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72화 (272/284)

272화

91. 천상천하(天上天下)(3)

영국군이 천진에 도착했을 때, 전 등주 수군총병관 황상신은 함대를 아예 항구에서 상당히 물려 놓은 상태였다.

혹시 저 해적들이 돌아갈 배가 없어서 화가 난 나머지 무력으로 배를 빼앗겠다고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영국 해군도 치욕적인 타격을 입었지만 그 대가는 컸다. 황상신이 이끌었던 200여 척의 대함대는 이제 40여 척 규모의 순찰 선단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애초에 병사가 많지 않아서) 사상자 자체는 크지 않았던 영국 해군과 달리 전사자는 다 헤아릴 수도 없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상신이 중화 수천 년 역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대공을 세웠다는 점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저 제갈 무후의 책략을 써서 멋지게 영길리 해적을 격퇴한 업적은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2의 제갈량을 꿈꾸는 황상신으로서는 다른 부분에서도 무후와 같은 사적을 남겨야 했다.

그래서 황상신은 제갈량의 진정한 주특기였던 국가사무, 즉 행정적 처리에 매진했다.

영국군과 서명아의 협상 소식은 당연히 천진에 있던 황상신에게도 전달되었다.

그 당시 황상신은 주위에 엄명을 내렸다.

“저 해적 놈들에게 배를 팔아먹는 자는 곧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같다. 북경의 국구(서명아)께서 말씀하신 바도 그냥 성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었지 우리더러 저 찢어 죽일 해적 놈들의 살림까지 보살펴 주라는 건 아니다. 아니, 설사 그런 말씀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황 모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설사 조정에서 내 목을 친다 해도 마찬가지다!”

송나라가 파멸할 때의 악비조차 이 황상신보다 더 우국충정에 불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대청의 관문 천진에는 진회처럼 괘씸한 간신이 없었다.

천진 사람들이 본 것은 자국 수군이 영길리 해적을 전설적 전투로 격퇴하는 모습뿐이었던지라, 내몽골 쪽과 달리 ‘시끄러운 일이 있었지만 결국 우리 폐하와 성조가 오랑캐를 물리쳤다’라고 생각할 법도 했다.

거기에 황상신이 영국군과 소소한 물품을 거래했던 백성 몇 명을 잡아 본보기로 처형하자, 어민들은 모두 영길리 군대에서 멀찍이 떠났다.

그러니 코크란 제독이 아무리 많은 금은보화를 제시해도 탈출용 선박이나 식량, 식수 수급이 원활할 리 없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던 영국군은 황상신의 신산귀모로도 예측하지 못했던 민중봉기를 얻어맞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황상신은 영국군이 엉망진창으로 얻어터지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극한 충성을 다하기 위해 궐기한 민중은 황상신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방향만 좀 다를 뿐 혁명과 유사하다는 것을 의심해 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황상신의 제갈량 같은 심계 역시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황상신은 벅차오르는 감동과 승전의 기쁨 사이에서 몸을 가누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의 소매를 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총병관 어른, 지금 뒤에서 양선(洋船) 여러 척이 오고 있소이다!”

“뭐야?”

황상신은 적정을 제대로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떨쳐 일어났다.

“흥, 영길리 오랑캐 놈들은 몇 번을 다시 와도 이 어르신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번에야말로 저놈들을 진멸하도록 하자!”

그러나 군교들은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황상신은 침묵하는 부하들을 보고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본 순간, 황상신은 그들이 왜 그랬는지 알게 되었다.

“저, 저, 저건…….”

황상신은 ‘수평선에서 나타났다’라고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이 온 배들을 보고 주저앉았다.

선체는 시커멓고 돛은 시뻘건 탓에, 마치 불타는 숯처럼 보이는 대박거선이 여덟 척이나 여기로 접근하고 있었다.

“저건 영길리 배가 아니지 않느냐! 저건 대체 어디의 배냐?”

“조선 놈들의 배 같소이다.”

