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93.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2)
시준과 정약전의 생각은 둘 다 맞았다.
우선 시준의 생각대로, 정약용에겐 조지당을 무장시켜서 런던 불바다를 만들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정약용은 공식적으로 조지당과 아무 연관이 없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비슷했다.
막후 조종자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는 경찰이 범죄자에게 제발 조사를 받아 주십사 하며 굽실대야 하는 21세기가 아니라서, 눈 가리고 아웅 정도의 수작으론 아무리 외국 공사라도 혐의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정약용은 ‘정말로’ 조지당에 아무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군자는 항상 미연에 대비하며, 의심받을 만한 곳에는 가지도 않는다. 오이밭에서 신발을 꿰지 않고 오얏나무 아래에서 관을 고치지 않는 법[君子防未然 不處嫌疑間 瓜田不納履 李下不正冠, 『고악부(古樂府)』]이니 소련 사람들이 글만 좀 읽었어도 능히 대숙청을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전의 생각도 맞았다.
그렇다고 해서 정약용이 혁명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이밭에서가 아닐 뿐 신발은 튼튼히 신고, 오얏나무 아래가 아닐 뿐 관은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현재 조지당에 부족한 엘리트 계층의 역할을 충실히 해 주는 ‘웅변가’ 헨리 헌트(Henry “Orator” Hunt) 역시 그런 사정을 헤아리는 인사 중 하나였다.
헨리 헌트는 항상 하던 대로 공사관이 아닌 로스차일드 은행 모처에서 비밀스럽게 정약용을 만났다.
이 사람은 실로 영국의 조제프 푸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배신 의존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타고난 선전선동부장이라는 의미다.
오히려 배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휘그당과 토리당 모두를 썩어빠졌다고 비난하며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최전선 투사로 선언한 그의 명연설은 3년 전 런던 스파 필드(Spa Fields)의 대폭동을 유발했다.
그래서 정약용 또한 그를 주목하고 있던 참이었다. 영길리 땅에도 혁명의 인재가 있었다.
과연 헨리 헌트는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해 주었다. 맨체스터와 리버풀, 브리스톨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헌트는 런던 조지당의 외연 확장에 큰 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실질적 지도자이기까지 했다.
그런 만큼 지금의 언변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만민 평등과 정치 참여는 그 본보기를 고려인민공화국에서 가장 잘 보여주었습니다. 저 아메리카는 고귀한 자유와 평등을 그저 껍데기로 내세워서 자기들만의 산적 성채를 꾸리고 싶은 부랑패들일 뿐이지요. 워싱턴에게는 조지라는 이름을 쓸 자격도 없습니다!”
워싱턴을 본받고 싶어 하는 시준은 꽤 상심할 것이다. 허나 헌트의 연설은 멈추지 않았다.
“거기서는 여전히 부유한 백인 남자만이 다른 모든 사람을 지배합니다. 그 가소로운 선언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란 노예에게 채찍질할 권리만을 말합니다. 그러나 공화국만은 다르기에 세계의 모든 핍박받는 사람이 정시준 의장을 등불로써 바라보는 것입니다.”
정약용은 지금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닌 헨리 헌트가 왜 이런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는지 궁금했다.
정약용의 예상대로 헌트에게는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공화국의 대의는 더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어야 합니다. 더 타임스가 현재 고려에 대한 독점적 보도권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들은 사실 몸을 사리고 있지요. 월터 씨는 런던에 뿌리를 둔 데다 몇 번이나 필화를 입은 적이 있으니만큼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영국에 진보적 신문이 더 타임스만 있는 건 아닙니다. 『더 맨체스터 옵저버(The Manchester Observer)』는 월간 대혁명의 최우선 수령을 위해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고려인민공화국에서 공식 창구로 지정하는 것은 현재로서 조심스러우시겠지만, 그 정도만 해 주셔도 동지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겁니다.”
