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67화 (267/284)
  • 267화

    90. 마지막 싸움(1)

    새 황제 옹립은 도광제의 탈환만큼이나 수월치 않은 일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차기 황제 자리를 주겠다는 소리에 솔깃한 황족도 있었다. 조지 스턴튼 공사도 그 자리 그냥 차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치는 도광제가 버리고 떠났다는 것에서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서열상 별로 중요한 황족이 아니었으며, 눈앞에 펼쳐질 부귀영화에 눈이 멀어 괴뢰정부의 군주가 무엇인지도 헤아려 보지 않을 정도로 무지했다.

    괴뢰 군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원래는 군주가 될 수 없는 자가 보위에 오른다는 면에서 볼 때 난세를 틈탄 잠룡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만한 준비를 해 두지 않은 자는 기회가 와도 선택되지 못한다.

    코크란 제독과 스턴튼 공사는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 머저리들은 도대체 자기를 지지할 귀족 세력 하나 제대로 만들어 두지 않았다. 역시 지혜 가득한 빛의 군주 도광제가 간과해 버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게다가 두 사람의 노력이란 것도 완벽한 영국인의 관점이라, 일을 더욱 꼬아 놓기만 하고 있었다.

    조지 스턴튼이 이름난 동양학자로서 중국에 대해 잘 안다고는 해도 그 지식이 해적의 안경을 통해 세상을 비추니 결과는 어차피 ‘영국’이었다.

    “여덟 개의 깃발(Eight Banners, 八旗)에서 가장 위의 세 깃발[上三旗] 출신이 황제의 근친이고, 황제는 노란색을 채워 넣은 깃발[鑲黃旗]에 속한다고……. 그러면 황실 식구들이 여기에 소속되어 있단 것 아닙니까? 공사 각하. 그냥 여기에서 아무나 뽑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그렇지가 않소. 좀 복잡한데, 황제와 같은 깃발 아래 섰다고 해서 무조건 다른 깃발보다 우월한 게 아니니까요. 아마 귀족들은 인정하지 않을 거요.”

    “골치 아프니까 깃발 별로 순위를 매깁시다. 인도 카스트처럼요. 인정하지 않는 녀석을 다 죽이고 지금부터 그렇다고 선포하면 안 됩니까?”

    “명쾌한 해결 방법이긴 하지만, 그러기에는 성 밖의 군사가 너무 많소. 제독.”

    스턴튼 공사의 지적에 코크란 제독 또한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서명아의 10만 대군은 왠지 더욱 불어나 있었다(도광제가 데리고 간 친족을 제외한다면 쓸 만한 차기 황제감도 다 저기에 있다).

    서명아의 피 토하는 격문에 호응한 인근 관리와 황실의 먼 친족들이 군사를 끌고 왔기 때문이다. 서명아가 군재는 미심쩍어도 글은 잘 썼다.

    천진에서 간신히 오고 있던 보급 또한 막혀버린 상태였다. 누가 봐도 영국군이 불리했다.

    그러니 황제 옹립 또한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어떤 멍청이가 볼장 다 본 침략 세력의 괴뢰가 되어 쾌속 능지처참을 예약하겠는가. 처음에 엉덩이 들썩거리던 몇몇 황족도 눈앞의 대군을 보자마자 우국충정에 빛나는 열사가 되어버렸다.

    코크란 제독이 어떻게 하면 패배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퇴각할지 고민하던 중, 가장 바라지 않았던 급보가 날아왔다.

    “중국군 3만 정도가 동남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톈진이 목표인 듯합니다!”

    제독은 예전 자기 발가락을 다치게 했던 궤짝을 다시 걷어찰 뻔했다.

    ***

    천진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함대에는, 당연히 병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코크란 제독이 보급선 유지와 후방 단속에 소홀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북경과 천진에 모두 병력을 두기에는 절대적 숫자 자체가 모자랐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여기에는 유사시에 주요 전함의 출항만 간신히 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곳 함대를 위임받아 지휘하던 헨리 호프 함장은 개떼처럼 몰려오는 청군을 보고 흑산도와 같은 꼴이 될 뻔했다. 정말이지 그의 괄약근이 아직 튼튼해서 다행이었다.

