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77화 (277/284)
  • 277화

    93.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4)

    나폴레옹 전쟁은 언제나 프랑스 궁정의 유행을 슬쩍슬쩍 곁눈질하던 영국의 재단사들로 하여금 독자적 문화를 창조하도록 재촉했다.

    다비드의 그림 같은 곳에 나오는, 참 화장실 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옷에서 현대인도 어찌어찌 밖에 입고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서양 복식이 변모한 게 이때쯤이다.

    그러나 공화국 사람이 보기에는 그냥 오랑캐 차림일 뿐이다.

    의복이란 단순히 보온과 개성 표현 수단이 아니다.

    옷은 신분 증명일 뿐만 아니라 문화이고 학문이며 종교이자 정체성이다. 물론 이런 관념은 유럽에도 있지만 동양에서 훨씬 강했다.

    조나라 무령왕이 기마군 육성을 위해 옷고름을 왼쪽으로 맨 것이 그래서 대단한 각오로 인식되는 것이며, 고대 중국에서 누군가를 평가할 때 ‘차림이 범속하지 않았다’는 말이 꼭 들어가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러니 정약용에게 지금의 꼴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아무리 런던에서도 아무나 입을 수 없는 최고급 원단과 재단이라도 말이다.

    검은색 하이웨이스트 재킷에 희고 풍성한 목도리형 넥타이를 맨 채, 독일 용병의 유행이었던 헤센 부츠를 신고 꼭 맞는 판탈롱을 그 안에 넣은 그 차림은 정약용으로 하여금 내복만 입고 나간 현대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1819년의 최신 트렌드는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에 맞게 상무 정신이었다.

    남녀의 옷 모두 오랜 전쟁에 적합한 실용성이 반영되었으며 특히 전통적으로 남자의 의무인 육체적 투쟁을 더욱 강조했다.

    한마디로 말해 정약용이 느끼기에는 몸에 너무 끼었다. 다리 근육을 드러내야 하는 바지 쪽이 특히 불편했다.

    정약용은 큰 두루마기라도 하나 있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며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지금은 눈에 띄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주영 고려공사라는 본연의 위치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일탈해 있었다.

    우선 그는 런던에 있지 않았다. 정약용이 마치 여름 산책하듯 태연히 나와 앉아 있는 곳은 피털루 광장, 그러니까 지금 이름으로는 성 피터 광장 바깥에 있는 벤치였다.

    공화국에 대규모 공장을 도입하기 위한 맨체스터 시찰 핑계로 멀리까지 나온 정약용은, 그를 안내하기로 한 여러 공장주나 관리들이 전혀 모르는 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정약용에게 주목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엄청난 수의 군중과 파견된 진압군이 일으키는 긴장 속 소란이다. 전쟁터와 맞먹는 이 혼란 가운데에서 사람 하나하나에 신경 쓰는 자는 거의 없었다.

    두 번째는 정약용의 탁월한 변장이다. 지금 정약용은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저 산책 나온 영국 신사처럼 보였다.

    그는 영국 현지의 재단사가 맞춤 제작한 – 어차피 이때는 기성복보다 이쪽이 일반적이다 – 완벽한 신사의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기 위해 꽤 큰 모자까지 눌러쓴 채였다.

    애초부터 ‘저기 혹시 동양인이 앉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망상적 의심을 가진 자가 아닌 이상 그냥 지나치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누구도 주 영국 고려 특명전권공사가 이 혼란스러운 광장 근처 벤치에 홀로 앉아 있는 줄은 모를 것이다.

    허나 효과적이라고 해서 다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정약용은 그답지 않게도 투덜거렸다.

    “갑갑하기 그지없구먼. 이 목도리만이라도 벗으면 안 되나?”

    옆에서 이미 해 봤던 시크교도의 차림을 – 정약용은 그쪽이 더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 한 문순득이 말렸다.

    “그러면 꽤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외사통호부장 동지.”

    “동지가 실로 오랑캐 옷에 달통하였네.”

    정약용은,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시퉁하게 내쏘았다.

    옷이 바뀌어서 그런지 아까부터 사람도 좀 바뀐 듯 했다.

    하지만 문순득은 바뀌지 않고 뻔뻔하게 웃었다.

    “빈정댈 정도로 힘드시면 바꿔 입을깝쇼?”

    “어흠.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순 없지. 이게 더 비싸다는 것을 노리는 게지?”

    “역시 정치국 위원의 혜안은 따라갈 수가 없소이다.”

    시시덕대던 문순득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약용도 곧 문순득의 시선을 따라갔다.

