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79화 (279/284)

279화

94. 혁명의 뒤편(1)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재판은 대체로 고려와 비슷했다.

다만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달랐다.

이유를 말하자면, ‘혁명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직 구체적으로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준에게 철학적 소양이 있던 것도 아니었거니와, 푸셰나 정약용 같은 사람들이 애는 썼지만 이런 종류의 발전은 기술이라든지 무력과는 다르게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반봉건과 생지당권에 대한 학문적 담론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해하기 쉬운 경제적 평등과 참정권 보장 같은 실제적 사안이 혁명의 중심이었다.

그것을 발동시키는 감정과 사상의 공감대는 나라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화의 경우, 그것은 역시 협(俠)에 기반한다.

지금 인민해방군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염군도 본래 종교결사, 다시 말해 협의 집단이다.

그리고 협이란 본래 썩어빠진 법과 공권력이 해결해 줄 수 없는 민초의 억울함을 사적으로 풀어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1세기 말로 하면, 그들의 행동 철학은 ‘사이다’에 있다.

그리고 사이다가 시원하려면 그 전에 고구마도 좀 먹어 줘야 한다. 임칙서는 그 점을 잘 아는 위원장이었다.

동지들 앞에 선 임칙서는 여진족이 인민에 대해 저지른 범죄를 먼저 준엄하게 나열했다.

“옛날 저들이 이 산해관을 넘어 중원에 들어왔을 때, 다탁(多鐸, 누르하치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도도를 말한다) 등 반동의 끄나풀은 양주와 가정에서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인민 수십만을 참혹하게 죽인 다음 그것을 자랑스레 전공이랍시고 선포했다.”

청의 한족 대학살을 좀 수상할 정도로 세세히 기록한『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나 『가정도성기략(嘉定屠城紀略)』 같은 책은 아직 역사에 등장할 때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의 존재 여부나 진위 정도와 관계없이, 그러한 서적이 젊은 시절의 량 치차오[梁啓超]를 비롯한 청말 배만(排滿) 혁명가들의 피를 끓게 했던 바로 그 과정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한족만의 원한이 아니었다.

“홍리(弘曆, 건륭제)는 자기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몽골 좌익(준가르)의 씨를 아예 말려 지금은 후손조차 찾을 수 없다. 신강(新疆)의 회족(위구르)과 이주 사람들 역시 억울하게 죽어, 그 원통한 곡소리가 사방에 울리고 뼈와 살은 땅과 강을 덮었다. 옹염(顒琰, 가경제)은 또 어떠한가? 초(楚) 땅 사람들(묘족. 여기서는 백련교-천리교 세력을 말함)을 가혹하게 학대하여 놓고 그들이 생지당권을 찾으려 들고일어나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잡아다가 고문하고 가죽을 벗겼다.”

지금 관 위에 줄줄이 꿇어앉혀져 있는 애신각라 면개나 서명아를 비롯한 여러 조신들은 저 억울한 누명에 반박하고 싶었다.

저 만행이 거짓말이라고는 못 한다. 그러나 그건 여진족이 중국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행한 일이지, 여진이 여진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저 고대 장평과 신안에서 인간 지층을 창조한 백기와 항우라거나 서주에서 인류사에 기록된 최대의 인신공양을 감행한 대효자 조맹덕 시절엔 여진이란 건 있지도 않았다.

알렉산드르가 본받고 싶어 할 (대머리라고 말하면 죽였다) 주원장의 명나라도 묘족 반란을 가혹하게 탄압한 적이 있다.

티베트와의 싸움 역시 늦게 잡아도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는 일이다. 왜 무협지에서 서장 포달랍궁이 대부분 악의 세력으로 등장하겠는가.

중국을 지배하려면 학살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심지어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원래 역사의 중화인민공화국 시절엔 인류 문명이 좀 더 발전해서, 야만스러운 총칼 대신 굶겨 죽이는 방식으로 2차 대전의 총사망자에 맞먹는 대학살을 간단히 행했다.

따라서 마치 여진족만 나쁜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억울했다.

게다가 그 이름 자체가 학살과 동의어인 저 몽골 놈들은 왜 과거를 세탁하고 뻔뻔하게 저 오족인지 뭔지에 끼어 있는가?

하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칼을 빳빳이 곤두세운 채 피가 흐르도록 입술을 씹는 저 중화 혁명당원들 앞에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간 죽음의 종류만 더 다채로워질 뿐이다.

그래서 임칙서의 연설은 방해받지 않고 이어졌다.

