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93.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1)
중화 혁명당의 위원들은 임칙서에게 강권했다.
“위원장 동지. 듣기로, 고려국에서는 열병을 할 때 장수들이 맨손으로 돌과 나무를 쪼개어 용맹을 자랑하는 풍습이 있다 합니다.”
딱 한 번 했던 일이 왜 풍습씩이나 되어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전통이란 게 원래 그렇다. 임칙서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들었소.”
“그러자 태사의(太師椅)에 앉아 그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던 정시준 진인이, 가소롭다는 듯 썩 나서서 맨손으로 평양성 대동문을 깨뜨렸다지요!”
“거짓말하지 마시오!”
“거짓말이 아닙니다. 공화국의 혁명 동지들이 입을 모아 증언했습니다. 이 정도는 해 주셔야 합니다, 위원장 동지!”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느냐는 항변은 통하지 않았다.
저 여진족의 군세도 정정당당하게는 들어오지 못했던 이 북경성을, 대부분이 빈민과 도적 떼 출신인 중화 혁명당이 드높은 신심만으로 함락한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마족 영길리조차 잠시의 점령 후에는 후퇴해야 했던 직례를 널리 혁명 정신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은 말이 되는가?
천지가 뒤집히고 전후가 뒤섞이는 것이 현재 이 세계의 ‘상식’이고 ‘법칙’이다.
따라서 임칙서도 혁명 동지들 앞에서 뭔가 보여줘야 했다.
반동의 군주는 애비에게 물려받은 혈통 외에 무언가를 증명할 필요가 없지만, 수평한 인민들에게 길을 인도하는 자는 항상 그에 걸맞은 자격을 요구받는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수평한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마땅하니까.
그래서 임칙서는 옥좌에서 탈거되어 눈앞에 놓인 ‘정대광명(正大光明)’ 현판을 보고 거친 숨만 몰아쉴 수밖에 없었다.
종(宗)이란 근본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뿌리만 있을 때는 근본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계승’을 전제한다.
아무 대가 없는 권력의 상속. 그것이 바로 반동이 그 고여 썩은 물을 더욱 견고히 하는 방법이다.
이 현판은 그 청의 계승을 상징한다. 이 정대광명 현판 뒤, 청의 황제가 저위밀건하는 상자가 있다.
도광제가 무엇을 적어 그 상자에 넣어 놓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산해관으로 면개와 같이 도망친 서명아 같은 자들이 신경 쓸 문제다. 아마 십중팔구는 면개의 부드러운 황위 계승을 위해 벌써 없애 버렸으리라.
그래서 임칙서는 이 현판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긴장으로 응축된 그의 시야에는 그저 이 현판이 매우 크고, 두껍고, 단단한 나무라는 사실만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중화 혁명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이다.
임칙서는 곧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이 행사의 핵심 선언을 부르짖었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만세!”
궁지에 몰린 한 남자의 처절한 기합 소리와 함께, 고려인민공화국과 유구인민공화국에 이은 이 세계 3번째의 인민공화국이 탄생했다.
***
정 진인과 달리 진짜로 태사의에 앉아 있던 송주령이 낄낄대며 물었다.
“그래서, 쪼갰나?”
“사람이 그걸 어떻게 해! 팔이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 장정 세 명이 도끼를 들고서야 겨우 부쉈다. 이런 개망신이 어디 있어?”
송주령은 별로 개의치 않는 동작으로 일어섰다.
“너무 상심하지 마라. 사람의 기억은 뒤죽박죽 섞이기 쉬워. 자기가 그걸 바라고 있다면 더욱 그렇지. 동지들은 틀림없이 그대가 정대광명 현판을 맨주먹으로 산산조각 냈다고 얘기할 거다. 정시준과 마찬가지야.”
그녀의 어깨에 걸쳐진 혁명군의 붉은 주의(周衣, 두루마기. 여기서는 코트)가 흔들렸다.
통일된 복색이랄 게 없는 인민해방군인 만큼 사령관이 고려 혁명군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것도 크게 괴이하지는 않았다.
