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63화 (263/284)

263화

88. 내부로부터의 중상(4)

외교사절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관념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널리 퍼져 있다.

파시즙 과다 증상으로 전쟁 자체가 목적이며 쾌락인 것 같은 – 그러나 애호가는 대개 프로를 초월할 수 없다는 사실만 번번이 증명한 – 프로이센인을 제외한다면, 전쟁은 어디까지나 업무이고 수단이다. 심지어 영국마저도 그렇다.

그런데 거래처 카운터파트를 없애 버려서야 얘기가 안 된다. 기분 나쁘다고 상대방 변호사를 드럼통에 담가버리면 변론에 이기는 게 아니라 재판이 취소되는 것이다.

따라서 외교사절은 항상 보호되어 왔다.

명색이 주중 러시아 공사인 레온티 베니그센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베니그센은 천진에 떨어진 벼락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영국인이 국제법을 지킬 것을 믿었다기보다는 그의 명을 따르는 3천 병력이 북경성 바깥에 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너무 건재해서 심각한 민폐를 끼치고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베니그센은 상당히 편안하게 앉아서 말할 수 있었다.

“살아서 다시 보니 반갑군. 그런데 네 얼굴은 흡사 위대한 위업을 마치고 돌아온 사나이의 표정을 방불케 하는구나. 물론 톈진에서 중국 관리들을 피해 성안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수완이다만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좋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기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니그센은 다 안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의 총명은 아직 쇠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과연 베니그센은 기랑의 불친절한 설명만으로도 상황을 모두 접수하고 일을 진행시켰다.

“황제는 내몽골에 마련된 별궁(행궁)으로 도망치려 하고 있다. 전쟁 시작할 때부터 준비했으니 아마 부드럽게 진행될 거야. 사흘 안으로는 떠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제로백 48시간의 남자 선조 이연에게는 물론 미치지 못하지만 이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챙길 것이 조선보다 수십 배는 많은 청 황실이라면 더욱 그렇다.

기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흘은 너무 짧다. 그리고 도광제가 정말 서북으로 달아나 버리면 잡기 힘들다.

러시아와 고려가 이심전심으로 체결한 밀약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영국에게 중국을 넘겨줄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국이란 베이징도, 톈진도, 난징도 아니다.

전제 군주국에서는 군주가 국가다. 영토, 신민, 군대, 정부 따위는 국가와 동치인 군주의 도구이지 국가 자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는 영국에게 황제를 넘겨줘선 안 된다는 말과 같다.

기랑은 그녀의 특기가 아닌 국제 외교적 방안을 생각하느라 고민하다가 물었다.

“서북 달단 사람들(칼카족을 말한다)이 도와줄 순 없어?”

베니그센은 벌써 한참 전 북경에 처음 왔을 때도 외몽골을 흔들었다. 그리고 기랑과 한중에 있었던 기간 그 연결은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베니그센은 고개를 저었다.

“끈이야 있다마는, 내가 설사 그들의 군주라 할지라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거병은 무리다. 소규모 반란이라면 요즘 변경이 허술해진 틈을 타서 일어나고 있긴 한데…… 제국의 반을 횡단해 여기까지 오는 건 어려워.”

즉각 대답이 나오는 것을 보니 이미 고려했던 방안인 모양이다. 이래서 전화기가 역사를 바꾼 물건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기랑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지자 베니그센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내게도 병사들이 있다. 걱정하지 말거라.”

“3천 명 가지고는 좀 어렵지 않을까?”

“영국군이나 중국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려는 건 아니니 괜찮아. 지금부터 계획을 설명해 주마.”

설명을 듣고 난 기랑은 어느 정도 안심하게 되었다.

역시 안쪽에 있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 있었다.

밖은 강건해도 안은 부드럽다. 그렇기 때문에 병력 열세와 장거리 고립이라는 난점에도 러시아는 이 전쟁의 향방을 가를 수 있다.

지금 러시아는 안쪽에서 도광제의 등에 칼을 꽂으려 한다.

그리고 중화 혁명당 또한 여전히 와신상담하며 제국의 보급로를 흔들고 있다.

중국만이 아니다.

얼마 전 몰트케 소위는 망원경을 모른 척 집어넣었다. 덤으로 고려-유대 자본 역시 영국에서 나날이 조지당의 세를 확대해 가고 있다.

