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80화 (280/284)

280화

94. 혁명의 뒤편(2)

시준은 결국 상투적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소?”

“지도가 별로 아름답지 못해 보인다고 했소.”

“아니, 그 뒤에 하신 말씀 말이오.”

임칙서는 태연히 대답했다.

“고려가 이대로 봉천(현대의 요녕성), 길림, 흑룡강의 3성만을 취한다면 여기…… 흑룡강성 남쪽 복규(卜奎, 현대의 치치하얼 시)부터 봉천성 성경에 이르기까지의 동쪽으로 움푹 들어간 부분은 공화국에게 있어 근심이 될 것이오. 아예 여기까지 가져가시지요.”

임칙서가 무슨 건어물 떨이해 주듯 가리킨 곳은, 그의 말마따나 고려인민공화국 신규 획득 영토의 옆구리를 잘라먹고 들어오는 듯한 땅이었다.

현대로 치면 유전도시로 유명한 다칭[大慶] 시가 있는 곳이다.

시준이 여기를 굳이 달라고 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다칭 유전에 대해 모른다는 것 말고도 또 있었다.

“거긴 오이라트 사람들이 사냥하는 땅 아니오. 여진족의 것이 아니라 오족의 하나인 몽골족의 것인데, 위원장께서 물론 오족의 총의를 대표하신다지만 그리 인민의 삶터를 뭉텅 떼어주어도 되겠소?”

이곳은 청의 행정구역 기준으로 볼 때 내몽고 동부로서, 동삼성과는 별개의 지역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여진을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만주를 삼킨 고려가 여기까지 탐낼 명분은 없다.

별로 탐내고 싶지도 않았다.

현대에 와서야 유전 터져 대박 친 거지, 그 전에는 습지와 초원뿐이라 고대부터 근대까지 자연의 신비 이상의 가치는 없었다. 시준의 말마따나 주로 사냥터로 쓰이던 땅이다.

그리고 시준 같은 한국의 일반인은 남의 나라 유전 위치까지 외우고 있기에는 너무 먹고 살기 바쁘다.

시준의 한계는 ‘만주 어딘가에 유전이 있다던데’ 정도다. 이것만 해도 진짜 많이 아는 편이다. 어차피 시추하려면 자기 죽은 뒤라 관심도 크게 두지 않았다.

반면 그 땅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는 관심이 있었다.

임칙서가 무슨 자선 사업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래서 시준은 거절했다.

다만 그는 주석이니까 ‘그깟 똥땅은 필요 없고’ 대신 좀 더 점잖은 어휘를 택해야 했다.

“날이 춥고 오곡이 자라지 않는 곳이라, 농사를 생업으로 하는 우리 공화국 인민에게는 낯설 듯하오. 그러나 몽고족에게는 양을 치고 말을 달리며 살아갈 땅이겠지. 위원장 동지께서 생각해 주시는 것은 고맙지만, 그것을 빼앗는 일은 혁명의 본의가 아니오.”

시준이 경계하며 물러나자 임칙서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내 터놓고 말하겠소. 주석 동지께서도 아시다시피 내몽고 부락들은 만주 팔기병과 함께 끝까지 반동의 편에 서서 인민을 괴롭혔소. 그런데 지금 사방의 도적 떼를 진멸하고 인민의 생업을 장려하려면 계속 전쟁만 하기는 어렵소이다. 이번 산해관 정벌로 또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소.”

‘몰수될 반동의 땅’은 만주만이 아니었다.

외몽골은 중화 혁명당에 협조했지만 청과 혼맥 등으로 연결이 긴밀한 내몽골은 반대다. 만몽 팔기의 만행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용납되기 어려웠다.

허나 그렇다고 지금 다시 군대를 돌려 그대로 내몽골을 치자니 또 곤란하다.

북경 바로 근처 산해관이라는 명확한 공격 목표가 있던 지금과 다르게, 인민해방군이 내몽골의 광대한 사막과 초원을 뒤지려면 그를 뒷받침할 보급과 행정 체계가 필요하다.

누가 봐도 비효율적인 일이다. 어차피 가치도 별로 없는 땅, 고려에 삼분지 일쯤 갈라 줌으로써 내몽골을 찢어 놓은 다음 핵심부만 제압하고 나머지의 항복을 받는 편이 훨씬 낫다.

