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95. 처음과 끝(3)
이제 공화국의 마차도 예전 영길리시발차 시절보다 한참 발전했다.
그렇다곤 해도, 도로를 우레탄으로 만든 게 아닌 이상에야 이 시대의 마차는 현대인 입장에서 그렇게 오래 탈 물건이 못 된다.
오랜만에 꽤 장기간 마차를 탄 시준은 녹초가 되었다. 그는 잠시 쉬자고 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길가에 걸린 현수막이었다.
<인민이 개척한 북방, 인민의 손으로 지키자!>
<영원한 주석 동지의 유훈(遺訓) 외길 따라 앞으로! 북으로 떨쳐 나서라, 인민들이여!>
<삼봉도(블라디보스토크)에는 강마다 금이 넘친다. 혁명의 신심만큼 사금(砂金)을 양손에 쥐어 보라! 덕원부(원산) 포구에 달려오는 순서대로 모집한다!>
시준은 후련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압록강이 진짜 머지않은 모양인데.”
그 현수막은 걸린 지 꽤 지난 듯 빛이 바랜 것도 있었다.
허나 그것들이 외치는 사업이 워낙 장기 사업이기에 여전히 걷지 않은 듯했다.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뭘 막 버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니까.
작년부터 시작된 만주 이주 사업은 3기 총선거가 끝난 지금도 연속 과업으로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시준의 임기 막판까지 (대부분 상조농장 소속인) 수만 호가 이주에 나섰고 앞으로는 더욱 늘어날 것 같았다.
왜 가정형인가 하면, 더 이상 시준은 공식적으로 공화국 국무당의 보고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시준은 이제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주석도, 혁명군의 총사령이나 혁명재판소장도 아니었다.
***
정치국 위원을 이해시키는 것은 첫걸음일 뿐이었다. 시준의 3기 총선거 출마 거부에는 당연히 많은 반발이 있었다.
심지어 ‘반동분자의 모략책동’이 끼어든 게 분명하다며 혁명군의 총궐기와 평양 진군을 부르짖던 이제초 같은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
이는 이제초와 시준의 독대로 간신히 해결되었다. 군에 안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없는 이제초는 시준에게 청해 스스로 총정치국장에서 파면되고 스스로 교화소에 걸어 들어가 복무했다. 주석 동지가 도술을 써서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부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외에도 죽은 정약전이나 물러난 정약용 등, 시준과의 개인적 인연으로 국무당에 복무하던 많은 사람들이 사임했다. 공화국은 이러다 나라가 망하겠다는 걱정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시준의 1년은 헛되지 않았다.
상임위원회를 사실상 이끌어 오던 김창시라든지, 이제 은퇴한 차형기 대신 혁명무력부장에 오른 남공철이나 이제초의 사임을 계기로 군에서 나와 혁명재판소에 자리 잡은 이광로 등은 ‘주석 동지의 혁명 적자(嫡子)’라는 간판을 달고 인민에게 선임되었다.
가장 중요한 국가의 대표, 즉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김창시로 뽑혔으니 중심은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준에게 있어 가장 빈도 높은 직책이었던 국무당 주석의 경우는 순탄하지 않았다.
본래 시준은 정치국에 남아 있는 인물 중 제일 고참이며 능력도 믿을 만한 공장영선부장 서유구를 정약전 후임 총괄서결부장에 앉힌 다음 팍팍 밀어 주었다.
그러나 중앙인민회의에서는 아쉽게도 찬반 격론이 벌어졌다. 서유구 역시 주석 자리를 고사했다.
서유구도 물론 공장영선부장으로서 다대한 기여를 해 왔다. 당장 시준이 타고 있는 마차와 도로가 그렇다.
허나 시준이 급하게 밀어주기에는 전쟁영웅인 남공철, 원로 혁명가 김창시, 광기의 정치장교 이광로 등에 비해 경험이나 인상 면에서 하나씩 모자랐다. 정치는 임팩트가 중요하다.
결국 타협된 결과는 서유구가 총괄서결부장으로서 재무이용부장(財務利用副長, 총괄서결부의 재정기능이 분리되었다)이나 혁명무력부장 등 핵심 인사들과 함께 정치국 회의를 ‘대리 주재’한다는 것이었다.
누굴 대리한다는 것이냐? 물론 인민을 대리한다.
그리고 공화국에서 인민과 동치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꼽으라면 그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정시준 동지께서 혁명에 이룬 공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오. 무엇보다 한없는 공을 이룬 다음 상응하는 경모를 받기도 전에 스스로 물러나셔서, 성인의 기풍을 보이고 수평도의 극의를 이신작칙하신 그 엄숙함은 한없이 부끄러움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오이다.”
