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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71화 (271/284)
  • 271화

    91. 천상천하(天上天下)(2)

    싸움은 오래잖아 결판이 났다.

    예르몰로프는 그와 오래 호흡을 맞춘 카자키들만이 할 수 있는 기동의 마술을 보여주었다.

    서쪽 본군은 무지막지하게 달려들었지만, 그들은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낸 다음 바로 동쪽으로 달렸다.

    동쪽의 적을 협격하여 분쇄하면, 그다음은 혁명군이 그대로 직진하여 청 본군과 부딪칠 것이다.

    그 잠깐 동안만 방진이 버텨 주면 된다.

    그리고 방진 안에 있던 하마(下馬) 기병들과 고총련은 반드시 그럴 태세였다.

    형편없이 무너지는 동쪽 청군의 벽은 얇아져 있었다.

    이제 사람이 힘껏 소리치면 들릴 법도 한 거리였다.

    방진 안의 고총련 사람들은 카자크조차 놀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혁명이 도착했다!”

    조급하게 청군을 뚫고 들어오던 김유근 여단병들이 벽력처럼 화답했다.

    “동지가 네게 왔다!”

    달걀 하나를 양쪽에서 바위로 짓누르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 실질과 기세 모두에서 그러했다.

    동쪽 청군은 너무나 빠르게 무너졌다.

    게다가 송윤의 희망과는 달리 서쪽 청군도 어영부영하다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방진 건너편에서 무서운 원군이 짓쳐드는 판에, 너희는 신경 쓰지 말고 차분하게 방진을 공략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요구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송윤은 이제야말로 자신이 동료의 뒤를 따를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가 길림 장군 부준처럼 용맹하게 산화할 기회는 없었다.

    김유근 여단이 방진을 통과해 서쪽 본군을 헤집으며 대장기가 드러난 그 순간, 방진에서 뛰쳐나와 말 잡아타고 따라왔던 기랑의 총알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

    희망은 아예 없을 때보다 미약하게 주어졌다가 박살 났을 때 더 가혹하다.

    도광제는 사람이 하룻밤 만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린다는 말을 이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염만장(氣焰萬丈)한 카자크 기병이 엉덩이를 걷어찰 기세로 을러대는데도, 도광제는 주저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혁명이란 게…… 뭐냐? 어떻게 하면 이토록…… 천지가 뒤집힐 수가 있는 거냐?”

    베니그센은 흙먼지와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십니다. 황제 폐하.”

    귀족의 예법으로서 황제의 하문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베니그센은 일단 그렇게 대답했다.

    혁명가가 아닌 그에게는 확실히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동안 보고 들은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이번 전투에서 베니그센 장군도 무언가 느낀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안에서도 뭔가 희미한 개념이 잡혀 가기는 했다.

    허나 그것은 본질적으로 피상적 지식이었다.

    베니그센은 멸망한 고대 국가(볼테르의 악의적 촌평과 달리 세 단어 다 맞다) 신성 로마 제국의 최후 귀족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푸른 피라고 한다면 바로 그를 말한다. 따라서 베니그센의 혁명에 대한 이해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남자가 임신에 대해 아는 정도 이상이 되질 못했다.

    100년 뒤에는 그 어디보다도 혁명적이 될 나라 소속이긴 하나, 지금의 러시아는 어디까지나 로맨스 판타지 궁정 사회다.

    지식만 늘어놓으라면 할 수는 있다.

    아메리카 혁명과 프랑스 혁명이 있었으니만큼 유럽 지식인에게 그다지 생경한 일도 아니다.

    끝없는 전복(顚覆), 영구한 반항, 전통적인 모든 사회 체계와 권위에 대한 급진적 저항, 인본주의와 인간 이성 외의 모든 통제에 대한 거부. 그 모든 것은 혁명에 속했다.

    연대기에 쓸 만한 단어로 정리하자면 그렇다는 의미다. 그러나 베니그센은 그중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빈 총을 들고 다가오는 ‘진짜 혁명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베니그센은 장난기가 섞인 영어로 그녀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혁명이 무엇인지 삼가 물으시는군.”

    기랑은 도광제를 한번 쓱 쳐다보았다. 길명이는 회장 동지가 자기를 볼 때보다도 무관심한 시선을 던졌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을 것이다. 최소한 자기가 꼴찌는 아니란 의미니까.

