 불렀다.
“···오냐.”
감히 나인 나부랭이가 자신을 부를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는지, 이향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소인도 저하께 긴히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
“······?”
“······!!”
다시 또 사방이 모두 고요해졌다.
이번에는 모두 고개를 들어 윤서를 바라보았다.
“독대를 청하옵니다. 시간을 내어주소서.”
“!”
독대라니.
조만간 세자빈의 가락지가 왜 네 손가락에 끼워져 있느냐고 불러 추궁할 예정이긴 하였으나 제가 먼저 나서서 ‘독대’를 청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이향은 순간 ‘이 맹랑한 것은 뭐지.’ 하는 표정으로 윤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뒤의 뜰에선 이제 노골적인 속삭임이 일었다.
“저것이 무엇인데 감히 우리 저하께 독대를 요청하는 거야.”
“흥, 원손 아기씨 앞세워서 허리 굽힘 좀 받았다고 제가 무어라도 된 줄 아나 보지.”
“원손 아기씨 핑계로 저하를 유혹하려는 거지요. 하지만 우리 저하께서 허락하실 리가요.”
귀에 다 들리도록 큰 속삭임이었다.
그러나 윤서는 꼿꼿하게 등을 세운 채 여전히 세자의 눈을 직시했다.
꿀릴 것이 무엇이야. 나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홍위의 보모 나인이고. 당신은 애새끼를 불안 속에 팽개쳐 둔 못난 아비인데.
“···곧, 엄 내관을 보내마.”
그 눈빛의 삼엄함을 읽었는지 이향이 툭 대답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된 놀람과 경악을 가뿐히 무시하며 내관 무리를 거느리고 바삐 편전으로 향했다.
윤서는 홍위의 손을 잡고 방금 세자가 나온 합문 앞에 섰다.
안에서 문이 열려 들어가니 다시 또 널따란 안마루가 나왔다.
안내하는 내관을 따라 들어가니 내관과 상궁이 허리를 굽히고 지키고 있는 임금 내외의 알현실이 나왔다.
“전하, 원손 아기씨와 신빈 자가, 귀인 자가 드시옵니다.”
“들라 하라!”
안에서 위엄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뵙는다. 세종 대왕을, 뵙는다.’
기대감에 쿵쿵 뛰는 심장을 달래며 윤서는 홍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신빈과 양 귀인이 따랐다.
“귀인 마마님과 함께 앞으로 나가셔서 문후를 드리세요.”
재빨리 원손에게 속삭인 후, 윤서는 문가에 엎드렸다.
나인 따위가 감히 고개를 들 자리가 아니었다.
“아이구, 우리 원손이 왔구나. 어서, 어서, 이 할미한테 오세요.”
저기 멀리 상석의 중앙, 화려한 보료에 자리한 중전마마께서 원손을 불렀다.
그러나 원손은 윤서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중전마마께 가세요, 아기씨.”
윤서는 고개만 살짝 돌려 원손을 재촉했다.
그렇지만 오늘 세 살짜리 아기는 윤서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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