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우리 아기씨를, 때리셨습니까.
낮것(점심)으로 색색 고명이 예쁜 국수와, 후식으로 연근과 밤을 조청에 졸인 정과가 나왔다.
“거가 나인야.”
수라 상궁이 홍위 옆에서 공손하게 수라 시중을 드는데 홍위가 앞에 엎드려 있는 윤서를 불렀다.
“예, 아기씨.”
“이거, 머거.”
아까 정과를 주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고 홍위가 정과가 올려진 접시를 가리켜 보였다.
“···예, 아기씨. 감사합니다.”
착한 아이네, 우리 홍위.
오후엔 궐 전체가 술렁거리는 느낌이었다.
“내일 전하께서 환궁하시잖아. 장악원 소속 기생들이 소리하고 재인들이 온갖 재주를 부리면서 마중 나가잖니. 다들 그 구경 보겠다고 지금 여기 육조거리부터 저기 동대문 밖까지 자리 잡느라고 사람들이 버글버글 하대.”
그 좋은 구경을 우리는 못 나가서 어쩌니. 밤 당번이면 구경 나갈 수 있을 텐데. 윤가가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해주었다.
하지만 콘서트에서 영화까지 온갖 멋지고 신나고 기기괴괴한 것까지 모두 섭렵한 현대인 윤서에게 기생 노랫소리나 광대의 물구나무서기 따위야.
흥미 없는 얼굴로 윤서는 홍위에게 제안했다.
“아기씨, 우리 낚시 놀이 할까요?”
가만히 있다가는 푹 엎어져 잠이 들 것만 같아서였다.
“낙찌하자. 투래잣끼도 하자.”
홍위가 짧은 다리로 방방 뛰었다.
머리에 쓴 두건이 경쾌하게 나풀거리고, 아이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생기 가득하게 빛나는 아이를 보자니, 또 뭔가 가슴이 뭉클해서.
윤서는 부러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짜식, 귀엽긴 겁나게 귀엽네.’
그래도 윤서는 짬이 날 때마다 변소로 달려갔다.
동궁전 구석에 있는 변소로 들어가면 일단 허리춤에 매단 오색 비단 주머니 입부터 벌린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찐득한 송홧가루가 잔뜩 묻어나는 금가락지를 꺼내 네 번째 손가락에 껴 보길 백 번째.
“젠장! 젠장!”
낮에는 영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세자 이향이 ‘진성’이 어떻고 했던 기억이 났다.
진성 별이 환하게 흔들렸다고 하니, 진성이 다시 환하게 빛날 때 가락지를 끼면 돌아갈 수 있겠지.
희망을 놓지 않으며 다시 털레털레 홍위의 거처로 돌아오는데.
“아!”
앞에서 오고 있는 한 무리의 상궁과 나인을 보니 등이 꼿꼿하게 긴장하며 식은땀이 흘렀다.
‘권가 나인’의 몸이 반사적으로 보이는 두려움 긴장 반응이었다.
뭐길래 이 몸이 이렇게 긴장하나 보는데.
저쪽에서도 나인 하나가 윤서를 보고 후다다닥 다른 키 큰 나인 뒤로 몸을 숨겼다.
“!”
저 나인이다.
저 나인이 어제 낮에 ‘권가 나인’에게 외소주방에서 얻어왔다며 송화 다식 몇 개를 손에 쥐여주었다.
식탐 많은 권가 나인은 그걸 이 비단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홍위가 잠든 뒤 장지문 뒤에서 우물우물 먹었고.
배가 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죽는구나’ 싶었던 권가 나인은 마지막으로 우리 아기씨 얼굴 한 번 보고 죽겠다고 홍위 곁으로 기어갔던 것이다.
의식이 흐려지던 순간 권가 나인이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가여운 우리 아기씨, 아아, 가여운 우리 아기씨.”
자식처럼 사랑한 원손 아기씨를 두고 죽어야 하는 권가 나인의 애통함과,
아들의 비극을 막고 싶은 가락지 속 세자빈의 원념이,
시공간을 넘어 공명하면서,
엉뚱하게도 윤서의 영혼을 죽은 권 나인의 몸으로 끌고 온 것이었다!
상궁과 나인 무리가 우르르 윤서 곁을 지나쳤다.
녹색 당의를 입은 중년의 상궁은 나인 따위가 인사도 없이 멍하니 서 있다고 윤서를 쏘아보며 그대로 지나쳤다.