    도광제와 베니그센 모두 그 눈만으로 이미 그녀가 혁명이 무엇인지 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랑은 두 사람의 예상을 깨고 직접 입을 열었다.

    “굴복하지 않는 사람[Dreadnought]들의 것이다.”

    ***

    조선 인민들은 강철군주와 김조순에게 엎드리지 않았다.

    공화국 사람들은 대국 청 앞에 신종하지 않았다.

    유구 인민은 사쓰마에 대항했고, 중화 오족은 두려움 없이 여진 황제와 맞부딪쳤다.

    공포를 모르는 자, 드레드노트. 그 이름은 어느 나라의 해적선 따위보다는 사실 혁명에 붙어야 마땅했다.

    혁명을 인도하는 조타수(선장이 아니다) 정시준의 뒤만 따라가면 그런 반동적인 비겁함 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아직 쌀쌀한 이월의 성경부 서쪽에서, 시준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에서 내리기 위해서다. 그것은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혁명 동지들에게 마땅히 갖춰야 할 예우였다.

    그리고 그런 시준의 좌우로 주석결사옹위대 병사들과 심양 주둔군, 그리고 혁명무력부 제1부부장 남공철이나 총참모장 홍총각 등 여러 간부들이 도열했다.

    베니그센은 예르몰로프에게 속삭였다.

    “허, 사열이라도 하는 것 같군.”

    “승자의 귀환이니까요. 개선이라면 개선 아니겠습니까? 어딘지 분위기는 다르지만.”

    “음. 확실히 달라. 이건 사열을 흉내 낸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이야. 굳이 말하자면 모여서 친구를 맞아들이는 것과도 유사한데. 벼락부자가 되어 졸렬하게 귀족을 흉내 내는 부르주아와는 비교할 수 없어. 결정적인 차이는 자존심의 문제지.”

    예르몰로프는 그 긴말을 한 귀로 흘렸으나, 베니그센은 깊은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처음 기랑이 파견되었던 목적은 베니그센과 러시아 사람들을 안전하게 공화국 점령지 안으로 들이기 위해서였다.

    중간에 임무가 다소 극적으로 바뀌었다 해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당연히 기랑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시준 역시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비록 지금 그의 옆에 ‘진짜 볼일’ 보러 성경부까지 쫓아온 지유와 명주가 같이 걷고 있다고 해도, 시준은 그다지 눈치를 보지 않았다. 최소한 겉으로는 그랬다.

    그러던 시준은 기랑의 몸 곳곳에서 싸맨 붕대며 붙인 고약을 보고 놀랐다.

    걷는 모습이 활기차 보여서 얼른 알아채지 못했는데 기랑은 여기저기 심한 찰과상을 입은 상태였다.

    “괜찮아?”

    “괜찮아.”

    시준은 잠시 침묵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잘 몰라서였다.

    그때 지유가 답답하다는 듯이 나섰다.

    그녀는 일반적으로 개선장군에게는 잘 쓰이지 않는 말로써 기랑을 환영했다.

    “어서 와. 고생했어.”

    낯설고 큰 사내들의 무리에서 약간 긴장했던 명주도 기랑을 알아보고 반갑게 파닥였다. “엄마!” 기랑은 명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유의 눈을 쳐다보았다.

    “다녀왔어.”

    ***

    시준은 사망한 동지들의 시신을 최대한 정중히 수습해 혁명열사릉에 묻어주도록 명했다.

    대부분 그럴 정신도 없었던 카자크들은 차후 중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시신 반환 문제를 반드시 거론하도록 약속했다.

    러시아인들은 그것이 자신의 용맹을 폄하하는 일이라며 불편해했지만, 속마음으로야 고마워할 것이다.

    그렇게 ‘급한 일’을 다 처리했다고 생각한 시준은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남공철이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엄청나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그 신묘한 보법에 감탄했다.

    그리고 남공철은 다른 재주도 보여주었다.

    마치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속삭인 것이다. 논리적 모순 따위는 혁명적으로 초월해 버린 제1부부장의 위엄이었다.

    “주석 동지. 뭔가 잊으신 게 있는 것 같소이다.”

    “잊어버렸다고요?”

    시준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곧 입을 벌렸다.

    도광제가 이제야 시준의 눈에 들어왔다. 황제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포로 행렬 가운데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사실 시준의 부주의함을 비난하기는 힘들다.