“또 그 아들 면녕(도광제)은 어떠하였는가. 서양의 침노에서 인민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자기 권세에만 급급하여 되지도 않는 궁병독무를 일삼고 가호(家戶)를 함부로 옮기며 무수히 죽였으니 곧 책에 나오는 폭군의 사적 그대로다. 오랜 전쟁으로 해남부터 외몽고까지 노략당하지 않은 곳이 없고 비명횡사한 사람이 없는 집이 없다. 종당에는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다가 끝내 북두의 빛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이야말로 혁명의 대의인 것이다.”

임칙서는 이쯤에서 동지들을 둘러보았다.

“중화 혁명당 혁명재판소의 위원인 동지들에게 묻겠다! 저들이 유죄라고 평하는 자는 왼쪽 어깨를 벗고, 무죄라고 평결할 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어라!”

이것이 바로 중국식 기명투표다. 한나라 강후 주발이 여후 일족을 공격할 때의 고사가 그대로 재현되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왼쪽 어깨를 벗어부치며 눈물을 흘렸다.

인민재판이 다 그렇듯 만장일치였다. 분위기 탄 임칙서는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동지들의 뜻이 합일하니 나의 뜻도 따라서 웅혼해진다. 동지들이여, 그렇다면 저 반동의 죄에 대한 처벌은 어떠해야 마땅하겠는가?”

협은 복수주의(復讎主義) 사상이다.

‘어디 한번 너도 똑같이 당해 봐, 이 새끼야.’ 가 협객의 정신이다.

복잡한 법적 이론이 없던 시대의 인류가 가졌던 가장 원초적인 법 감정이며, 따라서 어디에서나 잘 먹힌다. 이 사실은 인류 최초의 협객왕 함무라비가 증명한다.

당연히 이번에도 모두가 한목소리로 외쳤다.

“주륙(誅戮)! 주륙! 주륙!”

“오살(鏖殺)! 오살! 오살!”

그 함성은 산해관을 그대로 무너뜨릴 듯했다.

그리고 여진족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무너졌다.

고귀한 신분이니 죽더라도 신체는 보존케 해 달라는 반동적 요구는 줄줄이 늘어선 혁명작두 앞에서 꺼낼 수조차 없었다.

그 광경을 성벽에서 내려다보던 시준은, 역시 대륙이라 그런지 인민재판의 스케일부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장관이군요. 이제야말로 중화의 인민은 하나의 중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오.”

시준의 옆에 서 있던 기랑은 몸을 움찔했다. 갑자기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진 탓이다.

송주령은 팔짱을 낀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자세 그대로였지만, 그 기(氣)는 명백히 시준을 찌르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살기는 아니었다.

송주령은,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할지라도 상당히 긴장해 있는 것이다.

기랑은 평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비언어적 표현에 익숙했다. 그래서 송주령의 표정과 동작을 세심하게 살핀 다음 곧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휘둘릴지라도, 정시준은 세계 수평 혁명의 맹주이며 불가능마저 혁명해 버리는 불요불굴의 혁명가다(어쨌든 그렇게 알려져 있다). 지금 시준을 처음 만나는 송주령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시준을 심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송주령의 말은 좀 딱딱하게 들렸다.

“자기도 믿지 않는 말씀을 하시다니 내가 들은 주석 동지의 인품과는 다르구려. 허나 인생은 짧고 혁명은 깁니다. 이제 슬슬 우리 일을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물론 시준이 이제 아무 가치도 없는 청 황실의 최후를 구경하러 온 건 아니다.

무한금고가 없는 청 황실은 관심 없다. 도광제만 알고 있을 뿐 중화 혁명당이 파악하지 못한 부분은 중국 내 혁명군이 슬쩍슬쩍 빼돌리고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래서 그들이 전부 처형을 당하든 어디 광산으로 보내지든 시준의 알 바는 아니었다.

시준의 목적은 나치의 파시즙이 더 안 나올 때까지 동서에서 압착 요법을 감행하다 끝내 엘베 강에서 만난 미, 소 두 나라와 같았다. 일종의 향후 외교 회담을 하러 왔을 뿐이다.

그러나 시준은 우선 송주령의 말에 호기심을 느꼈다.

“내가 하나의 중국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소? 왜지?”

“나를 떠보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답해 드리지요.”

송주령은 지금 하나둘 처형되고 있는 청 잔당을 대신하여 변론했다.