    이대로라면 함대 전체를 나포당할 수도 있다. 아니, 나포만 당하면 다행이다. 중국인들은 영국의 모든 배를 그대로 불태워 버릴 태세였다.

    헨리 호프는 함장 체면에 친히 갑판을 달리면서 손을 흔들어야 했다.

    “배를 일단 부두에서 띄워! 바람은? 제기랄, 돛 안 펴고 뭐 해! 캣헤드! 캣헤드! 아직도 닻을 안 끌어올렸나! 아니, 그보다 먼저 육지를 향해 전탄 발사!”

    병사가 별로 없어서 실제 전탄 발사에 비해 반이나 될까 싶은 포구만이 불을 뿜었다. 그 정도로도 일단 청군의 발길이 멈춘 게 다행이었다.

    그러나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청군의 화기로 닿지 않는 거리라서 이렇게 을러댈 수 있지만, 얼마 안 있으면 그들도 중화기를 끌고 올 것이다.

    물론 영국 해군의 함포는 중국의 어떤 대포보다 사거리가 길다.

    허나 이 시대의 포격전이 대개 그렇듯, 그 정도 거리까지 떨어지면 영국 대포도 별 의미가 없다.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당한 거리만큼 떨어진 채 중국군을 일방적으로 유린한다’는 행복한 상황은 말 그대로 공상일 뿐이다.

    아예 멀리 떨어지는 게 차라리 낫다. 최소한 화약 낭비는 안 할 테니까.

    그리고 중국군은 그러한 이격에 필요한 시간을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이제 민간인도 없는 천진이라 보이는 건 모두 영길리 오랑캐나 그 부역자들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대륙의 기상을 보여주며 쇄도했다.

    총체적 흥분 상태로 날뛰는 헨리 호프의 불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견시수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남쪽에서 대선단 발견! 100척…… 150척? 아니, 정정! 200척 이상! 200척 이상의 정크선과 보트입니다!”

    호프 함장은 기어코 바지를 적시고 말았다.

    ***

    경항대운하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청은 바다보다 오히려 내륙에 배가 훨씬 많다.

    북쪽의 운하가 지나가는 주요 도시 중 행정력이 아직 살아 있는 지역에서는 운행을 중단하고 배를 거둬들이는 중이었다.

    이건 본래 영국군과는 관계없었다. 경항대운하와 장강의 합류지점이 반란군에게 탈취당했으니 당연한 조치였다.

    그대로 멍청히 있으면 남쪽의 도적들만 배부를 것이 뻔하다.

    이 와중 서명아의 연락을 받은 산동 순무 전진주(錢臻奏)는 묘계를 내었다.

    그 배 중 강으로 운반이 가능한 것들을 모아, 병사들을 태워 천진으로 돌격시키는 것이었다.

    그 양은 실로 대륙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서명아도 영길리 오랑캐가 배 타고 도망칠 것을 몰라서 육군만 보낸 게 아닌 셈이다.

    누군가는 애초에 청나라 배 따윈 아무리 많은들 영국 함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전진주가 내놓은 답안으로 해결된다.

    그들은 영국과 장렬한 함대전을 치를 생각이 없었다.

    옛날 이 부근을 관할하는 등주 수군의 총병관이었다가, 암허스트의 기습 공격에 사로잡히는 굴욕을 당한 뒤 송환되어 죄인 신세였던 황상신의 설명이 그것을 대변했다.

    “저놈들의 대포가 아무리 크고 멀리 나간다 한들 결국 하나에 한 배만 깨뜨릴 수 있을 뿐이야. 알아듣겠느냐? 너희가 평소 어지간히 악업을 쌓지 않았고서야, 이백 삼십여 척이 되는 이 배 중 너희가 탄 배를 어찌 골라 가라앉히겠느냐?”

    기함의 병사들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대부분은 황상신과 비슷한 처지였다.