그러나 시준은 아직도 의심스러웠다.

혁명이 일어나면 외부에 신경 쓸 여력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다.

시준은 모르지만, 1차 대전기의 소비에트 러시아는 혁명 때문에 정신없던 나머지 만주 전체에 필적하는 영토를 사인 한 방으로 날려 버렸다.

아무튼 프리드리히 때도 그렇고 전쟁 허접 독일의 최후 구원자는 항상 러시아다. 히틀러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할 때도 역사적 근거 정돈 있었던 셈이다.

허나 중화인민공화국은 너희 나라 망했는데 영토 좀 할인판매 안 하냐고 기웃대는 베트남이나 네팔 정도를 제외하면 이제 외국의 위협이 없다.

겨우 그 정도 이유로 땅을 떼어 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포기하는 것은 내몽골의 반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될 때라도 늦지는 않다.

과연 임칙서에게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그는 시준의 옆에 배석해 있던 김시택을 돌아보았다.

“그 전 여기 외사통호부 부부장 동지를 보내어 ‘하나의 중국’을 처음 전해 주실 때, 우리는 주석 동지의 뜻이 영길리와 진실로 친애하는 데에는 있지 않다고 생각했소.”

시준도 솔직하게 대답했다.

“맞소. 가능하면 여기에서 그들이 마음대로 설치게 놔두고 싶지 않소. 지금은 비록 패배했을지라도 앞으로는 더욱 강대해질 거요.”

“주석 동지의 예지라면 토를 달 수가 없군요. 사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시준은 조선에서 ‘예지’라는 말이 쓰이는 용법대로 그저 미래 예측을 잘했다는 뜻인 줄 알고 그냥 흘려 넘겼다. 그는 자기가 주술 예언자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아직 잘 몰랐다.

그리고 임칙서는 현실에서 예언을 들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택하는 길을 시도했다.

즉, 미래를 바꾸려 했다.

“그래서 말인데……. 영길리국이 여섯 개 항구에서 장사할 땅을 얻어낸 이전의 일은 저 반동의 여진족과 맺은 약속이지, 인민의 총의는 아니라고 할 것이오. 그들이 소위 ‘조약의 승계’를 관철시켜 이 중국 땅에서 도적질을 계속 일삼고, 그럼으로써 재물과 기계며 주즙을 더욱 강성하게 만들도록 놔두어선 안 되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말이 나오자, 시준은 탁상 아래에서 발가락을 꽉 오므렸다.

‘땅 주는 대신 6개 개항장의 포기를 영국에 대신 말해달라는 거구나!’

고려가 지금까지 영국과 한편, 즉 인류의 배반자라는 오명을 쓰지 않으면서도 영국을 적재적소에 잘 이용했던 후과를 치를 때가 왔다.

지금까지는 ‘영국의 협박에 못 이겨’ 핑계가 통했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 솔직히 지금까지 지나치게 책임 없는 외교적 이점만을 누려 온 게 행운이다.

고려는 영국과 중국 사이를 중재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영국에 상당히 불리한 제안이 될 것이다.

물론 공화국 쪽도 이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시준은 이강회를 보내 조지당의 의회 의석 진입과 확대를 노리고 있다(정찰총국 오리엔탈 파이터즈가 영국 기병대를 패죽였다는 사실은 모른다).

코크란 제독을 비롯한 급진파가 돌아가 그 세력에 더해지면 영국과의 협상은 꽤나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덮어쓰고 싶지 않았던 부담이었다.

시준은 일단 한 발 빼 보았다.

“영길리국이 한 번 싸움에 졌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나지 않으리라는 건 아시겠지요? 헛된 욕심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소.”

“단지 땅 때문이 아니오. 주석 동지께서도 아까 말씀하셨듯, 영길리국은 더욱 강대해질 것이고 우리는 그걸 막아야 하오이다. 세상의 패왕이 모두 영길리국을 본받는다면 세계 인민은 실로 도탄에 빠질 것이오.”

“그건 맞지만…….”

