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89. 갈망의 도시(1)
르네상스 시대 이후 공성전의 특징 중 하나는 ‘수학’의 적용이다.
어디에 참호를 파고 어디에 어떤 각도로 대포를 놓아야 하는가. 혹은 그것을 방어하려면 어떤 방식으로 축성해야 하는가, 병사들의 진로는 어떻게 짜야 하는가 등의 사항은 모두 면밀한 공식을 통해 철저하게 계산될 수 있었다.
포의 사거리와 각도, 화약량, 병사들의 인원과 걸음 수, 장비와 전장의 규모 등 모든 변수를 관찰하면 결과를 산출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수학은 이성의 정수였다. 군주와 장군들은 그렇게 참으로 이성적인 대규모 살인 사건을 계속해서 일으켰다.
이러한 과학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전투 형태는, 병법상의 금기와 달리 공성전이었다.
과학 실험은 통제된 실험실에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야전처럼 시시각각 바뀌어 통제 불가능한 변인이 마구 발생하는 전투는 ‘과학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군주에 따라서는 야전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전쟁도 굳이 공성전으로 몰아가곤 했다.
대표적으로는, 공성 참호전을 취미 수준으로 즐겼지만 야지에서 갑자기 적군을 마주치자 병력 우위에 상관없이 즉시 철수해 버린 루이 14세 같은 사람이 있다.
포스트모던 이전 시대까지 근대를 지배한 라플라스적 기계론은 전쟁에도 틀림없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영국군의 사정이 급했기 때문에 태양왕처럼 철저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죽죽 참호를 파고 박격포를 놓아 가며 북경성을 두드렸다.
이러한 공성 형태는 물론 청군도 안다. 청군은 홍경래의 난 당시, 화포를 이용한 근대 공성전 체계를 몰라 마구잡이로 쏘기만 하던 조선군을 조롱했을 정도라 여기에 일가견이 있다.
그러나 호적수가 만났다고는 표현하기 힘들었다.
이곳에서는 얼마 전 강남과 같은 장절한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
진강현의 운하 합류지점처럼 가치 있는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국의 수도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수도를 정의하는 유일하고도 최중요 요소인 황제는 이미 여기 없다.
따라서 북경은 이제 수도가 아니다. 병사들 또한 이런 ‘변방’을 목숨 바쳐 지킬 가치까지는 없다고 판단했다.
어떻게든 전공을 올려야 하는 캠벨 경이 앞장서서 제9창기병연대를 이끌고 부서진 성문으로 뛰어들자, 청군은 신속하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군주가 조선왕을 본받았듯 그들 역시 조선군을 본받았다.
예정대로 북경성을 함락시킨 영국군은 환호작약하며 밀려들었다.
무리한 진격 탓에 이제 영국군은 만일의 사태가 발생한다 해도 가져온 배를 전부 갖고 돌아가지 못한다. 배를 몰 수병이 많이 줄어들어서 그러려면 사고를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토마스 코크란에게는 이미 그런 것이 고려되지 않았다.
더 이상 캠벨 대령을 믿을 수 없어, 자신이 직접 수병과 해병대를 지휘하는 코크란 제독은 그야말로 걸리는 모든 생물체를 전부 살해하며 자금성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거기에 황제는 없었다.
코크란 제독은 아득한 기분으로 뒤쪽의 참상을 돌아보았다.
지금 영국군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제독의 뜻대로 페킹을 함락시켰고, 그래서 그들은 제독이 약속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들은 황홀경에 빠져 시내를 뒤지고 다녔다. 산더미처럼 긁어모은 약탈품이 간살당한 부녀자의 시체와 함께 쌓였다. 유서 깊은 사치품 거래 장소인 유리창은 가장 먼저 초토화되었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약탈 때와 비슷했다. 영국 해군더러 이제 이 짐 들고 내륙으로 황제 쫓아가자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영국군의 좋았던 기분은 수직 하락하게 된다.
그리고 영국 수병은 윗대가리가 자기 기분을 거스를 경우 선상 반란도 별로 꺼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해적은 의외로 상당히 민주적 체제하에 돌아간다. 해적 중의 해적인 영국 수병 또한, 언제든 선장을 돛대에 매달고 ‘불신임’ 해버릴 수 있다.
