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93.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3)
이 시대의 사할린 섬은 세 개 나라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상태였다.
첫 번째이자 가장 오래된 후보는 청이다. 꽤 의외의 일이지만, 누르하치는 후금을 건국한 바로 그때 사할린에도 군대를 보낸다.
하긴 영고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다, 여진족도 옛날에는 해적질로 깃발 좀 날리던 민족이다. 겨울이라면 도보로도 갈 수 있으니 더더욱 보내 볼 만하다.
그래서 사할린은 형식상 청이 영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원래 역사에서나 지금이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굳이 말한다면 지금 산해관에 있는 면개가 고려만 없었다면 혹시 거기까지 달아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며 한숨을 쉬는 중이었다.
그렇다 보니, 1819년 현재 실효 지배에 그나마 손톱만큼이나 가까운 나라를 꼽아 보자면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러시아 외교사절이 일본을 약탈한(뭔가 이상하지만 맞다) 1806년의 분카 로코[文化露寇] 사건은 러시아가 이미 사할린 북단에 거점을 마련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막부는 북방에 대해 경각심을 가졌다. ‘당연히’ 대충 일본 땅인 줄 알았던 그 섬에 이미 러시아 도적들이 침투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사할린 남부에는 이미 17세기 말부터 일본 북방 영주들의 해양 거점도 드문드문 있었다. 러시아에 가장 심하게 털린 마츠마에 번의 적극 협조와 함께, 막부는 이때부터 사할린에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시준이 혁명을 일으킬 때쯤에는 마치 유럽처럼 사람도 파견한다.
막부의 지원하에, 탐험가 마미야 린조[間宮林蔵]는 사할린이 섬이라는 사실을 최초로 증명(틀림)하고 일본국 경계라는 표지석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시준은 사할린의 파란만장한 분쟁사 따위 잘 모른다.
그가 아는 한계는 21세기 세계지도에서 거기가 러시아 땅이라는 정도였다.
그래서 시준은 별로 거리낌 없이 그곳을 러시아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수수료를 5할 정도 떼고 말이다.
막부나 마츠마에 번의 동의 따윈 당연히 받지 않았다.
일본인이 아이누의 동의를 받고 나서야 그들을 정복하고 21세기까지 2등 신민으로 만든 건 아니지 않는가.
시준은 미래인다운 정확한 지식을 적용해 보았다.
‘21세기 지도에서 사할린이 러시아 땅이라는 건, 일본이 그 땅 지금 차지해 봤자 어차피 나중에 모조리 빼앗긴다는 소리잖아?’
그의 추론은 맞았다.
황국신민증의 치료비는 그 심각성만큼이나 비싸다. 독일의 파시즙 과다증을 집도한 두 명의(名醫) 소련과 미국이 나서야 했던 만큼 어쩔 수 없다.
미국은 방사선 요법을 담당했고 소련은 물리치료를 담당했는데 이 중 후자에 들어간 요금이 남사할린과 (일본인만 북방 4도라고 부르는) 쿠릴 열도다.
애초에 그런 지식을 동원할 필요도 없다. 시준은 보통의 한국인으로서, 그게 독도든 댜오위다오든 쿠릴 열도든 일본에게 ‘섬을 준다’는 발상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다.
일본의 위정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관심 없다.
오히려 러시아 치하에서 일본 치하만큼이나 힘들 아이누와 퉁구스계 제족이 더 시준의 양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러시아 쪽은 시준이 믿는 바가 있었다.
러시아는 21세기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가디언 지의 기자에게 알려준 자신의 ‘비밀’이 100년 뒤에 실현되는 나라다.
‘우리에게 비밀을 하나 말해주시겠습니까?’
‘공산주의는 승리합니다.’
시준은 공산주의 혁명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지만 – 진짜다 - 혁명 때문에 러시아가 개판이 되리라는 사실에는 주목했다.
‘그때 틈을 봐서 후손들이 힘을 합쳐 독립 공화국을 세울 수도 있겠지. 본국 중앙정부가 훨씬 멀기도 하니 일본 치하보다는 벗어나기 쉬울 거다.’
