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화. 꽃들의 살벌함 속 홍위는 (1)
조선에 온 지 사흘째.
윤서는 지난 사흘간 많은 것을 배웠다.
가장 놀라운 점은 각 궁과 후궁의 거처가 모두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서로 교류가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각각의 궁이나 당은 별도의 환관과 상궁, 나인과 방자 수모 등을 거느리고 살림도 따로 꾸렸다.
그리고 중전마마와 주상 전하께도 매일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는 것이 아니라 차비 내관이라는 내관을 보내 대신 안부를 묻는다고 하였다.
아직 세 살인 홍위는 세자빈께서 돌아가신 까닭에 세종의 후궁인 귀인 양씨, 훗날 혜빈이 되시는 양씨의 양화당 안의 별도 전각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몸살감기 때문에 잠시 궐에서 나가 계신 홍위의 아지(유모)가 바로 귀인 양씨의 친정어머니인 이씨 부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중에 혜빈 양씨와 양씨의 아들 한남군 영풍군 등이 단종을 지키려다 죽게 되었구나.’
‘후궁 팔자도, 왕의 서자의 팔자도 누굴 차기 왕으로 미느냐에 따라 생과 사의 골짜기가 나뉘는데 그 밑의 환관과 상궁, 나인의 목숨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윤서는 하필 오게 된 곳이 남의 운명에 종속된 중세라는 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리 투덜거리며 금가락지를 꼈다 뺐다 해봐도 돌아갈 수 없다는 없다는 사실을 점차 수용하게 되었다.
현실을 수용하자마자, 그간 배우고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지식을 팽팽 굴리며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짜는 모드로 들어갔다.
박 상궁은 윤서가 독이 든 다식을 먹었다는 말을 한 이후, 매섭게 눈을 치켜뜨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장차 홍위에게 닥칠 일은 상궁 하나가 눈을 부라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마마님, 현재 궐 내 궁인들의 세력이 어떻게 나뉘어 있습니까? 그리고 전균은 어느 세력입니까?”
윤서가 저녁을 먹으면서 묻자 박 상궁은 젓가락을 탁 놓고 윤서를 꼼꼼히 살폈다. ‘달라져도 애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독을 먹었다더니 귀신이 들렸는가?’ 살피는 눈치였다.
“독을 먹었더니 머리에 막이 낀 듯 늘 어지럽던 것이 맑아지면서 많은 것들이 보입니다. 제가 궐에 산 지도 벌써 십 년이 되어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하긴 네가 그간 워낙 멍청해서 그랬지 중요한 자리에서 주워들은 것만 이해해도 어지간한 신하들 뺨을 칠 터이니’ 하고 중얼거린 박 상궁이 궐내 세력도를 그려서 보여 주셨다.
“내시부 수장 전균과 제조 상궁 조가이가 같은 편을 먹고 있다. 둘은 ‘의남매’로 젊을 때부터 워낙 각별한 사이라 서로 세력을 합쳤다만, 오로지 주상 전하만을 성심껏 모실 뿐 다른 마음은 없는 이들이니라.”
‘의남매’란 말을 할 때 박 상궁이 눈을 찡긋찡긋했다.
그러니까 둘의 사이가 그냥 동료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뭐, 그런 건 윤서의 관심 밖이었다.
양물이 없다고 연모하는 마음까지도 안 생기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보다는 전균이 수양 대군과 일찍 손을 잡고 훗날 문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홍위의 몰락이 시작된 계유정난에도 깊숙이 관여하는 궁인이란 사실이 중요했다.
“글쎄요, 인간이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 어떤 인간인지는 시험대에 서기 전에는 자신조차 모르는 법입니다. 전균 세력은 반드시 원수 삼아야 할 세력이에요. 그 대척점에는 누가 있습니까?”
“그야 우리가 있지. 주상 전하 다음으로 고귀하신 분을 모시는 우리 동궁전의 상전 엄자치와, 또 내가 있지 않느냐?”
“좋습니다. 그럼 마마님과 엄 상전님은 동궁전 내에 있는 나인들이 정말로 믿을만한지 조만간 가려내셔야 할 것이에요. 그리고 마마님, 밖에서 재산을 불리고 세력을 모을 빼어난 이가 있을까요?”
박 상궁의 주름 속 눈이 번쩍 빛났다.
“내 재산을 관리하며 불리고 있는 노비 노산대가 아주 영민하고 쓸만하다. 사실 상궁 월봉이라야 뭐 그리 대단하겠니? 그걸 오늘날 이만큼 불린 이가 바로 노씨인데, 그의 양딸이 대원각의 기생으로 아주 소리를 잘한단다. 그 양딸이 노름에 혼이 빠진 놈들, 여인에 미쳐 전답을 팔아서라도 첩으로 들이고 싶어 하는 정신 나간 놈들에게서 전답을 싸게 살 수 있는 거간꾼을 해 준 덕에 내가 이리 큰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게다.”
