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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70화 (270/284)

270화

91. 천상천하(天上天下)(1)

시준이 별달리 대단한 예지를 한 건 아니다.

그가 무슨 재주가 있어서 영국 해군이 천진에서 패배할 줄 알았겠는가. 직접 물어봤다면 그럴 리가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는 북쪽으로 떠나며 마침 도착한 이강회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중국은 산해관과 요서의 군을 빼지 않고 있고, 영길리 역시 본토의 군대가 남아 있소. 우리도 마지막 손패를 잃지 말아야 하오.’

‘그게 혁명해군이었던 것이군요.’

‘그렇소. 영길리나 중화 혁명당과 손잡고 중국을 친다는 큰 틀 안에서, 그 외의 조목은 모두 제독 동지에게 위임하겠소. 인민 해방의 결정적 순간에서 때를 놓치지 말아 주시오.’

그리고 그 말대로 지금껏 전력을 온존한 – 사실은 문순득도 런던에 있으니 이강회마저 없이는 대규모 원정을 나갈 형편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 혁명해군이 결정적 순간에 역할을 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영국은 전쟁에 완전히 실패했다.

계획했던 대로 중국을 정복하기는커녕, 원래 있던 개항장도 유지를 못 할 판국이다.

청이 다 쓰러져간다 한들 산해관 방어선은 건재하다.

어떻게 보면 그곳은 황제보다 중요하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은가. 황제는 버려졌을지언정 산해관과 영원성은 많은 사람의 피나는 노력으로 유지되었다.

그 노력은 보람으로 돌아왔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그곳을 정면으로 뚫을 수 있는 군대는 어디에도 없다.

북경에서 포위된 영국군을 구해낼 방법은 오직 해군뿐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 두 가지 면에서 그게 가능한 양과 질의 해군을 가진 나라는 딱 둘이다.

고려와 베트남이다.

그런데 베트남의 경우 영국의 적국에 가까운 데다, 일전에 청에게 대패한 것 때문에 반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어 외부에 신경 쓰기 어렵다.

공화국 외에는 없는 것이다. 대체 불가능성은 협상에서 상당한 수준의 우위를 보장한다.

그래서 영길리 해적 놈들은 중국 함대에게 패배하고 쫓겨 울면서 삼화부에 기어들어 왔다.

이쯤 오면 시준도 눈치채야 하겠지만, 시준의 소위 ‘예지’가 ‘들어맞는’ 방식이란 게 대충 이렇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하면 적당하다(사실 다른 예언자들도 비슷하다).

아래위로 다 뭔가를 좍좍 쏟는 헨리 호프 함장은 주 고려 특명전권공사대리 토마스 매닝을 대동하여 이강회를 찾아왔다.

그러고는 북경에 남아 있는 아군을 구해야 한다며 거듭 간청했다. 이강회도 영어에 능숙하기 때문에 그 대화는 영어로 진행되었다.

이강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연기했다.

“동인도 회사에는 왜 얘기를 안 하셨소?”

흥분과 초조 때문에, 그리고 여러 생리적 불편함 때문에 제대로 말을 못 하는 헨리 호프를 대신해 토마스 매닝이 설명했다.

“했지요. 하지만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 세포이의 인심을 잃었고, 거기에 시크교도의 준동이 심상치 않아 병사를 함부로 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공화국밖에 도와주실 수 있는 나라가 없어요.”

그리고 호프 함장 역시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베이징의 협상을 모르므로 영국군이 지금 당장이라도 다 죽을 거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호프는 빽 소리 지르는 것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보다 동인도 회사 함대가 여기로 올 때쯤이면, 페킹 성벽에서는 성가퀴에 내걸린 오천 영국군의 머리가 다 썩어버린 뒤일 거요!”

사실 이강회도 알면서 물어본 것이다.

이강회가 유구에서 근문소 대장 노릇 하며 놀기만 한 게 아니다.

이강회는 이미 지역 위원장 정도 하기에는 지나치게 고위급 인사였다. 유구 내부 사안이야 그에게 부업에 불과했다.

이강회는 유구에서 공화국 건립을 위한 여러 조치를 지원하는 한편 다른 쪽으로는 쉴 새 없이 국제 사안을 정탐하고 있었다. 유구의 지리적 위치는 여러모로 그런 일에 걸맞았다.

감옥에 갇힌 쇼코 왕은 무시한 채 폭발적으로 진행된 ‘유구 인민 공화국’의 얼개는 거의 다 갖추어졌다. 고려가 더 간섭하는 것도 모양이 안 좋았다.

그래서 이강회는 일본 담당 외사통호부 부부장 임상옥에게 유구 근문소 위원장 자리를 넘겨주고 평양에 돌아왔다.

