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화. 작지만 알찬 변화
“감히 이 나라 원손께 손을 대셨습니까?‘
윤서가 서늘하게 묻자 도원군 뒤에서 여인 하나가 거친 걸음으로 윤서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망발인가, 권가 나인?”
도원군의 유모 자격으로 입궐한 조씨였다.
“감히 우리 아기씨를 모함하다니. 목이 잘리고 싶어 환장을,”
“말조심 하세요. 전 나인 나부랭이에 불과할지 모르나, 제가 모시는 분은 원손 아기씨십니다.”
궐에선 모시는 이에 따라 궁인의 지위가 정해지거늘,
장차 보위에 오르실 원손 아기씨를 윗전으로 둔 내게 고작 방계의 ‘군’을 모시는 유모 따위가!
윤서가 서늘하게 턱 끝을 올렸다.
“뭐 저런 오만방자한 게 다 있어!”
“전하와 중전마마께서 지극히 아끼시는 명례궁 아기씨한테 소리를 치다니!”
도원군을 따라온 나인들이 살벌하게 지껄이며 윤서 쪽으로 다가섰다.
달려와 집단으로 치기라도 할 태세였다.
원손을 이리 홀대하다니, 왕실의 기강이 생각보다 엉망이었다.
“어허! 이것이 무슨 추태냐!”
지켜보던 동궁전의 박 상궁이 나섰다.
“감히 원손 아기씨 앞에서, 이것이 무슨 짓들이야!”
세자 저하를 모시고 동궁전을 총괄하는 박 상궁은 정 5품, 품계가 겨우 8품이나 9품이 되는 나인들이 함부로 대들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도원군과 담양군의 나인들이 물러서지 않았다.
“마마님께 결례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요. 권가 나인이,”
수양 대군과 신빈 김씨가 임금께 받는 총애가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물러서지 않는 나인들을 본 박 상궁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두 분 아기씨 잠시 귀를 막으소서. 소인이 윗전을 능멸하여 두 분 아기씨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저것들에게 훈계 한 자락 펼쳐야겠습니다.”
미리 도원군과 담양군에게 양해를 구한 박 상궁이 사자후를 질렀다.
“귓구멍이 막혔느냐? 나에 대한 결례가 아니라 우리 원손 아기씨에 대한 결례라고, 권가가 말하지 않았더냐? 여봐라!”
박 상궁이 동궁전에서 데려온 유난히 몸 좋은 나인들에게 외쳤다.
“더 씨부리는 것이 있으면 감찰부 내사옥에 끌고 가라!”
한번 끌려가면 제 발로 걸어서는 못 나온다는 내사옥이 박 상궁 입에서 나오는 순간, 도원군과 담양군의 나인들이 움찔하며 몸을 뒤로 물렸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눈치가 빤한 여섯 살 도원군이 나섰다.
“미안하네. 내가 낚싯대를 휘두르다가 홍위의 머리를 스쳤어. 그래서 그런 것이네. 홍위야, 형이, 미안하게 되었네.”
약 올리듯 빙글거리며 대충 사과를 한 도원군이 윤서를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지어내던 웃음기가 쏙 빠진, 날 선 눈초리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물어서 무엇하시게요? 저는 원손 아기씨를 모시는 권가 나인입니다.”
권가 나인은 165cm가 훌쩍 넘는 큰 키였다.
그런 나인이 위압적인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때리기라도 할 것처럼 보였는지 도원군이 움찔하며 화다닥 몸을 돌렸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수양 대군의 아들이라 해도 애는 아직 애였다.
“가자. 삼촌, 가요.”
그러자 담양군이 홍위 쪽으로 기분 나쁘게 씩 웃어 보이더니, 도원군과 함께 밖으로 걸어갔다.
나인들도 매섭게 윤서를 훑고 그 뒤를 종종 따랐다.
박 상궁이 큰 소리로 들으라는 듯 윤서를 혼냈다.
“권가야. 원손 아기씨께서 험한 소리를 들으시게 하다니!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기면 너부터 내사옥에 끌고 가 물고를 낼 것이다!”
그러나 혼을 내는 박 상궁의 입꼬리는 움찔움찔 광대뼈 쪽으로 호선을 그렸다.
평소 원손에게 함부로 하는 것들에게 나인 중 누구 하나 나서 막지 않았다.
상궁인 자신이 나서면 윗전들 사이의 갈등으로 번지기 때문에 분해도 참아야 했는데.
권가 나인이 먼저 삐딱하게 나서준 덕에 무례한 것들에게 겁을 줄 수 있었다.
속이 시원해진 박 상궁이 대문을 나서는 도원군 무리가 들을 수 있게 배에 힘을 팍 주고 또 소리쳤다.