무엇보다 기랑 또한 시준이 방심한 틈을 타 성안에서 그를 탈취했다.

세상 만방의 강대한 군주와 국가와 지도자가 안에서 들끓는 배신으로 함락되고 있었다.

내부로부터의 중상은 항상 즐겁다. 그리고 효과적이다.

***

레온티 베니그센은 카자크 지휘관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예르몰로프를 불렀다.

예르몰로프는 기운차게 말했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요. 성 바깥의 주둔군을 모두 불러들일까요?”

“그럴 필요는 없네.”

예르몰로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베니그센의 심중을 안다고 생각했다.

카자크의 특기인 민간인 도시 약탈과 방화, 학살을 최고조로 발휘하며 북경성을 혼란시킨 뒤, 영국 놈들보다 먼저 황제를 빼앗아서 튄다. 간단명료하지 않은가?

물론 그건 예르몰로프가 순수 혈통 도적 민족의 러시아 생존자라 그렇고 베니그센은 기품 있는 신성 로마 제국 출신이다.

“바깥에 있는 병력을 전부 데리고 출발할 준비를 하게. 여기는 내가 직속으로 거느리는 공관 호위병…… 한 100명 되지? 그 정도면 충분해.”

베니그센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서신과 계획을 주었다.

예르몰로프 역시 대장인 만큼 머릿속에 겁탈밖에 안 들어 있는 부하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수명하고 떠났다.

그 뒤, 베니그센은 곧바로 주중 영국 공사 조지 스턴튼을 만났다.

예전 바실 홀을 써서 우아하게 류큐를 탈취하고 동중국해를 주무르던 그 영광이 무색하게, 스턴튼은 요새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허나 불평했다가는 바로 칼이 날아올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그를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도광제의 상당한 국제 감각을 인정해야 했다.

베니그센은 그간 친분을 쌓아 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스턴튼의 면담 허가를 얻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황제의 도피 행렬에 참가하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결국 베니그센은 예정해둔 것보다 훨씬 적은 뇌물만 써서 – 의욕 없는 포리와 나졸만 매수하면 되니까 – 스턴튼을 만날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은 다 떠난다고요?”

“전쟁터에 멍하니 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소?”

스턴튼은 다급하게 베니그센을 붙잡았다.

“각하. 3천의 카자크 기병대가 여기 있습니다.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 있는 병력입니다. 현재 영국군은 육상 전력이 부족해요. 만약 러시아가 도와주신다면, 저 신의 없는 전제 군주를 단번에 무릎 꿇릴 수 있습니다.”

“중국과 언제나 우호를 쌓아 왔던 우리 러시아가 왜 그래야 하오?”

스턴튼은 이 노장군을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영국이 오기 전까지 청과 전쟁한 유럽 국가는 러시아밖에 없다. 길림 장군과 성경 장군의 영격태세가 왜 북쪽을 향하고 있겠는가.

결국 스턴튼은 한참 뒤에나 하려고 했던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저도 임페라토르가 원하는 바는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만약 영국을 도와주신다면, 그래서 청을 멸망시킬 수 있다면 북위 43도선을 양국의 경계선으로 하죠. 제가 극력 건의한다면 본국에서도 받아들일 겁니다. 어떻습니까?”

베니그센은 정말 놀라웠다.

영국이 젤토로시아를 인정해서가 아니다.

북쪽의 황무지만 빼고 중국을 다 처먹겠다는 영국의 뻔뻔함에, 그리고 그게 진심으로 ‘급해서 꺼낸 양보 많이 한 제안’이라는 점에 놀란 것이다.

역시 이자들은 인류 문명에 존재해선 안 된다.

물론 베니그센은 임페라토르의 충실한 신하이므로 러시아 역시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사실은 잊어버렸다.

그래서 베니그센은 양심의 가책을 하나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침착하게 다음 단계로 돌입했다.

“북위 43도라. 중국 동부에서 그 지역은 공화국 혁명군이 점거하고 있을 텐데요.”

“그까짓 게 무슨 상관입니까? 러시아와 영국이 손을 잡으면 그런 군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베니그센은 다시 한번 감동했다.

급해서 그런지 해적 본성이 아주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래 살다 보니 볼 꼴 못 볼 꼴 다 본 그조차도 경악할 정도였다.