괴이한 것이라면 정말 그 두루마기‘만’ 걸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임칙서는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송주령은 소매에 팔을 넣지도 않았다. 어깨에 의지한 채 천천히 흔들리는 두루마기 자락은 차라리 옷이 없는 것보다 더한 유혹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저 투박한 남자 옷, 그중에서도 군복이니 맵시 있는 단장이라고는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두루마기는 어떤 나삼(羅衫)보다도 야성적인 은폐를 보여주었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더없이 강력하게 드러내었다. 시준이 있었다면 와이셔츠에 대해 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임칙서가 예의의 이름으로 질타할 처지는 못 되었다. 그 역시 비슷한 차림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지난밤을 명청 황제들의 동방(洞房, 신혼방)인 곤녕궁 동난각(東暖閣)에서 보냈다.
아무튼 기랑의 스승답게, 송주령의 ‘미인계’는 백발백중이어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둘 중 하나가 황제가 되겠다거나 하는 반동적인 발상은 아니다.
여기는 북경의 중심 자금성에서도 가장 내밀한 곳이며, 따라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복벽파의 습격에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송주령은 자기가 앉아 있던 보좌를 맨발로 밀어 치우고 그 뒤쪽의 덧창을 열었다.
저격을 걱정한 임칙서의 주장으로 – 사실 다른 이유로 - 닫아 두었으나 그녀는 애초에 그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깥의 시끌벅적한 고함 소리와 쇠붙이 소리가 찬 새벽 공기와 함께 우르르 밀려들어 왔다.
“동지들이 벌써 일어나서 잘 해주고 있군.”
무엇을 ‘잘 해주는’지 물을 필요가 없는 임칙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경에는 거대한 자석이 떨어진 듯 했다.
궁중에 있는 모든 무기나 누대에 걸쳐서 쓰인 제기며 술잔은 물론, 문고리 장식부터 도광제도 애용하던 여러 화로까지 쇠붙이라면 전부 끌어내서 모으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내관이며 조신들은 오래전 달아났거나 처형되었기에 별다른 폭력은 없었다. 인민해방군은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금속기를 쌓아 올렸다.
공화국이 현재 무기 생산에 쓰는 여러 대형 노(爐)라든지, 콜브룩데일(Coalbrookdale)의 제철 공장을 모방해 만들고 있는 황주의 제철소 같은 건 현재의 중국 형편에 좀 어렵다.
기술이나 자본의 문제라기보다 치안과 지배의 문제 탓이다.
중화 혁명당은 직례는커녕 북경에 대해서도 구석구석 통제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거대한 유격대에서 탈피해 안정적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직 한 것보다 할 것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인민해방군은 일단 이런 식으로 고철을 수거해 되는 대로 창검이며 총신(이건 좀 좋은 쇠여야 했다)을 만들었다.
높은 노[高爐]가 필요한 건 동일하나, 중국에는 중국 고유의 방법[土法]에 따른 물건이 제격이었다.
물론 임칙서가 아무리 대장정을 했어도 마오쩌둥만큼 멍청한 건 아니었다. 쇠를 선별하고 녹이고 두드리는 과정은 혁명당 안에 포함된 장인 가문 출신 동지들이 전담했다.
이는 앞으로의 투쟁에 필요한 자재를 조달한다는 것 말고도 다른 의미가 있었다.
송주령이 말했다.
“진시황이 천하를 평정한 이후 무기를 모아, 하나에 천 석 무게가 되는 열두 개의 금인(金人)을 만들었다지. 맞나?”
“고서에 그런 말이 있지.”
“어떻게 생각하나?”
임칙서가 그저 송주령에게 밤에도 낮에도 지는 사람이었다면 송주령은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칙서는 단호하게 말했다.
“반동의 소치다. 무(武)로 세상을 뒤덮은 자는 마땅히 무에 의해 혁명당할 각오를 했어야 한다. 그것이 수평이다. 그러나 진시황은 화평이니 뭐니 하는 비겁한 말로써 천하의 무기를 없애려 했다. 그게 과연 육국을 군사로 멸한 자가 할 소리였단 말인가?
나는 남을 베어도 되지만, 남에게 베이기는 무섭다는 비겁자의 피신에 불과하다. 혁명이 영구 투쟁이라는 말은, 언제나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송주령은 그의 연인을 돌아보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그래서 우리는 거꾸로 솥을 흩어 병장기를 만들고 있는 거야. 우리는 항상 영구한 싸움을 준비한다.”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정시준의 전갈을 그대도 받았겠지?”
임칙서는 움찔했다.
