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누가 ‘우리’ 홍위래!
“홍위야. 아비다.”
단번에 몽글하게 풀어진 목소리로 이향이 속삭였다.
“아밤마아? 아밤마아!”
아비의 목소리를 들은 홍위는 단번에 울음을 그치고, 눈물에 젖은 새카만 눈동자를 흑요석처럼 빛내며 이향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보고딮엇떠요, 아밤마아.’ 울먹거렸다.
“나도 보고 싶었다. 무척 보고 싶었어.”
“아밤마아, 텬다문 거이 다 외었뎌요.”
“천자문을, 벌써? 성삼문이 아주 열심히 가르쳤나보구나.”
“드뜽니미 할바마아 담마더 영미하다 햇떠요.”
스승님이 할바마마 닮아서 영민하다고 했다고.
하긴 할아버지가 세종에, 아버지가 문종인데 멍청하기가 더 어렵겠지.
하지만 그래도 할아버지 못지않네.
만 두 돌이나 될까 싶은데 천자문을 다 외우다니.
그 영민한 머리로 이 누나 돌아갈 방법 좀 너의 어머니께 물어주련.
애 엄마이자 19대 조상 권씨를 향한 원망이 애꿎게 애로 향했다.
“권가, 너! 나중에 그 가락지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게다!”
이향은 넋을 빼고 앉아 있는 윤서에게 매섭게 말하고, 아들을 다시 힘껏 껴안았다.
“모레 저녁에 할바마마와 할마마마 모시고 환궁할 것이다. 그때까지 잘 있거라. 곧 보자.”
다정한 인사를 마친 이향이 순식간에 방을 나갔다.
“아밤마아, 아밤마아. 오딘다, 두 밤 다먼.”
풀이 죽은 채 속삭이던 아이가 다시 품을 파고들었다.
“다다, 거가 나잉. 다다.”
자고 나면, 여기가 아닐까.
제발 이것이 꿈이라고 말해줘, 아이야.
온통 혼란스럽게 얼어 있는 몸과 마음에 아이의 따스한 체온과 꼬물거리는 움직임이 위안이 된다.
윤서는 그 작은 위로의 존재를 힘껏 안고, 훅 촛불을 껐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면 제발 21세기 한국에 있길. 아니 아무 데라도 좋으니 제발 21세기 세계에 있길 간절히 기원했다.
권윤서가 조상님의 가락지 한번 끼었다가 강제로 조선에 소환당한 이 날.
조선왕조실록 세종 25년 4월 4일 기축년 (1443년 명 정통(正統) 8년) 기록엔 다음과 같이 실렸다.
[어가가 진위현(振威縣) 장호원(長好院) 서쪽 들녘에 머물렀다.]
[초저녁 동쪽 하늘에 진성(鎭星)이 환히 빛났다.]
[달에 흰 서기가 스쳤다.]
*****
“권가야! 권가야!”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던 새벽이 지나고.
이번엔 또 거친 중년 여인의 목소리가 윤서를 깨웠다.
“네가 왜 또 밤번을 서. 아이구, 이 멍청한 것아. 낮번은 어떻게 버티려고!”
윤서는 눈을 꾹 감고 못 들은 척했다.
“눈 떠. 눈꺼풀 파르르 하는 거 다 봤다.”
‘권가 나인’을 데리고 있는 동궁전 최고 상궁 박말예 마마님이시다.
모르는 척하고 싶은데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권가 나인’의 기억이 일러준다.
권가 나인은 박 상궁을 어머니처럼 믿고 따라서, 목소리만 듣고도 온몸이 평안하게 풀어진다.
평소 박 상궁이 좀 모지리인 권가를 잘 돌봐준 듯하다.
“시끄여워, 박 당궁.”
품 안에서 꼬물거리며 깨어난 홍위가 제법 의젓하게 혼을 낸다.
“아이구, 원손 아기씨 송구하옵니다. 곧 세숫물 들여올 거에요. 일어나셔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박 상궁이 홍위를 달랬다.
“거가야, 인너나.”
홍위가 윤서를 흔들었다.
아아, 내가 권가인 것 맞지만, 나인은 아니야! 아니라고!
화를 내고 싶지만. 아이는 뭔 죄인가.
윤서는 팽 몸을 일으켰다.
“대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어서 네가 밤번을 서고. 또 저하께서 내게 사람을 보내신 게야?”
“뭐라고 보냈는데요?”
반지 뺏고 쫓아내라 하신 건가.
그럼 난 이 낯선 외계 조선에서 어디 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순간 긴장되어 여쭈었더니, 박 상궁이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장지문 밖에 번을 서는 나인도 없이 너 혼자 있었다고. 나더러 뭐 하는 사람이냐고 추궁하셨다. 내 벌써 박가랑 한가는 혼구멍을 내고 왔다만, 네가 문제야, 네가 문제.”