“말도 안 돼! 그놈들의 배는 남쪽 유구에 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실제로 그것이 천진에 새로 함대를 보충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제 보충할 배가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체면 덜 깎이기 때문이다.

군교들은 다시 침묵했다.

이번 침묵의 의미는 황상신도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배의 출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상신은 여기가 자신의 적벽인 줄 알았다.

그 말도 맞다. 허나 19세기는 3세기에 비해 시대의 흐름이 무척 빠르다.

적벽의 영광이 지나가자마자, 그에게는 오장원이 닥쳐왔다.

***

상태이상 ‘혼란’에 걸려 능력치가 대폭 하락한 황상신의 괴멸적 지휘에도 불구하고, 몇몇 배는 양선에 특효라는 화공선 책략을 다시 써 보았다. 하지만 폭약도 연환주도 너무 부족했다.

게다가 이미 호프 함장의 과장된 설명을 들은 혁명해군은 젖은 이불이나 모래 등 방수 대책을 준비했다. 그 와중 무식한 오랑캐 놈이 삼국지도 안 봤냐며 손가락질당한 호프 함장의 우울증은 덤이다.

이강회는 혁명해군 1함대와 별기함대를 통합해서 끌고 왔다.

큰 양선만 여덟 척이요, 해병 2영대가 탑승한 여러 조선 전선까지 하면 과잉 화력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청나라 최후의 화공선은 물에 던진 촛불처럼 사그라졌다. 대포도 별로 쏠 필요가 없었다.

공화국 사람들은 배가 불타는 것쯤 별로 겁내지 않았다.

어차피 주석 동지가 또 공짜로 어디서 복사해 오면 되지 않는가. 이래서 복권 당첨자들이 재산 탕진한다는 뉴스가 나오는 것이다.

영국 기준으로도 비싼 5급 프리깃은 죽자고 달려드는 청나라 군선에 거꾸로 부딪쳐 갔다.

이 전술은 의외로 효과가 있어서, 제때 불을 붙이지 못하거나 붙였더라도 옮겨붙기 전에 선원들을 다 처치하는 방식으로 제압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청나라 잔존 수군을 쓸어버린 혁명해군은 천진 부두에 가 닿았다.

이때에야 발사된 혁명해군의 16킬로그램 혁명포 일제 사격은 청나라 민병대로 하여금 사태를 잠시 관망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양군의 간격은 꽤 벌어지게 되었다.

코크란 제독을 비롯한 영국군은 지옥에서 지장보살을 만난 극악인(맞다)처럼 울부짖었다.

유럽인이니 그들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 보내 달라 애원하던 부자의 절실함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허허…… 딱하기도 하지.”

그러나 이강회는 서두르지 않았다.

영국군이 앞다투어 몰려오고 있었지만, 그 어떤 배에서도 상륙정이나 사다리, 밧줄 따위를 내려줄 기미가 안 보였다.

마음이 급해 따라왔던 호프 함장과 매닝 공사대리가 이강회를 재촉했다.

“제독, 어서 구출해야 합니다. 지금은 잠시 물러났다 하나 저들은 곧…….”

이강회는 엉뚱한 말을 꺼냈다.

“원래 뱃사공은 강을 건네주기 전에 돈을 받는 법이오. 안전한 뭍에 내리고 나면 사람이 대개 달라지거든.”

“예?”

“선불이란 말이오. 저들이 약속대로 ‘가진 짐의 절반’을 포구에 부려놓고 해병대가 모두 실어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지요.”

“도, 돈은 사람을 구하고 나서 받아도 늦지는 않잖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돈만 주기로 한 것도 아니고, 추후 협상에서 그토록 많은 것을 약속했는데 그 정도는……”

그러나 전직 바늘장수 겸 깡패 두목 겸 주가 조작범이기도 했던 이강회는 물정 모르는 선비가 아니다. 그는 꿈쩍하지 않았다.