“김가 항아야. 소주방에 가서 우리 아기씨 좋아하시는 음식 한 상 거하게 차려 오너라. 동치미로 시원하게 국물 내고! 잣 동동 띄운 밀면! 과일 정과와 주악, 전유화 등, 있는 거 다 달라고 해서 가져 와!”
덕분에 윤서는 오후 내내 밀면에 조선 왕실 음식의 정수를 맛보았다.
각종 과일을 말려 꿀에 절인 정과에, 찹쌀가루를 동그랗게 반죽해 기름에 튀긴 다음 꿀을 바른 주악에, 현대에서도 좋아하는 약과에, 오미자 화채까지.
나인들과 박 상궁과 꼬마 홍위까지 모두 귀한 음식을 맛봐 무척 즐거워했지만······.
단맛을 꿀과 조청으로만 내서 몇 개만 먹었는데도 입 안이 텁텁하게 얼얼해졌다.
‘조선에서 오래 살아야 한다면 반드시 설탕을 정제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산뜻하게 단 설탕을 만들 수 있다면 조선 팔도의 재물을 싹싹 긁어모을 수 있을 텐데.
소헌 왕후가 그리 설탕을 먹고 싶어 하셨는데 올리지 못해, 돌아가신 후 이향이 명나라에서 가져온 설탕을 보면서 울었다는데.
‘부자가 되어야겠어!’
수양 대군의 아들 도원군이 저렇게 원손을 무시하는 것도, 그 무엄한 짓거리를 담양군이 편드는 것도 다 재물이 많아서이다.
수양 대군도 부자이지만 특히 그 부인 윤씨의 친정 동생 윤사균이 한양 최고의 부자로 손꼽힌다.
또 담양군의 어머니 신빈 김씨는 전하의 총애를 지극히 받으니 줄을 대보려고 여기저기서 재물을 바쳐 또 어마어마하게 부자겠지.
그에 비해 세자빈 권씨 가문은 원래도 그닥 권세 있는 가문이 아니었고, 세자빈이 죽은 뒤로 더욱더 곤궁해져 가는 추세다.
세자 이향은 유난히 처복이 없고 아들도 고작 하나, 게다가 세종께서도 셋째 아들로 보위에 올랐으니 홍위를 둘러싼 권력 인심이 냉정할 수밖에.
윤서가 갑자기 떨어진 세상의 엄혹함을 곱씹는데, 밤번을 서는 박가 나인과 한가 나인이 왔다.
둘은 곶감 열 개에 밤번을 맡겨버린 권가 나인을 보고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이 홍위에게 꾸벅 인사를 올렸다.
‘불량한 것들.’
윤서가 매섭게 한번 노려보고 홍위에게 작별을 고하려는데,
“···안 가면, 안 대느냐?”
홍위가 치맛자락을 잡고 쭈볏쭈볏 물었다.
아까 윤서가 자신을 위해 나서준 뒤로 윤서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무척 정이 들었나 보다.
마음이 말랑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홍위를 꼭 안고 귀에 속삭였다.
“내일 일찍 올게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내 깨어 있느라 소인이 많이 피곤합니다.”
“···그염, 빠이와야, 빠이와.”
박가 나인의 손을 잡고, 홍위는 윤서가 대문을 빠져나올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윤서는 권가 나인의 기억에 의존해서 경복궁 뒤쪽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각 중 하나로 찾아 들어갔다.
박 상궁 마마님이 살고 있는 거처였다.
“항아님, 아이고 눈 밑이 시커매요.”
박 상궁 마마님의 거처 일을 돌보는 방자 중금이가 앞치마에 손을 씻으며 나와 타박했다.
“목욕을 하고 싶은데요.”
씻지 못했더니 몸 전체가 꿉꿉했다.
“아유, 무슨 존댈 하시고. 사월이더러 물 길어 오라고 할게요.”
중금이가 배시시 웃으며 부엌으로 달려갔다.
상궁이 되면 이렇게 독립된 처소가 주어지고, 빨래와 바느질, 음식 준비, 물 긷기 등 허드렛일을 하는 노비가 둘이나 주어졌다.
‘그러고 보면 궁인도 나쁘지 않네. 궁에서 입혀 줘, 먹여 줘. 노비도 줘.’
‘노비’란 존재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들도 매달 쌀 4되, 두부 만들 콩 1승, 간장 2홉을 월봉으로 받았다.
또 매일 먹을 반찬으로 생선 2마리, 밴댕이젓과 백 새우젓, 소금 등을 받고, 봄 가을로 정포 1필 반과 목화솜까지 받으니,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조선시대에 일종의 철밥통 공무원 같은 존재였다.