하지만 베니그센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의 약속을 문서로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물론 스턴튼 역시 머리가 있었기 때문에 본국의 훈령도 없이 ‘반드시 러시아에게 땅을 갈라 주고, 지금 전쟁에 군량 대주고 있는 일급 동맹국도 확실히 배반하겠다’는 문서는 써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 문서에는 ‘영국은 러시아와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하여 중국에서의 군사 작전을 원활히 진행하며, 러시아의 이권이 중국 북부에서 보장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말이 들어갔다.

외교관 용어로 ‘긴밀한 협조 관계’는 ‘아무 사이도 아님’이라는 뜻이요,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 하겠음’이라는 뜻이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면피의 장치를 해 놓은 스턴튼은 뿌듯했다.

그러나 의외로 베니그센은 그런 문서도 선선히 받아갔다. 그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황제는 이미 탈출 행렬을 다 꾸렸소. 지금 톈진과 베이징 사이의 길에서 황제의 근위대(금군)가 결사항전 중이니만큼 영국이 그 전에 여기 도착하진 못할 거요.”

“그, 그러니 어서 행동을…….”

“안 되오. 성내에도 만을 헤아리는 병사가 있소. 게다가 당장 우리 병사들이 먹는 끼니부터가 중국인에게 공급받는 거요. 이럴 때는 머리를 써야지.”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조지 스턴튼으로서는 머리가 나쁘다는 평가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허나 상대는 조국전쟁의 영웅이며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베테랑이다.

그리고 지금은 전쟁 중이다.

그래서 스턴튼은 ‘카자크 3천 명을 황제의 도주 행렬에 매복시켰다가 붙잡는다’는 베니그센의 계획이 굉장히 매혹적으로 들렸다.

똑같은 설탕물이라도 동네 약장수가 말하면 미심쩍지만 TV에서 ‘박사님’이 말하면 건강에 좋은 효소액이 되는 것과 같다.

결국 스턴튼은 그 계획에 동의하고 말았다.

***

베니그센이 갑자기 시준을 배반하고 싶어진 것은 아니다.

만약 베니그센이 그렇게 했다면, 주위에 카자크가 몇 천이 있건 기랑은 반드시 그의 목을 땄을 것이다.

기랑에게 천부적 암살자의 소질이 있다기보다는 베니그센과 항상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베니그센 역시 기랑을 손녀처럼 대했다.

하지만 지금 설명하는 내용의 경우, 난롯가에서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말할 만한 종류는 아니었다.

“확실한 건, 우리는 공화국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과 국경을 바로 맞대는 사태는 상상만 해도 끔찍해. 내 진실성을 보여 주기 위해 숨김없이 말하자면, 중국과 고려라는 완충 지대를 두고 싶다. 그러니 영국에게 땅 받기 위해 배반하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오해를 살까 봐 미리 말해 두는 거야. 시준에게 잘 전해 두거라.”

“알았어.”

“좋아. 카자크 부대는 남쪽으로 물러나는 척하다가, 황제의 행렬을 앞질러 가서 먼저 별궁을 점거하고 주둔할 예정이다.”

베니그센은 분명히 황제의 행렬을 도중에 사로잡는다고 했다.

허나 구체적으로 어디서 사로잡을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도주 행렬의 거의 끝이라도, 어쨌든 분명히 도중은 도중이다.

그리고 아무리 도광제라 할지라도 그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애신각라다.

전주 이씨 중에서도 특별한 피를 타고나지 않은 이상에야 기병대보다 빠를 리는 없다.

그러나 기랑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거기에도 병사가 있을 텐데?”

베니그센은 날카롭게 미소지었다.

“훌륭하군. 물론 네 말대로지만, 숫자는 별로 많지 않아. 이미 내가 러시아 공사로 있으면서 다 파악했다.”

“왜지? 아무리 그래도 황제의 행궁인데.”

“뭐, 이유는 여러 가지 있단다. 몇 개는 내가 만들 작정이고.”

베니그센은 거기까지만 설명했다. 어쨌든 자신 있다는 뜻이어서 기랑도 구태여 더 캐묻지 않았다.

베니그센도 굳이 숨기려 한다기보다는 중요한 얘기가 아니어서 생략한다는 태도였다. 그는 물 흐르듯 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국가 정치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둬야 해. 우리는 중국 수도 한가운데에서 홀로 청과 싸워서 황제를 빼돌릴 수도 없었고, 또 영국군과 정면으로 맞설 수도 없었다. 특히 뒤쪽이 중요해.”