그리고 실제로 도탄에 빠지기도 하지만, 시준은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끝까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절충해 보도록 하지요. 궁한 쥐는 몰 수 없는 법이며, 하물며 저들은 쫓기는 쥐가 아니라 상처 입은 승냥이라고 할 만하오. 아무튼 영길리군에게는 북경을 쳐서 여진족 조정을 압도한 공도 있으니 무턱대고 모두 빼앗기도 어렵소.”

임칙서도 거기까지 현실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영국에 어디까지 내줄 수 있는가에 대해 합의에 들어갔다.

***

시준이 진채를 나왔을 때는 그날 밤이라기보다 다음날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산해관까지의 먼 여정에 과로까지 겹쳐지자 시준의 강건한 몸으로도 수월치가 않았다.

시준뿐만 아니라 그를 수행하던 중국 담당 외사통호부 부부장 김시택 등 여러 동료들은 더했다. 그들은 시준처럼 튼튼하지도 못한 데다 나이도 많다.

그렇게 정신이 취약해져 있었기에, 길에서 갑자기 나타난 희끄무레한 것을 보고 그들이 비이성적 공포에 사로잡힌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먼저 회복한 건 역시 복지 혜택 덕을 본 시준이었다.

시준은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기랑은 부루퉁한 얼굴로 시준에게 다가왔다.

조금 늦게야 동료들 역시 보였지만 그건 별로 주의하지 않았다. 시준의 옷매무새를 빠르게 훑어본 기랑은 곧 시준이 결백함을 알아챘다.

“지금 끝난 거야?”

“그래.”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시준은 여태 기랑이 자기에게 평대를 할 때 주위의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지금처럼.

‘이 자식들, 대체 언제부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거야?’

오해라기보다는 자기실현적 예언이라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시준의 귀에 기랑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됐어?”

글로 쓰면 그런 짧은 말이지만, 귀로 들으면 달랐다.

그건 중국과의 관계가 그저 순진한 혁명 동지애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아는 사람의 질문이었다.

그래서 시준도 그런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어.”

“지유도 봉천성 부녀회장 다 뽑았대. 의주에서 기다린다고 했어. 끝났으면 돌아가자.”

“그래. 이제 돌아가야지.”

시준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돌아갈 때가 됐다.

“눈만 좀 붙이고 해 뜨면 출발하자.”

“알았어.”

***

원 역사에서 더 맨체스터 옵저버는 세인트 피터 광장에서의 사건에 대해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피터와 워털루의 합성어로, 워털루의 그 치열한 전장과 같이 끔찍하다는 뜻이었다.

이번에도 같은 이름이 붙었지만 의미는 좀 달랐다. 워털루에서 음란군주 나폴레옹을 물리친 통쾌한 승리처럼, 맨체스터의 인민이 압제자에 대해 역전승을 거두었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번 사건의 명칭은 피털루 혁명(Peterloo Revolution)이었다.

다만 그 ‘불경한’ 이름을 붙인 더 맨체스터 옵저버의 편집자 제임스 로우(James Wroe)가 선동 혐의로 잡혀간 건 역사와 똑같았다.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특히 상대가 영국이라면 말이다.

영국 정부의 대처는 원 역사와 비슷하게 강경했다. 선거구 개혁법 따위 일곱 천사의 나팔이 불 때 의결할 태세였던 의회는 즉시 육개조법(六個條法, Six Acts)을 상정했다.

빨갱이들[Reds, 이 표현은 이제 맨체스터의 적기 때문에 생기게 되었다]의 난동 따위 용납할 수 없었다.

압제자의 발상은 어디나 비슷하다. 진시황 때 있었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자, 거리로 끌어내어 참수’에서 별다른 진보가 없는 법안이 줄줄이 마련되었다.

이제 여러 명이 모여서 뭘 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물론 법이란 게 다 그렇듯 이건 ‘빨갱이들’에게만 적용되지 빨갱이를 척결하러 일어선 민병대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잘만 훈련했다.

지역 치안판사는 누구든 자유롭게 지명하여 사유 재산을 털고 무기를 압수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범죄’에 대해서는 보석 따위 적용되지 않았다. 살인자건 강간범이건 돈만 내면 죄다 보석으로 풀어주는 영미법 관행으로 볼 때 대단한 결심이었다.