더 맨체스터 옵저버가 애국연합[Patriotic Union Society]을 결성해 급진 진보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눈앞의 이 남자도 그 일원이라는 사실쯤은 정약용 역시 아는 바였다.
그러나 원래 역사에서 이 애국연합이 불과 넉 달 뒤 맨체스터에서 일어날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고, 그에 따라 랭커셔 역사의 한 장을 붉게 적실 피털루 대학살[Peterloo Massacre]을 촉발한다는 사실까지는, 정약용은 물론 시준도 모른다.
그러나 현지에서 이들과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던 정약용은 회귀자보다도 더한 정확도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곧 사고를 친다.
그리고 정약용은 그것과 본국의 전쟁을 맞물려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양력으로 1819년 4월. 정약용이 이 시점에서 받은 최신 소식은 영국의 진강현 전투다.
당시 코크란 제독과 동인도 회사의 필사적 노력으로 영국인들은 ‘상하이를 침공하는 중국군을 영국군이 막아내어 승리(틀린 말까진 아니다)’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공화국의 연락을 받은 정약용은 달랐다.
정찰총국은 그간 정약용의 ‘소개’로 각지 영국 공사관이나 해군 기지에 은근슬쩍 더부살이했다.
돈 따로 많이 들이지 않고도 영국의 신속한 세계 연락망에 기생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이를테면 정약용과 선비의 교유로 서적을 주고받던 마드라스 총독 휴 엘리엇 같은 사람이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정약용은 영국의 ‘대본영 발표’에 속지 않을 수 있었다.
‘영길리는 이미 군세가 파멸한 거나 다름없다. 주석 동지의 광명영도가 이 호기를 놓칠 리 없어.’
아마도 공화국은 청과 영국이 공멸한 폐허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 할 것이다.
경제 쪽에서는 벌써 조치가 다 끝났다. 영국 국채와 동인도 회사 주식은 이미 매각을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의 경우 공매도까지 걸었다. ‘승리 소식’ 들은 호구들이 급히 사들여 줘서 다행이었다.
단순히 최종 패배가 알려져 떨어지기 전에 판다는 단순한 전략이 아니다.
왕 첸 리딩방에서 영국의 패배를 예견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국채 구매는 급감한다.
영국 정부는 전쟁국채를 통한 비용 조달의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이는 영국이 극동에 다시 한번 군대를 파견할 의욕을 꺾을 수 있다.
남은 것은 정치다.
정약용도 이 시대의 영국 자체에 혼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는 사실은 잘 알았다.
과거 막부를 친다고 해서 왜구가 평정되는 게 아니었듯, 영국은 정부를 마비시킨다고 멈추는 국가가 아니다.
다른 말로는 근대국가의 복잡성과 방대함이라고도 부르지만 정약용이 보기에는 왜구 쪽 설명이 더 익숙했다. 어쩌면 왜구는 그저 실패한 대영제국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정약용이 취할 방향은 영국 정치의 틀 내에서 지지기반을 늘리는 것이었다.
영국의 급진파 정치가는 헨리 헌트 말고도 많다.
휘그당, 토리당 양당에 속하지 않으면서 여성과 노동자 참정권을 주장하는 정파는 무시해도 될 정도로 작지 않다.
당장 현재 평양에서 추레하게 김치 얻어먹고 있는 토마스 코크란도 그중 하나다.
영국의 정치 세력 중 공화국과 가장 유사한 이 급진파의 수를 늘릴 수 있다면 공화국의 대영 외교에 큰 도움이 된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양당정치가 마치 창세 이래의 진리인 것처럼 인식되는 영미 정치계도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더욱이, 전쟁 이후의 불만 요소를 확실히 통제하지 못하는 현재의 영국 민심은 한 마디로 말해서 개판이다.
공장주들은 전쟁이 끝나서 물가가 내려갔으니 마땅히 임금이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주들은 다른 물가는 내려가도 좋지만 자기들이 파는 곡식의 값은 내려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귀하고 높고 부유하신 분들의 뜻은 즉시 이루어졌다.