“배에 타서 안심하게 되면 슬며시 욕심이 생기겠지. 당신네 영국인은 본래 조상이 해적, 아니, 실례했소. 아무튼 아까 뱃사공과 나그네 얘기처럼, 해적이 딱히 아니라도 사람 마음이란 게 다 그러한 법이오.”

함장과 공사대리는 차마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아쉬운 처지라서가 아니다. 이강회의 말에는 학문적으로 틀린 게 없다.

이강회는 초조해하는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지금 여기에서 보기에도 저 병사들이 짊어진 번쩍번쩍한 금은보화에 눈이 부실 지경이구려. 노략질을 할 만큼 여유작작하다면 별로 위태하지 않다는 소리. 서두를 필요는 없소. 천천히 합시다.”

이강회는 해적이 설마 북경에서 약탈을 안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반면 헨리 호프와 토마스 매닝은 ‘저런 짓이나 하고 있었으니 깨지지’ 하며 이를 갈았다. 결국 고려 사람들 좋은 일만 시켜 준 셈이었다.

공사대리가 이 바보 같은 말을 양측에 전하며 오가고 나자, 영국 병사들은 2할 정도의 약탈품을 꺼내어 쌓아 놓았다.

물론 이강회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증권거래소의 브로커를 많이 상대해 본 왕 첸은 북경의 약탈품 총량 따위 몰라도 된다. 저 오랑캐 놈들 표정만 보면 다 안다.

잠깐의 승강이 끝에 영국군은 거의 7할에 해당하는 약탈품을 내놓아야 했다. 아쉬운 게 영국군인데 어쩌겠는가.

일부 수병은 배에 오르자마자 저놈들을 다시 죽이고 빼앗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러기에는 영국군의 숫자와 사기가 너무 바닥이었다.

그래도 선적(船積) 자체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옛적 주석 동지가 그날 하루만 정의로운 도적이 되는 것을 허락한 전라우수영 습격 이후, ‘균등하게 분배하는’ 데에 있어 가장 숙련된 손놀림을 자랑하는 공화국 해병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가 상륙하자 민병대가 도망쳐 버린 것도 한몫했다. 얼마 가지 않아 코크란 제독은 완벽한 패잔병 대장의 처지로 (과거 영국 프리깃이었던) 유화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도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100여 년 뒤에도 영국의 후손들은 됭게르크에서 비슷한 짓을 해야만 했으니까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낮으나, 유럽의 역사가 전혀 바뀌지 않는다면 코크란 제독은 이토록 후줄근한 철수의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

비슷한 거래는 심양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찰총국장 방우준은 심양 모처의 창문도 없는 방에서 궐련에 불을 붙였다. 희미한 촛불에 비친 연기가 일렁였다.

방우준은 왠지 여기가 편안했다.

어둡고, 조용하고, 사방이 막혀 있어 무슨 비명이 울리든 새어나갈 염려가 없었다.

선천적 정찰총국장의 자질을 가졌다 할 만했다.

그런 만큼 방우준의 심문은 피심문자를 충분히 압도하는 것이었다.

그는 몇 사람의 ‘준비 운동’ 후 끌려 들어온 다음 포로를 향해 기계적 질문을 던졌다.

“이름.”

통역은 정찰총국 소속의 젊은 요원이자, 관화며 만주 말은 물론 일본어와 영길리 말까지 두루 능통하다는 오계순(吳繼淳)이었다.

원래 역사에서 15년쯤 뒤, 로드 암허스트 호(이름 주인은 안 왔다)의 내박에 대응하여 파견된 통역사가 바로 이 오계순이다.

아직은 젊어 경력이 일천하지만 그 언어적 재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좋은 통역자란 단순한 의미뿐만 아니라 그 맥락과 의도까지 정확히 전달하는 자다.

그래서 오계순은 방우준과 마찬가지로 어떤 군말이나 존칭 없이 간단하게 말했다.