오호라!
이거 참 좋은 조합이다.
소리 잘하는 기생이라면 풍류를 즐기는 양반 세도가들과 자연히 교류가 많을 것이고, 그 커넥션을 바탕으로 아비와 함께 재산을 이만큼이나 불릴 수 있다는 건 목청만 좋은 게 아니라 머리도 좋고 야심도 크다는 뜻.
“좋습니다, 마마님. 윗전들 환궁하시고 분주한 거 지나가면 곧 노산대와 그 양딸이라는 기생을 좀 봐야겠습니다.”
“오냐. 누가 네 목구멍에 독을 넣었는지 참, 내가 잡으면 절은 하고 죽여야겠다. 그 독이 무엇인지도 좀 알아봐서 전의 너처럼 멍청한 것들 목구멍에도 죽지 않을 만큼 부어 넣고.”
이 양반이 참. 큰일 날 말씀을 하시네.
****
다음날은 특히나 신경 써서 홍위를 꾸몄다.
어젯밤 늦게 환궁하신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께 직접 문후 여쭈러 가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주상 전하’께서 바로 ‘세종 대왕’이시다!!!
한민족 오천 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성군으로 뽑히시는 분.
그리고 무엇보다 위대한 한글을 창제하시어 문맹의 고통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
그분의 용안을 먼발치에서나마 뵐 수도 있단 생각에 윤서는 간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아기씨, 할바마마께선 어떤 분이세요?”
짙은 갈색의 단령 위에 금색 띠를 둘러드리며 윤서가 홍위만 들리게 물었다.
그러자 홍위는 새카만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딱 한 마디로 대답했다.
“무어마다.”
“예?”
“무어마다고!”
세 살 꼬마가 뚱하게 대답했다.
나인 따위가 어찌 감히 할바마마의 평가를 묻느냐는 대답이었다.
골을 내느라 그렇지 않아도 토실한 뺨이 토끼 엉덩이처럼 부풀었다.
짜식이, 귀엽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겁나게 영민하기도 하여라.
너무 귀여운 모습에 윤서는 저도 모르게 홍위 뺨에 뽀뽀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홍위가 뺨에 양손을 대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귀여우셔서, 송구합니다, 아기씨.”
윤서가 속삭이자 홍위가 갑자기 부끄러운 듯 짧은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무어마다, 거가 나인.”
무엄하다고 혼내면서도 아기씨의 입꼬리가 수줍게 위로 향했다.
그 모습이 심장 떨리게 귀여우면서도 동시에 마음이 아팠다.
이런 애정 표현을 거의 받아보지 못했구나, 우리 홍위는.
누나가, 아니지 아주 먼 후손이, 앞으로 많이많이 예뻐해 줄게.
윤서가 애정의 헌신을 맹세하고 있을 때.
문이 양옆으로 스르르 열리며 금박 무늬가 화려한 진보랏빛 비단 당의를 입은 여인이 들어왔다.
30대 후반의 순후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궐의 여인답게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홍위를 제외한 모두가 여인을 향해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귀인 마마님을 뵈옵니다.”
양화당의 주인 귀인 양씨였다.
‘훗날의 혜빈 양씨. 세종께서 아픈 세자 이향을 문안하러 동궁에 왔다가, 간병 하는 나인이 어여뻐 승은을 내렸다는 분.’
미모가 절정인 시기는 지났지만 아름다움은 고아한 아취를 덧입었다.
윤서가 양씨를 멍하니 보며 역사 지식을 훑는 동안, 양 귀인이 원손 앞에 앉아 양팔을 벌렸다.
“아기씨, 이리 오세요. 어서 차비 하시고 할바마마 할마마마 뵈러 가셔야지요.”
애정이 듬뿍 담긴 음성이었다.
그러나 홍위는 양씨를 외면하고 윤서의 품을 파고들었다.
“거 나이이양 가꺼에요.”
그러자 양 귀인이 윤서를 향해 오른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잘 따르던 아기씨가 왜 나를 멀리하는 게냐.’
묻는 눈빛이었다.
“온양 행궁에서 돌아오시는 주상 전하 일행을 맞이하시기 위해 마마님께서 요 며칠 무척 바쁘지 않으셨습니까? 며칠 얼굴을 뵙지 못하여 낯설어지셨나 봅니다.”
“아!”
고개를 끄덕인 귀인이 두 손을 모아 이마에 대고 원손에게 절을 올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기씨,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의 환궁을 맞이하는 일로 할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오늘 문안 인사까지 드리고 나면 다시 아기씨 곁에 있어 드릴 것입니다.”
“거 나이이양 가여.”