“예, 제 존재가 문제입니다, 정말.”
“···뭐라는, 거야?”
너무 순순히 문제임을 자인하자, 박 상궁은 오히려 ‘늘 헤헤거리기만 애가 왜 이러지.’ 놀란 눈으로 윤서를 살폈다.
“너, 왜 이러니? 어디 아프니? 내의원에 가 약 탈래?”
“여기서 사라지고 싶어요, 정말.”
“아니, 아기씨 들으시는데!”
박 상궁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그제야 입을 움찔거리며 올려다보고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달도 별도 없는 사막의 밤 같은 눈동자에 투명한 물기가 차오르는 걸 보자 정신이 확 들었다.
애 앞에서,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야.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엄마 잃고, 주양육자인 유모 이씨 부인은 고뿔로 궐을 나가 있어, 가뜩이나 정서가 불안할 애 앞에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가들도 표정과 목소리 톤만으로도 양육자의 기분 상태를 알아채고 버려질까 두려워한다.
하물며 천자문도 다 외우는 천재 홍위는.
자책이 가슴을 쿡쿡 찔러서 윤서는 화급히 사죄를 올렸다.
“아니, 아니에요, 아기씨. 아기씨 때문이 아니고요. 제가 문제가 좀 있어서······. 송구합니다.”
그러자 홍위는 몇 번 더 울까 말까 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작은 팔을 쭉 뻗으며 요구했다.
“아나저.”
윤서는 요구대로 아이를 안았다.
품에 쏙 들어오는 아이의 체온이 위로가 되었다.
포유류는 공포와 혼란 상황에서 서로 무리 지어 겹쳐있음으로 위로받고, 파충류는 죽은 듯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으며 공포를 견딘다.
홍위의 체온이 있어 윤서는 파충류의 뇌인 변연계의 공포를 딛고, 포유류 수준의 공포와 혼돈만 견디면 된다.
곧 전전두엽이 제 기능을 하며 이성적으로 탈출 방법을 찾아내리라.
심리 상담가 윤서는 작은 아이를 안고, 습관적으로 아이의 정서를 살폈다.
홍위의 정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안정적이었지만 약간의 분리불안 장애가 있었다.
안아달라 서슴없이 요구하고 평안히 안기는 건 그만큼 주양육자가 안정적인 애정을 주어 애착 관계를 잘 맺었다는 증거.
그 양육자가 지금 곁에 없으니 대신 윤서에게 매달리는 건, 일시적인 분리불안이리라.
유모 이씨 부인이 애를 잘 키웠네. 돌아가신 우리 조상님 대신.
머릿속으로 상담 일지를 써가고 있는데 박 상궁이 홍위에게 말했다.
“아기씨. 어서 세수하셔요. 소인이 초조반 올리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윤서에게 ‘어서 정신 차리고 아기씨 세수 시켜드리거라.’ 눈으로 재촉하고 방을 나갔다.
문이 열리고 새카만 옻칠을 한 대야에 미지근한 물이 담겨 들어왔다.
윤서는 고운 수건을 살짝 짜서 아이의 얼굴을 씻겼다.
이홍위.
훗날 세자가 되고, 단종이 되어 고작 열일곱 살의 나이에 죽는 가여운 아이는 제 운명을 모른 채 눈을 감고 의젓하게 얼굴을 맡기고 있다.
새까맣게 진한 속눈썹이 무척 길다.
뺨은 발그레하고 이마는 동그랗게 튀어나온 것이 전두엽이 일찍 발달을 시작했나 보다.
이렇게 귀여운 아이가 고작 십칠 년을 살고······.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후흡, 비명처럼 눈물이 터졌다.
고작 열일곱 살에 죽을 운명인 세 살 푸릇푸릇한 아이도 불쌍하고,
반지 한번 잘못 꼈다가 이 괴상한 세계에 끌려 온 나도 불쌍하고.
“왜 우으냐?”
“···아닙니다.”
“우디 마라, 우디 마. 이따 정가 주께.”
긴 속눈썹 끝에 눈물 한 방울 벌써 매달고 덩달아 입매를 비쭉이며 아이가 정과를 주겠다고 위로했다.
별로 맛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그 마음이 퍽 위로가 되어서,
슬그머니 눈물이 그쳤다.
방자가 세숫대야를 들고 나가고 나서야 함께 낮번을 서는 또 다른 보모 나인 윤가가 왔다.
“권가, 너도 참.”