    솔직히 수만 명이 모여 있는지라 저 중심부에서 뭘 하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둘은 공화국 혁명의 기수다.

    선전선동의 기미는 놓칠 리가 없다. 정약용이 낮게 중얼거렸다.

    “시작했구나.”

    “갈까요? 다른 동지들은 이미 들어가 있소이다.”

    “그러세. 혹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나와 있었지만 이제는 가봐야 하겠어.”

    둘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모자가 서로 닿을 정도로’ 빽빽이 밀집한 소란 속이었던지라, 아무도 그들을 보지 못했다.

    ***

    헨리 헌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가 연설을 시작했을 때 그 환영은 거의 광기가 되었다. 웅변가의 달변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외곽까지 목소리가 들릴 인원이 아니었으나 그런 건 문제가 안 됐다.

    조지당이 이미 익숙히 한 공화국식 선전선동 노하우로 삐라, 아니 쪽지가 배부된 지 오래였기에 사람들은 연설 내용을 모두 알았다.

    따라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이유는 헨리 헌트의 명징한 논리와 장엄한 대의에 지금 공감해서가 아니다.

    그 대의가 실현되는 순간의 감정에 동조한 것이다.

    이 주위를 8개 기병대대와 18개 보병중대, 그리고 2개 포병대가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떳떳하다. 이 ‘회의’의 주창자 중 하나이며, 현 시대에 드문 시위 개념을 창안한 작가 새뮤얼 뱀포드(Samuel Bamford)는 유념할 만한 규정을 언명했다.

    ‘우리는 이 회의를 도덕적으로 효과적이며, 영국에서 전에 본 적이 없던 장관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나오십시오. 금주, 절제, 비폭력은 우리의 뜻을 정당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조지들을 지저분하며, 난폭하고, 눈앞의 탐욕에 눈이 멀어 사회 혼란만 일으키는 ‘못 배워먹은 천민’으로 몰아붙이는 기득권층에게 대항하기 위한 대의였다. 맨체스터 시민 모임 중에서도 만 명에 달하는 큰 파벌 ‘멋쟁이[best dressed]’가 이 운동을 이끌었다.

    맨체스터의 수만 조지는 무기를 쥐지 않은 손을 들어 올렸다.

    “곡물법을 폐지해라!”

    “조지들의 대표를 내각으로 보내자!”

    “사람은 물처럼 평등하다!”

    그 함성은 맨체스터의 맑은 하늘 위로 퍼져갔다.

    그 전까진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이름을 얻고 꽃이 된 자들, 영국 수평도 조지당이었다.

    물론 아직 영국에는 조지당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 지역의 치안판사로 임명되어 군대에 지시할 총책을 거머쥔 윌리엄 헐튼(William Hulton)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었다.

    석탄 광산과 여러 공장을 소유한 부자인 그는 지속적으로 ‘집회의 자유’라는 불경한 개념에 대해 반대해 왔으며, 자신의 권력을 거기에 사용하는 데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의 의무 수행은 정확했다.

    헐튼은 대기하고 있던 제15 후사르경기병연대와 요멘리[鄕士] 의용기병대에게 즉시 그 유명한 ‘쪽지’를 전달했다.

    <나는 그들의 시민권이 공중도덕을 유지하는 데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합니다. 즉시 행동하십시오.>

    시민권을 지금부터 제한하겠다.

    한마디로 다 죽이라는 소리다.

    Your honor, 즉 ‘존경하는 재판장님’의 전언은 곧바로 실행되었다.

    특히 의욕적인 것은 요멘리 의용기병대였다.

    지방 지주의 둘째아들이나 공장주의 망나니 조카 등등으로 이루어진 이 기병대는, 대번에 짐작할 수 있듯 ‘부자의 정당한 노력을 갉아먹으려는 게으른 빈민’을 극도로 혐오했다.

    세상에 특정 계층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들은 약간 특별하다.

    서북청년단이 그랬고 나치스 돌격대가 그랬듯이 이들에게는 국가가 지원하거나 묵인하는 실질적 폭력이 있었다.

    신기한 일은 아니다. 어느 시대의 어느 나라건 기득권층은 사병을 가졌으며(안 그러면 죽창 맞는다) 앵글로색슨이 이 분야에서 독보적 선두를 달린다.

    21세기에 실시간으로 이를 관찰하고 싶다면 민병대가 세운 나라인 미국을 보면 된다.