    즉, 어떻게든 여기에서 공을 세워서 가족이라도 살려야 하는 죄인이 많았다. 전쟁 와중이다 보니 적전 도주자, 항복자, 군율 위반자 등등 죄인은 넘쳐났다.

    황상신은 열띤 태도로 연설했다.

    “알겠는가. 노를 빨리 저을수록 맞을 공산은 크게 낮아진다. 그리고 붙으면, 우리의 승리다! 저놈들의 배는 지금 껍데기만 클 뿐이요, 안의 병사는 전부 경사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다 한다.”

    과연 그 말대로 날아오는 포환은 매우 적어 보였다.

    작은 청군은 용기를 내기로 했다.

    그리고 영국군의 배때지에 칼침을 놔 줄 무기는 준비되어 있었다.

    헨리 호프 함장의 필사적인 기동간 포격이 쏟아졌지만, 도망치면서 쏴 대는 것이라 명중률은 없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한층 기세등등해진 청군은 몇 척의 배만 잃고서 꽤 다가갈 수 있었다.

    물론 영국 해군도 대포로만 싸우는 군대는 아니다. 곧 병사들이 총을 쏘고, 소구경 함포가 어지러이 사격을 날려댔다.

    그러나 그건 애초부터 청군도 예상하고 있었다.

    황상신은 영웅의 표정으로 동남쪽을 바라보았다. 형벌부대로 끌려 나온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제 이월이 다 되어 양기가 살아날 때다. 고전과 사서도 읽지 않는 오랑캐 놈들아. 저 무후(武侯)의 지혜를 맛보도록 하여라.”

    지금 황상신에게 제갈량의 백우선(白羽扇)은 없었다.

    그러나 적벽에서 맹덕의 함대를 불살라 버렸던 그 기상은 똑같이 갖추고 있었다.

    황상신은 부채 대신 자신의 검을 힘껏 휘둘렀다.

    안타깝게도 레이저 같은 게 나가지는 않았으나, 그다음 이루어진 일은 열광선 무기에 비추어 봐도 뒤처지지 않는 것이었다.

    선두로 나가던 삼십여 척의 배에 일제히 불이 붙었다.

    헨리 호프 함장은 당연히 삼국지연의를 읽은 적 없다.

    하지만 황상신의 생각과는 달리 영국에도 그와 흡사한 사적이 있다. 그는 절규하듯 외쳤다.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전술! 이 건방진 촌놈들이 어디에서 해군의 흉내를 내는 것이냐!”

    공정하게 말한다면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칼레 해전 이전에나 이후에나 정규 해군이 아니었다. 그냥 해적이다(하긴 그러니까 영국에선 존경받는 것이다). 해적에게 해적의 방법을 쓰는 이 전술은 여러 가지 의미로 적절했다.

    청군은 자살 돌격을 한 것도 아니다. 그건 히틀러조차 난색을 표하던 왜놈들만의 독문 마공인데 어찌 문명인이 따라 할 수 있겠는가?

    중화 4천 년의 역사를 깔봐서는 안 된다. 배의 앞에만 폭탄과 인화물질을 싣고 뒤쪽에서 배를 조종하며, 때 되면 배를 분리해서 탈출하는 기술이야 이미 명나라 이전부터 있었다.

    옛 책에서 급거 되살려 개조한 연환주(聯環舟)는 도광제의 국토 연성진 발동 이전부터 대영 방어대책의 일환으로 건조되던 것이었다.

    그 배들이 돛을 활짝 펴고 돌진했다. 미처 개조되지 못한 배는 그냥 돛만 펴고 타공이 뛰어내렸다.

    상대를 잘못 만나 불명예를 겪긴 했어도, 황상신은 수군 총병관이었던 자였다.

    봄이 되면 동남풍 분다는 사실이야 상식이다.

    그러나 황상신은 지금 자신에게 제갈 무후의 영혼이 강림하여 동남풍을 불러왔다고 확신했다.

    제갈량은 실제로 오림의 대승과 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직후 수십 척의 배가 영국 배에 사납게 부딪쳐 불타오르는 장관은 무후조차 놀라 턱이 빠질 광경이었다.