정시준이 사할린을 일본에게서 영원히 몰수하도록 인민의 이름으로 결정한 과정은 대강 이랬다.
그리고 그 결정은 상당히 혁명적인 방식으로 통보되었다.
***
마미야 린조는 1812년부터 다시 사할린과 홋카이도 일대로 돌아와 여러 업무를 진행한다. 지도도 만들고 아이누 여인과 사생아도 만들고 아무튼 바빴다.
그리고 그가 평생을 바친 이 북방 사업의 보람은 단 한 순간에 박살 나게 되었다.
여름이 되어 좀 살기 편해졌나 했더니 그건 해적들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서쪽에서 느닷없이 배 타고 나타난 로구(러시아 도적)들은 사할린 남부의 정착촌을 쑥 농장으로 바꿔 버렸다.
13년 전과 똑같았다.
그때도 러시아는 외교 사절단 호위병으로 약탈을 자행했다. 그리고 지금 온 놈들도 명목상은 어디까지나 공사의 호위병이었다.
서너 달 휴식하며 회복하느라 욕구 불만에 가득 차 있던 2천 카자크는 대장 예르몰로프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었다.
아니, 예르몰로프는 애초에 통제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신나는 타타르식 약탈 행렬에 참여 중이었다. 베니그센이 따라오지 않았다 보니 완전히 카자크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었다.
다행인 건 그러고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여기의 경비가 보잘것없었다는 사실이다.
마츠마에 번이 러시아를 대비하기 위해 절치부심 마련한 ‘전함’들은, 왜 형이 거기서 나오는지 모르겠는 양선 3척에 의해 찍소리도 못 하고 박살 났다.
번은 영지 본토에서 무사들을 소집하였지만 카자키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배도 없는 것들이고, 배를 마련해 건너온다면 더 좋다는 심정이었다.
그다음은 1806년과 비슷했다. 다만 규모가 훨씬 컸을 뿐이다.
많이 얻어맞고 묶인 채 꿇어앉은 마미야 린조는 불타는 마을과 학살당하는 일본인들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은 누구냐! 대체 이게 웬 행패더냐!”
카자크들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기 때문에 마미야의 말은 러시아인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놈들은 보기만 하면 누군지 아는데 그런 질문을 할 이유가 없다.
마미야의 질문은 자기를 감시하고 있는 ‘다른 해적’들을 향한 것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카자크라도 여름이라면 여기에 배를 타고 와야 한다. 섬이니까.
그리고 그들을 실어다 준 이놈들은 명백히 러시아 사람이 아니었다. 그놈들은 활짝 웃으며 마미야를 한 번 걷어차고 대답했다.
“Here‘s looking at you, kid!”
오랜만에 공화국 해군의 전통이 발휘된 것이다. 원조를 데려오면 좋았겠지만 그 원조들에게 들키면 안 되는 일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영국 수병에게 어죽 한 그릇 주고 바꿔 온 옷을 걸치고 머리에는 볏짚을 묶은 그들은 갈고닦은 영어 실력을 마음껏 뽐내었다.
혁명해군은 자신들이 영길리인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흡사하다는 데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수병 자신들뿐이었다.
시준도 ’주석 동지의 도력을 받은 혁명해군의 둔갑술‘ 따위에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일본이 뭐라고 하면 이번에는 영국 대신 ‘러시아의 강압에 못 이겨’ 작전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마미야 린조 역시 속지 않았다.
그는 이들을 우선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의심했다.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애초에 마미야는 평범한 지도 제작자나 탐험가, 측량가가 아니다.
그는 막부에서 운용하는 일종의 정보 조직인 오니와반슈[御庭番衆, 어정번중]의 일원이고 그에 걸맞은 소양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오해와 달리 오니와반슈는 입에서 불을 뿜거나 독 표창을 날리거나 사시미 두 자루로 칼부림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서 이렇게 잡혀 있을 뿐이다.
마미야 린조는 옛날 분카 로코 당시에도 러시아에 대한 결사 항전을 홀로 주장함으로써 (밥값도 못 한 죄를 지은 사무라이들과 달리) 혼자만 나중에 처벌받지 않았다.
