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92. 그러나 이 연호가
현실은 게임처럼 영토와 백성을 얻는다고 그게 곧 국력이 되지 않는다.
조선의 경우는 문화와 언어가 같고 이해관계를 공유하며 무엇보다 공통의 억압자라는 적이 존재했다.
하지만 만주는 그 모두가 전혀 다르다. 더욱 주의 깊은 처치가 필요했다.
다행인 것은 지금 만주의 인구가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청이 봉금을 풀어버리는 19세기 후반기쯤 가면 이미 만주의 인구가 천만 단위에 달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아니었다.
만주 봉금정책에 여기저기 구멍이 많았다고 해도 정책은 정책이다. 국가의 공식 신호는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 결과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기준 만주의 인구는 많이 쳐서 150만 내외였다.
제국 전체의 인구로 따졌을 때 0.5%에도 미치지 못한다.
(인두세가 없어져서) 반동 시절의 호구 결락을 거의 청산한 공화국 인구 약 1천만에 대비해 볼 때 2할도 안 되는 것이다. 시준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인이라고는 하나 (두 번째) 태생이 조선이라 워낙 호적 양자역학에 익숙해져 있던 시준은 이 보고를 믿지 못했다.
그는 재조사를 명했다. 분명히 히든 인구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남만주의 기초적 부녀회 조직까지 동원한 혁명무력부의 재조사가 막 시작된 참이지만,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게 현재까지의 보고였다.
몰래 숨어 들어와서 호구에 안 잡히는 한족이라든지 청의 신민인지도 애매한 수렵부족들을 모조리 포함한다 해도 그 숫자는 극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
청의 인구조사는 시준의 편견보다 꽤 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청의 관료조직이 조선에 비해 현격히 탁월한 건 아니다.
여기도 공화국과 원인이 같다. 화끈하게 인두세 없애 준 강희제 덕에 출생신고가 잘 되어서다.
시준은 이 시점에서 좀 실망했다.
‘만주를 차지해서 열강과 중국에 대항하려 했더니, 이거 갖고 뭘 해?’
어디에서 많이 듣던 소리다. 슬슬 제국주의자의 흑염룡을 잉태하고 있다고 봐도 될 것이다.
아무래도 빨리 주석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세계 평화를 위해 좋을 것 같았다.
다만 이건 시준이 한국의 소시민이되, 20세기 후반에 자아를 형성하고 21세기 초에 가장 많은 문화를 흡수했던 세대의 소시민이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시준이 열혈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 시준이 만주를 원했던 이유는 고토의 회복 같은 게 아니라 그저 땅과 돈과 인구가 탐나서다 – 시준의 청소년 시절은 꽤 그런 열풍이 불던 시기였다.
21세기에 진짜로 ‘통일 한국의 간도 진군’ 하자고 하면 중국 주식 갖고 있는 사람들의 대규모 봉기부터 어떻게 해야겠지만, 로망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만주에 대해 뜨거운 열망을 가진 일부 한국인들의 이야기는 시준도 들어 봤다.
만주만 가지면 광활한 영토, 풍족한 자원, 막대한 인구로 일약 강대국의 반열에 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시준이 지금 본 것은 광활한 황무지, 캘 방법도 없는 자원, 엄청나게 적은 인구뿐이었다.
하지만 아직 좌절하긴 이르다. 이러한 단점은 반대로 장점도 된다.
일단 석유라든지 철강 같은 거야 먼 미래의 일이니 천천히 한다 치고, 적은 인구는 공화국이 군대‘만’ 깨뜨리고 만주를 점령할 수 있었던 큰 요인이었다.
본국의 지원이 없이는 더 징병하려 해도 징병할 자원이 부족했으니 말이다. 덤으로 대규모 민중 저항에 대한 걱정도 덜었다.
넓은 땅도 마찬가지다. 이는 워낙 조별과제스러운 생산력 때문에 상조농장 더 늘리기도 부담스러운 공화국에게 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멋지게 결합한 것은 남공철의 비전이었다.
“여기에서는 옛일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석 동지.”
전생에서야 일반인이어서 알 도리가 없었지만, 현생의 시준은 남공철이 실학자의 하나로서 타계한 유득공과 교류가 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유득공은 발해고의 저자다.
발해고는 무식한 시준조차 이름을 들어 본 저서다. 한국사 시험에 나오니까.
시준은 남공철이 민족주의적 선전으로 만주를 규합하고자 하는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대 고구려니 만주 벌판이니 대륙 삼국이니 하는 얘기라면 시준도 전생에 어디서 봤던 가락이 있다. 선전선동부도 감탄할 여러 문구가 시준의 머릿속에 지나갔다.