    물론 도광제의 가치는 현재도 낮지 않다. 다른 것은 다 차치하더라도, 현재 가장 도광제를 애타게 원할 중화 혁명당에게는 더없는 협상 재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도광제를 융숭히 대접함으로써 발생하는 가치는 아니었다.

    시준이 동지들보다 먼저 신경 써야 하는 종류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고귀한 신분을 예우로 모셨다가 미묘한 정치적 저울에 시의 적절히 얹어 형세를 단번에 조정한다는 구상은 유럽의 먹물 든 정치가들이나 환호할 수작이다.

    예를 들면 반세기 뒤 스당에서 대패한 다음 뻔뻔하게 살아서 항복하여, ‘장교를 제외한 병사 전원은 감옥행’이라는 환상적 협상 결과를 얻어낸 나폴레옹 3세처럼 말이다.

    황제를 위해 총칼 맞고 창에 찔리며 대포에 터져 죽던 병사들은 수용소 철창 안에서 황제 시해의 열망에 불타올랐을 것이다(그래도 혁명 원조 맛집 가락이 있는지라, 죽이지는 못하지만 폐위는 한다).

    그렇게 자기들‘만’은 죽지 않을 거라고 믿고 기분 내키는 대로 전쟁 일으키는 위정자들, 그리고 그들의 주구가 된 귀족(그러니까 이 경우는 장교들)의 상호 보호 불문율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따라서 지금 시준이 도광제를 특별 취급한다거나, 안으로 모셔 차 한잔하며 얘기를 나눈다거나 하는 짓거리 따윈 다른 말이 필요 없는 반동의 소치다.

    포로는 모두 포로다. 수평하게.

    도광제가 뭘 기대하고 저렇게 눈을 굴리는지는 모르겠는데, 시준은 도광제를 다른 포로와 별도로 다룰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준은 자기가 중요 사항을 그냥 깜박해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원래부터 도광제는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을 매우 강조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반동의 군주만을 내가 직접 상대한다면 다른 자들이 어떻게 보겠소? 그건 그를 다른 여진족보다 위에 올려 주는 것이 되오. 제1부부장 동지께서는 수평도를 다시 상기하시고, 저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묶어 신속히 평양에 보내도록 하시오.”

    남공철은 아직도 혁명의 길에 통달하지 못한 자신을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병사들은 숨죽인 감탄을 터뜨렸다.

    이건 시준의 생각과 달리 그의 위기 모면이나 잘난 척 이외에도 많은 효과를 불러왔다.

    장병 수십만을 러시아에 묻어 놓고 태연히 엘바 대공 해먹은 숙부 나폴레옹이나, 게르만족 약탈자 앞에서 ‘아 내가 진짜 장렬히 죽으려고 했는데’ 따위의 허세 문자나 치던 조카 나폴레옹은 과학적인 프랑스인들에게 경험적 교훈을 주었다.

    한마디로, 프랑스인들은 전쟁에서 열심히 싸워 봐야 나만 성기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랑 비탈. 프랑스군이 무엇인지 상징하는 그 말은 직역하면 ‘생명의 도약’라는 뜻이다.

    프랑스인들은 그 구호를 100년 뒤에도 충실하게 지켰다.

    무엇보다 값진 ‘생명’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군은 6주 만에 수백만이 일제히 나치 독일로 ‘도약’했다. 생명에의 의지로 이보다 더 강렬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공화국 혁명군에 일어난 일은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었다.

    주석 동지는 언제나 혁명을 그대로 실천했다.

    도광제는 병사들이 보기에도 세계 최고의 전리품이었다. 병사들 역시 원래는 조선 사람이라 대청의 황제가 어떤 정도의 지위인지는 어렴풋이 알았다.

    그러나 주석 동지는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신작칙이다.

    몸이 행하는 바가 바로 규칙이 된다는 그 언명은 고대의 황제들도 가지던 칭호였다. 허나 그 의미는 전혀 달랐다.

    반동 군주의 경우는 황제가 행하면 그게 옳든 그르든 법이 되어 아랫사람들이 시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말만 들어도 혁명 정신이 구토와 함께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주석 동지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무엇이 옳은지는 그 몸이 하는 바만 보면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살짝 의문을 가질 사람이 여기 최소한 두 명은 있었지만, 그 정도는 오차 범위다.