3기 1차 정치국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맡은 총괄서결부장 서유구의 말이었다.
“반동의 예법이긴 하나 예로부터 공이 높은 임금은 불천위(不遷位)에 모시고 지금도 자식은 부모의 휘를 범하지 않소. 이제부터 공화국에는 위대한 정시준 주석 동지와 같은 열에 설 자가 없으리니, 정치국에서 중임을 맡은 동지들을 상무위원(常務委員)으로 하고 그들이 함께 주석의 대리로 회의를 집전할 것이외다.”
어디서 많이 보던 과두 체제였다. 따라서 시준이 떠맡아야 할 이름도 정해져 있었다.
정치국 상무위원 서유구는 힘있게 선언했다.
“정시준 주석 동지를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고, 우리는 그저 그 유훈을 따를 뿐이오!”
이 선언은 열광적 반응을 얻었다.
김창시는 즉시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자임하였으며, 혁명군에도 총사령이란 직위는 영구 결번으로 남았다. 혁명재판소 역시 (수석이 아닌) 차석판관 이광로를 필두로 하는 평의체가 되었다.
이제부터 공화국은 그들의 알량한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위대한 영도자 정시준 동지의 유훈통치로 다스려진다.
유훈이란 말과 달리 시준이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만약 죽었으면 정말로 미라를 만들어 앉혀 놨을지도 몰랐다.
명백한 가능성이었다. 이제 상하이와 타이완에서 얌전히 (마약) 장사하는 영국 사람들과의 교우도 완전히 익숙해진지라 공화국에는 이집트에 대한 지식도 퍼져 있었다.
시준은 진저리를 치며 주석당에서 짐을 챙겨 도망쳐 나왔다.
물론, 정치국 상무위원 누구도 그 사무실을 자기가 쓰겠다는 간 큰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시준이 쓰던 집무실은 ‘혁명사적’으로 정중히 보존되었다. 팻말이 세워지고 사람의 출입이 엄금되었다.
***
시준은 그때를 떠올리며 툴툴거렸다.
“그 난리를 쳤지만, 결국 다들 잘하고 있잖아.”
“뭐라고 중얼거리니? 명주 요강도 비웠어. 아버지 찾으니까 허리 좀 폈으면 빨리 들어와 봐.”
마차 안에서 지유와 명주가 뭔가 승강이를 벌이는 듯한 기척이 났다.
명주가 또 프랑스에서 가져온 ‘혁명작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양이었다. 칼날을 내리고 나서 그걸 원래대로 올려 고정하려면 어른의 손이 필요하다.
“아버지! 아버지! 빨리 와요! 이거 해 줘요!”
시준은 짐짓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무튼 그는 공화국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핑계에 불과했지만,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랏일’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외국이었다.
조지당 일을 얼기설기 타협한 영국은 전투종족 시크교도와의 갈등으로 정신이 없다. 게다가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은 극도로 축소되었다.
러시아 또한 아직은 고려와 싸울 이유도 능력도 없기에, 주 고려 공사 레온티 베니그센 역시 중국과의 국경선 획정에 집중했다.
따라서 지금 공화국이 혼란에 빠졌을 경우, 가장 걱정되는 나라는 중국과 일본이다.
다행히 두 나라 모두 시준의 퇴임 이후 기회를 노리고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자롱 황제는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혈투 끝에 인민해방군을 격퇴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특별히 이렇다 할 성과를 얻지 못한 임칙서는 오족 중화 연방의 성립을 남겨두고 정치적 도전에 직면했다.
정시준의 퇴임은 그 도전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북두의 정시준도 수평을 지키기 위해 물러났는데, 임칙서 동지는 언제까지 공도 없이 중화 혁명당 중앙위원장을 계속 하고 있을 셈인가?’
물론 임칙서의 공도 작지 않으므로 그런 의견은 소수였다. 허나 고려를 침공하자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했다. 송주령도 씁쓸하게 그 점을 인정하고 함부로 모험을 하지는 않았다.
베트남이라고 팔자 편할 리는 없다.
자롱 황제는 도저히 자기가 이겼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인민해방군은 결국 물러나야 했으나, 베트남 북부는 쑥대밭이 되었다.
교환비가 설사 10대 1이라도 우리가 천 명 있고 상대가 열 명 있다면 이쪽 승리다. 그게 대륙 방식이었다.