하지만 그건 남공철을 약간 오해한 처사였다.
민족주의는 근대인의 발명품이다. 남공철은 그것에 영향받지 않았다.
그가 말한 옛일은 따로 있었다.
발해 같은 먼 옛날이 아니다. 바로 전조(前朝)인 조선에서 여진을 실제로 통치하려 시도했던 유일한 군주, 드레드로드 세종의 사적이었다.
“땅이 넓고 크기는 하지만, 결국 이치는 옛날 사군 육진을 개척할 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론 수평한 인민을 폭압으로 다스려 옮기는 일은 없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지금 상조농장에는 자기 땅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장기 흉년이 끝나면서 자영농은 ‘토지 임차료’에도 불구하고 살림이 좀 폈다.
그러자 기존의 상대적 박탈감이 오히려 역전되기도 했다.
간신히 먹고살 만한 배급은 흉년 때야 자영농의 부러움을 샀으나 그것이 지나간 다음에는 오히려 박탈감의 원인이 된다.
자영농은 토지 임차료만 내면 나머지가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시준도 가끔 헷갈리긴 하지만 공화국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일해서 상조농장의 소출을 올릴 것인가? 이게 안 되는 이유는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럴 만한 의욕이 있는 자들은 차라리 장삿길로 나서곤 했다.
“만주 기인(旗人)의 땅은 응당 반동의 토지로 모두 몰수될 것이고 아예 주인 없는 황무지만 하여도 다 잴 수가 없을 정도인바, 이 북방으로 올 만한 숫자의 가구에는 모두 나누어 줄 수 있을 터입니다.”
땅을 공짜로 뿌린다는 형평성 문제는 시준도 걱정하지 않았다.
이 낯설고 엄혹한 땅까지 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누구보다 큰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개간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남공철은 만주의 적은 인구가 가지는 또 하나의 장점을 깨우쳐 주었다.
“옛날 탁발씨(拓跋氏, 북위)‧완안씨(完顔氏, 금)부터 하여 왕씨 고려 때의 박이제길특(博爾濟吉特, 보르지기트. 보르지긴 씨족)이나 지금의 애신각라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무릎 꿇렸다 하는 모든 호족(胡族)의 염려는 항상 숫자가 많은 한인에게 삼켜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각 군주들이 족속을 따로 떼어놓고 통혼을 막으며 사냥을 장려하였으나 모두 반동답게 헛짓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주석 동지의 광명영도로 아주 적절한 때를 맞았습니다. 공화국이 중국을 토벌했으면서도 요하와 산해관을 넘지 않았기 때문에, 밖으로는 과도한 진군으로 위험에 처하는 일을 피했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혁명의 색으로 충분히 물들일 수 있을 만큼 적은 여진족만이 남은 것이오이다.”
따라서 이들은 거꾸로 공화국에서 삼켜 버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공화국에서 희망자를 이주시킴과 동시에, 새로 생길 개척촌에 여진족을 흩어 옮기는 방식으로 사회 조직을 꾸리면 금세 희석된다.
물론 여진족 입장에서야 왜 조선인은 자발적 이주인데 우리는 강제 이주냐고 수평도를 내세워 대들겠지만, 안타깝게도 수평도는 ‘동지’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반동이 동지가 되려면 어느 정도의 ‘교화’가 필요한 법이다.
시준은 그게 바로 세종, 아니 스탈린이 하던 짓이라는 사실을 당연히 몰랐다. 그래서 마음 놓고 기뻐할 수도 있었다.
“그거 좋은 방안 같군요. 자세한 것은 평양의 농상진흥부와 이야기해야겠지만…….”
거기까지 얘기하던 시준은 곧 이강회가 가져올 영국인의 돈이 생각났다.
이제 기랑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하니 이만 심양을 떠나서 그쪽 일을 조율할 때가 되었다.
“그러면 대강의 보고를 만들어 주시오. 내가 그것을 가지고 평양에 돌아가 국무당에서 논해 보겠소.”
“알겠습니다. 주석 동지. 이는 동지께서 영도하는 제3기 5개년 계획의 기틀이 될 것인바 성심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남공철은 그런 말로써 자기가 시준의 제3기 집권에 ‘기틀이 되는’ 발상을 해냈다는 점을 암시했다.
시준은 마치 자기가 3연임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남공철에게 당장 반박하지 않았다.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2년 남았지?’
이번에는 실수하면 안 된다.