“여진만 나머지 오족을 압제한 게 아니오. 이 나라는 너무나 크고 광대하기 때문에 족속의 성질이 크게 다릅니다. 고려와는 사정이 같지 않소. 그래서 모든 반동의 군주들은 창칼의 폭압으로 그들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소.”

시준은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지리산 개망신의 경험상 잘 모를 땐 아무 말이나 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게 여러모로 유리했다.

다행히 송주령은 계속 말했다.

“물론 우리는 수평한 오족에게 스스로의 사안을 결정할 당권을 주어야 하겠지.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냥 다섯 개의 나라가 생기는 거요. 게다가 그 안에서도 부락이 나뉘고, 한인의 경우도 고을이나 당여마다 뜻한 바가 다르니 어쩌면 춘추의 시대가 되풀이될 수도 있소. 이것을 메우기 위해서 앞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군. 흥. 물론 고려가 보기에는 이웃 나라가 강대해지지 못하면 좋은 일이겠지만…….”

시준은 거기서 말을 끊었다.

“그렇지 않소.”

“그렇지 않다고?”

송주령은 번드르르한 말로는 자기를 속일 수 없을 거라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기랑은 그녀가 칼을 차고 있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준은 천천히 말했다.

“그건 그대들이 여전히 영정(嬴政, 진시황)의 반동적 망령이 드리운 그늘 아래 있기 때문이오.”

세상 누구도 정시준보다 혁명적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송주령도 많이 불쾌해하지는 않고 되물었다.

“무슨 말이오?”

“한 나라의 인민은 마땅히 하나의 수레바퀴 자국을 밟고 동일한 제도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 말이오. 서로 다른 것은 그냥 다른 것일 뿐, 안달하며 꼭 하나로 합쳐야만 일국은 아니외다. 다른 채로도 충분히 하나가 될 수 있소. 내 서양의 옛이야기를 하나 알고 있는데 들어 보시겠소?”

“지혜로 사방에 이름 높은 주석 동지의 가르침을 듣겠소.”

기랑은 고개를 돌리고 기침했다. 시준은 기랑을 짐짓 무시한 채 푸셰에게 얻어들은 썰을 풀었다.

“희랍(希臘, 그리스)에는 여러 신(神)이 있는데, 그중 아프로디테라는 여신은 헤르메스라는 도둑의 신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았소. 이 아들의 생김이 매우 잘났던 탓에 어떠한 선녀(仙女, 요정을 말한다)가 그에게 연정을 품었습니다. 그가 목욕하는 데에 뛰어들어 그를 끌어안고 다른 신들에게 그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지요. 신들이 어떻게 해 주었을 것 같소?”

시준의 지식으로 음역이나 의역이 안 되는 고유명사는 그대로 발음했지만 이야기를 알아듣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송주령은 이거 자기랑 임칙서가 간통했다고 뭐라 하는 것인가 하다가 곧 시준도 마찬가지임을 떠올렸다(이미 기랑에게 승전보를 다 들었다).

따라서 시준의 진의가 뭔지 알 수 없던 그녀는 상식적인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글쎄요. 간통을 저지른 건 그 부모이지 얼자에게는 죄가 없고 그를 연모한 선녀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니, 신들이 자비롭다면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겠소?”

“물론 들어주었소. 그 아들과 선녀를 하나로 합쳐, 남녀가 한 몸에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그 둘은 진실로 하나가 된 것이오.”

서양 오랑캐 고대신들의 사악한 코즈믹 호러는 송주령과 기랑을 둘 다 진감케 했다.

두 여자가 문화 충격에 놀라는 사이 시준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둘 중 누가 바랐겠소? 그것을 부부라고 할 수 있소? 그자는 아무것도 낳지 못하오. 거기에는 화합도 없고 생산도 없소. 지금까지 반동의 군주들이 시도했던 일이 그것이오. 그런 일을 하려 하니 다들 수백 년을 못 채우고 망한 것이지. 혁명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마땅히 달라야 하오.”

“그렇다면?”

“또 다른 서양의 신인 야소(耶蘇, 예수)는 부활을 보이기 위해 우선 죽어야 했소. 마찬가지로 하나가 되려면 먼저 달라야 하오.”

송주령은 곧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서양 학문은 주석 동지만큼 능통하지 못하지만 나도 옛글은 좀 읽었소. 음과 양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섞여 12효와 4천 96통의 역(易)을 이루는 것. 음만 있거나 양만 있다면 양의(兩儀)와 사상(四象)에서 팔괘(八卦)로 이어지는 변모와 생산은 있을 수 없지. 그것을 말씀한 것이지요?”