“ᡤᡝᠪᡠ ᡥᠠᠯᠠ(gebu hala, 성명).”

도광제는 이 무례에 격분했다.

“이 하민들이 잠시 권세를 잡았다고 근본을 바꿀 수 있을 줄 아느냐! 짐은 천자다. 하늘에 이름이 있더냐? 천지 우주는 영원하고 광대하여 그 외의 다른 것이란 게 없다. 구별할 수 없으므로 이름도 필요가 없다. 태양조차도 달이 있는 탓에 ‘해’라고 불러야 하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짐은 오직 ‘나[朕]’ 한 글자면 족한 것이다!”

방우준은 턱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정찰총국 부국장 정의진(鄭義鎭)이 도광제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도광제가 충분히 아파하고 나자 방우준은 다시 말했다.

“이름.”

도광제는 분개하면서도 자신의 호칭을 댔다.

“짐은 빛나는 길(ᡩᠣᡵᠣ ᡝᠯᡩᡝᠩᡤᡝ, 道光)을 이끄는 황제이며, 몽골의 대칸이고, 문수보살의…….”

정의진의 응징이 다시 작렬했다.

과연 원 역사의 홍경래의 난에서 5개월 동안 갑옷을 벗지 않아 적도를 모두 위축시켰다는 (다가가기 싫을 만도 하다) 정의진의 그 위엄은 도광제마저 눌리도록 만들었다.

“아이신기오로…… 민닝이다.”

“그래. 아이신기오로 민닝. 생업은 무엇으로 하고 있는가? 농사인가, 아니면 장사인가? 그도 아니면…… 아. 여진족이었지. 혹시 짐승 치는 일인가?”

“천자가 생업이 어디 있느냐! 위로 천상에서 명령을 받아[受命于天] 아래로 천하의 복락을 영원히 번창시키는[旣壽永昌] 직무가 있을 뿐이다!”

정찰총국 부국장씩이나 되는 만큼, 정의진의 직무는 그저 뒤통수 타격자가 아니었다. 방우준은 그에게 지시했다.

“부국장 동지. 적게. 아이신기오로 민닝은 생업이 없는 백도(白徒, 백수건달)이다.”

“예.”

오계순은 방금 방우준의 조선말도 능통하게 번역해 주었다. 도광제는 만주족의 전사적 소양을 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팔을 묶은 굵은 밧줄이 풀리기만 한다면.

그러나 정찰총국장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황제 데리고 놀려고 이런 심문을 개최한 건 아니었다. 방금의 질문도 의도가 있었다.

방우준은 아까와 명백히 다른 음성으로 불었다.

“이제 가계를 묻겠다. 양친 구존(具存)하여 있는가? 성명과 생업을 대라.”

도광제는 흠칫했다.

그가 양친이 없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의 생업을 현세의 백수건달에서 저승의 백수건달로 이전시키고, 부친에 대한 통상 호칭을 인종(仁宗)이라는 묘호로 바꿔 버린 그로서는 동요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방우준은 선천적 정찰총국장이었다. 그는 도광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심문의 고삐를 죄고 늦추는 기술은 조선에도 풍부하게 있다.

그리고 공화국에서는 당연히 한층 더 혁명적으로 발전하여, 이렇게 반동에게 일단 겁을 주고 나서 안심시킬 때의 구체적인 수단까지 준비되어 있다.

근거는 물론 시준이 내려 준 업무 지침에 따른 것이다.

방우준은 바깥의 요원들을 불러 말했다.

“공탕(空湯, 설렁탕)을 가져오라.”

의도는 대체로 적중했다.

인류의 절대다수는 그 역사 전체를 기아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예외는 ‘20세기 이후에 태어난 현대 선진국 시민’ 정도일 뿐이다.

따라서 문명권을 막론하고 ‘밥을 준다’는 의미는 막대하다. 가장 강력하고 기본적인 우호의 표시인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절대 규율을 어긴 스웨덴 사람들은 욕을 먹어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도광제 역시 이놈들이 대체 나를 죽이려는 것인지 살리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눈치를 보았다.