정시준은 영국과의 종전 협상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중화 혁명당은 영국과 직접 교류가 없으니 어찌 보면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는 중국 영토에 대한 협상에 고려가 끼어들 여지를 주는 것이기도 하다.
본래 고려인민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협상 사안은 만주에 대한 것뿐이다. 중국의 6개 개항장이나, 영국인들이 요구하는 청의 유산에 대해 그들은 어떤 간섭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정시준은 끼어들었다.
이름이야 여러 가지로 변천이 있다 해도, 브로커의 역사는 인류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점토에 중고거래 사기꾼 리뷰를 작성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정시준이라는 인간은 원래 그쪽이 본업이다. 그가 여기서 아무 이득도 가져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웠다.
“공화국 국무당 정치국은 수평삼국지계(水平三國之計)를 강령으로 세웠다. 확실히 대국적인 안목이긴 해. 나머지 반동의 세계 전부에 맞서 중국, 고려, 유구 삼국이 솥발처럼 튼튼히 서로를 지탱한다는 게 정치국의 공언이었지.”
결국 중요한 순간에는 학문의 근간이 삼국지연의밖에 안 되는 시준의 한계였지만 그래도 이 슬로건은 그럭저럭 먹혔다.
특히 내심으로는 언제 고려나 중국에 먹힐지 걱정하던 유구 사람들이 크게 환영했다.
그러나 송주령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고려는 이득이 없어도 우리 공화국…… 이렇게 말하니까 헷갈리는군. 우리 중공(中共)을 돕겠다는 게 공표한 바야.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그렇다면 정시준은 가장 중요한 사람을 빨리 돌려보냈어야 해.”
“황제 말인가?”
“아니. 영길리 공사.”
임칙서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송주령은 다시 태사의에 앉았다. 그녀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괸 채 턱을 받치고 다리를 꼬았다.
“이건 이 전쟁이 어떻게, 언제, 어디서 끝날지 고려가 정하겠다는 얘기다. 우리도 가만히 끌려다닐 수는 없어. 주체 두 글자를 잃으면 혁명은 식언일 뿐이야.”
“고려와 싸우겠다는 건가? 그건…….”
산동에서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는 북두맹이나 옛날에 시준에게 도움받은 천리교 잔당을 비롯하여, 중화 혁명당 내에는 정시준을 추종하는 세력이 많다. 아니, 솔직히 말해 임칙서부터가 친고려파다.
다행히 송주령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다만 정시준이 많이 썼던 방도를 우리라고 쓰지 못할 리는 없다는 거지.”
“무슨 방도지?”
“상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을 찌르는 것. 정시준은 이것만으로도 혁명의 태반을 이루었다. 우리도 그렇게 해 보자.”
송주령은 마치 이제 아침 식사를 하자는 듯한 투로 말했다.
“산해관에 도망쳐 웅크리고 있는 망조의 유신들을 친다.”
“뭐?”
“네 말처럼 투쟁은 끝나선 안 돼. 당 중앙군사위원회에서 내세울 이유가 필요한가? 그럼 내어주지. 자칫하면 애신각라 면개가 오삼계를 본받아 산해관을 열어버릴 수도 있다.”
임칙서는 신음을 흘렸다.
그 또한 혁명의 열의 하나만으로 모든 나라가 적기 아래 영원한 화호를 맹세하리라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다.
순망치한이라. 중화 오족 인민의 신의와 상관없이 고려는 요서에 ‘입술’을 만들고 싶을 터. 임칙서 자신이 정시준이라도 그 생각은 해 봤을 것이다.
“고려가 쳐들어오리라 여기나?”
“아니. 하지만 산해관과 거용관(居庸關)에 은근슬쩍 군을 머무르게 해 놓은 채 장성 일대를 고려의 것이라 주장할 수는 있지. 그런데 우리는 지금이 아니면 어차피 외정이 힘들어.”
왜냐하면 이제 슬슬 혁명전쟁이 끝나가기 때문이다.
전쟁 때 외부와의 단결이 잘 된다는 오래된 상식은, 거꾸로 말하면 평화기에는 단결이 잘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임칙서는 정시준처럼 유일무이한 지도자가 아니다.
계룡산에서 도를 닦지 않았던 탓에 시준처럼 다종다양한 천지조화도 일으키지 못했다. 이젠 동자공도 못 쓴다.