그들이 도시 노동자 임금 수준을 반토막도 아니고 1/3 수준으로 ‘하락’시키기 위해서는, 무슨 조잡스러운 장갑이니 보석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임금은 사장 돈으로 주는 것이므로 사장의 자유다.
자유 시장의 이름으로 반론은 용납될 수 없었다. 꼬우면 똑같이 담합한 다른 공장 가면 된다.
동시에, 외국 곡물의 수입을 원천 봉쇄해 버린 곡물법은 영국 의회의 처리 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마련되었다.
선거 제도의 개선과 투표권 확대는 다음 번 빙하기와 동시에 도래할 기세였지만, 이 곡물법만은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1815년에 바로 제정됐다.
산업화에 필수적으로 따라와야 하는 게 저곡가임을 감안할 때, 영국의 소위 ‘산업혁명’도 정향적(定向的)이거나 의도적인 건 아닌 셈이다.
불쌍한 조지들은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죽어갔다.
이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 노동자의 투표권 획득이었다.
그러나 토리당은 나폴레옹 전쟁 내내 ‘비상시국’ 핑계로 하층민의 요구를 외면했다.
물론 그런 비상시국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나폴레옹은 없지만 아무튼 국가의 적은 있다. 부정하는 놈은 그놈이 바로 국가의 적이다.
토마스 코크란도 격렬히 비판했던 바 있는 부패 선거구의 개혁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유권자의 표는 여전히 돈 주고 사는 것이었고, 가성비 좋게 표를 사들이기 위한 선거구 조정은 기상천외라고밖에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심지어 대표자보다 선거인단이 적은 선거구도 있었다.
개인의 성실한 노력은 부의 획득이나 명예로운 성공과 별로 관계가 없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번영 역시 정부의 합리성이나 사회의 건전성과는 무관하다.
이렇게 막 살아도 대영제국은 대영제국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나라가 유지되겠느냐’는 상식적 질문은 항상 옳지 않았다.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독일, 프랑스, 소련 등 이 시대 이후의 강대국 전부가 일제히 ‘되는데요’로 화답했다.
초원의 톰슨가젤이 매번 잡아먹히기만 한다고 해서 생태계가 붕괴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착취자는 착취자로, 피착취차는 피착취자로 남아 있어야 생태계가 유지된다.
하지만 그건 짐승의 논리다.
조지들은 사람이다.
그리고 혁명은 사람의 것이다.
물론 위험 부담은 있다. 정약용은 행동 하나하나가 공화국을 대표하며, 자칫 잘못하면 심대한 외교 마찰로 이어질 수 있다.
허나 정약용이 판단하기로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암허스트 같은 놈도 공사라고 보낸 영국의 행태로 봤을 때 외교관의 ‘돌출 행동’ 정도는 언제든지 무마 가능하다. 전화기가 없어서 오해가 발생했다는 변명이 가능한 시대니까.
최악의 경우라도 자기가 공사 자리에서 쫓겨나면 그만이다.
뭐 하나 잘못 까딱하면, 아니, 까딱 안 해도 왕 기분에 따라 모가지의 위치와 운동량이 결정되던 조선의 정치판에 비하면 영국은 매우 신사적이었다.
활줄 옆에 풀어놓고 탕약 들이키는 것도 아니고 큰 칼에 목이 썰릴 염려도 없다.
언론의 비난이나 상위 계층의 추방, 잠시의 수감 생활(헨리 헌트도 몇 번 갔다 왔다) 정도는 조선의 선비에게 고난 축에도 안 든다.
유럽이 민주주의적이다 보니 전제 군주 대신 웬 시민의 손에 총 맞아 죽을 위험은 있지만(조선을 개항시킨 총리 스펜서 퍼시발도 정약용 부임 한참 전 그렇게 죽었다), 그건 여기도 총이 있으면 해볼 만 하다.