반면 방우준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주석 동지의 교시에 의하면, 설렁탕은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섭취시킬 때 훌륭한 심문 도구가 될 수 있다.

방우준은 주석 동지의 빛나는 영도를 되새기며 도광제에게 말했다.

“아이신기오로 민닝. 지금부터 네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이 국을 입으로 먹을지, 코로 먹을지가 결정된다. 잘 생각해서 말해라. 같이 온 상영귀라는 환관을 잘 알고 있으렷다?”

도광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도광제는 간단한 진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한 번 배신한 자는 두 번도 배신한다.

그때 벌써 심양에서 시준을 만나보고 있던 상영귀는 열성적으로 말했다.

“이미 예전 저 자금성에서 마주했을 때 깨달았지만 정공(鄭公), 아니 주석 동지께서는 참으로 영웅의 기풍이 있으십니다. 주석 동지께서 한마디만 해 주시면, 여기의 다른 고려 사람들이 직능에 따라 모이듯 제가 옛 환관들을 모아 반드시 힘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상영귀가 확실히 인재는 인재였다. 불과 며칠 만에 공화국 민주주의가 돌아가는 방식을 눈치채었으니 말이다.

이득집단을 만들어 중앙인민회의의 표결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은, 현재 공화국에서 자기 뜻을 이루고 안전을 획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시준도 상영귀의 사상 최초 고자연합 창설에 충분히 협조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상영귀가 천리교 반란 진압 당시 자기에게 거드름을 피웠다는 사실은 잊어버려 주었다.

무한금고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 도광제가 들고 온 금은보화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와 나눠야 하나, 중화 혁명당도 아직 미처 알지 못하는 비밀 금고나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여러 재산이 도광제에게는 있다.

대부분은 망실되었겠지만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막대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 대부분은 도광제의 자발적 헌금이 아니면 가지기 힘들다.

이제 와서 무슨 법을 지킨다는 의미는 아니고, 도광제나 그 최측근이 아니면 다룰 수 없는 인맥이나 관계 때문이다.

“면녕의 패륜 이외에도, 부당한 학대를 당하던 환관들은 저 소위 황실의 여러 악덕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는 주석 동지의 사업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청은 환관의 숫자를 극히 제한하고, 잡심부름 이외의 어떤 업무 권한도 주지 않았다.

물론 청 입장에서는 명나라 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조치다. 그런대로 성공하기도 했다.

다른 녀석들이 전횡을 해서 문제지, 환관의 전횡은 유의미한 수준으로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환관들 입장에서는 부당한 기득권 박탈로 보일 만도 하다.

시준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민은 수평하므로 신 없다 하여 천하게 보는 것은 반동의 소치. 오히려 옛날의 사적을 보게 되면 환관 중에 인물이 많았소. 종이를 만들어 학문을 장려하고 인민을 이롭게 한 자로 한나라 경중(敬仲, 채륜)이 있었고, 사서를 기록해 후대를 경계함은 태사공(太史公, 사마천)보다 누가 나을 것이며, 밖으로 널리 나아가 위엄을 떨친 자로는 마삼보(馬三寶, 정화)를 따를 자가 어디 있겠소?”

역사에 면면히 빛나는 중화 3대 고자의 이름에 상영귀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시준이 정약용에게 배운 밑천을 다 털어먹은 평생의 재주였다. 옆에서 선전선동부 사람들이 이 교시를 열심히 기록했다.

사마천은 거세를 당했을 뿐 환관이 아니라는 사실 따윈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주석 동지가 환관이라면 지금부터 환관인 것이다. 물론 상영귀도 마찬가지였다.

시준은 상영귀가 도광제의 살인에 실행범 노릇 한 죄를 혁명재판소장의 권한으로 판결했다.

형벌은 노동교화 5년이었다.