    너무나 감동한 혁명군은 도광제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 카자크조차 걷어차‘려고’만 했을 뿐이다 - 황족들의 변발을 잡아채며 그들을 내몰았다.

    그런데 그중에는 조선 인민 해방전쟁 시절부터 혁명군에 종군하여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한 고참병도 몇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 왕과 청 황제의 뒤통수를 모두 때려 봤다는 업적을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수평한 공화국에서는 그저 술자리 이야깃거리 정도 이상은 되지 않을 업적이었지만 말이다.

    체면 떨어질 뻔한 사태를 슬기롭게 모면한 시준은 다시 마차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쪽에서 총참모장 홍총각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뭔가 군사적으로 급한 소식이 전해진 모양이었다.

    이강회가 ‘사후 재가’를 받기 위해 보낸 보고였다. 그것을 받아본 시준은 적어도 도광제 때보다는 진지해졌다.

    시준은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1함대제독 동지의 결정은 내가 전권을 위임한 바이니 시비하지 않겠으며, 잘 알았다고 전해 주시오. 마지막까지 꼼꼼히 살펴 실수 없이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오.”

    “예. 주석 동지. 그대로 추달하겠소이다.”

    홍총각이 가고 나자 시준은 천천히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표정과 동작은 심원한 혁명 계획을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혹시 자기가 또 잊어버린 것이 없나 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건 없었다. 안심한 시준은 곧 동료들과 함께 성경부로 돌아갔다.

    ***

    서명아는 약속대로 영국군의 무사 퇴각을 보장했다.

    그러나 서명아가 청, 아니 직례 일대라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으면 애초에 전쟁이 이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서명아는 분명히 철수하는 영국군을 건드리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명령만 내렸을 뿐이었다. 그 또한 영길리 오랑캐 놈들을 지켜 주는 데에 열성적일 리가 없다.

    그래서 천진에서 중국 배밖에 안 보이는 항구를 보며 절망하던 코크란 제독과 휘하 병사들은, 얼마 안 가 배수진(수동태)을 치게 되었다.

    그간 영국군에게 노략당하고 도륙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민병대를 꾸려 밀어닥친 것이다.

    그 숫자는 혹시 서명아의 본군과 비슷하지 않나 착각될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다.

    하지만 전력 면에서는 착각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아편 전쟁 때도 증명되었듯 원래 중국의 시민병은 관군보다 항상 강한 것이 전통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북경을 수습하고 한편으로 중화 혁명당 쪽에 태반을 갈라 보낸 서명아는 저들을 막아 주고 싶어도 막기가 힘들다.

    코크란 제독은 북경에서 약탈한 금은보화를 풀어 재빨리 평양에 보낼 배를 수배하는 한편, 사람을 민병대에 보내 청 정부의 결정을 알리고 싸움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그 민병대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인간은 하나도 없었다.

    있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군마의 안장에 사람 모가지만 매달려 되돌아오는 이 고풍스러운 거절은 유럽인에게 약간의 문화 충격을 선사했다.

    코크란 제독은 권총을 빼 들고 날뛰었다.

    “이 투르크족 같은 새끼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그랬다가는 이번에야말로 원정군이 전멸한다. 부하들이 죽을힘을 다해 뜯어말려 제독은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그들은 곧바로 숙의에 들어갔다.

    “어차피 저들은 가난한 농민 무리입니다. 페킹에서 가져온 재보를 써서 회유해 볼까요?”

    “말이 통할 놈들이었으면 왜 사절을 참수해서 돌려보냈겠나! 그 교활한 중국 놈들이 조약을 어겨! 당장 본국에 품의해서 대함대를 데리고…….”

    “그것도 일단 살아서 나가야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리고 이 정도 대패라면 재차 원정이 결의되기는 힘들걸요.”

    “너 나가. 야, 누가 이 새끼 기둥에 매달아라. 태형 20대다.”

    “진정하시고, 육로는 어떻습니까? 공화국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북경에서 수집한 문서에 따르면, 이 지경이 되어서도 청 정부는 산과 바다의 관문[山海關]에서 병사를 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지역이라는 거죠.”

    그런 갑론을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민병대라는 것은 원래 기세 빼면 시체다. 따라서 급조된 ‘의병’들로 하여금 총 맞으면 아프다는 당연한 사실을 계속 상기할 시간을 주며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곧 함성이 들리자 장교들은 일제히 와라락 일어섰다.