양 귀인의 절절한 사과에도 어린 아기씨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그럼 권가 나인이랑 가세요, 아기씨.”
상냥하게 말한 양 귀인은 윤서에게 눈짓을 한 다음, 화려한 치맛단을 펄럭이며 먼저 밖으로 향했다.
양 귀인을 비롯한 세종의 후궁 거처는 소헌 왕후의 처소 교태전에서 북서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품계가 가장 높은 정1품 신빈 김씨의 희락당이 제일 규모가 컸고, 종1품 귀인 양씨의 양화당이 두 번째로 컸다.
“아기씨를 잘 안고 따라오너라.”
혹여라도 떨어뜨리는 불상사가 없도록 엄하게 당부하는 양 귀인은 화려하였다.
둥글게 올린 머리에는 진주와 마노, 홍옥 등이 달린 화려한 떨잠을 세 개나 꽂고,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진보라색 긴 저고리를 입었다.
양 귀인의 전각을 나서자 저 앞쪽으로 솟을대문까지 위풍당당하게 갖춘 전각이 보였다.
세종께서 가장 총애하는 후궁 신빈 김씨의 거처 희락당이었다.
희락당에 가까워졌을 때 솟을대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맨 앞에 선 이는 빨간 비단에 금박 연꽃 무늬가 화려한 당의를 입고, 머리 가득 장신구를 꽃처럼 꽂고 있는 여인이었다.
‘신빈 김씨!’
원손 아기씨를 안은 윤서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갔다.
신빈 김씨.
내자시 공노비 출신으로 세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후궁이자, 세종께서 제일 아낀 아들인 계양군을 비롯, 왕자만 여섯을 낳아 기른 다복한 어머니.
그 아들 모두가 수양 대군 쪽에 붙어 단종을 죽이는 데 적극 협력한 덕에 평안하게 천수를 누렸던,
농염하게 아름다운 여인!
‘그리고 어쩌면 내게 독이 든 다식을 건네라고 시켰을지 모르는 여인!’
윤서는 눈에 힘을 주어 재빨리 신빈의 뒤에 선 나인 무리를 훑었다.
하지만 다식을 준 나인은 찾지 못했다.
그런데 눈에서 불꽃을 튀기는 이는 윤서만이 아니었다.
귀인 양씨도 신빈을 향해 적의 가득한 눈빛을 쏘아내고 있었다.
원손 일행을 발견한 신빈 김씨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원손 아기씨를 뵈옵니다.”
윤서 품에 안긴 원손을 향해 신빈이 고개를 숙이자, 양 귀인은 도도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흡사 아랫것의 인사를 받는 듯한 양씨의 태도에 신빈을 모시는 상궁과 나인들의 눈초리가 대번에 살벌해졌다.
신빈이 허리를 펴자 이번엔 한 단계 낮은 품계인 귀인 양씨가 신빈을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혔다.
“신빈 자가를 뵈옵니다.”
“원손 아기씨를 돌보느라 양 귀인이 수고가 많네요.”
“수고라니요. 장차의 국본을 모시는 중차대한 일에 어찌 수고란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은근히 돌려 까는 양 귀인의 말에 신빈이 아름다운 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신빈도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을 여인은 아니었다.
“주상 전하와 중전마마를 모시고 온양 행궁에 다녀온 계양군에게도 나는 ‘수고하였네요.’ 하고 치하했어요. 전하를 모시는 일도 ‘수고’인데, 원손 아기씨를 모시는 일을 ‘수고’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인가요?”
내 아들 계양군은 전하의 총애가 깊어 온양 행궁에도 시종했는데,
네 아들 한남군은 전하의 총애를 받지 못해 여기 한양에 남아 있어야 하지 않았느냐.
돌려 비꼬는 말이었다.
“‘수고’는 윗사람에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노고가 크십니다.’하고 말씀을 하셔야 맞는 예법이지요.”
아무리 친어미라고 해도 임금의 아들에겐 존대를 해야 하는 법이거늘, 천한 노비 출신이라 아직도 예법을 다 못 익혔군요.
우아하게 돌려치는 귀인의 말에 신빈의 얼굴이 짜게 식었다.
말의 전쟁 첫판에서 패배한 신빈의 눈에 권가 나인의 목을 꽉 안고 있는 원손 아기씨가 들어왔다.
오호라, 저기가 약점이구나.
“요새 원손 아기씨께서 저 권가 나인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시는군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가 봅니다. 권가 나인은 가여운 빈 마마의 친척이니 아기씨께서 더욱 각별하게 느끼시는 것이지요.”
원손을 키운다며 그리 위세를 떨어대는데, 정작 원손은 저기 권가 나인만 좋아하잖니.
윤서를 이용해 신빈이 2차 공격을 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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