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89. 갈망의 도시(3)
시준은 혁명무력부장 차형기와 정찰총국장 방우준 앞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황제와 그 가솔을 데려와야겠소.”
방우준이 약간 놀라서 되물었다.
“그들은 아라사 사람들이 비밀히 데리고 오도록 예정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연경을 포위했다는 그 10만 군세가 얌전히 성만 되찾을 리는 없소. 서명아라는 장군은 금세 황제가 그 안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요. 물론 도성이니만큼 탈환을 포기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1, 2만 명쯤 갈라 장성을 넘어 오란찰포로 보내는 것쯤은 어렵지 않소.”
전신 하나 없는 지금의 문명에서, 시준이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사 지식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의 모호한 정보뿐이었다.
나머지 격차는 시준의 추리로 메워야 한다.
현재 시준이 도광제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는 북경성에서 도망친 관리가 정찰총국의 ‘보호와 설득’을 받고 제공한 정보, 그러니까 아라사인들이 황제의 몽진 행렬에 참가했다는 지점까지였다.
그렇다면 베니그센은 황제를 훌륭히 빼돌린 셈이다.
시준은 베니그센을 의심하지 않았다. 도광제를 영국에 갖다 바치려면 북경성 안에서 그렇게 해도 되니까.
몽진이 ‘러시아 공사관의 협조’하에 이루어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러시아가 영국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었다.
전후 사정으로 보아 기랑과 고총련이 거기 같이 있으리라는 사실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언가의 사정으로 베니그센과의 합류에 실패했다면 기랑은 시준의 지시대로 즉시 도망쳐서 공화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시준도 베니그센의 곡예는 자세히 알 도리가 없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3천 명의 기병대를 잘 활용하여 황제를 억류했으리라 예상했다.
만약 도광제를 확실히 통제할 수단이 없었다고 해 보자.
그 상태에서 베니그센이 고작 공관 수비대만 가지고 합류했을 리가 없다. 차라리 북경에 그대로 머물러 영국군과 교섭하는 게 낫다.
따라서 답은 간단하다.
레온티 베니그센은 도광제의 몽진 행렬을 억압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기랑도 거기에 있다.
반대 전제를 가정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는 귀류법(歸謬法) 하나만으로도 시준은 순식간에 꽤 많은 정보를 확정했다.
시준은 손가락으로 서안을 딱딱 치며 말했다.
“만약 때를 놓쳤다간 3천 명에 불과한 아라사 사람들은 그대로 에워싸이게 되오. 이제 영길리군 또한 함부로 북경을 나오지 못하게 되었으니…….”
사실 이건 코크란 제독의 실책이었다.
도둑이 법을 준수하면 굶어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해적 두목이 국제 문제나 외교 마찰 같은 것에 주의를 기울였을 때 그는 실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영국인이 외교 조약을 준수하는 족속이었으면, 백 년 뒤에 팔레스타인 3중 근저당권 설정이 발생했을 리가 없다.
토마스 코크란이 급진파 의원인 게 탈이었다. 만약 보수파 의원이었으면 영국인의 전통을 충실하게 지켜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전통이란 무엇인가?
바로 수학이 뒷받침하는 이성과 과학이다.
이성적이고 계몽된 영국인들은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두 학문, 물리와 논리의 연관 관계를 일찍부터 깨달았다.
아이작 뉴턴이 괜히 영국 사람이겠는가. 『프린키피아』에 보면 다 나와 있다.
논리력은 물리력에 정비례한다. 약속을 지키기 싫다면, 증인을 다 죽여 없애면 된다.
그러므로 코크란 제독은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 대신, 북경에 황제가 없다는 것을 아는 즉시 무슨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군을 휘몰아 건곤일척을 치렀어야 했다.