    인류의 자유를 선도하는 위대한 아메리카 노예국의 수정헌법 2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州)의 안보에 필수적이다. (빨갱이의 시위대에 총탄을 갈기고 깜둥이를 사냥해 창에 꿰어다가 나무에 매달기 위해) 무기를 소장하고 휴대하는 모든 인민들의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

    수정헌법의 생략된 이 행간을 잘 읽어야 한다. 무장 방어권의 목적은 이토록 명백하다.

    총기 소유의 자유를 그토록 부르짖는 미국이지만, 흑인 소년은 물총만 갖고 놀아도 핏덩이가 될 때까지 집중 사격을 얻어맞는 이유는 이것이다.

    똑같은 미국 시민권자라 할지라도 무슬림 단체가 총을 쏘면 ‘테러’지만 백인 기독교도가 총을 쏘면 ‘총기 사고’인 이유도 같다.

    유색인종과 이교도, 빨갱이는 미합중국의 인민이 아니다.

    나도 시민권 있다는 그놈들의 항의는 필요 없다. 미국인이 그런 서류 쪼가리에 존경을 표하는 사람들이었으면 그냥 영국 왕 밑에 얌전히 있지, 독립 전쟁을 왜 했겠는가.

    그러나 미국은 아직 열강의 말석에도 못 끼는 삼류. 지금 미니트맨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이 맨체스터-살포드(Salford) 요멘리 의용대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중령 계급까지 돈 주고 살 수 있었으며, 그 어떤 잔학 행위라도 손쉽게 묵인받았다.

    그들이 하는 짓은 결코 살인이나 폭행, 강도 및 강간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권리 있는 자의 마땅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시민에 의한 체포[Citizen's arrest]’다.

    요멘리 기병대 지휘관 휴 혼비 벌리(Hugh Hornby Birle) 대위 역시 즐거운 사냥을 나온 기분이었다.

    그는 무가치한 버러지와 기생충을 마음껏 죽일 생각에 흥분했다.

    “제군. 가자! 사회 정의를 우리가 바로잡는다! 저 조지인지 뭔지 하는 놈들의 모가지를 전부 따 버리는 거다!”

    지휘관과 일심동체가 된 기병대는 오늘의 시위에서 가장 처음 무장 행동을 개시했다.

    시민들은 무장하지 않았지만 군대는 거리낌 없이 칼까지 뽑아들고 말을 달렸다.

    수치스러운 광경이었다.

    오직 약자를 괴롭히기 위해 무기를 쥔 이 ‘전도유망한 청년’들은 곧 그들의 취향에 딱 맞는 먹잇감을 발견했다.

    아기를 안고 나왔다가 기병대의 급습에 황급히 도망치는 한 여인이었다.

    부녀회는 공화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두 달 전 결성된 맨체스터 여성 개혁 협회[Manchester Female Reform Society]는 여기에도 적극 참가했다.

    그 여인, 앤 필즈(Ann Fildes)가 아기에게 미래에 대한 어떤 종류의 희망을 보여주려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 윌리엄 필즈(William Fildes)가 바뀐 역사에서도 똑같이 이 학살의 첫 희생자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이다.

    지시도 필요 없었다. 선두를 달려가던 기병 하나가 앤을 말발굽으로 밀어붙이고 칼로 후려쳤다.

    “아아악!”

    앤은 비명을 지르며 아기를 놓쳤다. 도망칠 힘도 없는 두 살배기 아기는 포석으로 된 바닥에 세차게 부딪혔다.

    윌리엄이 그 짧은 생을 그대로 끝내는 장면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기병대의 물결에 가려져서 볼 수 없었다.

    물론 의용병들은 동요의 가장 작은 낌새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아기를 죽인 데 대해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았으면 애초에 극우 민병대에 입대조차 안 했다.

    오히려 벌리 대위는 크게 웃으며 칼을 휘둘렀다.

    “자! 저 멍청한 놈들은 손에 아무것도 없다. 돌격!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베어 죽여라!”

    맨체스터 요멘리 기병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팔 닿는 거리의 시민들을 전부 참살’하기 시작했다.

    피에 젖은 비명이 터졌다.

    ***

    한편 외곽이 아닌 연단 중심부에서는, 이때 헨리 헌트에 대한 체포 영장이 이미 즉석 발부된 상태였다.

    우악스러운 병사들이 시위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려 하자 당연히 헨리 헌트를 보호하려는 군중들과 싸움이 터졌다.

    “이 무식한 부랑당패 놈들아! 이 영장이 보이지 않는 거냐?”

    “영장은 무슨 니미 씨발 개똥 같은[motherfucking bullshit] 영장이야. 이 새끼. 반동 놈들이 제멋대로 설치도록 놔둘 줄 아냐!”