일이 바쁘니 봐준다는 시선이었다.
‘잡아서 족칠까?’
아니.
증거가 없다.
아니 증거가 있긴 한데 이 부스러기로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너는 언제고 내 손에 죽는다.’
내가 가진 모든 지식을 동원해 너를 잡아내고 말 것이다.
윤서는 무섭게 맨 뒤에서 종종 도망치고 있는 나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벌써부터 홍위의 머리 위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무거운 마음으로 깨달았다.
“낙찌 하자아!”
전각 안으로 돌아오니 대청마루에 서 있던 홍위가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윤서는 심부름꾼 방자가 구해온 긴 나뭇가지에 굵은 실을 매달고, 끝에 돌멩이를 달아 무게를 준 다음 홍위의 손에 쥐여주었다.
“저기 연못 한가운데로 던지세요.”
홍위가 거처하는 전각은 양반가 안채와 비슷한 구조였다.
사방으로 사각의 담이 있고, 북쪽 중앙에 홍위의 침전과 공부방이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있는 주 건물이 있다.
심부름과 여러 허드렛일을 하는 방자와 수모 등은 대문 옆으로 된 행각의 자그마한 방에 살고 있다.
그리고 널따란 마당 동쪽으로 조그만 연못이 있다.
홍위가 낚시 놀이를 한다고 하자 보모 나인 윤가뿐 아니라 청소와 빨래, 촛불과 등불 담당 나인, 종들까지 모두 나와 구경 중이었다.
홍위는 막대기를 꼭 잡고 짧은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낚싯줄을 던질 준비를 했다.
“무꼬기야, 간다앙.”
혀 짧은 소리로 물고기에게 외치며 원손이 줄을 던졌다.
그러자 알록달록한 잉어들이 수초 속으로 화다닥 숨었다.
홍위는 그 모습을 보며 ‘이야 이야’ 손바닥을 치며 기분 좋게 깔깔 웃었다.
어린 아기의 귀여운 웃음소리에 구경하던 나인과 방자들도 “멋지십니다, 아기씨” “한 번 더 던지세요.”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홍위는 의기양양하게 다시 다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또 던질 준비를 한다.
“너, 언제 이렇게 아기씨랑 잘 놀아드리는 법을 깨친 거야?”
윤가 나인이 이상하다는 듯 윤서를 보았다.
‘너 원래 좀 맹한데, 어찌 이리 눈이 초롱하게 된 거니. 뭘 잘 못 먹었나.’ 그런 눈빛이었다.
영혼이 바뀌어서 그러하단다.
말하지 못해서 그냥 흐응 웃어 보이고 홍위를 보는데.
“뭐 하느냐?”
대문간에서 대여섯 살 먹은 사내아이 둘이 뒤에 나인을 주륵 거느리고 들어왔다.
짙은 자주색 단령에 금색 관대를 허리에 두른, 왕족 꼬마들이었다.
“명례궁 아기씨, 희락당 아기씨, 오셨습니까?”
윤가 나인이 종종종 달려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다른 궁인들도 모두 깊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누구지?’
궁금해하자,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한 지식이 떠올랐다.
‘명례궁 아기씨는 수양 대군의 큰아들 도원군을, 희락당 아기씨는 임금께서 총애하시는 귀인 김씨의 막내아들 담양군을 말한다.’
귀인 김씨는 훗날 신빈 김씨가 되고.
신빈 김씨는 세종께서 제일 총애한 후궁으로, 내자시의 여종에서 정1품 빈까지 오른 출세 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조상이 세자빈 권씨와 단종이라 꼼꼼하게 보아두었던 역사 지식이 휘리릭 튀어나왔다.
‘공부 따위 하지 말걸. 잘 아니까 여기로 날려 보낸 거 아냐!’
새삼 짜증이 나는데 몸은 저절로 홍위 옆으로 내달렸다.
홍위가 저 두 꼬마를 보고 어깨를 움츠리는 게 선명하게 보여서였다.
“우리 홍위가 낚시하는구나. 형이 도와줄게.”
의외로 도원군은 의젓하게 형 노릇을 하며 홍위를 도와 낚시를 시작했다.
"물고기 간다!"