당시 시점에서 카자크 3천기는 오란찰포에 있었기에 그때가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베니그센이 휘하 병력을 모두 거느린 줄 알았던 코크란은 실패 위험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대신 엉뚱한 황실 후계자 찾는다고 시간을 낭비하는 사이, 제독은 북경성의 포위를 허용하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은 공화국과 러시아에게 턴이 돌아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준은 코크란처럼 자기 턴을 헛되이 낭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청군이 행궁의 변(變)을 눈치채기 전에 지금 바로 빠져나와야 하오.”
거기까지 말하던 시준은 기랑과 베니그센이 둘 다 영리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 말을 바꾸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라사인들은 벌써 동쪽으로 오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하지만 오는 도중 대군을 만난다면 위태해질 수도 있지. 우리가 가야 해요.”
차형기와 방우준은 둘 모두 약간 긴장했다.
그러나 시준은 자신의 지시를 철회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고총련 사람들이 있소. 군인도 아니면서 나라를 위해 위험을 무릅써 준 동지들이오. 혁명은 동지를 버리지 않소이다. 자세한 방법은 생각해 둔 게 몇 개 있으니 북쪽으로 가면서 논해 봅시다. 그렇지 않아도 나 역시 의주로 가 볼 생각이었소.”
그 말은 차형기와 방우준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그 둘은, 차후로 이런 주석 동지의 명에 사적인 감정이 섞여 있지 않나 의심하는 자에게도 지금 시준의 말을 – 약간의 폭력적 ‘교화’와 함께 – 들려줄 것이다.
그래서 시준은 안심하고 명령했다.
“혁명군 총사령의 군령이오. 압록강 북쪽의 혁명군 중 날랜 기병을 가려 뽑아 성경부에 둔치게 하여, 언제든 서진할 수 있도록 준비하시오.”
***
내몽골의 어느 이름도 없는 산속 고갯길, 풀 더미를 덮어쓴 채 나무에 올라 있는 기랑은 꽤 편안해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떨어지지 않는 데에만도 온 신경을 집중해야겠지만 그녀는 용케도 그 위에서 총을 들어 겨누었다.
옆에서 상당히 불안하게 자세 잡고 있던 길명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회장 동지. 괘, 괜찮을까요?”
“네가 더 떠들지만 않으면.”
길명이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두 사람은 오란찰포에서 꽤 멀리까지 장거리 정찰을 나온 상태였다.
시준의 예측대로, 서명아는 북경에 황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오란찰포로 병사들을 보냈다. 황제를 안심시키고 자신의 우국충정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확실하게 보여주려면 본군 모두를 이끌고 황제를 모시러 가는 게 임팩트 면에서 확실하다.
하지만 그 군은 당연히 북경 탈환하러 다시 파견될 것인데 그런 낭비를 할 이유가 없었다.
왜란 당시의 그 수많은 근왕군이나 의병이, 전부 다 최속군주에게 찾아와서 사열 받은 다음 출동한 게 아니지 않는가.
아무리 전근대 동아시아인이라도 그 정도로 비실용적이지는 않았다.
여기에 시준은 없지만, 베니그센도 다행히 같은 예측을 했다.
그는 오란찰포로 대군이 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령이나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몇 개의 정찰 소대를 구성해 멀리 척후를 내보냈다.
대부분은 물론 자기 병사다. 그러나 기랑과 고총련도 그런 일에는 적합한 인재였다.
그리고 지금, ‘당첨’은 기랑과 고총련 특작부대 쪽에 걸린 모양이었다.
한 백여 명 정도의 기마부대가 천천히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대륙적 관점에서는 연락병이라고 해야 할 규모다. 서명아는 과연 실리 쪽을 택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기랑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망원경을 길명이에게 넘겨주었다.
“똑바로 봐. 여러 번은 못 쏜다.”
100년 뒤에나 일반화될 저격수와 관측수의 구분을 이미 고총련이 실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은 기랑에게 없었다. 그녀는 시준과 같이 ‘오오 대단해!’ 소리에 보람을 느끼는 이세계 용사가 아니니까.