이제 지유도 지지해 준다고 했고, 기랑도 저번처럼 방해하지 않을 테니 조건은 훨씬 좋다. 정약전과 푸셰 두 늙은이만 어떻게 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워싱턴을 초월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워싱턴과 동급은 되어야 했다. 시준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남쪽으로 향했다.
***
확실히, 시준은 워싱턴의 정통 후계자라 할 만했다.
저 영국 놈들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싶은 것을 보니 틀림없다.
시준이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온 스턴튼 공사와 매닝 공사대리는 준비해 온 요설을 늘어놓았다.
“의장 각하. 잘 아시다시피 영국군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고 공화국의 국익에 기여했습니다. 그 덕에 공화국은 압록강 북쪽의 광활한 영토를 얻게 되었으니 영국의 지분 획득에 있어 적극적인 동조를 바라겠습니다.”
“영국 정부는 기존 6개 개항장의 안정적 할양과 더불어 포모사 전체와 광둥, 푸젠성의 보호령화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페킹 정부가 무너지면 산하이관의 청국 병력도 와해될 테니 곧 혁명군의 진격이 가능할 겁니다. 공화국과의 완충 지대는 황허와 양쯔강 사이가 어떨까요? 물론 이의가 있으시다면 전향적으로 고려하겠습니다.”
누가 톨킨 나라 아니랄까 봐 지도를 재창조하고 판타지 설정 짜는 데에는 따를 자가 없었다.
시준은 헨리 호프 함장이 처음 도망칠 당시 함께 탈출한 헬무트 폰 몰트케 소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의 배석은 시준의 의지가 아니다. 아무래도 그가 시준과 친한 것 같다고 판단한 영국인들이 데려온 것이었다.
시준의 기대대로, 몰트케는 어깨를 으쓱한다거나 피식 웃지 않았다. 그는 지금 ‘영국군의 덴마크 관전무관’인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물론 시준의 프로이센에 대한 외교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전쟁만 했다 하면 깨지는 것들과 동맹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몰트케를 내버려 둠으로써 간첩질에 도움을 주고, 그 정보가 유럽에서의 영국 견제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까지는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저 해적 놈들은 시준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 뻔뻔했다. 더 이상 힘을 실어 주면 안 된다.
“글쎄요. 중화 혁명당이 그 제안에 동의할지도 모르겠소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극동 영국군이 그 광대한 영토를 지켜낼 수는 있겠소?”
시준의 ‘이 패배자 새끼들아’라는 대사에도 영국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예상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스턴튼 공사는 자기 특기인 협상이 되자 더 여유로워진 것 같았다.
그는 ‘취소해라……. 방금 그 말…….’ 어쩌고 하며 시준에게 덤비는 대신, 다른 종류의 상하관계를 꺼냈다.
“의장 각하의 염려가 타당하십니다. 그러나 저 음란한 나폴레옹을 물리친 현재 유럽은 안정되어 있고, 인도의 전례와 같이 추가로 치안 유지군을 파견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습니다.”
역시 무작정 들이민 것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약간 체면을 구겼지만 곧 본국의 군대를 더 불러올 테니 신나서 까불지 말라는 협박이다.
몰트케는 끝내 기침을 하고 말았다. 그의 막대한 파시즙 분비량으로도 이 자극은 허용 범위 밖이었다.
시준은 물론, 몰트케조차도 설마 영국 의회가 다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여기 군대를 다시 보내진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번 전훈을 보았을 때, 작정하고 동아시아를 상대하려면 지금 보낸 것의 5배는 필요하다. 고려도 그 ‘상대’에 포함된다면 더 늘어난다.
허나 그 정도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증기 철갑선도 전신도 철도도 없기는 하지만, 핵심은 그런 게 아니다.
10만 이상을 파병한다고 해 보자. 세계 각지 해군의 공백이나 보급 문제는 그렇다 치고, 전통적으로 왜소한 영국 육군 특성상 대규모 징병이 필요불가결하다.
그런데 그러려면 영국은 원정 이전에 우선 내전을 치러야 한다.
자기 나라 지키는 명분이라도 있었던 양차대전도 아니고, 남의 나라 강도질 하고 싶으니까 목숨을 바치라는 말에 누가 동의하겠는가.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시준과 몰트케는 인간이고 영국인은 영국인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움에서는 이겨야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영국에서 징병될 만한 신분의 사람들은 어차피 투표권도 없다.
그래서 시준은 잠시 침묵했다.
양아치가 칼을 들었을 때, ‘찔러봐! 찔러봐! 왜, 겁나냐? 찌질이 새끼야!’라고 을러대면 찌를 생각이 없었어도 찔린다.