신빈의 막내아들 희락당 아기씨, 담양군 이거도 반대편으로 쪼르르 달려가 발을 텅텅 굴러 수초 속에 숨은 물고기들을 원손 앞으로 보냈다.
도원군은 홍위 뒤에 서서 낚싯대를 쥔 손을 겹쳐 잡고, 휙휙 돌멩이가 든 줄을 허공에 돌렸다.
‘우리 홍위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새인데.’
여차하면 도원군의 손에서 홍위를 구해낼 목적으로 윤서가 둘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낚싯줄이 힘차게 연못 수면을 때렸다.
“와하하하하.”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홍위는 흔들리는 눈망울로 입 끝을 움찔거렸다.
아까 온 얼굴로 웃던 웃음과는 딴 판인, 불안한 웃음.
‘네놈이 원인이겠지.’
윤서는 도원군의 표정을 살폈다.
‘눈까지 웃지 않아. 쪼끄만 게 벌써부터 입꼬리만 올린 가짜 웃음을 짓고 지랄이야.’
도원군은 왕실의 첫 손주여서 홍위가 태어나기 전까지 대단한 총애를 받던 아기였다.
공들여 간택한 세자빈 둘이 투기와 동성애로 줄줄이 폐빈이 되어 내쳐지는 처복 없는 이향과 달리.
수양 대군은 한양 최고의 거부인 윤씨 집안의 소녀를 아내로 맞아 그토록 고대하던 첫 손주를 세종 부부에게 안겨드렸다.
‘왕실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저 아이는 우리 홍위가 태어났을 때 과연 어땠을까.’
친동기 사이에도 동생이 태어나면 도로 어린 아기로 퇴행할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 경우는 태어난 사촌 동생이 장차 보위에 오를 원손이다.
그리고 도원군은 다른 이도 아닌 그 ‘수양 대군’의 큰아들이었다.
대여섯 살 사내아이들은 함께 놀 때에도 본능적으로 서열을 정하려 든다.
저 두 아이의 서열 본능이 우리 홍위에게 향하면!
윤서는 한 걸음만 내디디면 홍위를 안을 수 있는 거리에 서서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번에는 담양군이 홍위 손에서 낚싯대를 받았다.
“잘 봐. 이렇게 돌리면 되는 거야.”
담양군이 횡휭 낚싯줄을 높게 돌렸다.
“아유, 아기씨들 오셨군요. 가서 다과와 감식혜 좀 내어오너라.”
어느새 나타난 박 상궁이 방자에게 일렀다.
아이들은 이제 낚싯대를 놓고 연못의 물을 서로에게 튀기며 물장난을 시작했다.
홍위도 권가가 옆에서 든든히 지키자, 처음의 불안함을 벗고 짧은 다리로 도도도 뛰어가며 제법 물을 뿌렸다.
“여기 증편과 수리취떡 있습니다. 한입씩 드시고들 노세요.”
박 상궁이 외치자 식탐 많은 ‘권가 나인’ 몸이 반사적으로 홍위에게서 떡이 올려진 소반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선을 떼었던 그 유일한 순간, 홍위가 머리를 쥐고 울먹이며 윤서에게 달려왔다.
“아나저, 아나저.”
서럽게 입술을 움찔거리면서.
순간 윤서는 가슴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아기씨, 무슨 일이에요.”
윤서는 부드럽게 물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윤서는 평소 ‘지나치게 친절한 윤서씨’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무한 인내심을 가진 심리상담사였다.
그렇지만 아기가 울먹거리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텅 비어서.
“명례궁 아기씨가, 때렸어요?”
앙다문 잇새로 묻고 있었다.
“으잉, 아나저.”
그러나 홍위는 윤서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리기만 했다.
군자는 고자질 따윈 해서는 안 된다는 개똥 같은 철학을 벌써 주입 당한 듯했다.
윤서는 일단 홍위를 안았다.
일 미터도 안 되는 작은 몸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하아!”
윤서의 몸도 떨리기 시작했다.
삼십 평생 살면서 권윤서가 이렇게 가슴 쓰리게 분노한 적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명례궁 아기씨, 우리 아기씨 때리셨습니까?”
딱딱한 목소리로 묻는 순간,
뜰 전체가 음 소거 버튼을 누른 것처럼 고요해졌다.
“우리 원손 아기씨의 머리를 때리셨습니까?”
윤서는 수양 대군의 아들 도원군을 싸늘하게 내려보며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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