기랑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그럼으로써 그녀의 것인 시준과 가족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최선의 방책을 선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의지는 곧 총탄이 되어서 날아갔다.
런던에서도 유명한 반왕의 마탄이다.
그리고 기랑 역시 마탄의 사수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강선총과 확장탄이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의 극한이 펼쳐졌다.
가운데쯤에서 우두머리라는 것을 너무 지나치게 드러내고 달리던 대장의 머리가 한 번에 터져 나갔다. 말이 질겁하고 병사들도 소스라쳤다.
“뭐, 뭐냐!”
“조창(鳥鎗, 조총)이다! 엎드려! 아니, 말, 말 뒤에 숨어!”
길명이는 빠르게 속삭였다.
“맞았소이다. 회장 동지.”
“총, 빨리.”
“예, 예!”
길명이의 임무는 관측수만이 아니었다. 그는 곧 장전해 두었던 총을 넘겨주었다.
길명이 역시 태천군 대표를 할 만한 포수였다.
그에게 있어 나무를 탄다거나 총 다섯 자루를 장전한 채 가지고 있는 일 정도는 가능한 곡예의 범주에 속했다. 기랑이 쏘는 동안에도 길명이는 계속해서 총을 재었다.
허나 길명이의 손놀림이 아무리 빨라도 쏘는 속도보다 재는 속도가 나을 수야 없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간극은, 다행히 다른 동료들이 메워 주었다.
고갯길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고총련 특작부대의 저격은 순식간에 청군을 와해시켰다.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는 게 작전의 목표였다. 기랑과 길명이처럼 대부분 2인 1조를 이루고 있는 특작부대는 한 조에 최소한 네 명을 맡아 해치우도록 되어 있었다.
물론 무슨 게임도 아니고 저격만으로 백여 명을 몰살시키는 것은 무리다.
이제 거의 절반 가까이 줄어든 청군에게는 적당한 마지막 매듭이 준비되어 있었다.
청군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이 ‘매듭’은 고총련 특작부대와 달리 눈에 잘 보였다.
“마, 마군(馬軍)이다!”
“아라사 놈들이 아닌가, 저놈들이 대체 어디서!”
약 200기를 이끈 채 돌진해 온 카자크 대장 예르몰로프가 그 주인공이었다.
각 길목의 중계지에 해당하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총소리가 난 지점으로 달려온 것이다.
불쑥 나타난 아라사인을 마주치자 청군은 혼백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예르몰로프는 그런 기분을 곧 진실로 만들어 주었다.
영혼이 없어진 청군의 차가운 육신이 땅에 쓰러졌다.
청소가 끝나자 예르몰로프는 칼에 묻은 피와 기름을 털며 기랑에게 다가왔다.
출신이나 행동이 모두 카자크족이다 보니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뿐, 그 역시 고위 엘리트였기 때문에 영어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군대가 아니라서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내 부하들이라도 이보다 깔끔하게 처리하기 힘들겠다는 점은 솔직히 인정해야겠어. 고려의 호랑이 사냥꾼은 듣던 대로 대단하군.”
기랑은 그 칭찬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감흥 없는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장군에게 가서 전해. 이대로 동쪽으로 가도 된다고.”
“그러지. 이제부턴 너희들의 역할이 중요해.”
“걱정하지 마. 아마 시준은 벌써 군사를 보냈을 거야.”
“진짜인가? 물론 나도 정시준 의장의 예지력은 소문으로 들은 바 있지만…….”
예르몰로프는 그런 비과학적인 능력에 대해 본때 있게 토론하고 싶었다.
그러나 기랑이 상대조차 하지 않고 그냥 가 버리자 별수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칼을 집어넣었다.
***
시준은 곧바로 ‘앞으로의 정치국 회의는 의주에서 열릴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석 동지가 전선 가까이까지 나가 이신작칙으로 혁명을 지도한다는 그 선언에 국무당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시준은 자신에게 갈채를 보낼 수 없었다.