그리고 영국은 명실상부한 양아치였다. 자극해선 안 된다.
어차피 시준은 북경에서 영국이 시도했던 배신을 이미 다 기랑에게 전해 들었다. 협상에서 우위에 설 재료가 많이 있으니 여유를 가져도 된다.
그러나 양아치가 흔히 그렇듯, 영국인 두 사람도 시준이 입을 다물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패배는 항상 그런 곳에서 온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나서 나선 토마스 매닝 주 고려 영국 공사대리의 입에서 왔다.
“북경을 함락시킨 영국군의 정당한 포로인 중국 황제를 영국 정부에 양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는 공화국이 러시아와 모종의 반영 밀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는 가장 명예로운 증거가 될 것입니다.”
러시아와 모종의 반고려 밀약을 체결하려 했던 조지 스턴튼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체면 때문에 자기의 바보짓을 토마스 매닝 공사대리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우를 저질렀다. 이래서 칸막이 없는 업무 협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시준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이 말 언제 꺼낼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먼저 때려 달라고 뺨 내밀어 주니 참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너 이 새끼들 주둥이 한번 잘 털었다며 다급히 나서지는 않았다.
그 대신 말해 줄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주 고려 러시아 공사 자격으로 배석한 레온티 베니그센 장군은, 애송이들에게 관록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기품 있는 동작을 취하며 말했다.
“간과할 수 없는 말이로군. ‘모종의 반영 밀약’이라? 여기 계신 중국 공사 각하께서 직접 써 주신 문서가 내게 있소. 러시아와 고려는 영국과 신의로써 군사 공조를 했을 뿐이오.”
베니그센은 그러면서 물 흐르듯 문서를 꺼내놓았다. 매닝은 급히 스턴튼을 쳐다보았고 스턴튼은 공황 발작을 일으킬 것 같았다.
“영국의 전략 목표를 달성해 준 데 대한 감사는 못 할망정 이런 어처구니없는 중상모략이라니! 게다가 이 문서와 함께 구두로 말씀하셨던 것을, 설마 내 면전에서 부정하진 않으시겠지요? 북위 43도선을 기준으로 중국을 나누자는 그 뻔뻔한 제안은 고려나 중국과 변함없는 우의를 가진 우리 러시아가 받아들일 수는 없었소만, 밀약이라 하면 그런 게 밀약 아니겠소?”
‘야, 너도 그땐 좋아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라는, 무슨 성범죄 용의자 같은 고함은 지를 수 없었다.
이미 우위는 완전히 저쪽에 있다.
이래서야 추가 파병 어쩌고 하는 협박도 헛짓이다.
영국 의회가 도덕에 신경 쓰는 집단이라서는 아니다.
러시아가 적으로 돌아선다면, 영국은 극동에 그 많은 군대를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림 반도와 그리스 방면에는 벌써부터 다른 종류의 전운이 떠돌고 있다.
의회는 감당할 수 없는 양면전선을 만드느니 스턴튼을 ‘암허스트’해 버리고 사안을 정리할 게 뻔하다.
스턴튼 공사는 이럴 때 상투적으로 쓰이지만 항상 상투적으로 무시당하는 대사를 꺼내놓았다.
“저, 각하. 뭔가 오해가 있는…….”
“오해라! 내가 늙어서 이해력이 쇠퇴했을 수는 있지. 그렇다면 젊은이에게 묻겠소. 고려인민공화국 의장 각하의 판단은 어떠신지?”
시준은 그 토스를 놓치지 않고 최고의 스파이크를 때렸다.
“물론 인망 높은 주중 영국 공사 각하의 본의는 아니리라 믿습니다만, ‘괴멸 위기의 영국군을 구출하고’ ‘영국과 달리 전선에서 승리하여 동맹국의 의무를 모두 달성한’ 고려를 영국이 배반하려고 했다는 수치스러운 소문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것이므로, 이를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런던에 이 문서를 보내 정식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겠군요.”
정약용 설교하듯 속사포처럼 쏟아낸 시준의 말은 하나의 문장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그리고 두 사람 역시 정약용에게 설교 들은 시준과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
영국인의 돼먹잖은 협상에 분노한 사람은 많다.
허나 가장 격분할 자는 따로 있었다.
청나라의 마지막 우국지사 서명아였다.
청은 아직 안 죽었다. 서명아는 북경을 탈환하자마자 가경제의 차자인 화석돈각친왕(和碩惇恪親王) 면개(綿愷)를 옹립하고 정부 구성을 시도했다.