조선 정치 박해의 마스터 집안 출신 정약용에게는 위험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을 출현시켜 영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박의 판돈으로는 저렴하기까지 하다.
그런 사고를 순식간에 진행시킨 정약용은 헨리 헌트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선물을 주었다.
“비록 지금까지는 대놓고 말하지 못하였으나, 이제야말로 혁명 동지가 생겼으니 어찌 더 숨기거나 주저할 수 있으리. 월간 대혁명은 물론이고, 내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약방과 총포사에서 그 신문과만 광고를 계약하도록 권하겠소.”
21세기처럼 기업들이 광고로써 언론을 지배하는 단초는 빨라도 반세기는 더 지나야 형태가 보인다. 하지만 이때도 유료 광고 체계 자체는 익숙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헨리 헌트도 크게 놀랐다.
베이커 가에 간다는 말이 왕 첸에게 간다는 것과 동의어로 통하는 두 회사는 광고가 필요 없다.
안 그래도 잘 팔리는데 광고를 왜 하는가. 21세기에 편의점 삼각김밥 광고를 안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이것은 왕 첸 그룹의 홍보가 목적이 아니다.
왕 첸 사냥용품점과 왕 첸 약방이 더 맨체스터 옵저버를 ‘거의 공식적으로’ 후원한다는 얘기다.
바보가 아니라면, 이게 고려인민공화국이 영국 내에서 급진파와 친하고 싶다는 신호라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정치가인 헨리 헌트는 이게 얼마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인지 잘 알았다.
그의 생각에, 자칫하면 극동에서 ‘승전을 이어가는’ 영국군이 고려에 칼날을 돌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약용은 단호했다.
“용기란 무엇인가?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오. 혁명이란 무엇인가? 망설이지 않는 것이외다. 우리 공화국은 동지들 앞에서 이것저것 재어 보며 협잡하지 않소. 주석 동지의 광명영도에는 의심과 지체가 없소이다.”
헨리 헌트는 정약용의 손에 입이라도 맞출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 말씀에 저는 가장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공사 각하! 반드시 이 영국 땅에도 ‘평평한 물의 사상[水平道]’을 펼치도록 하겠습니다.”
***
비슷한 이유로, 토마스 코크란 역시 평양에서 꽤 높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평양에서’ 대접받는다는 게 중요하다. 시준은 그에게 삼화부를 벗어나 평양에 머무를 수 있는 특권을 부여했다.
동맹군의 사령관이라는 명예로운 지위에 상응하는 대우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물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코크란이 원정 초기 존 레디와 이야기한 대로, 그는 전부터 시준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는 코크란이 상상할 수도 없었던 최악의 방식이었다.
코크란은 영국군이 중국이고 고려고 다 박살 낸 다음에 시준을 껄끄럽게 만날 상황에 대해서 걱정했지, 자기가 박살 나는 미래는 생각도 못 했다.
하긴 코크란이 명심보감을 안 읽어서 그렇지, 인생이란 게 원래 아침저녁으로 예측불허이긴 하다.
지금 토마스 코크란 제독과 수천 영국군은 오로지 정시준의 호의에 의지해 먹고 사는 상황이다.
만약 여기에서 말을 잘못하면 공화국에서 치료받고 있는 부상병들의 목숨부터 장담하지 못한다.
지금 영국군이 얼마나 눈치를 보고 있는지는, 영국군이 삼화부에 머무르면서 저지르는 범죄가 극히 적다(없지는 않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코크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시준을 만나면 토론해 보려던 여러 정치사상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선원이 없어서 포기해 버린 중소형 포함이나 수송선 몇 척을 ‘수리’한다며 은근슬쩍 가져가 버리는 혁명해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소한 일은 전혀 알지 못하는’ 시준은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평소부터 제독이 가진, 정의와 인권에 기반한 사상을 매우 높이 평가해 왔소.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다행이오. 부디 근래의 아픔을 잊고 편히 쉬다 가시오.”