뒤에는 막부의 쇄국도 어기고 바다를 건너 아무르 강 유역을 탐험한 다음, 러시아의 지배권이 호언장담과 달리 실제로 만주 극동에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쾌거도 올리는 사람이다.
국제 감각과 민족주의적 애국심, 그를 뒷받침할 역량을 모두 갖추었다는 뜻이다.
상식이 있는 정이대장군이라면 불사나이나 가면남 등등은 차력사 쪽으로 돌리고 이런 인재를 채용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므로 마미야는 사할린에 거주하면서도 당연히 첩보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해 그가 모르면 이상하다.
마미야는 곧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조선인…… 고려인민공화국인가 뭔가 하는 그놈들이군! 이기리스(영국)와 손을 잡았다더니, 이번에는 로시아(러시아) 놈들인가!’
***
마미야 린조의 분석은 오니와반슈답게 정확했다.
토마스 코크란이 불려오기 며칠 전, 시준은 비밀히 주고려 겸 주중 공사 베니그센을 만났다.
“그 섬(사할린)은 문헌에도 명백히 나와 있는 바 만청의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진족 반동의 영토를 모두 몰수한 공화국의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흑룡강으로 정해진 국경에 대해 향후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섬 북반부는 러시아의 영토로 인정하겠습니다.”
이로써 러시아는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확정했던 국경선인 스타노보이 산맥에서 크게 남하하여 흑룡강 이북을 전부 차지하게 된다. 원래 역사와는 이제 연해주 정도만 차이 날 뿐이다.
게다가 사할린 북부까지 얻으니, 러시아는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많은 것을 가져간 국가가 되었다. 이 정도 공짜 횡재면 알렉산드르도 대머리의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원래 역사에서의 일본이 이쪽에서 가질 수 있었던 최대 영역은 러일 전쟁의 승리와 포츠머스 조약으로 얻어낸 북위 4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와 쿠릴 열도였다.
시준은 거기에서 주어만 고려로 바꾼 셈이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완공 뒤의 러시아라면 코웃음을 칠 제안이다. 땅 속성의 궁극을 찍은 러시아인에게 있어 지구의 ‘토지’는 모두 당연히 러시아의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래서 베니그센은 동의했다.
“아무르 강(흑룡강) 이남의 영토를 고려에 양보하는 대신인가? 그 정도면 나도 말해볼 수 있겠군. 설마 임페라토르도 정말 젤토로시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여기진 않았을 테니.”
“그 정도에서 끝나도록 원만한 협의를 부탁드립니다.”
“다시 이를 말인가. 맡겨 두게.”
시준이 이렇게까지 양보하는 이유는 사할린에 숟가락 얹는 것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러시아가 외몽골에서 거의 이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외몽골 부족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 중화 혁명당에 협조했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은 결코 그 영토를 러시아에게 내어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운데 끼어버린 고려는 상당히 난처해진다.
러시아에게 수고했으니 그만 빈손으로 가보라고 할 수도 없고, 중국에게 오족의 하나를 러시아의 말발굽 아래 밀어 넣으라고 권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고려가 전 세계 수평 혁명의 기치 아래 대국적으로 양보했다는 구도를 만든 것이다.
이러면 러시아와 중국은 고려에게는 화를 낼 수 없다. 따라서 서로에게 화를 내게 된다. 공화국으로서는 바라마지 않는 그림이다.
현재의 공화국 역량으로는 손도 댈 수 없는 극북의 토지를 대가로 중국과 러시아 양쪽을 제어할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만’ 남는 장사라면 이는 장기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진정한 상재는 나와 상대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를 기획하는 것에서 발휘된다.
시준이 선뜻 내어준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흑룡강 이북이 옥토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대지 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러시아인에게는 시대에 상관없이 크나큰 선물이다.
베니그센 역시 그 점을 잘 알았다.
“내 얼마 안 남은 생을 다 써서 고려를 비호하도록 하지. 공화국이 바라는 대로 우리는 유럽에서 영국을 막아 주는 방파제가 될 걸세.”