    병사들은 반동이 뭔지는 잘 몰랐지만 그 앞의 욕설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그들은 분노하여 칼을 치켜들었다. 상대는 비무장이라 더욱 안심하고 무기를 들기 쉬웠다.

    “비키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하겠다!”

    “어디 한번…… 크어억!”

    “저, 저자가 맨손의 시민에게 칼을 휘둘렀다!”

    정규군이나 민병대나 인간의 질은 거기서 거기다. 이들은 오히려 의기양양할 뿐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의 만족감과는 별개로, 폭동 진압 상황에서 피를 보는 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겁먹은 군중들이 흩어질 수도 있지만, 과도하게 흥분했을 경우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부터 역사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래 역사의 피털루 학살에서는 진압 시작 10분 만에 군중이 해산한다. 그야 아무것도 안 가진 시민들 상대로 군대가 쳐들어와 총을 쏘고 칼로 쑤시고 대포로 갈겨대니 해산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지금도 피아의 무장 상태는 비슷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제 하나의 이름이 더 있었다.

    “형제 조지들이여! 덮쳐 눌러라! 칼을 빼앗아라!”

    두려움 없는 조지들이 즉각 호응했다.

    “우리는 조지다!”

    “나도 조지다!”

    그간 맨체스터 외곽에서 이럴 때를 대비해 해 온 훈련이 빛났다.

    조지들은 축구 선수처럼 – 이때 축구 얘기다 – 병사들을 들이받거나 걷어차거나 껴안고 쓰러졌다. 몇몇 조지들이 칼을 빼앗자 이제 본격적인 난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허나 그렇다곤 해도 병사들 쪽이 더 유리한 것은 변함이 없다. 선봉 조지의 대부분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중에는 머리칼이 드문드문 빠지고 10대라고는 보이지 않는 외모를 한 남자도 있었다.

    옛날 굴뚝 청소부를 하다 문순득에게 활기찬 구호를 외치고 조지당에 입당한 조지였다.

    조지당 열성당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이 맨체스터까지 원정을 왔던 것이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의 혁명 정신이 병사의 칼을 막아 주지는 못했다.

    굴뚝 조지는 깊은 자상을 입은 채 창자가 비어져 나오는 배를 움켜잡고 피를 토해냈다.

    그다지 원통하거나 서글프지는 않았다. 그 자신이 봐도 도무지 가치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인생이었으니까.

    ‘결국 이렇게 객사할 줄 알았지.’

    그러나 뒷골목에서 한 조각 빵을 다투다가 맞아 죽거나, 자는 사이에 쥐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겨 죽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굴뚝 조지는 적어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앞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부모조차 축복하지 않았던 그의 탄생이었지만 굴뚝 조지는 그로 인해 받은 목숨을 끝낼 자리를 스스로 찾았다.

    그리고 그런 굴뚝 조지에게 확신을 부여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동지[Comrade]. 오랜만이군. 동지는 진정코 혁명의 기수다.”

    굴뚝 조지는 힘겹게 눈을 떴다. 이 무지막지한 소란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그의 등을 받치고 있는 시크교도가 있었다.

    죽어가는 와중에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굴뚝 조지는 곧 그자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그가 평생 본 아시아인이라고 해 봐야 다섯 명도 채 안 되니까.

    “당신은……. 아니, 나를 기억하고 있었습니까?”

    “동지라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결코 잊지 않는다.”

    문순득은 그렇게 대답하고 굴뚝 조지를 눕혔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문순득은 굴뚝 조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남길 말은?”

    조지는 입가를 푸들거리며 웃었다.

    원래 그는 자신과 같은 비참한 사람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자기가 조지당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도.

    그러나 그 긴말을 다 하기까지 목숨이 붙어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조지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조지는 그 모두를 압축적으로 표현해야 했다.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 만세. 잃을 것은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굴뚝 조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문순득 역시 이번에는 목소리가 작다느니 하며 타박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던 문순득은 그에게 속삭였다.

    “얻을 것은 온 세계다.”

    문순득은 굴뚝 조지를 눕혀 두고 터번을 벗었다.

    이제 더 이상 시크교도 흉내를 낼 필요는 없었거니와, 그에게는 이 붉은색 천이 꼭 필요했다.

    문순득은 정약용을 돌아보았다.

    “외사통호부장 동지. 지금 곳곳에서 적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동지들은 준비를 완료한 모양입니다. 신호를 내려 주십시오.”