주역은 유교 경전의 커리큘럼 중에서 심화 과정에 속하는 책이다. 배움을 중도에 폐한 시준은 전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강철 같은 뻔뻔함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소. 이건 난관이 아니라 기회라고 해야 하는 거요. 만약 내가 중국이 약해지기를 원했다면 오히려 하나의 중국 핑계를 대고 힘써 반동을 진멸해 만방을 혼일하라 권했겠지. 그러면 중공은 스스로 무너질 테니까.”

그러고는 자기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실무적 얘기로 즉시 넘어갔다.

“조상이 같고 의복과 제도가 같은 사람들……. 이들을 민족(民族)이라고 합시다. 이 민족은 각자의 것을 지킬 당권이 있소. 그리고 한 민족에 꼭 한 나라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오. 여러 민족이 합심하여 대표를 선출하되, 군국기무와 같은 중대한 조목만을 그들에게 맡기고 나머지는 스스로 처결하는 거요. 이렇게 하면 힘은 모을 수 있되 폭압은 일어나지 않소. 이것을 나라[邦]가 이어졌다[聯] 하여 연방[聯邦]이라 합니다.”

시준은 이 설명에 자신이 있었다. 이미 미국이라는 선례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바로 그래서 문제인데, 미국에 대해서 모르는 송주령 역시 미국이 겪어야 했던 연방제의 부작용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느슨하게 놔두었다가 만약 자기들끼리 살겠다는 자가 나오면?”

“몽고 사람들처럼 말하자면 무리에서 떨어진 양은 늑대에게 잡아먹힐 뿐. 오족 누구도 혼자서 아라사, 혹은 영길리를 상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민족의 총의가 정당하게 ‘독립’을 지지한다면야 어쩔 수 없지요. 따지고 보면 조선도 그렇게 번신의 지위를 버린 것 아니겠소?”

송주령은 반박하기 힘들었다.

자기들이 인민의 총의로 반청의 기치를 들었고 성공했으니만큼, 다른 사람들도 원한다면 그럴 권리가 있다.

임칙서의 말대로 혁명을 한 자 혁명 당할 각오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시준은 송주령의 답답함도 약간 해소해 주었다.

“허나 그런 획책은 대개 자기들이 이득을 혼자 먹고 싶어 하는 반동이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조종해서 벌이는 것이기 쉽소. 그럴 경우엔…….”

송주령은 귀를 기울였다. 시준의 다음 말은 그녀가 기대하던 대로 단호했다.

“나라를 가리지 않고 모든 수평한 인민의 의지가 그 반동을 쳐 없앨 것이오. 이건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고려도, 유구도, 그리고 앞으로 연속하여 일어날 전 세계 동시 인민 혁명이 미치는 나라 어디든지 마찬가지요.”

송주령은 뒷덜미가 선뜻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아래를 바라볼 수 없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준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공교롭게도, 바로 그 순간 청조 최후의 후계자 애신각라 면개의 목이 혁명작두에서 떨어졌다.

딱히 마지막 순서라거나 하는 특별 취급은 아니었다.

***

송주령이 개인적으로 정시준을 봐 두고 싶었기 때문에 회담 핑계로 성벽에서 자리를 마련했지만, 본래 그건 군사위원회 위원장인 그녀의 일이 아니다.

본격적인 국경 획정이나 중공의 정체(政體) 같은 것은 임칙서의 업무다.

그래서 임칙서가 구르는 사이 송주령은 오랜만에 만난 기랑과 한잔할 수 있었다.

혹시 동충하초 하나 더 줄까 싶어서 그녀의 얘기를 듣던 기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속았다고?”

“그래. 아니, 속았다기보다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할까. 정시준은 지금 우리가 할 수밖에 없는 길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에 족쇄를 채웠어.”

연방이라는 이름이 안 붙었을 뿐, 시준의 구상은 이미 중화 혁명당의 수뇌부 사이에서 공감대를 얻어가는 주장이었다.

억압에 반대한다는 기치로 일어선 이상 강력한 중앙정부 같은 건 애초에 불가능한 꿈이다. 혁명에 참여한 각 파벌은 각자의 자치권이 있어야 한다.

단지 그 자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인데, 시준이 더해준 말은 여기에서 의미가 있었다.

군사권과 외교권의 집중이라는 현대식 연방국가 개념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체적인 비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송주령은 그 말을 들으면서 한 가지 무서운 개념도 떠올랐다.