그리고 개중 영국인들을 가장 분노케 한 것은 ‘영장 없는 수색과 체포’가 가능해졌다는 점이었다.

인신 자유의 보장은 참정권보다 더 기본이 되는 민주주의의 원시적 맹아다. 이건 먼 옛날, 라이온하트가 주식이 아니라 칼날을 휘두르던 시대부터 지켜져 온 율법이다.

게다가 이들은 ‘피털루 학살’로 패배하지 않았다. ‘피털루 혁명’의 승리 기세는 강력했다.

압제에 굴복하지 않기로 맹세한 맨체스터 연합군[Manchester United]이 창설되었다. 조지당 맨체스터 지부가 중심이 된 그 조직은 바로 옛 남조선혁명당의 체계를 적극 수용한 것이었다.

집회 금지 법률 따위 무시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외쳤다.

“대헌장을 내놔라!”

“대헌장을 내놔라!”

“제임스 로우를 석방해라! 언론 탄압 중지하라!”

육개조법 중 장기적으로 가혹하게 빈민들의 목줄을 조르는 것은 체포나 사살이 아니라 언론법이다.

더 맨체스터 옵저버를 포함한 ‘불온한 선전물’에 대한 엄청난 세금 부과로 ‘거렁뱅이들이 쓸데없는 말에 현혹되지 않게’ 하는 법은 혁명의 토양 자체를 말려 죽이려는 시도였다.

다행히 더 맨체스터 옵저버는 해당되지 않았다. 정약용은 헨리 헌트와 맺은 약속을 지켰고, ‘광고비 수익’은 충실하게 신문을 지탱했다.

튼튼한 재정 구조를 가진 기업의 미래는 항상 밝은 법이다. 그들은 영국 정부가 원한에 차 매겨대는 세금에도 불구하고 신문을 저렴하게 팔았다.

얼마 안 가 런던의 정책 결정자들은 자신이 오히려 영국 급진파 신문들의 지분만 넓혀 주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른 신문은 다 비실대는데 그 신문들만 싸게 판매되고 있었으니 당연하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꺾이면 영국 정부가 아니다. 그들은 인도와 영국에 수평하게 적용되는 감탄할 평등을 보여주었다.

군대가 각지에 파견되었다. 그들은 시위대에 대포를 쏘고 총칼로 쑤시며 기병으로 짓밟았다. 안타깝게도 모든 곳에서 혁명이 이기는 건 아니었다.

이 빈민층 중에는 나폴레옹 전쟁의 베테랑도 꽤 많았지만, 그들 역시 유럽에서의 그 전장보다 현재의 잉글랜드가 더 끔찍하다고 할 정도였다.

학살, 학살, 학살의 연속이었다. 죽은 사람의 몇 배나 되는 숫자가 카리브행 노예와 같은 방식으로 배에 선적되어 호주로 추방되었다.

무엇이 꺼려지겠는가? 세금도 낼 수 없고, 투표권이 있는 자들도 아닌데 말이다. 그들의 목숨은 아무 가치도 없었다.

확실히 5년 전이었다면 그 명제에 빈민 자신들조차 동의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생지당권은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으로 가져야 하는 권리이고, 이것을 빼앗겼다면 당연히 탈환해야 했다.

지금까지 구호소 삐라 등을 통해 티 안 나게 스며들었던 수평도는 맨체스터, 리버풀, 브리스톨, 런던 곳곳에서 폭발했다.

“사람은 물처럼 평등하다!”

“투표권을 내놔라! 의석을 내놔라!”

“위대한 예언자 정시준 만세!”

그리고 좀 실제적인 의미의 폭발도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내년에야 발생할 내각 폭탄 테러는 누군가의 선의에 의해 폭약을 지원받은 조지당의 활약으로 앞당겨졌다.

내각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은 ‘모종의 사유’로 취소되었지만 표적 자체는 더 다양해졌다. 여러 저택과 민병대 본부, 치안판사의 사무실이 혁명적으로 터져나갔다.

가혹한 탄압에도 영국인들이 본래 역사처럼 꼬리를 내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육개조법이 영국 내 피지배층에게 커다란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모든 혁명의 배경은 다양하지만 직접적으로 불꽃을 튕기는 원인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냥 죽는다.’