그러니 영국군의 소식을 마치 지금 처음 듣는다는 듯 말하고는 있지만, 그건 조선인다운 의뭉일 뿐이다.

적어도 영국군이 도박적인 북경 기습을 감행했다는 정보까지는 이강회의 손에 이미 들어온 후인 것이다.

솔직히 태생이 조선 사람인 이강회로서는 영길리 놈들이 드디어 미쳤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세계 그 자체인 중화 제국의 수도에, 불과 만 명을 좀 넘는 패잔병으로 쳐들어가서 뭘 해보겠다는 말인가?

로드 암허스트 때 중국이 협상에 나선 것은, 동아시아적 관점에서는 지방 도적 떼에게 적당히 관직 내려 주고 입 다물게 하던 전통의 연장선일 뿐이다.

중국이 정말 이 악물고 대들면 배겨날 리가 없다. 이 정도 깨지고 돌아온 것만 해도 상당한 선전이다.

이강회는 품위 있게 부채를 펼쳤다.

그의 대답은 매우 느릿느릿했다. 또한 전혀 의미가 없었다.

“허어, 그것참 딱한 노릇이오.”

선비는 집에 불이 났어도 뛰지 않는다. 그러한 아름다운 기풍을 전혀 모르는 서양 오랑캐 토마스 매닝이 다시 매달렸다.

“그, 그렇게 남의 일 말하듯 할 때가 아닙니다. 농업의류장관, 아니, 함대제독 각하. 고려는 우리의 동맹국이지 않습니까? 이건 중대한 의무이기도 합니다. 물론 영국은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참, 공사대리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 주석 동지와 정치국은 전부 북쪽에 있소. 하다못해 혁명무력부장 동지나 총참모장 동지도 없지. 혁명군 총사령의 직명을 수령하지 않고서는 제멋대로 출병할 수가 없소.”

“……혹시 공화국 정부에는 사후 재가라는 제도가 없습니까?”

“있지요. 조선말로 알려드릴까? 선참후계라고 하지. 하지만 영국도 군대에 관해서라면 그렇지 않을 텐데요?”

당연하다. 군사 이동의 사후 재가 따윌 인정해 버리면 반란 좀 일으켜달라는 소리밖에 안 된다.

게다가 군대의 규정이 엄청나게 보수적이고 빡빡한 이유는, 그런 가혹할 만큼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기상천외급으로 빈발하는 곳이 군대이기 때문이다. 군사적인 일에 자의적 판단은 절대 금지다.

물론, 이강회는 그런 자의적 판단을 완전히 위임받은 상태다.

단지 저 두 오랑캐만 그것을 모를 뿐이다.

런던 증권거래소의 (전) 지배자 왕 첸을 상대로 주둥이 좀 놀려서 원하는 바를 얻어 보려던 토마스 매닝과 헨리 호프가 잘못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항복 선언이었다. 이강회 역시 그제야 본색을 드러내었다.

“주석 동지와 ‘어려서부터 사형제지간이라 우애가 깊은’ 나라면 또 주석 동지의 진노를 피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요. 다만 세계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주석 동지의 천리안 아래에서 대책 없이 월권을 했다가는 나라고 할지라도 아오지에 가서 죽을 때까지 석탄을 캘 뿐이고, 뭔가 위에 말할 게 있어야 하는데…….”

시준의 통치 체제에는 오해와 왜곡이 상당 부분 섞여 있다.

그래서 토마스 매닝은 공사대리 근무 기간이 꽤 오래됐음에도 불구하고 시준에 대해 아직 확신이 없었다.

정시준은 주위에 휘둘리는 것 같으면서도 중요한 순간에 항상 의지를 관철시켰고, 이 시대 사람들이 보기에 군주정에 비해 통치기반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공화정을 적극 표방하면서도 자리를 자주 비웠다.

그런데도 나라는 별다른 문제 없이 굴러갔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이 패자뿐인 진흙탕 싸움 같은 전쟁에서 유일하게 성공을 거두고 있기까지 하다.

물론 매닝도 정시준의 코드인사는 알고 있다.

특히 자기 여자들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다는, 틀림없이 많은 제왕이 부러워하고 더 많은 호사가들이 환호할 그 통치 방식을 말이다.

하지만 권력 앞에 영원한 측근이란 없는 법이다.

토마스 매닝이 아시아에 대해 잘 아는 편이었던 게 오히려 독이었다.

다른 영국인이라면 왕 없어도 잘 돌아가는 자국의 해적민주주의 체계를 적용해 볼 것이다.