러시아군은 영국군과 당장 싸울 수 없다. 질 것 같아서라기보다는 더 큰 문제 때문이었다.

조국전쟁의 발발 원인은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을 무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도 세계가 공인한 그의 연인과 굳이 싸우고 싶던 건 아니었다. 그때의 잘나가던 나폴레옹은 정말이지 재앙이었다.

당시 알렉산드르는 전쟁을 막기 위해 불쌍할 정도로 노력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데이트 폭력은 결국 짓쳐들었다. 연인을 때리는 개망나니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교훈을 남길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다면 왜 봉쇄령을 무시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러시아가 망하기 때문이다.

19세기 초반 들어 폭증하기 시작한 러시아와 영국의 무역은 잠시 멈춰 둘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 궁정의 로맨스 판타지적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사치품도 많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다.

허나 그보다는 생필품이 문제였다. 단적으로, 당대 러시아의 대영 수입 중 어떤 것보다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면직물이었다.

옷은 돈 없다고 안 입어도 되는 물건이 아니며, 이 면직물 수입량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정점을 찍는다. 봉쇄령 아니라도 이미 보호무역을 도입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현재의 러시아는 절박한 필요, 예를 들어 크림 반도의 부동항 같은 게 걸려 있지 않는 한 영국과 정면충돌할 수 없다. 이러한 신경전이 한계다.

이런 전차로 베니그센은 이처럼 복잡한 곡예를 부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곡예는 성공했다.

그의 손에 영국 공사의 문서까지 있으니, 러시아가 영국과 공식적으로 적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리고 ‘엄정한 중립을 지키기 위해’ 병력을 눈앞에서 ‘철수’시켰으니 도망치기 바쁜 청 조정도 거기 관심을 가질 새가 없다.

베니그센은 손쉽게 영국을 농락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청을 농락해야 한다.

“나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소수의 공관 수비병만 데리고, 옛날 반란 진압을 도왔던 일을 언급하며 황제에게 접근할 생각이다. 아, 네 얼굴도 그때 황제가 봤나?”

“그렇긴 하지만,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러면 안심이구나. 일단은 남장을 더 세심하게 하고 있거라. 네 일행은 중국인 일꾼으로 꾸며야 할 텐데, 우리와 동행한 전제 군주가 갑자기 피난길 노리개로 쓰려고 끌고 갈지도 모르니.”

당시 청나라 고관들은 예쁘기만 하면 딱히 성별을 가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들키는 것과 들키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크다.

“지금 남자 안 같아?”

베니그센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글쎄다. 최소한 지난번의 어린 아가씨로는 보이지 않는군. 귀부인[madam]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짧은 사이 많이 변했어. 범인은 그 정시준이렷다.”

잠깐 생각하던 기랑은 곧 ‘사실’만을 대답하기로 했다. 선전선동부의 기술이었다.

“그래. 이제 그는 내 남편이야.”

베니그센이 북경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혁명군은 압록강을 넘었고, 따라서 북경과의 안정적 통신로도 막혔다.

그렇다 보니 베니그센이 들은 시준의 소식은 전부 기랑이 출처였다.

그래서 베니그센은 마음 놓고 기뻐했다. 시준이 예전에 결혼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아주 좋은 일이야. 내가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 있다면 반드시 축하하러 가마. 부인을 이 먼 데까지 보내는 경박함은 마땅히 노인이 훈계해야겠지만.”

“고마워.”

***

도광제가 러시아인을 의심한다는 것은 그의 심원한 지혜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있었을 러시아군의 철수는 확인했다.

같이 영국과 싸워 주지 않는 데 대한 의심도 있기는 했지만, 황제도 안 싸우고 튀는 마당에 러시아에게 왜 참전 안 하느냐고 따지기도 뭐했다.

그리고 베니그센은 영국과 얽힌 모든 나라들의 확실한 변명을 갖고 있었다.

“영국의 난폭하고 잔인한 군대가 유럽에서 우리 본토를 침공할까 두려워, 저의 재량만으로는 함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고려도 많이 댔던 핑계였다. 그때처럼 모두가 인정하고 러시아인을 감싸 안을 수밖에 없었다.