원래 역사에서 급진파가 내각에 폭약을 매설한다는 가이 포크스 같은 계획을 떠올렸던 이유와 같다.

그들은 목숨의 절박함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동시에 잃을 건 목숨뿐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더 긍정적인 것이었다.

영국은 이제 승전국이 아니다. 가만히만 있으면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련만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다가 방금 참혹하게 얻어터지고 온 참이다.

그것도 동아시아의 미개국에게 당했다. 무적 불패를 자랑하는 영국 해군이 말이다.

지금 세인트헬레나에서 시들어가는 나폴레옹이 이 소식을 들으면 위암조차 씻은 듯이 나을 만한 소식이었다.

더 타임스나 더 맨체스터 옵저버를 통해 들어오는 보도자료는 ‘중국군이 가진 예상외의 강력함’을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유럽인은 한 가지 의문을 자연스레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고려는 왜 이겼는데?’

‘러시아 타타르족은 2천 명으로 해낸 일을 영국군은 2만 명으로 실패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영국군이 바보라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청조는 멸망시켰지 않느냐는 동인도 회사의 처절한 변명은 먹히지 않았다.

사람들의 반응은 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하느냐는 차가운 한마디였다.

나는 상대가 비록 초등학생일지라도 최선을 다한다고 나불대는 칼잡이까지는 그럭저럭 봐 넘겨 줄 수 있지만, 그러다가 정말 초등학생과 동귀어진해 버린 놈이 있다면 당장 그 바닥 떠야 하는 것이다.

영국군은 이제 군대가 가장 받아서는 안 되는 평가를, 다름 아닌 자국 국민에게 받고 말았다.

‘뭐지? 사실 좆밥이었나?’

싸움도 못 하는 등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 영국인 중 조상이 해적 아닌 자는 없다. 명문 해적가문의 이름에 걸고 그런 수치를 무릅써서는 안 된다.

해적은 상종 못 할 범죄자이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영국 각지에서 들끓는 해적왕들이 위대한 혁명의 항로를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

외무장관 로버트 스튜어트는 결단을 내렸다.

자기 머리에 총 쏘겠다는 결단은 아니다.

지금 영국이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이 파국은, 극동에서의 패배와 내부에서의 반란이라는 두 가지 사건이 중첩되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둘 중 하나를 해결하고 나머지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스튜어트는 자신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거기에서 그가 항상 갖고 다니던 권총이 툭 떨어졌다. 그 권총을 집어 들어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 당기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대단한 정신력이 필요했다.

정약용은 이때까지 고려에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인수인계 문제도 있고, 이강회가 부드럽게 일을 마무리하려면 윌리엄 자딘 말고도 비공식적으로 활동할 창구가 필요했다.

이강회도 나름대로 화이트스 클럽 정규 회원씩이나 되는 만큼 영국에서의 인맥이라면 꽤 있으나, 그건 주로 주식쟁이들과의 교우였다.

왕 첸 리딩방 사업에만 미쳐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따라서 정약용처럼 사회에 영향을 미칠 고관들과의 인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정약용 역시 제자의 불민함을 한탄하며 공사관에 머무른 채였다.

그는 뭔가를 잔뜩 안고 들어오는 문순득을 보고 혀를 찼다.

“우리 공화국 얘기 나온 것만 갖고 오라고 했잖나. 동지. 사람 미련하기는.”

“이게 전부 그 얘깁니다, 외사통호부장 동지! 거기 앉아 계시지만 말고 좀 받아 주십쇼!”

수평도의 기수 정약용이니만큼 문순득이 직장 상사를 나무라는 것에 대해서는 힐책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놀라서 일어나 그 종이 뭉치를 받았다.

과연 문순득의 말은 사실이었다.

더 타임스나 더 맨체스터 옵저버는 물론이요, 스코틀랜드의 급진 계몽주의 잡지인 『에든버러 리뷰(Edinburgh Review)』라든지 보수파 언론인 『더 쿼틀리 리뷰(The Quarterly Review)』도 있고 심지어 프랑스와 독일 신문까지 있었다.

“이게 전부 우리 얘기라고? 혹시 공화국이 의심받는다든가 하는 낌새는 없던가?”