코크란 제독 또한 당연히 그것을 잘 안다. 물론 고급 장교 역시 해적 두목이긴 마찬가지라 영국 해군은 선상 반란의 진압에도 많은 노하우가 있지만 군의 붕괴 자체는 피하기 힘들다.
그래서 도저히 그들에게 ‘동작 그만’이라고 명령할 수 없었다.
주중 영국 공사 조지 스턴튼은 아무래도 자기가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코크란 제독이 자신을 가장 먼저 찾으리라고 기대했건만, 영국군은 황제에 눈이 뒤집혀 이미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도망치는 청군에게 화풀이로 살해당하기 전에 빨리 군대에 합류해야 했다.
영국군은 북경성 전체를 일거에 제압한 게 아니었다. 얼마 없는 공사 호위병과 중국인 사환들이 이 난리 통에 절반은 죽고 나서야 스턴튼은 코크란 제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스턴튼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코크란 제독은, 스턴튼 공사가 훌륭한 협상으로 러시아군의 개입을 막고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소식을 듣자 미친 듯이 분노했다.
차라리 공사관에 그대로 있는 편이 안전하지 않았을까 생각될 정도였다.
“이런 개 같은! 그래. 러시아군이 황제를 체포하겠다고! 그 말을 공사 각하께서는 믿었단 말입니까? 설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여기에서 한참 떨어진 내륙에서 잡겠다는 그 저의가 뻔하지 않습니까!”
“저의……라고요?”
토마스 코크란은 그보다 정부 위계서열상으로 명백히 높은 특명전권공사에게 아주 막말을 퍼부었다.
“아직도 모르겠소? 타타르족보다도 지능이 떨어지는 머저리 같으니! 러시아 놈들은 거짓말을 하고 황제를 빼돌린 거요! 그들이 체포는커녕 황제를 공손히 모시고 있다는 데에 우리 엄마 이름을 걸지!”
코크란 제독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있는 가구를 걷어찼다.
누구 것인지 모를 칠보 궤짝이 둔중하게 흔들리고 제독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발가락이 안 부러진 게 다행이다.
스턴튼 공사는 항의해 보았다.
“아니, 그럼 황제가 도망칠 것을 전혀 예상하지 않고 왔다는 말이오? 러시아군이 없더라도 황제가 스스로 도망쳤으면 같은 결과 아니오. 그런 경솔한…….”
“예상? 했지! 하지만 카자크 3천 명이 호위하고 있다는 개떡 같은 사태는 상정하지 않았지! 러시아군이 없더라도 같은 결과라고? 입 닥쳐! 러시아군만 없었으면 이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창기병연대 하나만 차출해서 붙잡을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당신이 다 망쳐 놨어!”
사실 스턴튼이 좀 멀쩡한 상태였으면 이렇게까지 모욕을 받을 것도 없이 사태를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친 뱃놈이 눈앞에서 칼 들고 을러대고 있는데 판단력이 빠르게 돌아가기는 어렵다.
그래서 스턴튼은 자기 변명에만 급급했다.
“내가 뭘 했다는 거요? 내가 아무것도 안 했더라도 레온티 베니그센은 자기 휘하 군대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소! 마치 내가 그걸 막을 수 있었다는 듯이…….”
“그게 바로 당신 바보짓의 핵심이지. 당장의 문제만이 아니오. 분명히 1, 2주 정도 지나면 군은 수습될 거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든 그들을 이끌고 카자크족과 붙어볼 수도 있지. 카자크라면 다 갈아 마시고 싶어 하는 캠벨 대령은 좋아하겠군. 그런데 당신이 무슨 문서를 줬소? 러시아와 영국의 협상이잖아. 그러면 설사 뒤쫓아갔다 해도 전투가 일어나면 여기에서 먼저 협상을 깨는 건 영국이 되잖아!”
스턴튼은 휘청하다가 끝내 무릎을 꿇었다. 코크란 제독은 손 한 번 내밀어주지 않았다.
“거기 멍청히 앉아 있을 시간도 없소! 공사 각하. 존경과 신뢰로 부탁드리건대, 당장 황제의 가장 가까운 인척을 대시오. 당신이라면 여기 오래 있었으니 알겠지. 직계는 바라지도 않아. 황제가 데리고 갔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싸구려 패라도 당장 필요해. 아무 놈이나, 아니. 여자라도 상관없어. 누구든 빨리 새 황제로 옹립하고 대립정부를 세워야 하오!”