    정약용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편에서 자신을 알아본 듯한 헨리 헌트가 황급히 다가오고 있었다.

    주 고려 영국 공사가 여기에 휘말려 무슨 사고를 당한다면 이건 영국 정부 난처해졌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대탄압의 핑계가 된다.

    물론 정약용이 그 정도도 헤아리지 않았을 리는 없다.

    정약용은 주머니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냈다.

    이강회가 가지고 온 공화국 국무당의 소환장이었다.

    영국 왕에게 보고한 건 아니지만, 정치국이 그를 직에서 면했으므로 이제부터 정약용은 공사가 아니다.

    영국인과 여러모로 유연하게 어울려 ‘페킹의 중국 관리와는 다르게 거만하지 않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던 – 왕 첸 리딩방에 들어가고 싶은 신사들의 사심 섞인 평가다 - 외교관도 아니다.

    지금 정약용은 공화국 국무당 정치국 위원, 즉 정시준의 동료인 혁명가로 되돌아갔다.

    문순득은 정약용과 자신의 지팡이를 이어 만들어 두었던 깃대에 적기를 매달았다. 그러고는 그것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정약용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 공화국에서는 잘 쓰지 않는 말이 점잖은 희만 선생의 입에서 벽력처럼 터져 나왔다.

    “전위대!”

    펄럭이는 터번과 정약용의 목소리는 시위대 곳곳에 잠든 혁명의 전위들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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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1. 작중 나온 피털루 학살의 준비와 진행 과정은 (공화국 사람들이 나오는 부분만 빼고) 참가 인물이나 그들의 동선 등 모두가 역사와 동일합니다. 베스트 드레스드나 맨체스터 여성 개혁 협회 같은 것도 모두 실제로 참가했던 단체가 맞습니다. 이 학살의 첫 번째 희생자가 2살짜리 윌리엄 필즈였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맨체스터-살포드 요멘리 의용기병대에 대한 서술도 사실입니다. 작중에서처럼 첫 번째로 학살의 포문을 열었죠. 애초에 창설 목적이 노동운동 진압이었습니다.

    2. 이 시대의 시위는 ‘당연히’ 폭력 시위였습니다. 어떻게 시위를 하든 진압하는 쪽은 무장 병력을 투입해 발포하는 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새뮤얼 뱀포드의 제안은 혁신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론 영국 정부는 그딴 거 상관없이 일 편해서 좋다고 외치며 그냥 군대로 갈아버렸지만…

    그리고 이 학살을 계기로 진압 방침이 바뀌거나 협상 쪽으로 돌아서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100년 뒤까지도, 시위에 대한 대응은 무기 쪽에서만 진보했습니다. 머스킷 대신 기관총과 폭격기로요. 딱히 영국만 그런 건 아니고 모든 나라가 그랬습니다.

    3. 백인 민병대가 자주 내세우던 슬로건인 ‘(인종 평등 되니까) 거만해진 흑인이 백인 여자를 강간한다’는 ‘우려’에 의해, 민병대는 흑인을 사냥해 구타 및 살해하고 창으로 꿰어다가 경고로써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시신을 토막 쳐서 기념품으로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이는 작중 시대(노예제가 유지되던 19세기 초)보다, 오히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인 19세기 후반부터 현대까지 자주 일어나던 일입니다. 노예일 때는 동정하던 백인들도 있었지만 ‘감히 자신과 맞먹으려는’ 위치가 되자 참아주지 못했다는 게 흥미롭죠.

    4. ‘시민에 의한 체포’는 본래 남북전쟁 시기에 제정된 법으로, 상당한 의심이 가는 사유가 있을 경우 시민이 공권력을 대행해 범죄자를 체포하는 것을 허락하는 법입니다. 폭력에 대한 자력구제 전통이 발달한 서구에는 그 전부터 개념이 있었지만 용어는 작중 시대에 아직 없습니다.

    물론 짐작하시다시피 범죄자 체포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수십 배는 컸습니다. 3번 설명의 흑인 사냥은 대부분 이 법을 핑계 삼아 행해졌으며, 극히 일부의 주에서만(2021년 조지아가 최초) 이 법을 폐지했을 뿐 지금도 여전히 미국에서 유지 중입니다.

    5. 피털루라는 말은 광장의 지명인 세인트 피터 필즈와 워털루의 합성어로, 더 맨체스터 옵저버에서 사건 후 워털루 전투에 비견할 비참함이 일어났다는 뜻으로 만들어 붙인 말입니다(그리고 이 이름 붙인 편집자는 잡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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