그러나 매닝은 그것이 아시아에서 일어나기에는 토양이 너무 다르다고 파악했다. 게다가 그가 보기에 공화국은 신정국가적인 색채도 강했다.

그래서 그는 정시준에게 뭔가 권력 유지를 위한 숨겨진 한 수가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숨겨진 한 수’는 방금 이강회의 천리안이니 아오지니 하는 엄살에서 추론할 수 있었다.

매닝은 ‘가혹한 감시자이자 독재자, 동양의 크롬웰 정시준’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새겨 두었다.

그런 다음 재빨리 말했다.

“제 권한 내에서 할 수 있는 약속이라면, 아니, 각하께서 위험을 무릅쓰시는 만큼 그 이상이라도 힘써보겠습니다.”

이틀 후, 평양에서 의주로 이어지는 천리마 봉화가 가동되었다. 이강회가 시준에게 보내는 ‘사후 보고’였다.

그 이틀 사이 1함대는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전투태세를 완비했다.

코크란 제독이 이끄는 패잔병 행렬이 천진까지 하루 거리를 남겨둔 채로 영국 함대의 패퇴 소식을 들었을 무렵이었다.

***

기랑은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을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친부모가 죽고 자기를 맡아 기른 동네 포수에게 매 맞아 가며 총을 들었을 무렵이었다.

그때 그 포수는 기랑을 친자식처럼 대했다.

귀찮은 군식구를 떠맡았다고 불평하면서, 어떻게든 기랑을 잘 키워 생계 수단으로 써먹으려 했다는 소리다.

양반가였다면 부덕을 닦은 규중의 고운 처녀가 되어 ‘부친’에게 영화를 안겨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조선은 워낙 동방예의지국이라 평민들이 오히려 덕을 엄중히 지켰다.

그들은 사람에게도 수학적으로 값이 안 매겨지면 초조한 어디의 디지털 국가처럼 인신매매와 사전적 정의가 완벽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코 돈이 없어서는 아니고, 혼인의 일에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자아이라도 일을 시켜야 했다. ‘부친’은 기랑이 자기 키보다 큰 총으로 솔방울을 명중시키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았다. 총을 잘못 관리한 날은 때리기도 했다.

그가 고대 로도스 투석병의 지혜로운 양육 방법을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지금 와서는 물어볼 수도 없다.

술에 취해 걸핏하면 그녀를 폭행하던 ‘부친’은 어느 날 ‘호랑이에게 물려갔으니까’ 말이다.

기랑이 그 후 포수들 용병 노릇을 전전하다 시준을 만난 것은 조금 더 후의 일이다.

하지만 로도스 용병들이 그러했듯 그 가혹한 훈련의 결과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기랑은 그 사실에 어느 정도 감사를 느끼면서도, 왜 지금 그 일이 생각나는지 의아해했다.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예가 완성된 뒤에는 느낄 기회가 드물었던 여러 가지 고통이 지금 그녀의 몸을 엄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혹한 소음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오른쪽 귀는 이제 멍멍하여 잘 들리지도 않는다.

그녀의 목숨을 담보해야 할 손가락에서는 흐르는 피의 감각만이 기이하도록 짙게 느껴질 뿐 아픔조차 메아리처럼 흐릿했다.

반면 몇 차례나 청군의 화살과 총탄에 긁힌 몸 여기저기는 쉴 새 없이 뚜렷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정통으로 맞은 건 아직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 꼴임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으려면 방진 안에서 계속하여 몸을 솟구치거나 날리거나 굴러야 했다.

이미 옷은 거의 누더기가 되어 맨살이 비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길명이조차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길명이의 애타는 마음이 식은 건 아니고, 어깨에 총알을 맞아 길게 누워 있는 상태에서는 좀 어려운 일이었다.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다.

기랑의 상처쯤은 여기에서 경상은커녕 생채기라고 말할 축에도 끼지 않을 정도였다. 마차 방진 안에 모두 있던 고총련 중에서도 벌써 사망자가 셋이나 나왔다.

밖에서 대응하던 코사크 군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이제 반도 남지 않았다.

예르몰로프 장군은 아직 기운차게 칼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지휘관인 그의 목숨도 사선 위에서 춤추는 중이었다.

물론 청군은 그보다 훨씬 많이 죽었다. 허나 남은 병사들은 베니그센의 추측과 달리 도망가지 않았다.

이것이 정녕 중국군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악스러운 기병도와 창이 곳곳에서 교차했다.

다만 멋지게 부딪쳐 불꽃을 튀기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은 일합 만에, 더 운이 좋은 쪽이 더 나쁜 쪽의 살을 파먹고 종료되었다.