그렇다 보니 아쉽게도, 혹은 건전하게도 중화 혁명당은 임칙서나 송주령 개인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처럼 언어와 문화가 같지도 않고 면적과 인구는 비교도 못 하게 막대한 대륙이 ‘하나의 중국’으로 나아가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구심점이 없으니까.
이미 혁명당 중앙위 내부 파벌에 따른 요구 사항은 다 정리하기도 싫을 정도로 빗발치고 있다.
오족 모두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줘야 하는 건 물론이요, 내몽골 쪽은 벌써 만주족에 이은 제2의 반동으로 찍혀 당장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한 처지에서 정시준이 옛 고려의 영토가 고도(古都) 계(薊, 연나라의 수도. 현재의 북경 인근)까지 미쳤음을 주장하며 밀어붙인다면, 내부가 혼란한 중화인민공화국으로서는 거절하기 힘들다.
어차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아니 전위의 도시에서 반동의 굴혈 북경이 후보지가 될 리는 없을 터. 중공 정부는 어어 하다가 ‘변방을 내어줄’ 공산이 크다.
정작 시준은 북경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사실 따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정시준은 고구려 시절의 땅을 회복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왜 만주를 쳤겠는가.’
송주령이 시준을 보는 관점은 1930년대 유럽인들이 히틀러를 보는 관점과 비슷했다.
정시준은 애당초 공화국 인민의 ‘정당한 생활권역’을 주장할 생각이었던 게 틀림없다. 나라 이름 고려로 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해. 아직 중화 혁명당의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바로 지금을 놓치면 때는 오지 않는다.”
고려와 전쟁은 무리다.
허나 중화인민공화국이 반동의 발본색원을 명분으로 산해관을 먼저 치면, 반대할 수 없는 고려는 여러 가지로 난처해진다.
그리고 현 중화 혁명당 수뇌부의 권위도 공고히 할 수 있다.
송주령은 두루마기를 휘감듯이 하며 일어났다.
“공화국은 우리가 중국 혁명에 정신이 없으리라 믿고 있겠지. 고려 가까이에 대군이 나타나면 정시준도 더 이상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거다.”
***
청이 봉금지를 유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배후지 확보였다.
오족공화의 이념은 급조된 선동성 구호가 아니다. 심지어 청 역시 자기들이 중화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따라서 초기의 청은 중화의 반발이 감당 못 할 지경으로 일어날 경우, 중원을 버리고 고향 만주로 튀겠다는 비상 작전계획을 수립해 두고 있었다.
청은 최속군주의 사적을 알고 있었지만 도저히 그 정도의 스피드를 낼 자신은 없었다. 하긴 안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긴 하다.
그래서 미리 대비한 것이다.
게다가 선조가 불충무지한 신하들의 압력으로 의주에서 그의 전격전을 멈춰야 했던 – 놔뒀다면 중국은 물론 인도까지 그의 시간 왜곡에 휘말렸을 것이다 - 사실까지 고려했다. 만주를 확고하게 여진족의 것으로만 남겨 둔다면 장성을 넘는 일도 수월해진다.
역사의 전범이라 함은 이것을 말한다.
사적에 어두운 탓에 어영부영 도망치다 잡혀버린 서양 어딘가의 오랑캐 왕과는 학문에서부터 비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는 최속군주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당연히 더 잘 인지했던 바다.
그래서 삼번의 난 때 ‘청이 만주로 되돌아갔다가 재차 조선을 침공할 경우의 대처방안’이 진지하게 논의(만)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송주령이 공화국의 의표를 찔렀다고 생각한 산해관 토벌 또한 예측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선조를 잡으려면 한양이 아니라 의주를, 청조를 잡으려면 북경이 아니라 산해관을 제압해야 한다.
한 가지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중화 혁명당 수뇌부가 정시준을 피끓는 고구려주의자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준은 손에 종이를 쥐고 쓰게 웃었다.
‘반동의 완전한 토벌’을 위해 떨쳐나선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이 직례 북부에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였다.
시준의 미소가 맑을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것이 시준의 예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시준은 역사에 밝지 못하다.
두 번째는, 시준 대신 이 상황을 예견하고 일부러 중국을 안달 나게 함으로써 산해관에서 혁명군 대신 군사를 소모해 주도록 만든 장본인이 더 이상 시준을 도와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점이다.