“감사합니다. 우리도 물론 극동아시아에서 영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겁니다. 삼봉도(三峯島, 울릉도라는 설도 있고 홋카이도라는 설도 있으나, 여기서는 현재의 블라디보스토크를 말한다)의 개항도 러시아 제국이 고려에 변함없는 우의를 보여준다면 적극 고려하겠습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일 뿐이라 시기상조이지만요.”
베니그센은 너 영국 앞에 가서도 나라만 바꿔서 똑같은 소리 할 거 아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런 뻔한 것을 굳이 캐는 일은 좋은 외교도, 좋은 사회생활도 아니다.
러시아도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영국과 공동 파병할 계획을 짜고 있다. 그게 어른의 사정이라는 것이다.
허나 아무리 세파에 찌든 어른이라도 정의롭고 청명한 대의에 대한 동경은 항상 있는 법.
두 사람은 마족에 대항하는 인류의 이름으로 손을 잡았다.
***
약간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인류의 대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일본인도 어느 정도 같다.
그렇다 보니 고려-러시아 연합군의 사할린 습격에서 해군 수병들이 보여준 되도 않는 연기는 의외의 파장을 일으켰다.
마미야 린조는 당연히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살아남아 도망친 다른 사람들은 그만큼 똑똑하지 못했다. 민첩성에 투자하느라 지능에 투자할 포인트가 안 남아서였다.
이 두 가지 요인이 합쳐져서, 에도에 올라가는 보고에는 상당히 자신 없는 투의 추정이 실리게 되었다.
“로시아 놈들이야 그렇다 쳐도 이기리스가 거기서 왜 나와? 다시 확인해 보라!”
이런 질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에도 막부가 아직 건전히 돌아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중국 상대하기도 바쁜 영국인들이 대체 왜 머나먼 에조치에 오는가 말이다.
그러나 원숭이가 본능적으로 뱀을 혐오하듯, 인류는 기본적으로 영국을 경계한다.
한편으로는 ‘영국 놈들이라면 혹시?’ 하는 분위기도 무시 못 할 정도로 형성되었다.
그건 이 분위기를 부채질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찌그러져 있었던 사쓰마의 시마즈 가는 선전선동의 앰프를 최대 음량으로 틀어놓고 마약 빤 로커처럼 악을 써댔다(조슈를 통해 들어간 고려약이 사쓰마에 좀 많이 퍼져 있긴 하다).
“분명 이기리스 놈들이다! 그놈들의 천성이 해적이라고 몇 번이나 목 놓아 외치지 않았는가. 이제 북으로 그놈들을 토벌함과 동시에, 남쪽에서는 그놈들의 굴혈인 류큐를 다시 되찾아올 때이다!”
물론 영국과 오래전 평화 조약을 맺었던 막부는 절대 불허 방침을 보냈다.
그러나 ‘안 돼’의 속뜻은 본래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진짜로 안 된다는 뜻이고, 나머지 하나는 나는 모르는 일로 할 테니 네가 알아서 해 보라는 뜻이다. 마미야 린조의 쇄국 위반도 그쪽에 속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조직 생활 좀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능숙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일생 전체를 조폭 서열 안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막부 역시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이게 진짜 영국이라면’ 영국이 두 번 다시 일본에 시비 걸지 않겠다는 약속을 위반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심기’는 금지 명령과 같이 내려온 여러 다른 조치들로 인해 표현되었다.
현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련의 과정이지만, 사쓰마인들은 막부가 보여주는 입과 몸의 솔직함 차이를 바로 깨달았다.
그들은 막부의 지시를 받은 조슈의 떨떠름한 지원(이것도 책임 안 지려는 몸부림이다) 하에 다시 류큐 원정군을 모아 출병했다.
그간 절치부심하면서 입수한 첩보에 따르면 이기리스 놈들은 중국에서 엉망진창 대패하여 꼴이 말이 아니라고 한다.
류큐를 지키고 있을 여유 따윈 없을 터. 왠지 모르게 갑자기 은거에서 뛰쳐나온 시마즈 시게히데는 고토 수복을 위한 대 호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때쯤 재정비와 영국 귀환을 위해 남으로 내려가 류큐에 주둔하고 있던 코크란 제독과 영국 극동함대는 거품을 물었다.