황제의 동생인데 왜 같이 몽진하지 않았느냐 하면, 전쟁 때 면개는 북경성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빈발하는 반란 때문에 황제를 대리하는 양황기 지휘관(장식)으로 파견되어 있다가 어찌어찌 근왕군에 포함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근왕군의 야심가들은 쓴 입맛만 다셨다.
물론 면개가 최우선 후보로 고려되어야 하는 건 그들도 알고 있었다.
허나 설마 도광제의 장인인 서명아가 사위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옹립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취급은 서명아를 너무 얕본 처사였다.
서명아가 그저 그런 간신이었으면 빛의 황제가 그를 믿고 10만 군대를 맡기지도 않았고, 지금까지 외로운 대 마족 항전을 이끌어 오지도 못했다.
서명아에게 ‘나를 지지하면 (도광제가 혹시 살아 돌아왔을 때) 우겸 꼴 나는 것을 막아 주겠다’며 약 치고 있던 황제 후보들은 서명아의 불타는 애국충정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서명아의 결정은 대국적이었다.
또한 빈틈이 없기도 했다. 면개는 태후 역할을 하고 있는 효화예황후 뉴호록씨(같이 고려에 끌려갔다)가 돌아왔을 때 일이 부드럽게 진행되기 위한 최고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녀의 친자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유는, 그의 나이가 시준보다도 어리고 일찌감치 황위 계승에서 벗어난지라 세력도 없어서 서명아가 통제하기 좋다는 것이었다.
청조의 열사들은 모두 서명아의 충정과 지혜에 감동했다. 역시 사위를 잘 가르쳐서 사위도 지혜의 왕이었던 모양이었다.
불타고 노략당하고 학살당한 북경은 새로운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관민이 합심하여 부월을 만든다, 의장을 수선한다, 궁을 고친다 하며 오만가지 수선을 떨었다.
분위기 쇄신이라면 또 연호를 빼놓을 수 없다.
이제 황제가 바뀌었으니 마땅히 시간의 이름도 바뀌어야 했다.
서명아는 즉시 얼마 안 남은 학자들을 불러 모았다. 강희자전에서 좋다는 한자는 빠짐없이 검토되었다.
그 결과 내정된 연호는 중화 수천 년 역사에서도 가장 멋지고 웅장하고 장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연호가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영국과의 전쟁에 모든 힘을 쏟아낸 청조는 수십만 단위로 불어나 밀려드는 인민해방군에게 거짓말처럼 연패했다.
도광 5년(1819년) 춘삼월도 저물어갈 무렵, 청조는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북경은 다시 한번 함락의 아픔을 겪게 되었다.
자기는 뭐 한 것도 없는데 제2의 숭정제가 되기 싫었던 면개는 신하들이 건네준 비단 끈을 던져 버리고 달아났다. 목적지는 아직 청군이 남아 있는 유일한 곳, 산해관이었다.
영국이 대노하여 쳐들어오지는 않을 정도의 달래기용 협상안을 시준이 마련하고 중화 혁명당 수뇌부와 공식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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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작중 만주의 인구구조는 상하이 사회과학원 출판사, 1987, ‘청대와 민국 시기 산동에서 동북으로의 이주 약사[清代和民国山东移民东北史略]’에 근거합니다. 자료에 의하면 19세기 초 기준 봉천(심양 일대) 94만, 길림 30만으로 124만 명입니다만 작중에서는 누락을 감안해 약간 크게 잡았습니다. 그간 잠겼던 만주 인구는 봉금에도 불구하고 청이 끝날 때까지 점진적으로 늘어나며, 동치 연간의 순차적 봉금 해제 이후 폭발적으로 급증합니다.
2. 보르지긴의 음역으로는 ‘패아지근’도 익숙하실 텐데, 그것과 본문의 ‘박이제길특’ 둘 다 쓰였던 말입니다. 다만 청대에는 아이신기오로 가문이 몽골의 칸을 자처하며 보르지긴 씨족과의 적극 통혼을 통한 복속을 시도했기 때문에, 청이 만주어로 음역한 박이제길특이라는 명칭이 권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래도 당대 조선 사람들 역시 그 이름으로 더 많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죠.
3. 이민족 왕조는 대개 한 번쯤은 한화를 경계했습니다. 가장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저항했던 건 역시 최후라서 역사적 교훈도 많은 청이었는데, 그에 대해서는 작중에서 여러 차례 나왔지요. 봉금지 설정 역시, 작중에서는 경제적 사유만 설명했지만 이 맥락의 군사적, 민족적 이유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