    ***

    청군이 분전하는 동안, 중화 혁명당도 열심히 그 뒤를 후리는 일에 매진했다.

    장강의 운하 합류부를 점거한 그들은 막대한 재화를 거머쥐었다.

    단지 거기에 있던 곡식이라든가 면포, 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많은 지역과 그 인민들이 혁명당의 대의에 합류한 것이다.

    강남에 있던 많은 청군 부대는 이미 진강 전투 때 모였다가 산화했다. 게다가 아무리 국토 연성진이 있었어도 이 모든 일의 초기부터 도광제에게 시달려 온 강남은 인심도 청 정부의 편이 아니었다.

    결국 서명아가 북경을 포위하고, 시준이 구출 작전을 계획하며 천진에서 대전투가 일어나는 동안 혁명당은 강남 대부분의 주요 도시를 ‘해방구’로 만들었다.

    심지어 이제 영국도, 청도 없는 옛 개항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송강부와 항주만 제외하고, 모두 즉각 깃발만이나마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초토화된 이 땅 자체에 당장 큰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혁명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임칙서의 주장은 미래를 내다본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의 일을 생각해야 한다. 고려와의 문제도 있으니 결국 영길리국과 적대할 수는 없겠지. 그러나 그들이 만약 이 포구들을 되찾으려 한다면, 마땅히 그만한 값을 치러야 할 터이다.”

    전후 외교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조건을 가져가는 셈이었다.

    두 번째 대장정의 성공에 혁명당원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북두의 인도는 틀리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승리했고,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임칙서는 역시 위원장이었다. 두 번의 나태함은 용납할 수 없다.

    한중에서 기랑이 깨우쳐 줬을 때처럼, 혁명은 안주할 터를 얻었다고 하여 끝나는 게 아니었다.

    혁명당 중앙위원회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즉각적인 북벌(北伐)을 결의했다.

    “우리가 옛 조송처럼 자기 것을 빼앗긴 부끄러움도 외면한 채, 강남에 안주하여 배부르게 먹고 자려고 혁명을 일으킨 것인가? 만약 그처럼 반동적인 안일함에 빠졌다가는 끝내 그들과 같이 애산에서 바다에 뛰어드는 결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연속 혁명, 영구 혁명,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 만세! 동지들, 곧바로 배를 준비하라!”

    본격적인 진군 이전에, 군사위원회 위원장 송주령이 이끄는 정예부대와 공화국 해병대가 운하를 따라 북상했다.

    송주령과 김덕춘, 그리고 정길룡은 예전에 해 봤던 그 가락 그대로 강북 여기저기를 오가며 게릴라전을 펼쳤다.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나마 헐떡대며 그들을 쫓아다니던 장강 북쪽의 청나라 관리들은, 그러나 곧 급한 보고를 받고 장강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그들은 아마도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척후도, 전술도, 준비 사격도 없었다.

    중화 혁명당 인민해방군은 그야말로 물에 뜨는 것이면 전부 동원해 장강을 건너왔다. 한 3할은 그냥 뗏목인 것 같았다.

    하긴 이 짧은 시간에 저 많은 인원을 건너게 하려면 준비 기간만 몇 년이 걸릴 테니 저 수밖에 없기는 하다.

    그러나 장강은 무슨 시냇물이 아니다. 오면서 그 거친 풍랑에 뒤집히고 가라앉는 것들만 해도 다 세기가 힘들 정도였다.

    혁명의 신심이 아니었다면 결코 시작될 수도 없었던 무모한 도하였다.

    빠진 동지를 건져 주며, 건질 수 없었던 더 많은 동지들의 죽음에 비통한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들은 기어코 건너편에 도달했다.

    청군의 저항은 장강의 저항만도 못했다. 군사 상식적인 도하 지점 따위 무시하고 엄청난 면적에 걸쳐 건너온 탓에 다 막기도 어려웠거니와, 대부분의 군사는 그 말도 안 되는 모습에 놀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바빴다.

    그리고 마지막 의무감 때문에 남아 있던 자들 역시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작은 배들은 대개 장강을 건너오지 못하고 뒤집혀 버렸기에, 여기까지 와 닿은 것은 그나마 크기가 좀 되는 선박이었다.