며칠 뒤, 퇴근이라기보다 잠깐 들른다는 개념으로 집에 왔던 시준은 지유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제발 의주에 따라가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 줘.”
“우리 남편 똑똑한데?”
그렇게 말하며 웃는 지유는, 다른 짐은 별로 없이 명주만 데리고 있는 채였다.
면포와 솜이불로 뭉쳐진 덩어리 비슷한 것이 된 명주는 불편하다는 듯 제 어미 품에서 꼼지락댔다.
더 뭘 들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다행히 나머지 짐은 그녀가 ‘일하는’ 동안 명주를 돌볼 유모나 사용인들이 가지고 있었으니 상관은 없다.
지유는 권력이나 재물에 담백한 편이었지만, 강박적인 것은 아니었기에 필요하다면 사용했다. 지금은 전쟁도 거의 끝나 총력전의 모범을 보이던 그녀도 약간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시준은 반대로 초조했다.
“정월이라 해도 거긴 매우 추워. 부녀회가 전쟁터에서 할 일이 뭐가 있어?”
“저번에 기랑이가 갖다 준 약 먹어서 이제 괜찮아. 게다가 찬바람 맞고 돌아다닐 일은 그렇게 많이 없어.”
지유는 그러면서 정색했다.
“그리고 전쟁터라서 할 일이 많은 거야. 전쟁에서 가장 많이 죽고 다치며 험한 꼴 보는 사람이 부녀들이잖아. 옛날 홍경래 일 때문에 난 그걸 뼈저리게 느꼈어.”
사실 혁명군은 이 시대의 어떤 군대보다도 전쟁범죄가 적은 편이었다.
혁명군이 매번 외치는 구호는 그저 시준의 저혈압 치료제나 겉만 번지르르한 명분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에 설득된다.
인민 해방을 외치는 혁명군은 ‘반동의 재산’이 아니면 함부로 노략질하지 않았고 폭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적다는 거지 없다는 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군대가 움직였는데 전쟁범죄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은 비를 맞았는데 옷이 젖지 않을 확률과 비슷하다. 즉 불가능하다.
게다가 전쟁 때의 민간인 희생이 모두 적군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적군에 부역했다’는 ‘정당한’ 핑계가 있고 안정적으로 수탈할 기반이 있는 아군이 더 위험하다. 이런 기회를 노리는 자국 무법자들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청군이 사라져 치안 부재 상태가 된 만주는 시급히 정돈하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정글이 된다.
물론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가장 약한 자들이다.
그리고 혁명은 항상 가장 약한 자에게서부터 시작했다.
먼저 압록강 북쪽 남만주의 향촌 부녀들을 조직화해서 공화국 본국과의 연락선을 구성한다. 그건 전쟁에 희생되기 쉬운 여자와 아이, 노약자들을 지킬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장정들 또한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자기 처자식의 보전을 위해 합류할 것이다. 장수를 잡으려면 말을 쏴야 한다.
물론 사회적 약자는 단지 부녀뿐만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 의주행에는 지유만이 아니라 여러 단체의 수장과 회원들이 함께 한다.
지유는 미륵사와 형평사 등, 중국에서도 비슷하게 천대받는 계층을 대표할 수 있을 만한 중앙인민회의 파벌들과 연계를 이미 마쳤다.
그저 선심성 사업이라고만 한다면 지유를 지나치게 깔본 것이다.
그런 것이었으면 이제 훌륭한 정치 세력이 된 중앙인민회의의 각 파벌 수장들이 참가했을 리가 없다. 아니, 당장 부녀회장 김부용부터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만주의 잔존 청군이라든지 아직 청조에 충성하는 유지에 대한 대항 세력을 만들거나 한인 사회를 공화국에 편입시키는 초석이 될 수 있다.
시준이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였던 만주의 혁명화에 필요불가결한 사업이기까지 하다.