“이제 별 웃기는 놈들이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구나!”
발톱과 이빨을 부러뜨려 놓은 사자가 있다면, 인간이 맨손으로 그 사자를 이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금 영국 해군은 전력을 많이 회복한 상태였다.
베이징에서 구해낸 수병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재편성되었다. 침몰하지 않은 전함의 대부분은 여전히 운용 가능하고 기함인 워스파이트도 건재하다.
아무리 중국에서 깨졌어도 영국 해군이다. 코크란 제독은 화풀이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며 사쓰마 함대를 괴멸시켰다.
그의 수치스러운 이력에 한 줄 승전보를 추가해서 다행이었다. 막대한 포로와 전리품을 획득한 코크란 제독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조그만 놈들은 쓸 만해 보인다. 제군, 제독의 이름으로 허락한다. 이놈들은 제군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
영국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게다가 사쓰마의 불운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류큐에는 ‘수평한 유구 인민들의 요청으로’ 중국에서 돌아온 공화국 해병 1영대도 주둔하고 있었다.
원래 목적은 영국 해군이 류큐에서 고려의 설탕 이권을 침해하지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병대원들은 그런 재미없는 일보다 왜놈들의 엉덩이에 칼을 꽂는 임무가 더 마음에 들었다.
해병대의 용맹도 여전한 것이었지만, 일찍이 검술 역사에 없었던 회피법을 창안한 야쿠마루 나가사에몬이 특히 눈에 띄었다.
그때 공화국에 항복하고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유구 인민회의의 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리까지 받은 나가사에몬은 바로 혁명에 투신해서야 그 출세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원래 사무라이는 출세만 시켜 준다면 어느 진영에서든 잘 싸운다.
나가사에몬은 간신히 상륙한 일부 사쓰마군을 처리하는 바로 그 선두에서 활약했다.
사쓰마 군대는 전국시대 풍으로 붉은 깃발을 등에 꽂은 채 동료들을 도륙하는 이 소태도의 명수를 보며 어이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이 배반자 놈, 네가 그러고도 선비……. 크아악!”
“닥쳐라! 혁명은 언제나 폭풍과 같이 변화무쌍한 것이다!”
뜻 모를 말을 외치며 칼을 뿌려대는 나가사에몬의 위용은 1영대장 김덕춘마저도 감탄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김덕춘은 전투가 끝나는 즉시 그를 해병대의 검술 지도원으로서 초빙했다. 나가사에몬 역시 동지에게 기꺼이 협조하니 전우애는 날로 깊어만 갔다.
그렇게 사쓰마가 다시 한번 문가에서 고개 숙이고 중얼대야 하는 신세가 되자, 시마즈 시게히데는 이번에도 귀신같이 은거했다.
그러나 두 번이나 같은 수법이 통할 만큼 일본 정치가 만만하지는 않다.
궁지에 몰린 아버지가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뒤주에 처넣을 것이라 여긴 아들 시마즈 나리노부는 자신이 먼저 영조의 수법을 쓰기로 했다.
과학군주의 실험정신은 거침이 없다.
물리학 실험에 아들을 썼다면, 의학 실험에는 형을 사용했다.
게장과 곶감은 아니지만, 시게히데에게는 약간 특별한 식사가 바쳐졌다.
시게히데는 소원대로 영원히 속세에 나올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공식적으로는 안 된다는 답만 보내며 사쓰마 손절 준비를 갈고닦던 에도 막부의 현명한 대처도 빛을 발했다.
이제부터 러시아를 상대하며 사할린을 되찾아야 하는 막부는 도저히 영국과도 적대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사쓰마의 단독 행동’으로 합의하는 일도 손쉬웠다. 고려, 영국, 일본 삼국은 다시 평온해졌다.
***
다만 영국의 경우 평온하다는 서술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는 어쩌고 하며 호언할 만큼은 아니지만, 영국도 꽤 여러 군데에 걸쳐 있으므로 일괄적으로 말하기 힘들다.