‘그럼 권가도 꽤 재산을 모았겠구나. 월봉이 매달 쌀 7 되, 콩 1승, 간장과 청장을 받고 봄가을로 정포 세 필 가까이, 정주 비단 1필, 목화솜 한 근 반을 받고. 매일 석수어 2마리, 청어 1마리, 진어 1마리, 밴댕이젓, 백새우젓, 소금 등을 받았고. 또 시시때때로 동궁전에서 비단이며 조청이며 여러 선물을 받았는데. 이걸 다 모아서 팔았으면 재산이······.’
권가의 기억을 빌어서 손가락을 꼽아보던 윤서가 이마를 팍 찌푸렸다.
받은 기억은 있는데 모은 기억이 없다!
뭐지 이 권가 곰탱이는.
박 상궁 마마님은 벌써 저 인천에도 전답이 수만 평에, 양주 쪽에도 전답이 오만 평 넘고, 여기 한양에도 기와집이 세 채, 그리고 저기 월계 쪽에도 또 땅을 사야 한다고 하시는, 어지간한 양반보다 훨씬 더 땅부자신데.
이 야무진 땅투기꾼 밑에서 권가 얘는 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거지야, 거지가.
윤서는 기가 막혀서 목욕물을 팍팍 쳤더니,
“항아님. 물이 식었어요? 뜨거운 물 더 가져다 드릴까요?”
방자 사월이가 밖에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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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내가 그러니까 그 거머리 같은 네 이부동생네 다 퍼주지 말라고 했지?”
왜 나는 재산이 하나도 남지 않았냐고 여쭸더니, 박 상궁 마마님이 생선 뜯던 젓가락으로 정수리를 팡 치셨다.
아, 더럽게.
머리 감았는데.
너무 길어서 말리기도 쉽지 않은데, 왜!
“저한테 이부동생이 있어요?”
“얼씨구. 맹하다 못해 드디어 기억까지 잃은 게냐?”
그러자 스멀스멀 권가의 기억이 올라왔다.
권가는 세자빈 권씨의 먼 친척으로 아버지를 일찍 잃은 가난한 처지였다.
머리는 맹한데 몸이 날래서, 궐에서 믿을 만한 이를 찾지 못해 애를 먹던 세자빈 권씨가 나인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홀로 남은 권가 나인의 어머니는 그 후 바로 양반은 양반인데 재산은 하나도 없는 놈팽이 같은 놈에게 재가하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으셨는데.
그 의붓아버지고, 의붓동생들이고 다 권가 나인의 월봉만 노리고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권가야, 권가야!’
윤서는 먹던 숟가락으로 제 머리를 때렸다.
어차피 감아야 하는 머리, 맞고서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였다.
목욕도 하고 배부르게 밥도 먹으니, 슬슬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윤서는 문득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멍청이 권가 나인의 몸에 들어와 나까지 머리가 멍해진 것인가. 지금이 겨우 재물 타령을 할 때인가.
“마마님, 어제 제게 독이 든 다식을 건넨 나인이 있어요.”
“무어?”
윤서는 송화 다식을 건넨 나인의 생김새를 마마님께 설명했다.
그자가 어느 전각 소속인지 모르지만, 흉수가 지금은 권가에게 뻗었지만 최종 목표는 원손 아기씨가 틀림없을 것이란 사실도 빠르게 설명했다.
박 상궁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아기씨 거처 호위는 제대로 서고 있습니까? 저한테 번을 맡긴 두 나인은 당장 잘라야 합니다.”
윤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 상궁이 벌떡 일어났다.
“넌 자거라. 난 다시 아기씨 계시는 전각에 갈 것이니.”
박 상궁이 나가고 상을 물린 후, 윤서는 권가 나인이 쓰던 조그만 방에 누웠다.
이리저리 살피니 조그만 반닫이엔 보풀이 잔뜩 일어난 허름한 나인복이 두 벌, 무명으로 된 칙칙한 평상복이 두 벌 들어 있고 또 닳아서 나달나달한 속옷들이 들어 있었다.
벼루나 붓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니 권가 나인은 까막눈이 틀림없었다.
그 거머리 같은 이복형제들에게 홀랑 넘어가 아무 문서에나 수결을 해놓은 것은 아닌지,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돈 문제는 별거 아니다. 현대인이 조선에 와서 돈 벌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살아남는 것. 그리고 홍위를 살리는 것.
‘사람을 얻어야 해. 각 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식을 전할 사람. 그리고 궐밖에서 세도가들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연합하고 판을 짜는지 동향을 캐낼 사람들이.’
윤서는 어떻게 하면 정보 조직부터 갖출 수 있을까 따져보다가 극심한 피로에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다음날 새벽, 낮번을 서기 위해 홍위의 처소로 가니 대문 안쪽과 마당에 삼엄하게 경비가 서 있었다.
또 박가 나인과 한가 나인 대신 성실하고 야무진 이가 나인과 최가 나인이 번을 서고 있었다.
작지만 알찬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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