이게 지금 일개 해군 제독이 공사에게 할 수 있는 명령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스턴튼은 창백한 얼굴로 일어나 입술을 떨었다. 그러고는 바로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
***
날씨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추운데도, 도광제는 자신의 가마 안에 일체 화로를 들이지 못하게 했다.
“백성을 버리고 몽진해야 하는 짐은 죄인이다. 어찌 따뜻한 잠자리가 가당하겠느냐?”
도광제의 연금술을 대행했기 때문에 그 진짜 이유를 아는 상영귀를 포함하여, 모든 신하들은 옥체를 보중하시라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도광제는 끝내 거부했다.
결국 애꿎은 궁인이며 병사들만 떼로 얼어 죽었다.
황제도 화로 안 쓰는데 아랫것이 함부로 몸 녹일 수는 없잖은가.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동사가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물론 외국인인 러시아 사람들 일행과, 아랫것이 아닌 고려 사람들은 큰 상관이 없다.
기랑은 진인 화둔법 제2장을 시전했다. 거리낌 없이 안전난로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그녀가 문득 말했다.
“이제 어떻게 동쪽으로 가지?”
도광제를 이대로 러시아에 데리고 간다면 꽤나 센세이셔널한 사건이 되겠지만, 당초 베니그센도 설명했던 외교적 문제 때문에 그러기 힘들다.
그건 영국과 정면으로 붙어 보자는 소리다. 그리고 아무리 여기가 중국 북쪽이라도 ‘황제를 모시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일은 대역사라고 표현해야 할 모험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도광제의 최종 행선지는, 본인은 꿈에도 모르는 고려로 결정되었다.
문제는 지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니그센의 늙은 눈꺼풀이 불기운에 나른하게 내려앉았다.
“서두를 건 없다. 우선 목적지에 도착하고, 힘의 차이를 보여준 다음 천천히 말을 듣게 하면 돼. 어차피 영국군은 쫓아올 수 없어. 지금쯤 새 정부를 세우려 하고 있을걸.”
“그렇다면…….”
“허나 그게 잘될 리 있겠느냐. 보나마나 왕당파 병사들이 지방에서 몰려올 거다. 지금쯤이면 강남에서 싸웠다는 청의 주력부대도 당연히 눈치채고 북상 중이겠지. 영국 놈들은 그 모두를 상대해야 할 터. 그쪽 일이 마무리되어야 우리가 행동을 개시한다.”
베니그센은 눈동자만 굴려 황제 쪽을 돌아보았다.
이미 그의 휘하 부대가 오란찰포를 사실상 무력 강점함으로써 그곳을 황제의 행궁이 아닌 러시아 공사관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여러 가지 안배도.
베니그센은 짐짓 기랑을 놀려 보았다.
“어떠냐. 시준도 똑똑하지만, 역시 노인의 지혜가 제법이지 않느냐?”
“맞아.”
기랑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시준이 훨씬 나아. 분명히 더 멀리 보고 있을 거야.”
“핫핫. 역시 당할 수가 없구나.”
그렇게 물리적으로나 추상적으로나 한쪽은 훈훈하고 한쪽은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도광제는 오란찰포에 도착했다.
그리고 본래 여기 출신으로서,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미리 하라고 주변 부족에게 연락해 놓았던 병부상서 화영은 당황했다.
대부분의 부족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간신히 나온 몇 명의 대표자들은 왜 거기 있는지 모르겠는 러시아군 3천 명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북경 남쪽으로 철수했다던 그놈들이었다.
시준이 봤다면 조폭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을 것이다.
주인공과 대립하던 악역이 어느 날 자기 소유의 클럽에 들어갔는데, 웨이터와 바운서들이 주인공에 의해 다 복날 개처럼 얻어터지고 눈 부은 채 무릎 꿇고선 눈알 굴리고 있는 그런 광경 말이다.
영화란 건 몰라도, 21세기 조직폭력배보다 훨씬 거친 삶을 사는 19세기 몽골족 출신 병부상서 화영 역시 단번에 분위기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라사 놈들이? 아니, 어떻게?’
물론 여기에는, 베니그센의 조사대로 병력이 그리 많지 않다.
이미 청은 대부분의 군사를 소모했기 때문이다.