저 지옥에서 기어 나온 해적 놈들 앞에서, 어찌 인류가 마땅히 하나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전 총을 들어 참람된 반역자로부터 황제 폐하를 지켜냈던 그때처럼, 영국도 시비할 수 없는 저와 공관 호위병만으로 폐하의 여정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도광제는 눈물을 흘리며 베니그센에게 벼슬과 재물을 하사했다.

나라 안마저 반란자로 들끓는 이 마당에 진정한 도를 아는 자가 저 멀리 아라사에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절차가 끝나자, 그들은 즉시 별로 아름답지 못한 현실에 달려들었다.

탈출은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죽기로 항전하는 직례 주방팔기를 소원대로 다 쳐죽여 준 영국군이 악귀 같은 기세로 북경성을 들이치기 시작했을 때, 이미 황제의 어가는 서북으로 한참을 빠져나간 뒤였다.

속도를 내야 했기 때문에 호위병은 불과 오천여의 금군이었다. 거기에 베니그센의 ‘공관 경비병’ 약 백여 명, 그리고 러시아에 고용된 허드레 일꾼인 척하고 있는 기랑과 고총련 이삼십 명 정도가 전부였다.

그들은 병력의 삼분지 일쯤 되는 숫자인 황제와 그 식솔, 고위 대신 및 그 하인 등등을 둘러싸며 나아갔다.

내몽골의 요충 오란찰포(烏蘭察布)에 있는 황제의 새 행궁을 향해서였다.

물론 거기에는 이제 ‘위치 이동’된 러시아 공사관도 있을 것이다.

***

도광제는 전쟁군주처럼 머리를 아홉 번 박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주저 없이 최속군주의 용단을 본받았다.

반면교사와 진짜 교사가 모두 동방에 있으니, 대국의 스승이라 함은 이것을 말한다.

그러나 도광제는 단 한 사람의 사적을 놓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백 년 뒤 미래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 불가역의 절대 법칙을 어길 수 있었던 자는 과학의 나라 조선에서도 선조와 시준 둘뿐이다.

그래서 자기도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도광제는 또 다른 조선 군주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군주가 누군지는 명백하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된다.

도광제가 고종처럼 잡상인부터 열강 정부까지 오만 잡놈들 상대로 옥장판 VIP 고객 노릇 하고 다닌 건 아니다.

기초적 인플레이션 개념조차 밥 말아 먹었으면서, 군대 제복 디자인 및 설정놀음과 정치깡패 운용에만 수상할 정도로 현대적인 군주였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명색이 빛의 황제인데 그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외교의 흑마술사 고종과 연탄의 연금술사 도광제는 한 가지 치명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임금은 모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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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19세기 초 러시아는 강력한 보호 무역의 시동을 걸면서 대영 무역과 관련한 경제 개혁을 실시합니다(박지배, 2015, ‘19세기 1/4분기 해외무역으로 본 러시아의 경제 상황’).

그런데 러시아의 신흥 관료귀족과 사업가들은 여기에 찬성했지만, 대토지와 농노를 보유한 지주 귀족들은 보호무역이 아니라 자유무역을 지지했습니다. 자기 영지 생산품을 외국에 싸게 팔고 사치품을 싸게 들여오고 싶었기 때문에 극렬하게 반대하죠. 지주들에게는 이것이 부르주아를 지원하기 위해 자기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으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이 갈등은 사실상 러시아가 망할 때까지 해결이 안 됩니다. 러시아는 국내 상황상 ‘농노제를 유지하면서 산업화’를 해야 했는데, 사실 양립이 힘든 명제죠. 농노제와 지주가 존재하는 이상 보호무역을 통한 국내 생산기반 발전이 어려웠던 겁니다.

2. 오란찰포는 옛 거란 및 몽골 제국, 그리고 청 시기에는 내몽골의 요충지였습니다. 도르보드, 칼카(우익), 우라드 등 주요 부족 6개가 모여 맹을 이루고 청에 신속했습니다. 청도 이 지역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했죠. 베이징에서는 직선거리로 서북 270킬로미터 정도입니다.

3. ‘제로백’이란 차량이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주로 슈퍼카 성능을 얘기할 때 사용되는데 2초도 안 되어 도달하는 차량도 있지요. 단어 자체는 한국식 합성어로서 어원은 심플하게 Zero+百. 영미권에서는 마일 단위로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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