쑥 올라간 고양이상 눈 끝을 더 치켜올리며, 윤가가 혀를 찼다.
어디서 맨날 그렇게 호구 잡히냐고 눈으로 한참 혼을 낸 후 윤가는 홍위를 향해서 넙죽 엎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아기씨, 좋은 꿈 꾸셨지요?”
원손 홍위를 돌보는 일이 주 업무인 보모 나인의 일과가 다시 또 시작이었다.
******
“무그(묶을) 독(束) 띠 대(帶) 다당할(자랑할) 긍(矜) 띡띡할(씩씩할) 당(장)(莊) 어덩거닛(어정거릴) 배(徘) 머무거닐(머뭇거릴) 해(회)(徊) 보(볼) 첨(瞻) 바라봇(바라볼) 쪼(조)(眺).”
“아주 정확하게 읽으셨습니다. 그럼 이어붙여서 읽고 뜻을 풀이하실까요?”
홍위가 거처하는 전각 내 동쪽 작은 건물.
안에서 들리는 혀짧은 소리에 윤서는 큭큭, 어깨를 들썩거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장지문 앞에 앉아 있던 윤가가 매섭게 눈을 흘겼다.
우리 원자 아기씨 공부하시는데 어디서 감히 웃음질이냐는 꾸짖음이었다.
“예, 드등님, 똑대긍당하고 배해첨도하야. 허이띠을 단단이 묵거 긍디를 가꼬 여여 고슬 두유 사펴아 뜨십니다.”
(예 스승님, 속대긍장하고 배회첨조하야 허리띠를 단단히 묶어 긍지를 갖고 여러 곳을 여러 곳을 두루 살펴라 뜻입니다.)
“아주 정확하십니다. ‘허리띠를 단단히 묶어 긍지를 갖고 여러 곳을 살펴야 한다.’ 제가 그제 풀이해 드렸던 뜻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십니다.”
안에서 원손 홍위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고 있는 스승은 그 유명하신 성삼문이셨다.
아까 대청마루에 오르는 모습을 뵈니 풍성한 수염에 얼굴이 엄격하고, 걸음걸이 자태가 위에 말한 것처럼 ‘속대긍장’ (옷차림새가 아주 단아하고 바른 것) 했다.
“이 어귀는 주례(周禮)의 경서에 나온 구절로 군자는 평시 옷차림새를 단정히 하고······.”
성삼문께서 구절의 근원을 밝히는 소리가 웅웅거리며 점점 멀어졌다.
교대 시간인 신시 반각, 현대 시간으로 오후 네 시가 되려면 다섯 시간이나 남았는데.
“···차려.”
“······?”
“정신 좀 차리라고. 아기씨 수업 끝날 때가 다 되었어.”
윤가 나인이 매섭게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깨어났다.
“침 좀 닦아라. 아우, 드러.”
장차 보위에 오르실 아기씨를 모신다는 자긍심이 대단한 윤가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손바닥으로 턱을 문질렀더니 손바닥 한가득 침이 묻어났다.
그래도 잠깐 졸았더니 머릿속이 상큼하게 맑아졌다.
커피 한 잔만 마셨으면 소원이 없겠네.
생각하며 윤서는 윤가 나인을 따라 몸을 일으켜 문 옆으로 허리를 굽혔다.
문이 드륵 열리고 홍위가 먼저 의젓하게, 그렇지만 아직 삼등신 몸체인 까닭에 뒤뚱뒤뚱 걸어 나왔다.
그리고 역사 속 위인 성삼문이 피와 살을 가진 생생한 실체적 인물이 되어 또 걸어 나왔다.
“아기씨, 내일 주상 전하께서 환궁하시어 수업이 없습니다. 저는 모레 찾아뵙겠습니다.”
성삼문이 허리를 굽히자, 우리 홍위도 배꼽에 손을 대고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다.
“뜨뜽님, 안넝이 가데요.”
홍위는 시옷(ㅅ) 마찰음 발음을 아직 디귿(ㄷ) 파열음 발음으로 하고 있었다.
원래 자음 중 시옷이 가장 늦게 발달하는 음소로, 만 6세가 지나야 정확하게 소리 낼 수 있는 어려운 발음이다.
그래도 혀를 윗니 바로 뒤쪽인 경구개 부위에 가까이 올려 ‘스스’ 하면서 공기를 마찰시키는 연습을 하면 감을 잡을 수 있는 발음이기도 했다.
‘우리 홍휘, 천자문도 이렇게나 잘 외우는데. 이 누나가 발음 교정 좀 시켜줘야겠네.’
멍하니 생각하다가 윤서는 깜짝 놀랐다.
우리 홍위라니. 누가 ‘우리’ 홍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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