“몇 개의 나라로 이루어진 연방이 될지는 몰라. 하지만 그 연방을 다스리는…… 조정은 아니군. 뭐라고 해야 할까? 너희처럼 국무당이라고 하자. 중공 국무당이 고려를 적으로 삼을 경우, 정시준은 국무당에게 불만이 있는 나라 중 하나를 꼬드겨 중국에 다시 난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 거야. 수평한 인민의 의지가 반동을 친다는 건 그런 뜻이다.”

“그런 뜻이야? 너무 과한 것 같은데.”

“과하지 않아. 정시준의 뜻에 반발하는 자가 곧 반동이다. 그걸 아니라고 할 정도로 어리석거나 뻔뻔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기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송주령은 푸념하듯 술을 따랐다.

“하나로 혼일할 천하는 없어졌다. 정시준은 집을 두고 다투는 사람들 앞에서 벽을 무너뜨려 버렸어. 그다음에 그는 새로운 울타리를 보여줬지. 전 세계 혁명의 인민들이라는 울타리.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천하를 가질 수 없다.”

정시준이 규정한 이 수평 혁명국가의 연계는 이전까지의 ‘천하’와 다른 관념을 제시했다.

기존까지 세계의 군주가 되고 싶은 자는 중국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면 되었다.

허나 이제 ‘천하통일’을 하려면 얘기가 다르다. 중원이나 몽골, 강남뿐만 아니라 고려와 유구며 어쩌면 더 멀리까지 엮여버린 ‘천하’를 보며 당황해야 한다.

수평은 물처럼 평평하다. 그리고 물 사이에는 구분이 없다.

장성이 더 이상 국경이 아니게 되자 청나라는 러시아라는 대지의 한계치를 만날 때까지 어영부영했다. 일본 역시 러시아가 침입하기 전까지는 특별히 사할린에 국경을 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구는 평탄화되었으며, 따라서 중국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목표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는 다른 말로 하면 한계점을 잃어버렸다는 말도 된다.

더 줄이면 ‘해방’이다. 인민해방군과 중화 혁명당의 목적이었던 바로 그것이다.

중국인들은 천하에서 해방되었다.

기랑은 그 점을 담담히 지적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 시준은 천하 대신 세계를 주었잖아.”

새로운 ‘천하통일’은 아직 할 수 있다.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이 그것이다.

세계를 모두 혁명의 색으로 물들이면 그건 더 이상 확장되거나 무너질 여지가 없는 완벽한 통일이다. 그 안에서 모든 나라와 ‘민족’은 수평할 것이다.

100년쯤 뒤에 다른 사람들이 소비에트 국제 혁명이라 부르던 것과도 비슷하다.

송주령은 술을 쭉 넘겼다.

“하하. 그래. 맞아. 이것 참. 내가 너무 덜 혁명적이었군. 부부에게 연달아 이렇게 당하다니…… 부부 맞지?”

“맞아. 왜 자꾸 물어?”

“어, 아니. 네 말대로 평양에서 네 친구가 시준을 소유하고 단전성에서 네가 시준을 품는다면, 고려의 세 번째 전위의 성시라는 성경부에서는 어떨까 싶어서 말이지. 중화인민공화국과 고려인민공화국의 두령을 모두 가지는 것도 통쾌하지 않겠느냐.”

기랑은 장난스럽게 입술을 핥는 송주령을 보고서야 그 말을 이해했다.

“그러면 내 손에 죽는다.”

“어머나. 무서워라.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난 허락 받았어.”

“하하!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허락 받고 바람나는 녀석이 어디 있어? 보아하니 정시준도 알 만해.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불굴의 사내지만 정조만은 쉽게 꺾이는 것 같군.”

기랑은 도저히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시준은 그런 놈이다. 그의 혁명 의지는 강철을 능가하지만 절조는 수수깡만도 못하다.

그래서 기랑은 그냥 송주령을 여기서 처치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을 때, 송주령은 웃으면서 일어났다.

“장난이다. 아마 나 정도로도 안 될 것 같아. 아까 같이 있을 때 알았지. 네 친구라는 그 여자는 아직 못 봤지만 아마 너희는 굳이 부부가 아니라도 일가(一家)가 되었을 거다.”

“뭐?”

“별 얘기 아니니까 개의치 마. 이제 슬슬 정시준도 돌아오고 우리 위원장 동지도 돌아오겠군. 이만 작파하도록 하자.”

