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 - ⓒ 윤인수
현덕왕후 권씨의 금가락지를 꼈더니,
-지켜줘, 권가야. 우리 홍위를 지켜줘.
무시무시한 절규와 함께 단종 곁으로 강제 소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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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마나, 우디 마.”
꼬물꼬물 따스한 것이 품을 파고들었다.
“꿍 끄으야?”
작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눈물 젖은 뺨을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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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저하! 지금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하!”
지금 돌아가야 하는 사람은 난데.
울고 싶은 윤서 대신, 세자 품에서 깨어난 홍위가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시끄여워.”
정말 머리가, 무척 시끄럽다,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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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화. 금가락지의 소환
“우디 마나, 우디 마.”
꼬물꼬물 따스한 것이 품을 파고들었다.
“꿍 끄으야?”
작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눈물 젖은 뺨을 쓸었다.
꿈이라기엔 너무 따뜻해서, 윤서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호지를 통해 은은하게 달빛이 흘러들었다.
“벌써 밤이라니. 대체 얼마나······, 엄마야!”
윤서는 펄쩍 몸을 물렸다.
눈앞에 조그만 아이가 환영처럼 윤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어모이 꿍 끄으냐?”
세 살 정도 되었을까.
긴 머리를 늘어뜨린 아이는 귀신이라 하기엔 너무 다정한 목소리였다.
“···누구?”
묻는데 아이는 윤서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작은 손으로 졸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디 마고, 다다.”
그러더니 윤서의 옷고름을 쥐고······,
‘응? 옷고름이라니!’
윤서는 아이가 쥐고 잠든 옷고름은 놓아둔 채 조심스럽게 이불을 들췄다.
옥색 저고리와 짙은 색 치마가 보였다.
분명 목 늘어진 면티에 무릎 푹 나온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이게 뭐지.
아이야, 넌 누구니.
흔들어 깨워 물으려다, 손을 멈췄다.
자는 아이를 놀라게 해선 안 된다는 심리 상담가의 직업 의식이었다.
다시 손을 거둬들이는데, 약지 손가락이 반짝 빛을 내었다.
‘금가락지!’
오래된 단향목 상자에 편지와 함께 들어 있던 금가락지다.
그러자 호기심에 금가락지를 끼었을 때 들었던 절규가 다시 머릿속을 왱왱 울렸다.
-지켜줘, 권가야. 우리 홍위를 지켜줘.
홍위.
이홍위.
우리 권씨 집안의 19대 조상 현덕왕후 권씨의 아들.
그리고 세조에게 살해당한 비운의 왕 단종.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 한다.
윤서는 이불자락을 옷고름 대신 아기 손에 쥐여주고 몸을 일으켰다.
장지문을 여니 안마루가 있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분합분이 있는 이중 구조의 저택이었다.
주로 궐이나 세도가의 저택에서나 있는 구조다.
‘설마, 정말로 조선시대로 타임 슬립이라도 했단 말이야?’
두려운 마음으로 바깥으로 통하는 문에 손을 올리는데.
쿵, 대청마루를 딛는 발소리와 함께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저하! 세자 저하! 이렇게 궐에 무단으로 들어오신 것이 알려지면!”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가 하나.
“어허. 하늘을 좀 보래도. 진성(鎭星)이 유난히 빛난다니까.”
위엄에 찬 목소리가 또 하나.
“그럼 원손 아기씨 안위만 확인하고 빨리 나오십시오. 해 뜨기 전까지 돌아가시려면 시간이 촉박합니다요.”
“넌 오늘 밤번을 선 자들 이름, 여기 귀인 전각의 호위를 담당한 놈들의 이름을 빠짐없이 알아놓거라. 대체 궐의 방비가!”
사내의 음성엔 짙은 노여움이 배어 있었다.
자신의 침입을 감지하지 못한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엄벌하겠다는 의지가 선명했다.
‘원손 아기씨라니. 저 아이가 진짜로 단종이세요?’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기 좋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윤서가 도로 몸을 돌릴 때였다.
스윽, 소리 없이 합문이 열리고 다음 순간 거친 손길이 윤서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누구냐? 누구길래 쥐새끼처럼 엿듣는 것이냐?”
“엿, 엿듣다니요?”
윤서는 필사적으로 적당한 변명을 생각해냈다.
“아기씨께서 목, 목이 마르신 듯해서······.”