자롱 황제는 보복성으로 최강 베트남 해군을 출동시켰으나 그도 헛짓이었다.
아직 도광제의 국토 연성진은 완전히 복구되지 않았다. 베트남 해군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땅에서 헤매다가 돌아와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피폐한 백성들의 생활은 완전히 망가졌다. 가까운 나라인 중국, 고려, 유구가 차례차례 혁명화하는 것을 본 베트남 사람들은 당연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거 혹시 우리가 비정상인 거 아냐?’
‘세상’에서 그들만이 군주의 손가락질 하나에 가축처럼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사방에서 한층 격화된 반란은 수상할 정도로 정교하고 조직적으로 발전했다. 마치 누군가가 몰래 교본과 무기를 전해주는 듯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강철군주의 전례를 밟을 것이 분명했다. 하긴 이 동네에서 서양 문물 가까이한 군주는 대체로 끝이 좋지 않았다. 자롱 황제는 화들짝 놀라 여기저기 불을 끄러 다녔다.
일본의 경우는 의외로 조용했다.
일본 사람 대부분은 애초에 정시준 퇴임이 고려의 위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흑막으로서 뒤에 서서 후임자를 책임 없이 조종하려는 게 뻔하지 않은가.
일본인들은 친숙함마저 느꼈다. 시게히데가 죽고 나자 사쓰마가 문가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도 안 들리니 에도 막부는 태평성대였다.
문제가 있다면 고려가 ‘러시아의 앞잡이가 되어’ 제멋대로 나눠 먹은 사할린인데, 거길 탈환할 해군력이 막부에 있었으면 애초에 영국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은 시간이 필요했다. 막부는 러시아와 조심스럽게 교섭에 나서며 동시에 해군을 모아 보는 한편, 마츠마에 번에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사고 못 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마츠마에 번은 막부가 번신을 안 지켜준다고 목놓아 울며 자꾸 사쓰마 시즌 2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사쓰마 때문에 손해 본 게 얼만지 생각하면 경솔한 행동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일본도 침묵을 지키는 쪽이었다.
***
그렇게 국내와 국외 상황까지 다 고민하였건만, 마차 안의 재촉은 가라앉기는커녕 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시준은 포기하고 안으로 들어가 명주를 달랬다.
아기를 안아 본 사람이면 알지만 아기의 체온은 체감상 꽤 높다. 따끈따끈한 아기를 안고 달래다 같이 잠이 드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지유는 명주를 넘기고 얼마 안 가 졸기 시작했다. 마차 여행에 피로했던 시준도 마찬가지였다.
명주가 잠들자 시준 역시 더 저항할 수가 없었다. 사소한 소란으로는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만한 졸음기가 덮쳐 왔다.
그리고 시준은 약 30년에 해당하는 경악을 겪게 되었다.
***
낯이 익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어쨌든 30년 전 시준은 ‘그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분명히 보기는 봤다. 그래서 시준은 간신히 적당한 말을 꺼내 놓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관리자’는 자기가 해 줄 만큼 민원인에게 해 줬을 때의 공무원 특유의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시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 반갑습니다. 복지가 만족스러우셨던 모양입니다. 한 번도 민원 문의가 없었거든요.”
시준은 그제야 ‘관리자’가 헤어질 때 ‘불편 사항은 문의 주시면’ 어쩌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 자기가 했던 생각도.
“어떻게? 방법만 알았다면 당장 했을 겁니다. 대체 어떻게 문의를 한다는 겁니까?”
“음? 모르셨습니까?”
“알 거라고 생각한 게 어이가 없군요! 전화가 있어요, 아니면 인터넷이 있어요? 왜 사람을 이상한 데 떨궈 놔서 개고생을 하게…….”
대한민국의 김시준으로 돌아간 그는 거기까지 외치다가 숨을 멈추었다.
그의 옆에는, 그리고 이 마차가 가는 곳에는 지금 그가 고려인민공화국의 정시준이라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시준이 무슨 고생을 했건, 그건 ‘개고생’이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큰 보상을 그에게 주었던 것이다.
“아니, 어쨌든 케어를 해 주려면 끝까지 똑바로 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시준의 민첩성과 상황 대응력은 이 30년의 파란만장한 경험 동안 크게 늘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교섭을 시도하면서, 시준은 또다시 복지 혜택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경우를 대비했다. 그 정도 보상은 있어야 한다.