    그래서 뭍에 너무 가까이 댈 수는 없었다. 상륙정 따윌 따로 마련할 수 있었을 리도 없다.

    그렇다 보니 인민해방군 대부분은 배에서 물에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얕으면 목이요, 보통은 사람 키보다 훨씬 깊었지만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해방군은 대부분 뭔가를 붙잡고 둥실둥실 떠 오거나 헤엄을 쳤다. 그리고 기슭에 다다라 발이 땅에 닿자 그대로 몸을 솟구쳤다.

    결과적으로,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군에게는 마치 물속에서 개미떼 같은 반란군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하백(河伯)이 기이한 저주를 내려, 장구한 세월 동안 장강에서 익사한 그 수많은 원혼들이 모두 되살아나 기어 올라오는 듯한 광경이었다.

    사실이 아니라는 건 그들도 안다. 그러나 19세기 사람이건 현대인이건 사람의 뇌는 비치는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풍경을 본다.

    곧 청군은 무기를 내버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물에 푹 젖은 채 비척비척 걸어오는 중화 혁명당 인민해방군의 발걸음은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았다.

    그들은 애초에 청군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표는 우선 중화 오족의 해방, 그리고 전 세계 인민 동시 해방이었다.

    눈앞의 하찮은 반동 군대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해방군은 연속적으로, 꾸준히 발을 디뎠다.

    그 엄청난 숫자의 발자국 중에서는 물론 한족과 묘족의 것이 가장 많았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 전란에 도망쳐온 티베트족이나 위구르족, 그리고 심지어 과거 몽골 팔기 출신의 투항병이 찍은 것도 적지 않았다.

    중화 오족이 하나 된 북벌이었다.

    ***

    황하 남쪽에서 연달아 올라오는 급보는, 원칙적으로라면 오란찰포의 도광제에게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처음에 갔던 몇 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뒤 잇달아 보낸 사절들은 돌아왔지만, 행궁이 텅 비어버렸다는 기이한 소식만 가지고 왔을 뿐이었다(불태워 버리거나 하면 즉각 긴급 사태로 인식할 것이기 때문에 모호성을 남겨두기로 한 베니그센의 결정이었다).

    더 이상 도광제의 분조(分朝)와 연락하는 것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래서 그 보고는 일단 모두 서명아에게 접수되었다.

    서명아가 잠깐 황제 된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서명아의 권력욕을 비난해선 안 된다.

    그런 기분은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그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서명아는 황제가 러시아군에게 억류된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행궁 전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에 서명아가 가진 의심의 화살은 내부로 돌려졌다.

    한마디로 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여기에 있는 소위 근왕군 중에는 충분히 차기 황제 자리를 노려볼 만한 황족도 많다.

    그러나 그중 하나가 황제에 오르면, 그다음 수순은 자연히 서명아의 숙청이다.

    옛적 명나라 회귀군주 정통제가 천순(天順)이라는 이름으로 2회차 인생을 시작할 때를 보면 알 수 있다.

    정통제의 환생트럭이 된 토목의 변 당시, 병부시랑 우겸은 몽골족에게 끌려간 정통제 대신 동생 경태제를 옹립한 뒤 오이라트의 격퇴를 이루어냈다.

    우겸이 경태제파여서 그랬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상황을 볼 때 5호 16국 시대를 다시 열지 않으려면 방법이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조직 안에서 옳은 일을 위해 총대를 멘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 그 대가도 어김없이, 가장 가혹하게 찾아왔다.

    돌아온 정통제는 히든 스킬 ‘탈문의 변’으로 2회차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 우겸을 죽여 버렸다.

    정통제도 우겸이 대국적 관점에서 그런 선택을 했다는 사실은 알았다. 그러나 살려둘 수는 없었다.

    경태제의 등극이 옳은 일이었음을 인정한다면, 경태제 치세를 다시 뒤집어엎은 자신의 회귀가 부정되니까 말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서명아가 무슨 다른 황제를 옹립한 건 아니지만 정통제가 우겸을 죽일 때도 경태제 얘긴 핑계에 불과했다.