코크란은 의례적인 감사의 말만 중얼거렸다.
공화국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주요 덕목인 사상으로 봤을 때, 코크란은 혁명적인 편에 속했다. 따라서 시준 입장에서 코크란을 증오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적당히 싸움 못하는 바람에 – 시준의 생각이다. 실제로는 유능한 해군 지휘관인 코크란으로서는 억울해 미칠 것이다 - 영국군을 청군과 함께 말아먹어 주기까지 하였으니 마음 같아서는 매우 좋아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시준은 그 마음을 표현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꽤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고 들었소. 전쟁이 거의 끝났으니 동맹군으로서 더 도울 건 없지만,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주가 조작범으로 감옥 가는 신세 면하게 해준다는 말에 코크란은 귀가 번쩍 뜨였다.
생각해 보면 그가 당장 징역 살지 않고 원정군 제독에 차출된 것도 정약용의 도움이 컸다.
“전후 협상도 도울 겸, 슬슬 주영 고려 특명전권교사도 교체할 겸 해서 제독도 아는 우리 정부 농업의류장관(이강회)이 영국으로 떠날 것이오.”
“그렇습니까?”
정약용을 소환하는 대신 이강회를 보내기로 한 것은 정치국 결정이었다.
이제 자식이 커서 댈 핑계도 없는 이강회는 그냥 체념했다. 사숙이 되는 정약전이 죽기 전에 동생 좀 보고 싶다는데 분위기상 다시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그렇소. 그때 ‘제독의 전공에 대한 오해’가 나오지 않도록 양국의 입장을 잘 조율해야 하겠지요.”
코크란은 침을 삼켰다. 알아듣기 어렵지 않은 말이었다.
그 무능의 대명사 윌리엄 드루리조차 이긴 중국군에게 대패했다는 사실이 정당화되려면, 중국군을 실제보다 더 강대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사력을 다한 영국군이 어쩔 수 없이 패퇴하자 고려가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어 끝내 극적으로 승리하였다는 그림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합의한다면 말을 맞추는 게 어렵지는 않으리라. 패전을 목도한 영국군 장교들 역시 앞으로 군대에 몸담고 싶다면 코크란의 계획에 기꺼이 동조해 줄 것이다. 병사한테는 묻지도 않을 테니 상관없다.
그래서 코크란은 다른 것을 물었다.
“저는 비록 패장이지만, 그렇게까지 우둔하지는 않다고 자부합니다. 의장 각하. 이 호의에 대해 제가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입니까?”
“허허. 나는 단지 평생 사람 돕기를 좋아했을 뿐이오. 대가라니 참으로 차가운 말이구려. 그저 나중에 제독께서도 기회가 되면 우리 공화국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고맙겠소.”
평생이라고 해 봐야 코크란 제독의 반밖에 안 되는 시준은 뻔뻔하게 웃었다.
심지어 제독조차 낯짝 두껍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긴 이미 큰 인륜을 하나 어겼는데 이제 와서 시준이 무엇에 부끄러워하겠는가.
그래서 코크란은 시준이 해야 할 말을 대신해 주었다.
“새삼 지위에 집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만민 평등에 대한 제 신념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서도 제가 무사할 수 있다면 마땅히 영국과 공화국의 우의를 견실히 하는 데에 모든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코크란이 선거 개혁파이면서도 부패 선거구 출신자라는 점에 대해 냉소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건 현재 영국 정계의 막장스러운 맥락을 고려하여 평가해야 한다.
이는 코크란의 위선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정의감을 상징한다. 자기 이익기반을 포기하는 정치인은 21세기에도 거의 없다.
실제적인 면에서 봐도 코크란의 장담은 빈말이 아니었다.