“총괄서결부장 동지의 혜안은 어긋남이 없었소. 본래 관(關)이란 바깥에서 들이치는 힘에는 강해도 안에서 뚫고 나오는 힘에는 약한 것. 조선 인민 해방전쟁 당시 조령에서 그러했듯이, 중화인민공화국은 산해관을 어렵잖게 함락시킬 거요. 그러고 나면 혁명군도 영원성까지는 나아가 후일의 근심을 덜 수 있겠지.”
제국주의자 입맛에 너무 적은 만주 인구 때문에 실망한 시준은, 요서 일부까지는 가능하다면 노려 볼 생각이었다.
다만 중화 혁명당과 싸운다거나 화북을 정복하는 일은 절대 사양이다.
영국이 좋아할 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당장 기각할 사유는 차고 넘친다.
시준은 이미 전생 가락대로 ‘개항장과 강남 할양은 고려국의 소관이 아니니 저쪽으로 전화 돌려드릴게요’라고 말할 준비 만반이었다.
그리고 이 판세를 만든 건 시준이 아니다. 혁명의 마피아 정약전이다.
갖은 핑계를 대며 스턴튼도 황제도 돌려보내지 않은 책략과, 공화국이 마치 산해관의 청 잔당과 협상할 것처럼 냄새를 피운 기만은 정약전의 제안이었다.
송주령 역시 도적 출신이지만 종교결사 비적 대장과 밀무역 신디케이트 참모는 약간 직업의 결이 다르다.
이런 일이라면 후자 쪽이 더 전문이다. 그래서 송주령은 속은 것이다.
정약전은 기침을 잠시 멈추고 말했다.
“다행이군요. 주석 동지.”
집에서 누워 있던 정약전은 안 그래도 빈한해 보이는 인상이 더욱 마른 상태였다.
“내가 마음을 잘 쓰지 못하여 동지께서 이리되셨구려. 후임자가 정치국에서 결정될 때까지 총괄서결부 부부장들로 하여금 일을 담당하게 할 터이니, 국사는 잊고 편히 쉬도록 하시오.”
총괄서결부는 원래 너무 비대한 부처였다.
인사, 재무, 서무 종합을 모두 맡고 있는 이 국무당의 중추가 지금껏 큰 문제 없이 가동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장이 정약전이었기 때문이지 조직이 효율적이어서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따위는 ‘전가사변’ 해 버릴 공포의 군주라면 누워서 일하라고 강요했겠지만 전생에 공무원이었던 시준은 달랐다.
‘이래서 일 잘하는 사람이 몇 년 근무하다 가면 후임자가 힘들지……. 정약전은 낫더라도 쉬라고 하고 조직을 다시 정리해야겠어.’
정약전은 시준의 문병에 감사했지만 황송해하지는 않았다. 시준은 그의 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운 사람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예의만 표시한 정약전은 천천히 말했다.
“세월을 이미 많이 잡아먹어, 내일 죽는다 해도…… 불평하지 못할 나이올시다. 주석 동지의 은혜로 고금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으흠! 이 혁명에 몸 바쳤으니 여한은 없습니다. 다만 죽기 전에 우제(愚弟)가 한번 보고 싶군요.”
원래 역사에서도 동생을 보지 못하고 떠나간 정약전의 한은 그런 역사를 모르는 시준에게도 와 닿는 것 같았다. 시준은 반드시 그렇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급히 오라는 것 외에 무슨 말을 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영국까지의 배는 아무리 빨라도 왕복 반년에서 8개월이다. 정약용이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그러나 정약전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혁명을 이루었다면 돌아오되, 이루지 못했다면 돌아오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시준은 약간 당황했다.
“아니, 혁명이라니? 빈민 구제 얘기는 나도 알고 있소만 왕가를 뒤엎기에는 영길리국이 너무 튼튼하오. 그런 위험한 일을 하라고 할 수는 없소.”
조지당은 그저 그런 빈민단체 중 하나일 뿐이다.
10년 전의 조선이었다면 혁명에 큰 힘이 될 전력을 갖고 있지만 현재의 영국에서는 군이 주의해야 할 수준조차 아니다.
마계와 인간계의 던전 레벨은 다를 수밖에 없다. 조지당이 무장 반란을 일으켜 봐야 단번에 진압당하고 끝이다.