정확히 말해서, ‘유럽의 영국’의 경우는 동아시아의 영국과 달리 별로 평온하지 않았다.
류큐에서 전투가 마무리되었을 때 영국 본국에서는 다른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19년 8월, 맨체스터 피털루 광장에 모인 6만 명의 군중에게는 그 숫자 말고도 특별한 점이 있었다.
각자가 가진 가장 깨끗한 옷을 입고 나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여기의 군중이 지나가는 길에 기웃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들은 각자의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모였다.
빼앗긴 권리를 요구하는 그들을 ‘프랑스인 같은 불온분자’로 정의한 부자들에게, 우리는 도적 떼나 부랑자가 아니며 그건 바로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칭호라고 일갈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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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일전에 지도 제작자 이노 타다다카가 한번 언급되었었죠. 이 시대 일본은 본격적으로 근대적 국경선을 탐색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됩니다. 마미야 린조의 행적도 원 역사와 같습니다.
2. 마미야 린조가 최초로 사할린을 섬이라고 밝혀냈다(아시아와 사할린 사이에 해협이 있다)는 것은 일본 측 주장입니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네벨스코이가 최초 탐사했다고 주장하죠. 하지만 어차피 최초로 그곳이 섬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13세기에 여길 최초로 침공한 몽골이기 때문에 둘 다 틀렸습니다.
2. “Here‘s looking at you, kid.” 는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나온 건배사로 유명하죠. looking at이 있지만 뭘 보고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경탄스러운 애정 등을 표시할 때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 대사의 한국어 번역인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가 10배 정도 더 멋진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3. 삼봉도는 성종 때 집중적으로 탐사가 시도되었으며 조선 유민이 많이 도망가 살던 섬으로 묘사됩니다. 실록의 항해 기록을 그대로 그려보면 말이 서로 모순되어서 명확히 이거다 하는 데가 없다 보니 지금도 삼봉도의 정체는 논쟁 중입니다.
울릉도나 독도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만, 특이한 건 이 탐사 관할이 강원도나 경상도가 아니라 쭉 함경도였다는 겁니다. 실록에 따르면 함경도 경성에서 ‘날씨가 맑으면 보인다’는데,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경우 울릉도나 독도라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죠. 지도로 살펴보면 경성군에서 어떤 섬이건 육안으로 보인다는 말 자체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아리송한데, 회령에서 동쪽으로 항해해 도착했다는 설을 근거로 심지어 홋카이도라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다만 성종 시대를 기준으로 봐도 홋카이도는 다양한 세력이 얽혀 있던 지 오래라 조선 유민들이 많이 도망갔고 조선에서도 배를 보냈다면 일본에 기록이 있어야 해서 신빙성이 약간 떨어집니다.
그곳이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설도 있습니다. 물론 거긴 섬이 아니지만, 작중 나온 사할린 건에서도 알 수 있듯 전근대에는 항해에서 도착한 곳이 섬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끝에는 실제로 루스키 섬이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것도 실록의 기록에서 (삼봉도에 도착한 이후)‘4일 밤낮을 북쪽으로 항해하여 돌아왔다’고 해서 부정됩니다. 작중에서 시준이 삼봉도라고 이름을 붙인 건 무슨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달리 부를 이름이 없어서에 가깝습니다.
4. 슬라보예 지젝의 인터뷰는 2008년의 것입니다. 그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이 저거였죠. 앞의 내용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철학자답게(?) 참 삐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인터뷰입니다.
여담으로 여기에서 지젝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라는 질문에 작중 시점인 19세기 초로 회귀하고 싶다고 얘기합니다. 이유는 헤겔의 철학 강의를 직접 들어보기 위해서.
5.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뱀을 죽이려 드는 경향성이 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영장류뿐만 아니라 인간과 유전적 유연관계가 있어 같은 영장상목에 속하는 ‘쥐’의 대표적 천적도 뱀이라는 게 재미있지요.
6. 피털루 광장에서의 시위 때 ‘깨끗한 옷차림’ 얘기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편에 좀 나오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