    “일단 병사를 정렬시켜!”

    마땅한 대책을 짜내기도 전에, 영국군은 청나라 의병을 맞아 다섯 차례의 쉴 틈 없는 방어전을 치러야 했다.

    불리함의 정석 같은 지형에서 온갖 악조건은 다 떠안은 채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는데도 당장 군대가 와해되지 않은 것은, 여기의 장교 대부분이 나폴레옹 전쟁을 헤쳐 나온 베테랑이라는 이유 외에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곧 한계에 몰렸다.

    중상을 입고 자기 뒤로 급히 후송되는 – 뒤는 바다인데 후송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 캠벨 대령을 보면서, 코크란 제독은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것과 저놈들에게 돌격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어선은 거의 무너졌다. 일부 장교들은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의미 없는 소리만 중얼대었다.

    “자비로우신 주여……. 영국의 왕을 보호하시고[God save the king], 그의 의지를 실현하는 병사들을 보호하소서.”

    어떤 신이 자비롭다면 그는 악을 미워할 텐데, 따라서 해적을 구해 줄 이유가 없다는 당연한 논리는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로 단정해 버리는 것은 성급하다.

    신앙은 본래 논리를 초월하는 법. 신은 진실로 그들을 구했다.

    현세를 오래전에 떠나버린 그들의 신이 아니다.

    자신을 일컬어 신이라고 부른다면 현재 지구에서 가장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동조해 줄 인간, 정시준이었다.

    동맹국이라서 구한다는 속세 지향적이고 재미없는 설명은 이 경우에 정확하지 않다.

    혁명의 인민들이 정시준에게 헌사하는 신앙 중에서는, 런던 증권거래소 신사들의 몫도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정시준은 영국인의 부름에도 마땅히 응한 것이다.

    정시준은 그의 사도를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반파되거나 가라앉은 영국 배가 여기저기 시체처럼 널려 있는 천진 앞바다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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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1. 스당에서 항복한 나폴레옹은 ‘나는 나의 병사들과 함께 죽는 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제 나의 검을 폐하(빌헬름)에게 맡긴다’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때 나폴레옹 3세는 독일군이 명예롭게 풀어주면 자신이 군대와 함께 퇴각하여 파리로 돌아갈 줄 알았으나 비스마르크는 그것을 중간에 컷합니다. 하긴 그럴 거라면 전쟁도 하지 않았겠죠.

    그래도 비스마르크 역시 귀족이고 19세기 사람인만큼 당대 유럽에 통용되는 관례를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그의 ‘가혹한 처우’는 장교를 제외한 병사들을 수용소(독일 사람들이 수용소를 좋아함) 처분하는 것이었는데, 거꾸로 말하면 귀족인 장교들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이때는 포로라 할지라도 장교는 무기를 휴대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병사들 입장에서는 배알이 꼴릴 만도 하겠죠. 이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실제로 나폴레옹 3세는 스당 전투를 마지막으로 파리 시민들에 의해 원격 폐위되어 영국에 망명하게 됩니다.

    2. 엘랑 비탈은 작중 초반부에도 한 번 등장했었죠. 사실 생명력이 충만한, 활기찬 약동이라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본래는 앙리 베르그송(아직 안 태어남)의 철학 용어로 어떠한 유기체가 스스로 창조적 진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생성하는 에너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엔트로피가 대표하는, 필연적으로 쇠망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자연적 흐름을 ‘거부’하고 거꾸로 생명을 유지, 생성하는 비약이지요.

    위의 설명은 저번 전범국 철학 때처럼 간략한 개요 수준으로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베르그송이 유럽 철학자 중에서도 난해한 언어를 많이 쓴 편이라 저는 좀 알아먹기가 힘들더군요.

    어쨌든 프랑스군의 공격적 교리에 붙이는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죠. 상당히 원뜻과는 멀어진 셈입니다.

    3. 영국의 국가로 알려져 있는(실제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법적 지정 국가는 없습니다) God save the king(Queen)은 작곡과 작사의 유래가 불분명하며, 영국 말고도 많은 나라에서 같은 노래를 행사 때 썼습니다.

    4. 드레드노트는 작중 표현대로 ‘두려움[Dread]이 없는[nought] 것’이라는 뜻이며, 이 이름은 영국 해군에서 16세기부터 여러 차례 전함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가장 유명한 건 1906년 건조된 그 드레드노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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