그러면 곤란하다. 공식적으로 고려인민공화국은 조지당과 어떤 관계도 없어야 했다. 영국인이 수평도를 배워 가든 말든 그건 조지들의 자발적 혁명이지 결코 뒤에서 조종한 게 아니다.

원래 극기복례라. 지극한 도는 가만히 있어도 천하를 절로 귀부하게 하는 법이다. 정시준의 등불에 이끌린 인민들의 자발적 혁명을 우리가 어떡하겠는가.

그게 현재 고려의 공식 입장이었다.

허나 문순득은 고개를 저었다.

“전쟁 얘기가 거지반이고, 공화국은 곁들여 논하는 것이 많소이다. 다 보고 추릴 시간이 없어 우선 보이는 대로 가져왔습니다.”

“흐음…… 자작(캐슬레이 자작 로버트)과의 자리가 곧 있는데.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만날 수야 없으니, 공사 동지를 급히 오라고 하게.”

아직도 제 버릇 못 버리고 부임 인사한다는 핑계로 런던 증권거래소 가 있던 이강회가 끌려왔다.

볼이 부은 이강회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유럽 전역에서 혁명적으로 유명해지고 있는 정시준과 공화국의 기사를 하나하나 검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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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아무래도 280화로 딱 끝나면 저도 독자분들도 서운하지요. 아직 약간 남았습니다.

1. 청대의 중국 행정구역은 현대와 좀 다릅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현대 헤이룽장성(흑룡강성)의 동부 대부분을 길림성이 먹고 있었고, 흑룡강성은 서쪽으로 현대보다 훨씬 길어 현대의 네이멍구(내몽고)자치구 동북 대부분을 차지했죠.

이렇게 되면 동삼성은 가운데에 내몽고 지역 일부분을 쑥 들어오게 한 ⊃자 모양 경계를 가지게 됩니다. 바로 그곳 인근에 (현대에는 흑룡강성 소속인) 다칭 시 일대가 일부 속해 있고, 이번에 임칙서가 넘겨주기로 한 곳은 그곳이지요. 세부 사항은 약간 다릅니다만 현대 기준으로 후룬베이얼-치치하얼-퉁랴오(통료)-차오양(조양)-산해관을 잇는 선 동쪽은 공화국의 영역이라고 보시면 무리가 없습니다.

2. 독일은 프리드리히 2세 때(프로이센입니다)도 전쟁에서 패배해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러시아가 갑자기 전쟁을 멈추고 강화하여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적이 있습니다. 1차 대전 때도 서부전선이 매우 위급했지만,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독일에게 기적적 찬스가 다시 돌아오죠.

물론 두 번이나 그렇게 잘 풀리긴 힘들어서, 동부전선 병력을 서부로 돌린 보람도 없이 독일은 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전쟁(2차 대전)에서는 러시아가 제대로 각 잡고 싸우는 바람에 그럴 기회도 없이 또 집니다.

3. 영국 정부는 이전에도 설명되었지만 피털루 학살 이후 전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작중 나온 조치들은 모두 실제로 실현된 것입니다. 탄압의 참혹함이 워털루 전투보다 잔인했다고 한 말도 당대에 귀환병 출신으로 시위 참가한 사람의 증언입니다.

다만 사람을 배에 노예무역처럼 차곡차곡 실어 호주로 보낸 건, 딱히 시위자에 대한 증오 때문이 아니라 원래 호주로 범죄자 보내는 방식이 이랬습니다. 백인이라고 딱히 배겨날 재주는 없어서 거의 대부분이 죽었죠. 이게 개선된 건 동인도 회사에게 하청을 맡기는 과정에서 생존자 수대로 요금을 계산해 주고 나서입니다.

4. 가이 포크스는 제임스 1세의 성공회 정책에 대항하던 극단주의 가톨릭 인사로서, 시절 궁정 밑에 폭약을 묻었다가 터뜨려 왕가를 날려버릴 계획을 꾸민 사람입니다. 실패하고 처형되지만 후에 저항자의 상징으로 유명해지게 되죠. 1820년의 내각 폭탄 암살 모의 사건도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5. 식스 액트는 실제 있던 법이지만 육개조법이라는 번역은 자의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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