‘이번에는 별 쓸데도 없는 서바이벌 능력 대신에……. 그래. 함선이나 무기 설계 능력을 달라고 할까? 자원 탐광이나 런던 주식 시세 예측은? 아니, 아니. 아예 그런 지식이 전부 담겨 있는 컴퓨터나…… 그래. 나노머신 같은 걸로 하면 어떨까. 환생도 되는데 안 될 게 뭐야. 이런 멍청이! 진작 그런 쉬운 치트키를 선택했다면 훨씬 편했을 텐데!’
그러나 공무원 한 지가 너무 오래돼서 시준도 잊어버린 게 있었다.
그도 지금 수많은 진상 민원인처럼 자신의 가능성을 과신하고 있었다.
관리자는 새로운 능력 따윌 제안하는 대신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정말 그립기까지 한 A4용지였다.
“이게 뭡니까?”
“중간 만족도 조사입니다. 하도 연락이 없으셔서 점검하러 왔습니다. 설정 실수야 어쨌든 당신이 받은 업만큼 반작용이 있지 않으면 곤란하니까요. 여기에 좀 체크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능력 같은 거 물 건너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시준은 으르렁대며 관리자가 건네주는 사인펜을 – 이것도 정말 그리운 물건이었다 – 검처럼 빼들었다.
선택지는 시준도 잘 아는 5단계 리커트 척도였다. 무조건 ‘매우 불만족’에 체크해서 4분기 성과평가를 개판으로 만들어 줄 작정이었다.
민원인들의 착각과 달리 그들의 악평이 공무원에게 치명적이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매우 귀찮아지기는 한다. 시준은 잘 안다. 이렇게까지 일처리를 잘못했으면 이 정도는 당해도 싸다.
‘멍청한 놈들. 민원 만족도 질문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하나만 만들면 어떻게 하냐.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질문을 만들어야 한쪽에서 만족도 말아먹어도 다른 데에서 선방하지. 기본이 안 돼 있어, 기본이. 이래서야 악의에 가득 찬 민원인들 상대로 살아남겠냐.’
그 와중에도 저놈들의 일머리를 비웃던 시준의 손은, 그러나 막 체크를 하기 직전 멈추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했다.
시준은 다시 손을 들었다.
잠시 후, 시준이 종이를 돌려주자 관리자는 고개를 숙였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완벽한 작별의 말이었다. 시준은 놀라서 화들짝 일어났다.
“이봐요. 잠깐. 그 연락처는 알려 주고……!”
그러나 내뻗은 시준의 손에 걸린 것은 관리자의 멱살이 아니었다.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깬 시준은 자기 손에 부러진 마차 문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을 보고 침을 삼켰다.
시준은 아마도 상황 분석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자주 쓰였을지도 모르는 말을 중얼거렸다.
“꿈인가?”
다행히 꿈결에 팔을 휘둘러 명주를 다치게 하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명주는 그의 품에서 어느새 빠져나와 의자 한쪽에 기댄 채 잘 잠들어 있었다. 지유는 처음 그대로였다.
주변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자, 그제야 시준의 귀에 외부의 자극이 접수되었다. 마차 밖에서 두런두런하는 말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왜 안 내려?”
“어, 잠시만요. 회장 동지. 안에서 곤히 잠드시기라도 하셨나 보오이다. 제가 열어 보지요.”
시준은 튕겨나가는 것처럼 조선 사람으로 돌아왔다. 기랑이야 괜찮지만 외간 남자인 마부에게 자는 처자식을 내보인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시준은 일단 목소리부터 내보냈다.
“이제 깼어. 내릴 테니까 기다려.”
***
마차의 목적지는 시준과 기랑, 지유 모두의 고향인 의주였다.
‘영원한 주석’이라도 고향에서는 또 다른 의미인지라, 인파에 둘러싸인다거나 환호를 받지 않고도 평화를 즐길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그렇게 의주 한가운데를 천천히 걸었다.
명주가 있는데 왜 세 사람인가 하면, 명주는 기랑의 팔과 시준의 팔을 한쪽씩 잡은 채 땅에 거의 발을 딛지 않고 있어 걷는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깔깔대는 것을 보니 신나는 것 같았다. 동생 보러 가는 길이라 더 그런지도 몰랐다.
기랑은 ‘어머니! 나 그거 해 줘요!’라고 안기는 명주를 높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시준을 돌아보았다.
“주석 자리 물러나더니 아주 늘어졌네. 누가 와서 목이라도 따면 어떡해?”
가족이 다 모일 때마다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시준은 ‘야, 애가 듣는데 목이 어쩌고가 다 무슨 소리냐. 세상 사람이 다 너 같은 줄 아냐. 너도 애 엄마면서 왜 그러냐?’ 라고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준은 비겁하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그거야 뭐…… 계룡(鷄龍)이는 어디 두고 왔어?”