단체들 입장에서도, 2년 뒤 만주를 포함해 이루어질 ‘3기 총선거’를 진지하게 노린다면 이 기회에 꼭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시준 역시 이 정도 근거와 동조자를 갖춰 온 기획안이라면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몸이 낫긴 나은 모양이네.’
하지만 지금 시준이 이 사업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은, 지유의 안이 합리적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지유는 명주를 안은 채 방글방글 웃었다.
“안 된다고는 안 할 거지?”
“안 할 거지!”
이 이상한 대답은 시준의 것이 아니라 명주의 것이다. 딸이 어머니의 말을 그대로 받아 외치는 그 귀여운 모습에 잠깐 정신을 놨던 시준은 곧 이성을 되돌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용서하는 대신 뭐든지 들어준다고 했잖아?”
“뭐든지!”
“그래, 명주야. 약속을 안 지키는 아버지는 나쁜 사람이지?”
“아버지 나빠!”
시준은 피를 토하고 쓰러질 뻔했다. 아무 뜻도 모르고 외친 명주의 말은 시준의 가슴을 후벼 팠다.
“……알았어. 다만 지키는 병사들을 떼어놓거나 영채에서 멀리 벗어나면 안 돼. 압록강을 넘을 때는 더욱 반드시. 이것만은 어기지 말아 줘.”
“그렇게 할게.”
마차에 타고 얼마 있지 않아 명주는 잠들었다.
시준은 아이들이 멀미하면 잠드는 증세가 19세기도 똑같은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양심의 가책을 떨쳐내려 노력했다.
그러던 중, 지유가 갑작스럽지만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시준의 손을 잡았다.
“가족은 서로 아껴야 하잖아.”
“응?”
“너는 이제 남편으로서 기랑이를 지켜야 해.”
시준은 불분명한 발음으로 대답을 중얼거렸다. 지유가 말했다.
“당연히 나도 그렇고.”
지유는 손에 힘을 주었다.
“먼 데서 고생하고 돌아오는 기랑이를 같이 데리러 가자.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나면, 다 같이 웃으면서 편하게 살아 보자. 네가 항상 노래를 부르던 대로 말야. 이번 임기는, 끝나고 낙향한다 해도 나는 찬동해 줄게.”
시준은 이번에도 불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밝고 큰 희망이 지유의 말에 담겨 있었다.
그것은 회의와 부정을 애써 알면서 거부한다기보다, 그런 것을 신경 쓰지도 않는 종류의 희망이었다.
시준은 한 가지 확신을 느꼈다.
그는 거부할 수 없이 두 사람, 그리고 잠든 명주의 것이다. 동시에 모든 인민의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하는 사업과, 모든 인민을 위해 하는 사업은 지금 같은 목표와 과정하에 일치되었다.
시준은 가족을 위해 공화국의 국무를 비틀지도 않았고, 국가 전략을 위해 가족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억지로 그리된 게 아니다. 두 가지 목적은 자연스럽게 합쳐졌다.
시준과 가족, 친구들은 반동의 군주나 그 가솔과 달리 인민으로부터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걷는 길이 같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정시준을 일컬어 모든 인민의 총의를 대표한다 하는 것이다.
시준은 단전성에서 기랑이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을 때와 같은 심정을 느꼈다.
그는 무슨 영화처럼 이 과정이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날 거라 생각할 수 없었다.
또한 지금 그 이유도 알게 되었다.
바로 그 자신이 그렇게 되도록 만들 것이기에.
시준은 시원하게 웃었다.
“그래, 그러자.”
그리고 의주에서 제2기 제144차 정치국 회의가 개최되었을 무렵, 갈망의 도시 북경의 탈환전도 그 끝이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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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이 이야기도 이제 종막을 향해 가는군요. 그간 따라와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 관측자와 저격수가 쌍을 이루는 스나이퍼 팀의 구성은, 물론 기원을 특정하기 힘듭니다만 대체로 20세기 초로 봅니다. 관련한 전술이 공식적으로 개발, 채택되기 시작한 건 1차 세계대전부터라고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