“목이 마르면, 옆에 자리끼 물이 다 준비되어 있을 것을!”
되지도 않을 변명은 하지도 말라는 듯 사내의 손길에 힘이 들어갔다.
으윽.
숨이 막히기 시작한 순간 윤서의 머릿속에 낯선 기억이 격통처럼 밀려들었다.
권가 나인!
이 몸은 본래 세자빈 권씨의 본가에 얹혀살던 먼 친척 ‘권가 윤서 나인’이다.
권씨가 세자의 후궁인 승휘로 뽑혀 입궁할 때, 순전히 몸이 날래단 이유로 보디가드 비슷하게 따라 들어왔고,
세자빈께서 돌아가신 후엔 원손 아기씨를 지키는 보모 나인이 되었다.
아들을 낳고 사흘 만에 죽은 세자빈 권씨.
아주아주 익숙한 이야기다.
“똑바로 고하지 못할까!”
세자 이향, 훗날의 문종이 목을 틀어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
윤서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귀하신 분께 목을 졸리게 된 건 남의 가락지, 정확히 말하면 19대 조상님인 현덕왕후 권씨의 금가락지를 함부로 껴서다.
조상님 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윤서는 부모님 3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홍성 고향 집에 내려왔었다.
엄마 아빠 좋아하신 황새기 젓갈과, 콩떡과 한잔 술로 제사를 지낸 후.
부모님의 추억이 깃든 곳들을 돌아보다가 다락방까지 올라갔었다.
어릴 적 읽던 동화책과 상장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장을 보는데, 낯선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자개로 꽃과 줄기를 섬세하게 장식한 단향목 상자였다
진품명품에 출품하면 억대를 호가하기에 충분해 보이는 귀한 함이었다.
뚜껑을 여니, 백옥을 깎아 만든 봉황 비녀 하나, 은으로 봉황 무늬를 새겨 넣은 금가락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맨 밑에 치자빛이 아직도 선명한 종이 한 장이 곱게 접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비녀와 반지를 꺼낸 후, 종이를 펼쳤다.
慈母棄世何怱怱(자모기세하총총)
어진 어미는 어찌하여 서둘러 세상을 등졌는가.
단정하고 힘 있는 필체가 절제된 슬픔을 담고 있다.
‘이건 현덕 왕후 기일에 문종이 썼다는 만시(輓詩), 일종의 애도 시다.’
한시를 번역해 여러 권 책을 낸 아빠가 가르쳐준 적 있는 시구였다.
윤서는 세자빈을 잃은 슬픔이 깊게 밴 종이를 손가락으로 쓸며 시구를 살짝 바꿨다.
父母棄世何怱怱(부모기세하총총)
부모님은 어찌하여 서둘러 세상을 등지셨는가.
이 풍진 세상에 나만 남겨두고.
무너지는 마음으로 가락지를 들어 왼손 약지에 끼는데.
으흐흐흑 비통한 울음소리와 함께 여인이 절규했다.
-지켜줘, 권가야. 우리 홍위를 지켜줘.
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윤서는 의식을 잃고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그렇게 쓰러지고 나서 눈을 떠보니 여기 조선.
절규하신 조상님의 남편 손에 목덜미 잡혀 짤짤 흔들리고 계시다.
해도 해도 너무하시다 정말.
그렇게 홍위를 지키고 싶으시면 당신이 돌아오실 일이지.
왜 가여운 후손인, 19대면 남보다도 못한, 나를 보내셨단 말인가.
치미는 억울함에 윤서는 팔꿈치를 틀어 콱, 이향의 명치를 찔렀다.
치한에게 잡혔을 때 빠져나가기 호신술 중 두 번째였다.
크윽, 신음과 함께 목을 움켜쥔 손아귀 힘이 풀렸다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윤서는 재빨리 귀하신 아기가 잠들어 있는 침실 문을 열었다.
“자는 아이는 깨우는 거 아닙니다!”
윤서는 손가락으로 쉿 해 보이고 아이 곁에 털썩 앉았다.
“하아, 발칙하구나!”
소리치려던 이향은 입을 꾹 닫았다.
시간이 없다.
장호원까지 돌아가려면 꼬박 두 시진은 달려가야 한다.
두 시진 전, 온종일 어가 행렬을 지휘하느라 고단했던 이향이 잠깐 조는 사이.