오족공화를 내세운 중화 혁명당에 대항해 도광제는 여진족과 몽골족을 집결시켰다. 여태까지 도광제가 엄청나게 휘두른 군세, 그 주축이 되는 병사들은 대부분 몽골 팔기와 만주 팔기였다.
지금까지 중화 혁명당 및 영국, 고려를 상대하며 숨 가쁘게 소모한 대병력이 다 거기서 나왔다는 의미다. 특히 결정타가 된 것은 최근의 진강 전투였다.
한마디로, 이제 내몽골에는 군대라고 할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허나 그건 베니그센보다 청 조정이 더 잘 안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도광제가 여기로 온 이유가 있다.
영국군은 수적 열세와 보급선 문제로 내륙까지 진격할 수 없다. 당장의 대병은 필요 없다.
원래 몽진은 근왕군을 모으기 위해 하는 것이며 여기는 몽골 팔기의 본향이다. 주민은 거의 모두가 전사다.
만주를 상실한 이상, 도광제가 새로 믿을 만한 군대를 만들려면 오란찰포에 와서 몽골 양황기의 수장인 화영에게 의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화영이 각 기(旗)의 수장을 모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이들은 채 모이기도 전에 아라사 도적들에게 얻어터지고 말았다.
‘옛적 오란찰포의 회맹에 깃발을 들었던 6개 부족이 겨우 3천 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말인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라드족의 한 추장이 심각한 사태를 암시하려 애쓰며 나섰다.
마치 카자크 기병들이 뒤통수를 후려치며 ‘야. 너네 형님이 이해를 못 하신다. 설명 좀 해드려라.’라고 한 듯한 분위기였다.
“서쪽에서 칼카와 호쇼트부 사람들이 내몽골을 노략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칸을 영접하는 데에 부족함이 많습니다.”
즉, 이미 외몽골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리다.
그리고 눈앞에서 뻔뻔한 조소를 보내오는 저 3천 아라사 도적놈들이 거기 연관이 없을 리 없다.
여기에 대장 예르몰로프가 없다는 사실마저 알았으면 그 의심은 확신이 되었을 것이다.
얼마 전 예르몰로프가 북경 인근을 출발할 때, 그는 오란찰포로 가지 않았다.
그는 100여 기 정도만 이끌고 행궁 습격 부대와 따로 떨어져 나갔다.
그러고는 베니그센의 서신을 친분 있는 외몽골 부족들에게 전했다.
준가르 멸족의 원한과 경계를 아직 품고 있던 외몽골 부족들은 도성이 무너지고 황제가 도망칠 것 같다는 희소식에 일제히 봉기했다.
기랑의 희망처럼 그들이 북경까지 오는 건 무리라 해도, 내몽골 서부를 유린하기에는 충분하다.
외몽골의 반란과 내몽골 병력의 탕진.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몽골 대칸의 성지이자 청 황제의 행궁 오란찰포는 불과 3천의 도적 무리에게 어이없이 털려 버린 것이다.
그러나 화영은 몽골 양황기의 수장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사태를 파악하자마자 재빨리 황제에게 다가갔다. 러시아 공사 베니그센을 인질로 잡아서라도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베니그센의 ‘공사관 호위병’들이 일제히 칼을 빼 드는 것을 신호로, 황제가 아니라 옛 동료들을 맞이하러 기다렸던 카자크 본대 역시 말을 박찼다.
분명 금군의 숫자가 더 많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은 먼 길을 오느라 지치고 굶주렸다. 도광제의 ‘반성’ 때문에 허무하게 얼어 죽은 자도 꽤 있었다.
이 상태라면 전력상으로는 러시아 쪽이 2배 가까이 우위인 것이나 다름없다.
카자크는 거의 손해 없는 3천의 기병이고, 몽골족을 신나게 약탈한 덕분에 기세도 하늘을 찔렀다.
거기에 몽진 행렬에는 대규모 민간인 무리까지 뒤섞여 있으니, 안 그래도 없는 전투력을 발휘조차 하지 못할 악조건이었다.
전투라기보다 대규모 칼부림 같은 짧은 활극은 금세 끝났다.
손수 칼을 휘둘러 병부상서 화영을 베어버린 – 가장 똑똑해 보여서 죽인 것이었다 – 베니그센 장군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검을 부하에게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도광제 앞에 가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려와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그는 공화주의자가 아니다.