“홍 장주 댁에서 사람들이 봐 주고 있어. 거기서 기다리다가 안 오길래 나와 본 거야.”
“그, 그래. 어서 가자.”
홍 장주는 작년에 타계했다. 지금 집안은 남아 있는 식솔들이 그럭저럭 꾸려 가고 있었다.
원래부터 세가 대단했고 시준 덕분에 더 대단해진 집안이라 살림에는 무리가 없어 보였다.
반가운 사람들에게 대강 인사를 마치고 나자, 세 사람은 명주가 계룡이를 어르도록 내버려 둔 채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셋 모두 여기서 태어난 건 아니다. 시준과 지유는 의주 출신이긴 하지만 다른 데서 났다가 고아가 되어 거두어진 것이고, 기랑의 경우는 아예 의주 태생이 아니다.
하지만 세 사람의 고향은 의주이고, 이 집이었다.
여기에서 그들의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니까.
대구를 맞추려면 여기에서 모든 것이 끝나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시준은 이제 모두 끝났다는 식의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한참 그렇게 있다가, 지유가 문득 말했다.
“진이 빠져서 좀 앉아 있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해가 지겠는걸. 오늘 희만당에도 가야 하잖아?”
향수에 잠겨 있던 시준과 기랑 역시 퍼뜩 눈을 들었다.
혁명에 끝이 없듯, 인생도 끝이 없다.
하나의 장절(章節)이 분리될 수는 있어도 책을 덮을 때는 죽음이 모두를 갈라놓은 후다. 죽기 전까지는 앞으로 걸을 수밖에 없다.
세 사람은 다음 장으로 책을 넘기기 위해 일어났다.
곧 작별하고 나오는 다섯 명의 가족 사이에서는 활기찬 대화가 다시 오갔다.
기랑이 웬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맞아. 선생님이 거기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제자들이 밭과 지붕을 안 보살펴서 폐허가 되어 버렸다고 무척 나무라던데.”
그러자 시준이 툴툴대었다.
“보살필 제자들이 죄다 국무당 나가 있었는데 어쩔 수 있나. 그것도 10년이나 지났잖아. 부참모장 동지…… 백 사제에게 희만당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봤더니 얼굴이 아주 백짓장처럼 허옇게 질리더라. 다들 새까맣게 잊어버린 거지, 뭐.”
지유 역시 고향 사람인 백윤구는 잘 안다. 그녀는 까르르 웃었다.
“아하하! 그것참. 다들 그러면서도 그 번잡한 국무는 어떻게 했나 몰라.”
“남의 일이 아냐. 너희는 여전히 하고 있잖아?”
“어머. 너야말로 남의 일이 아니란다. 사내가 되어서 아낙들만 일 시킨 채 놀고먹지는 않겠지? 이제부터는 나랏일 핑계도 못 대니, 어릴 때부터 노래를 부르던 대로 한 재산 좋이 벌어 와야 한다.”
“여기서 더?”
“어쩔 수 없잖아. 네가 혁명을 해서 세상을 터 버렸으니까. 예전처럼 쌀가마만 쌓여 있으면 배부르질 못 해.”
“기랑이 너까지 언제 그렇게 됐냐……. 아무튼 서두르자. 벌써 땅거미가 진다.”
과연 그림자가 동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에서는 사람 하나하나를 따로따로 떼어 볼 수 없었다.
황혼의 빛을 받은 그림자는 한데 뭉쳐서 계속 우쭐대며 뒤바뀌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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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영길리시발차는 120화에 나왔던 공화국의 첫 유럽식 마차입니다.
2. 블라디보스토크 주변 강가에서는 실제로 사금이 채취됩니다. 이는 부동항과 함께 연해주의 이권이 첨예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3. 프랑스에서는 단두대 장난감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들어갈 크기였는데 그 시대에 안전 따윈 고려되지 않았는지라 다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지요.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의 이야기가 막을 내렸습니다. 정말 취향이 아닌데 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시준이만 겪은 이야기도 아니었겠군요. 연재 후 첫 주말 업로드인 것 같은데, 지루함을 달래는 의외의 작은 선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2부의 예정은 아직 없습니다만, 시준의 인생이라는 책도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또 다른 외전격 이야기가 있으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그간 이 이야기를 하는 데 같이 고생해 주신 편집부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신 주변인들, 무엇보다 긴 글 끝까지 따라와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언젠가 또 다른 이야기에서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