기랑은 찜찜한 얼굴을 한 채 산해관의 혁명군 진채로 돌아갔다.

그리고 밤늦도록 시준이 돌아오지 않자, 기랑은 송주령의 말이 정말 농담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

물론 시준은 그때 송주령이 아니라 그녀의 연인과 함께 있었다.

사실 이 전후 처리에 있어 그렇게까지 심한 쟁점은 찾기 힘들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그때까지 고려의 점령지는 청 황제들이 정한 봉금지인 동삼성과 거의 일치했다. 그래서 ‘거긴 여진족 땅이 아니니 중국에 돌려줘라’는 말이 나올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임칙서는 별생각 없이 동삼성까지만 확정해 두려던 시준에게 전혀 의외의 제안을 걸어왔다.

그래서 시준은 피로를 애써 떨쳐내며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시준은 ‘너 제정신이야?’라는 소리를 어떻게 하면 국가 회담에 어울리는 점잖은 말로 바꿀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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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양주십일기는 후대에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습니다. 분명히 청이 양주성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건 청만이 아니라 당대 강남의 혼란 와중 여러 세력에 의해 발생한 일이었고 그 규모나 방식에서 과장되었다는 거죠.

서술 방식이 명말 선비의 저작이라기에는 좀 많이 근대적이라는 것도 있지만, 양주십일기가 의심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한족 민중의 반청 감정이 최고조이던 청말 즈음해서 ‘갑자기’ 나타났다는 겁니다.

물론 ‘청이 그간 금서로 지정했다’는 이유는 있습니다만… 이 시대 금서 지정은 마치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 금지하는 것과 같아서 정말 철저히 사라지기도 힘들었을뿐더러, 금서로 지정하려면 최소한 그 책의 제목은 알려져야 하는데 그런 것도 없이 근대에 ‘일본에서 발견’되어 수입되었다는 점이 수상하긴 하죠.

그리고 청이 정말 양주 학살을 그리도 철저하게 숨기고 싶었다면 아이신기오로 도도의 전공도 청실록에서 삭제되었어야 하지만 그건 또 그대로 있습니다. 무엇보다 양주만 수치스러워하고 준가르 학살은 안 숨겼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고요.

물론 그렇다고 청조의 죄가 덜어지는 건 아닌 게, 청은 거의 모든 반란에 대한 대처를 집단 학살로 일관했기 때문에 양주 하나 좀 경감된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습니다.

2. 량 치차오는 양계초라고도 알려진 청말의 사상가입니다. 중국의 근대화와 혁명에 영향을 미친 인물을 꼽으라면 반드시 첫손에 꼽힐 인물이죠. 작중 ‘젊었을 때’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는, 이 사람도 혈기왕성할 때는 양주십일기를 읽고(당시 중국에서 혁명한다는 사람들의 필독서였음) 철저한 반청배만 운동의 격정에 차 있다가 성숙해서는 방향을 선회해 모든 중국인이 하나가 되는 혁명을 추구했다고 회고하기 때문입니다.

3. 이야기에 나온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사생아는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os)로, 이름부터가 불륜 같은 거 숨길 생각 없다는 당당한 네이밍입니다. 물론 부모가 둘 다 신이라 이쪽도 신입니다.

그를 사랑했던 님프는 살마키스라고 합니다. 합쳐지고 난 다음엔 인격이라도 소멸되었는지 등장하지 않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그 사건이 일어난) 연못에 몸을 씻은 자도 모두 자기처럼 되도록 부모에게 간청하지요. 이 저주도 그대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헤르마프로디토스는 결합의 신이자 양성구유의 신이기도 한데, 양성을 한 몸에 갖춘 것은 ‘완전성’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으므로 꼭 부정적 의미만은 아닙니다. 연금술 쪽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씁니다. 요한 빙켈만 같은 후대 학자에 의해 ‘남성과 여성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헤르마프로디토스적 아름다움이 재조명, 재해석되기도 하지요.

고대 키프로스에서도 숭배를 받았습니다. 그때 헤르마프로디토스 신상 사진을 한 번 보시면 직관적으로 느낌이 딱 오실 겁니다. 다만 고대신을 고대인이 섬기다 보니 방법이 좀 고대스러워서 남장여자와 여장남자를 인신공양했다고 합니다.

사실 인도의 아르다나리쉬바라(시바와 그 아내 파르바티가 반반씩 합체한 신) 등 양성 결합 형태의 신은 오리엔트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원시 시절부터 보편적인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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