    우겸이 장악했던 군사력과, 그 성과에 따른 사람들의 존경이 더 핵심적인 사망 사유다.

    따라서 서명아는 이 근왕군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코크란 제독의 착각과 달리, 지금 청군이 북경성에 대한 무자비한 공성전을 개시하지 못하는 건 영국군의 수비가 튼튼해서가 아니다. 청군 내부가 불안해서다.

    서명아는 ‘보나마나 서쪽으로 이동했을’ 황제의 행궁을 추적하는 일에 골몰하고 내사에 집중했다. 어떤 벼락 맞을 놈이 황제를 숨겼는지 알아내야 했다.

    군내의 여러 제후와 관리들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해 그가 늙은 나이에 벌인 권력의 무도회는 실로 장대한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찬가지로 실컷 춤추며 진행된 외교관 각축과도 비견할 만했다.

    그러던 중 황하와 장강 사이가 불안해지니 청군은 더 흔들렸다.

    당장 근거지가 그쪽인 장군이며 관리들은 군량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황폐화된 직례는 10만이 넘는 근왕군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었다.

    마치 동탁 치하의 낙양을 되찾으러 온 18로 제후군 같았다. 대의가 아니라 꼬라지가 그렇다는 의미다.

    그리고 영국 또한 동탁 역할을 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토마스 코크란 제독은 협상안을 마련하여 서명아에게 보냈다.

    겉으로는 ‘이 불행한 오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양국의 화호 회복과 인도적 조치’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감춰진 내용은 둘 모두 충분히 이해했다.

    코크란 제독은 모스크바가 불탄 러시아 조국전쟁의 역사를, 서명아는 동탁의 낙양 대방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풀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더 이상 청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 영국군의 안전한 퇴각을 보장하라. 만약 이 제안을 거부한다면 북경은 잿더미가 되고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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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1. 이름으로 봐선 대장일 듯한 정황기(正黄旗)는 사실 대장이 아니고, 황제가 있는 양황기가 수위라는 점은 여러 차례 언급되었죠. 이건 팔기의 이름이 순수하게 색깔로만 붙은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正黄은 다른 의미 없이 ‘모두 노란색’이라는 뜻밖에 없습니다. ‘正’자가 고위를 뜻하는 것은 한족의 관념이죠. 한편 양황(鑲黃)의 양(鑲)은 원래 거푸집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되어 테두리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다는 뜻도 가집니다. 그 이름대로 양황기는 빨간색 테두리에 노란색을 채워 넣은 색깔입니다. 의전 순위와 깃발 이름은 관련이 없지요.

    2. 배의 앞뒤가 분리되는 화공용 선박은 실제로 있었던 것으로, 연환주라고 불렸습니다. 그림도 남아 있지요. 나머지 정보는 작중 서술과 같습니다.

    3.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사적이란 것은 칼레 해전 당시 화공선으로 에스파냐 무적함대를 공격했던 일을 말합니다. 물론 이때는 영국 해군도 충분한 정규 전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드레이크는 엘리자베스에게 명예 제독 자리를 하사받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사략선단의 제독이지 정규군은 아니었습니다. 칼레 해전 이후로도 드레이크는 해적질을 하고 다녔죠.

    4. 토목의 변은 정통제가 오이라트 원정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가 패배해서 사로잡힌 일을 말하며,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타이시는 태사라는 뜻으로 직책 이름입니다)는 정통제를 이용해 명을 뚫어보려다가 작중 나온 우겸의 황제 갈아끼우기로 소용이 없어지자 그를 그냥 풀어줍니다. 조선은 이때 세종~문종 시기.

    정통제는 돌아왔으나 경태제 입장에선 황위를 내놓을 수가 없죠(바로 살해당할 테니까). 그래서 형을 가두어 두었는데, 경태제가 병사하자 여기에서 탈출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게 탈문의 변입니다.

    상당히 어설픈 쿠데타였지만 어쨌든 성공은 했지요. 그 이후 정통제는 회귀자답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꽤나 선정을 펼쳤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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