중국의 힘을 과장하는 것은, 코크란의 패배를 정당화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의회와 동인도 회사 이사회로 하여금 극동아시아 정복 정책을 포기하게 하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코크란은 그의 정치군사적 입장상 공화국의 편을 들어도 그다지 큰 위화감이 없다.
그는 정치적 급진파이며, 군사적으로는 공화국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말이다.
시준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요.”
정약용과는 당연히 어떤 협의도 없었지만, 정약전의 말은 시준에게 큰 힌트를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먼 거리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목적으로 영국의 정치가들을 포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코크란 역시 어느 정도 안심하게 되었다.
그는 앞으로의 ‘오해를 없이 하는 일’에서 시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수평도에 대한 여러 찬양을 늘어놓았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말에 가장 잘 설득되는 법이며, 원래부터 호의적인 사상이었다면 더하다.
코크란은 어느새 자신의 급진주의적 사상을 수평도로써 완성해 가고 있었다.
그러느라 바쁜 나머지 코크란은 한 가지를 물어보는 것을 잊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위축된 상태라도 이건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토마스 코크란은 분명히 평양 인근에 있었을 2천에 가까운 카자크 병사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러시아가 이 협상 과정에서 무엇을 받았는지도.
2. 정약용의 대사 중 ‘뒤돌아보지 않는 것’ ‘망설이지 않는 것’ 이라는 대사는 일본 드라마 ‘우주형사 갸반’의 주제가 가사인 ‘젊음이란 무엇인가? 뒤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망설이지 않는 것이다[若さってなんだ 振り向かないことさ / 愛ってなんだ 躊躇わないことさ]’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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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먼저,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오늘이 완결편이 아니며 아직 다소 남았습니다(중요).
완결과 관련된 사항은 공지와 같습니다. 일전 한 번 종막이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처럼 예정된 결말이었고, 특별한 변동이나 사고가 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로서 2부에 관한 구체적 일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겠지요. 외전 정도는 약속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완결 후 금방은, 어쩌면 꽤 오랜 기간 외전이나 후속작이 나오지 않을 수 있기에 이렇다 할 장담을 드리기는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다음에 독자분들을 만날 무대가 본작의 외전이나 2부일지, 아니면차기작일지는 알 수 없지만 완결 후에도 기억해 주신다면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아래부터는 언제나와 같은 여담입니다. 천천히 즐겨 주세요.
1. ‘웅변가’ 헨리 헌트는 영국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한 사람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헨리 헌트와 피털루 학살, 그 과정에서 참여한 인사 및 언론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작중에서 언급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더 맨체스터 옵저버와 애국연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의 영향이 없었더라도 이때는 차티스트 운동의 단초가 시작되던 때이며, 1819년 8월 맨체스터 피털루 광장에서 일어난 시위는 무자비한 유혈 진압으로 끝나나 일반 참정권 운동은 이 이후로도 계속됩니다.
3. 대본영 발표라는 건 일본이 2차 대전 중 자국 국민들에게 거짓으로 너무 티나는 가짜 승전보를 계속 내보내자 이를 비꼬기 위해 당대에 생겨난 말입니다. 대본영은 당시 일본군의 총사령부.
4. 나폴레옹 전쟁 이후 치솟았던 물가가 원상복구되는 과정에서, 임금도 대폭 깎입니다. 미숙련 섬유노동자 기준으로 원래 주급 15실링이 4~5실링으로 감액되죠.
그런데 이러면 물가, 특히 식비 역시 이 수준으로 내려가야 생활이 유지되는데, 어쨌든 자기는 손해 보기 싫었던 지주들은 곡물법을 제정합니다.
현대인의 감에 맞게 적당히 패러디하면, ‘쌀값이 20킬로그램 한 포대에 100만원이 되기 전까지는 외국 곡식을 수입하지 않는다’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지주가 많았던) 콘월은 의석 44석, 인구가 훨씬 많은 런던은 단 4석인 상황이라 법은 사실상 부자들 마음대로였습니다. 이 곡물법도 차티스트 운동의 중요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