수평을 근간으로 하는 공화국 형법에는 존속 살인이 따로 없다.

개별 범죄의 잔악성과 비윤리성을 양형에 반영할 수야 있겠지만, 별도 법으로 규정하는 ‘더 귀중한 목숨’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반 살인죄가 적용되고,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따랐으며 ‘깊이 반성하고’ ‘수사에 협조한 점’ 등을 참작하여 가장 가벼운 형량이 내려진 것이었다.

절차가 끝나자 시준은 다시 중앙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으로 변신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상영귀의 ‘사면’을 정식 선언했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에 따라 이제 상영귀의 과오는 누구도 다시 시비할 수 없다.

깊이 감사한 상영귀는 선전선동부 사람들과 함께 고자연합의 깃발을 의논하러 물러났다.

시준은 굴러들어올 돈을 생각하며 기지개를 켰다.

이제 이강회가 영국인에게서 가져올 재물만 잘 접수하면 돈 문제는 일단락이 된다.

그것도 어차피 대부분 도광제 것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천상이건 천하건 결국 전부 수평한 공화국 인민의 소유라는 진리는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

그다음은 정치 문제였다.

얼마 안 가 벌어질 주변국들의 종전 협상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시준은 다시 점령지 안정 문제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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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는 누가복음 16장의 이야기입니다. 살아서 부유했다가 죽어서 불지옥에 떨어지게 된 부자는 거지였다가 천국에 간 나사로를 안고 있는(왜 안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사로의 손끝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내 혀끝에 떨어뜨리도록’ 부탁하나 거절당합니다.

2. 100여 년 뒤의 철수는 2차 대전 당시 됭게르크의 철수를 말합니다. 아시다시피 나치의 프랑스 침공 때 프랑스는 좀 지나치게 빨리 무너졌고, 영국군은 극적인 철수를 해야 했습니다. 어떻게 간신히 사람은 많이 구했으나, 장비와 물자를 대부분 잃어버린 영국군은 군 재건에 상당히 고생하죠.

3. 도광제의 만주어 칭호는 ‘도로 얼덩어 한’으로, 뜻은 ‘도광제’와 같습니다. 도로는 길[道], 얼덩어는 빛[光], 한은 군주[帝]라는 뜻입니다.

4. 수명어천, 기수영창은 전국옥새에 찍혔다고 하는 문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동아시아 문명의 군주란 무엇인가’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5. 존속살인은 조선 시대에 십악의 하나로 쳐서 최고 극형으로 처벌했고, 지금 한국도 그 법을 승계하고 있습니다만 이외에는 21세기 기준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일본에는 있었는데 폐지했고요.

대만과 프랑스 등 몇몇 나라에도 있긴 한데, 그건 한국처럼 존속이 ‘윗사람이라서’ 더 무겁게 처벌하는 게 아니라 가족 살해를 더 무겁게 처벌하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한국과 달리 비속 살인도 마찬가지로 별도 가중 처벌하기 때문입니다.

이외 국가도 부모 살해를 일반 살해보다 더 무겁게 보는 관념이야 당연히 있지만, 그건 양형에서 더 부과하는 방법으로 해결하지 별도의 법으로 마련하지는 않습니다. 존속살해‘만’ 정규 법제화를 하게 되면 윤리 수호라는 명분도 맞지 않고(배우자나 비속도 가족이니까) 따라서 신분제를 인정하는 게 되어버린다는 지적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6. 청은 환관들에게 심지어 글을 배우는 것조차 금지했습니다. 물론 심부름 하려면 문자를 아예 모르는 것은 곤란하기도 해서 엄격히 지켜진 것은 아닙니다만(태어날 때부터 환관인 건 아니니 다 지켜질 수가 없는 규정입니다), 청조가 환관을 어느 정도의 사회 계급에 두려고 했는지는 잘 알 수 있죠. 작중 상영귀는 그래도 지위가 높으니만큼 기초적인 학문은 익히고 있다는 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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