전쟁이나 정치 혹은 국적 및 인종과 상관없이, 고귀한 신분에게는 그에 걸맞은 존경이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인종차별은 공화주의자의 악덕이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고는 싶은데 자기보다 우월한 사람은 못 참다 보니, 공화주의자가 되면서 동시에 차별주의자가 되어야 했고 그러려면 신분 대신 다른 핑계를 찾아야 했다.
인종차별 부문에서 인류 최강 쓰레기 자리를 치열하게 다투는 프랑스, 독일, 미국은(꼭 19세기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모두 공화국이었다. 영국도 공화국은 아니지만 사실상의 민주주의 국가다.
하지만 베니그센은 다르다.
이제는 역사의 사토에 묻히고 만 고대 봉건국가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이며, 지금은 로맨스 판타지 러시아 궁정에서 복무하는 ‘진짜 귀족’이다.
그래서 그는 사심 없이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황제 폐하. 주중 러시아 공사관에 친림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최근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새로 급히 마련한 공관이라 폐하의 명예에 어울리는 접객이 소홀할 수 있으나, 부디 넓으신 해량을 바랍니다.”
도광제는 갑자기 화로가 쓰고 싶어졌다.
***
시준에 대한 기랑의 평가는 그저 콩깍지가 아니었다.
시준은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늦지 않게 발을 맞추었다.
시준이 알 수 있었던 것이 제한된 정보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총괄서결부장 정약전이 붙어 있었다 해도 이 성과는 놀랍다.
시준은 단전성을 떠나는 마차 안의 시간까지 아껴 가며 여러 가지를 지시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여러 가지였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강남 연락선의 회복이었다.
이제 그곳에 영국군은 거의 없다. 그리고 서명아의 본군 역시 머리가 있다면 지금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겨울 동안 대규모 전쟁터가 된 강남 송강부 일대는 통제 불능. 중화 혁명당과 정찰총국이 춤출 수 있는 최적의 무대다.
주석 동지의 명령은 무조건 즉시 결사 관철이다. 불과 며칠 만에 삼화부, 순천부 등 서쪽 항구에서는 2선급 무기들이 일제히 배에 실려 출항했다.
이제 혁명군은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목표를 거의 다 얻었으므로 당장 무기가 급하지는 않다.
그것은 남중국 곳곳에 가 닿았다. 영국 개항장도 철수하고 천계령까지 내려 텅 비어버린 광저우와 마카오 쪽이 주 행선지였다.
주력이 다 천진에 몰려간 영국 해군은 그 밀수선을 제대로 감시하지도 못했다. 어차피 영국군에 대한 군량 공급선과 구별도 힘들었다.
물론 대륙적인 규모로 봤을 때 그 양은 대단하지 않다.
허나 항상 그랬듯 실질적 수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을 주도하는 수평 세계의 맹주 고려인민공화국과 그 영도자의 의지가 전달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원래대로라면 한창 정월 춘절을 축하해야 할 무렵이 되자, 서명아가 사위 구하러 달려가며 진강현에 남겨 놓은 청군의 최소 수비 병력은 얼굴이 해쓱해졌다.
그들은 처음에 서명아가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온 줄 알았다.
규모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청군도, 영국군도 아니었다.
대부분이 굶주려 시체 같은 얼굴에 어설픈 육성홍기 하나만 든 채, 군대라기보다 피난민 비슷한 모습으로 밀려들어온 그들은 바로 오족의 공의를 대표하는 중화 혁명당 인민해방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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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수학적 계산이 적용된 통제된 공성전은, 급해서 다 망가질 일도 없고 안전한 전선 방문 계획을 세워 왕의 위엄을 체계적으로 보여주기도 적합했기 때문에 일부 군주들이 그것을 즐겼습니다. 작중에 언급된 루이 14세가 대표적이었죠.
2. 로열 조지의 사례가 작중 언급된 적이 있습니다만, 영국 해군의 선상 반란은 꽤 흔한 편이었습니다. 암허스트의 휘하 군세에서 나왔던 존 메이틀랜드 소장이 명성을 얻은 일도 선상 반란의 진압이죠.
해군의 규모가 크니 통계학적으로 말썽도 많을 수밖에 없음+‘모병’ 방식상 자부심과 의무감을 가지기 힘든데다 인적 자원 자체도 좋지 못함+열악하고 혹독한 대우의 3콤보이니 영국 해군이 선진병영이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