무엇보다 지금 시점에서 런던의 반란은, 배후 조종을 들켰을 때의 손해에 비해 딱히 큰 이득이 없다.
시준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의 구현의 통쾌함 말고는 얻는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리 시준이라도 혁명의 본질을 잊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약전이 대답했다.
“혁명의 본의는 종묘사직을 폐하고 군주를 목베는 것만이 아닙니다. 인민이 수평해진다면 그것이 곧 혁명.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의 대의에 따라, 영길리에서도 지금쯤이면 틀림없이 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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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태사의는 아마 무협지에서 자주 보셨을 겁니다. 유래는 불분명하나, 전설에 따르면 진회가 의자에 앉아 졸다가 두건을 떨어뜨리자 측근들이 아첨을 위해 의자에 두건 걸이를 만들어 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디자인이 시대에 따라 다양해서 일괄적으로 말하긴 힘들지만 팔걸이가 있는 고급 의자라는 게 공통점입니다. 청대에는 권력층의 가구로 많이 쓰였지요(왕좌는 아닙니다).
2. 동난각은 사실 19세기에는 신혼방으로 잘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옹정제 즈음부터 이 방의 기운이 불길하다는 둥 여러 얘기가 나와서…….
3. 마오쩌둥은 작은 고로(높은 로)를 많이 만들면 큰 제철소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총알 수십 톤 모으면 핵폭탄 될 거라는 발상과 비슷합니다) 집집마다 고로를 만들게 하는데 이것이 토법고로입니다. 토법은 ‘우리 방식’이라는 뜻이죠. 과연 걔네 대륙 방식대로 망했습니다.
4. 삼번의 난 때 논의된 것은 겉으로는 ‘이 기회에 북벌!’ 이었지만 맥락상은 대만 정씨 왕국(일본인이 모계였음)의 임진왜란 시즌 2나 여진의 병자호란 시즌 2 대비 쪽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침공이든, 대비든 대기근이 덮친 당시 조선의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청나라에 잘 보여서 우정을 쌓고 쌀 좀 얻어오자는 제안이 더 현실성 있다고 봐야 했죠. 실제로 청나라도 난리 당시 조선이 안(못) 움직인 게 기특했는지 숙종 때 공식 요청했을 땐 쌀을 보내 줍니다.
양은 비록 고려천자 만력제의 20분의 1에 불과한 5만석이었지만(여기에서 중화가 왜 중화이고 오랑캐가 왜 오랑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도움이 됐지요.
여담으로, 쌀을 보내 주기 전 조선 사신이 와서 (쌀 달라는 소리는 못하고) 기근이 혹심하다고 보고하자 강희제는 ‘그건 너희 나라의 왕이 약하고 신하가 강대한 탓’이라 디스합니다.
유명한 ‘군약신강(君弱臣强)’이라는 말의 유래가 이것으로, 본래는 ‘너네 혹시 신성 로마 제국 같은 거니?’ 라는 맥락의 조롱입니다.
그때 동지사로 갔던 복선군 이남은 할아버지 일로(인조의 손자입니다) 원한이 사무쳤는지 우린 그런 거 아니라고 대드는데, 강희제는 그저 네가 왕의 친척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며 넘어가죠.
5. 고대 메소포타미아는 상업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쪽 쐐기문자 점토판의 대부분은 상업 관련한 영수증과 계약서 등이죠. 그 중 에아-나시르라는 악덕업자에 대한 엄청난 부피의(점토니까) 항의서는 (그의 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잘 보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유명한 얘기라 아시는 분이 많을 텐데, 간단히 설명하면 올라운드 사기꾼으로서 금속, 곡식, 부동산 등 그 당시 인류 문명이 거래할 만한 상업업종 중 이자가 사기 치지 않은 분야는 거의 없는 정도로 보입니다.
6. 명, 청대 북경의 수도 입지는 둘 다 정치적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명의 경우는 영락제의 근거지여서 그렇고, 청의 경우는 명의 유유산도 계승할 겸 언급된 것처럼 만주가 가까워야 해서 그렇죠. 수도가 불가능할 입지는 아닙니다만, 최적인가 하면 고개를 갸웃할 점이 있습니다.
7. 콜브룩데일은 산업혁명 이전부터 유명했던 영국의 제철 도시고, 황주는 원 역사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송림제철소가 들어섰던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