베니그센 역시 여유를 거의 잃고 지휘에 매진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입 안으로 들어온 수염을 거칠게 끄집어내며 외쳤다.

“지독하군, 지독해! 아일라우(Eylau)에서 나폴레옹의 폭위 앞에 야음을 틈타 도망쳐야 했을 때도 이토록 몰린 적은 없었는데!”

독일어다 보니 아무도 알아들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베니그센은 기랑에게 다시 말했다.

“별로 유감은 없다만, 아무래도 네 예측은 틀린 모양이구나.”

기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청군의 니루 어전쯤 되어 보이는 고급 군관의 머리가 박살 났다.

기랑은 다시 다음 총을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그제야 베니그센의 말을 들었다는 듯이 약간 지체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순간 들은 것은 베니그센의 말이 아니었다.

워낙 시끄러워서 놓치기 십상이었지만, 그건 공화국 무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날카로운 소리였다.

잠시 후, 기랑이 억양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온다.”

“그래. 네 믿음은 안다. 하지만…….”

“아니. 동쪽을 봐.”

베니그센은 그 말대로 했다.

그러고는 환호를 질렀다.

***

송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상할 수 있었던, 아니, 상상도 못 했던 최악의 사태였다.

‘정시준, 정시준! 그 교활함은 천문과 지리를 모두 가지고 노는 것 같구나. 그러한 기재를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위로 천자를 섬겨 천하를 평안케 하고 아래로 인민이 고통받지 않도록 위무하는 일에 힘쓰지 않느냐? 이러한 궁병독무가 끝내 하늘의 갚음을 받지 않을 줄 아는가!’

그런 멍청한 질문은 사실 굳이 정시준에게 묻지 않아도 공화국 인민 누구나 대답할 수 있다.

한마디면 충분하다.

‘반동이다! 전위대!’

송윤 또한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칼을 움켜잡았다.

여기서부터는 위임받은 지휘권을 넘어서는 부분이라, 부도통 역시 성경 장군을 급히 쳐다보았다.

송윤 또한 즉시 판단했다.

“동쪽에서 도적들을 에워싸던 부대는 반전하여 저들을 맞상대하라. 나머지는 더욱 격렬하게 몰아친다. 이놈들을 구하러 온 것이라면, 우리가 다 죽더라도 그 전에 저놈들을 모두 죽인다!”

말투는 장렬했지만 결국 부대를 나누어 상대하라는 얘기다. 동쪽에서 러시아 공사관 일행을 두들겨대고 있던 약 2천여 명의 기병은 – 숫자가 많이 줄었다 - 역습을 방지하기 위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맞지는 않았으나, 그들 주위에서는 이미 마상에서 아무렇게나 쏘아버린 주체신기전 3호가 사납게 터지고 있었다.

김유근 여단장 매경은이 달리던 그 모습 그대로 호령했다.

“거창(擧槍)!”

“정시준! 결사옹위!”

5천 명에 달하는 김유근 여단병은 일제히 기병창을 치켜들었다.

창이 검보다 압도적으로 배우기 쉽고 대규모 군대를 구성하기도 수월하다는 조언은 냉병기 군대에 있어 꼭 따라나오는 것이다.

대체로는 맞는 말이다. 허나 세상일이 다 그렇듯 예외는 있다.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이 시대의) 창기병이다.

말 위에서 두 손으로 다뤄야 하는 경우가 잦은 창은 승마술과 무술, 용기 모두에서 대단한 수준의 기예가 필요했다.

전쟁 잘 못하는 나라 장교다 보니 신뢰에는 신중해야겠지만, 후일의 프로이센 사람 빌헬름 발크(Wilhelm Balck)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창기병은 신체가 튼튼하고 철저하게 훈련받은 숙련병이어야만 한다. 아마도, 신병에게는 기병도만을 들려 줄 필요도 있을 것이다.’

4개 사단에서 고르고 골라 차출된 이 김유근 여단의 기병들은 물론 풋내기 신병이 아니다.

저고리와 겉옷은 붉은색이요, 바지는 흰색이라 얼핏 보기엔 영국군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완전한 프랑스식 창기병이다.

그리고 근대 프랑스 창기병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폴란드 기병을 받아들여 정립된 것. 한마디로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구성이다.

매경은은 사기의 중요성을 아는 장수였다. 동시에 자기 과시에 꽤나 의욕적인 장수이기도 했다.

매경은은 창을 휘두르며 외쳤다.

“여단기를! 올려라!”

바람이 천을 찢어버리려는 듯한 소리와 함께 좌우에서 깃발이 활짝 펼쳐졌다.

성경부에서 수여받은 김유근 여단의 자랑스러운 깃발이었다.