그리운 세자빈 권씨가 꿈에 나타났다.
- 저하, 저하. 우리 홍이를 지킬 이를 보냈어요. 저하. 홍이를, 홍이를 지켜주세요, 저하.
간절하게 당부하는 목소리에 깨어 막사 밖으로 뛰어나오니 별의 움직임이 기이했다.
초저녁 동쪽 하늘에 뜨는 별인 진성(鎭星)이 유난히 밝게 빛나며 흔들거렸다.
진성은 왕손의 안위와 관계된 별이고,
환히 빛나는 것은 상서로운 징조이나 흔들리는 것은 불길한 징조다.
‘우리 홍위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금 이향은 전하 내외를 모시고 온양 온천의 행궁에 다녀오는 길.
임금과 세자가 부재한 한양은 안평 대군이 지키고 있다.
이럴 때 아무리 세자라도 임금의 허락 없이 궐에 들어가면 역모죄로 몰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향은 두 돌도 안 된 아들의 안위를 반드시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초조감에 그대로 말에 올라 40리 길을 달려왔다.
세자 익위사 중 가장 빼어난 호위 다섯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왔더니, 궐의 수비는 담장을 넘어 침입하는 줄도 모르고.
원손이 있는 전각의 방비마저 모두 비우고, 지게문 밖에 응당 지키고 있어야 할 나인도 없다.
두 달 궐을 비웠기로서니!
“넌, 누구냐? 보모 나인이냐?”
이향은 아이를 안고 있는 나인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농 위의 촛불을 켰다.
화락 퍼져나가는 불빛 속에, 토실한 뺨을 한 홍위를 안고 있는 나인이 보였다.
“···권가?”
“···예, 보모 나인 권가입니다.”
“어째서 너 혼자만 있는 것이냐? 다른 나인들은?”
‘다른 나인’이란 말을 듣자 원래 번을 서고 있어야 할 박가 나인과 한가 나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둘이 몸은 날랜데 머리가 약간 모자란 ‘권가 나인’에게 곶감 열 개를 주고 대신 번을 서게 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권가 나인’은 여기 홍위가 있는 전각의 공식 호구였다!
“배탈들이 나서, 저만 있게 되었습니다.”
“배탈?”
“물이 잘 못 되었나 봅니다.”
“이질이 돈단 말이냐? 우리 홍위는?”
“여기 이렇게 잘 주무시고 계십니다!”
입은 기계적으로 답을 뱉어 놓는데, 머릿속은 아우성이었다.
이향이 다가왔다.
불빛 아래 드러난 이향은 수려한 미남자였다.
큰 키, 널따란 어깨, 선 굵은 얼굴. 저리 풍성한 수염만 없다면 현대 기준으로도 전 세계 잘생긴 로얄 프린스 목록에서 다섯 손가락에는 들 외모였다.
그러나 그렇게 잘생긴 얼굴이 훅 다가와 품에서 아이를 안아가는데도,
윤서는 무감한 눈으로 세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딴 궁리 중이었다.
‘이 반지! 다시 뺐다가 끼면 혹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아이가 사라진 틈을 이용해 윤서는 약지손가락에서 금가락지를 빼어냈다.
그리고 눈을 꾹 감고 다시 손가락에 끼며 기도했다.
‘눈을 뜨면 현대다. 눈을 뜨면 21세기 다락방이다. 눈을 뜨면!’
엄마, 아빠, 도와주세요.
하나님, 부처님, 세상의 모든 신이시여!
간절히 기도하며 눈을 딱 떴는데,
검은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그리고 뒤이어 굳은살이 단단히 박힌 손이 우악스럽게 손을 비틀어 올렸다.
“이 가락지, 무엇이냐? 왜, 네가?”
젠장.
아직도 조선,
성군이었으나 제 아들 하나 지키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세자 앞이었다.
“저도 알고 싶습니다. 이따위 가락지!”
“?”
이향이 입매를 굳혔다. 이런 무엄한 말 따윈 들어도 본 적 없단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때 밖에서 다시 다급한 부름이 들렸다.
“세자 저하! 지금 돌아가셔야 합니다! 저하!”
지금 돌아가야 하는 사람은 난데.
울고 싶은 윤서 대신, 세자 품에서 깨어난 홍위가 으앙, 울음을 터트렸다.
“시끄여워.”
정말 머리가, 무척 시끄럽다,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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