바탕은 말할 것도 없이 적기다. 그리고 혁명 열사 김유근 동지와 인민의 영도자 정시준 동지를, 그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경지교의 동지애로써 이어주었다는 전설적인 예물이 거기에 그려져 있었다.

암탉과 수탉 한 쌍, 그리고 달걀 하나였다.

시력이 남보다 좋은 기랑은 그 깃발을 보고 웃어버릴 뻔했다.

그녀는 시준이 김조순과 나누었던 그 ‘예물’의 의미와 과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리고 김유근은, 비록 과정이 약간 뒤틀려 있기는 하나 기랑에게도 의미가 깊은 사람이었다.

기랑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라면 시준과 지유, 명주였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동감할 수 있는 사람은 김유근이었다.

지금의 기랑에게 있어 김유근은 시준만큼이나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도 할 수 있었다.

살았느냐와 죽었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두 사람은 모두 자기가 믿는 바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그 와중 자신을 가로막는 것과는 모두 싸웠다.

기랑의 남편은 시준일지 몰라도, 기랑의 동지는 김유근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공감대 아래에서, 기랑은 문득 어두운 확신이 들었다.

지유의 말이 복수심에서 나온 거짓이라는 것을 김유근이 알았더라도 그는 아마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내가 여기서 김유근처럼 죽었다면 시준은 나를 혁명열사릉에 묻어 주었을까, 아니면 가묘(家廟)를 따로 했을까?’

기랑은 그에 대해 더 생각해 보려 했다.

하지만 그런 한가로운 사색에 오래 잠겨 있을 여유는 없었다.

베니그센은 송윤의 의도와 반대로 서쪽 청군을 사납게 공격하여 물려 놓은 뒤 곧바로 혁명군과 합세해 동쪽을 뚫으라고 지시했다. 당연하기까지 한 판단이었다.

기랑은 총을 잡았다.

김유근의 깃발이 내려다본다면, 역시 여기서 질 수는 없다.

그간 시준은 마치 어떤 다른 공화국 같은 분위기로 자연 발생하는 혁명가요를 보고 기겁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더 사상적으로 온건한’ 군가를 마구 집어넣었다.

그 결과로 혁명군의 군가는 제식 동작이나 무기 종류보다 외우기 힘들 만큼 많다는 악평도 듣는다.

하지만 영광스러운 김유근 여단에겐 해당 사항이 없다.

그들이 제창할 곡은 이미 단 하나로 정해져 있다.

매경은은 과거 한양군에서의 위대한 혁명과 함께 울렸던 ‘김유근 열사의 노래’를 선창했다.

“가슴 떨려 요동쳐! 북소리 되어 울릴 때!”

병사들 역시 일제히 화답했다.

“내일은 열려 밝은 아침이 오리라!”

청군이 쏘아대는 마상총이나 화살 따위는 혁명의 열의 앞에 짚검불과 같을 뿐이다.

김유근 여단은 달려오던 그 기세를 전혀 늦추지 않고 청군에게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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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로도스 섬의 투석병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용병으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로도스 섬이 농업적으로 풍족한 곳이 아니라서 섬의 경제는 대개 이러한 용병 노릇으로 돌아갔는데, 그것을 위해 아이들에게도 어릴 때부터 가혹한 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투석은 궁사와 마찬가지로 숙련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그렇습니다. 일정 거리 이상의 표적을 돌팔매로 명중시키지 못하면 밥을 굶기는 정도는 예사였다고 하지요.

2. 아일라우 전투는 나폴레옹의 독일-폴란드 원정 시에 일어났던 전투로, 베니그센은 여기에서 부상까지 입어가며 군세를 후퇴시켜야 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프랑스군도 적잖은 피해를 입어 나폴레옹에게도 타격이 되었지요.

3. 프랑스 창기병만 그런 건 아니고, 다른 유럽 국가의 창기병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폴란드 창기병의 훈련 방식과 장교들을 많이 영입했습니다.

엄밀히 말해 프랑스 창기병대의 공식 창설은 1811년경이라 푸셰 일행이 조선에 온 때보다는 약간 늦으나, 그 전부터 훈련이 이루어지고는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작중에서는 전수된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4. 빌헬름 발크는 이때 사람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당시, 그러니까 독일 제국의 장교입니다(프로이센 출신인 건 맞음). 보직도 기병 같은 게 아니라 통신이었고 야전 지휘관이라기보다는 전쟁 이론가였는데, 전술 서적을 저술하면서 한 말이지요. 그쪽 분야에서는 유명한 인물로, 이때 특히 미국에서 빌헬름 발크의 저술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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