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88. 내부로부터의 중상(3)
반쯤 누워 있는 시준과 달리 기랑은 일어나서 앉아 있었다.
시준은 다시 흩어지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물었다.
“괜찮아?”
강건한 시준으로서도 근육통 때문에 일어나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흐트러진 옷을 들어 보던 기랑의 목소리는 평범했다.
“허벅다리가 좀 아픈데. 마차 탈 거니까 괜찮아.”
“처음에 그렇게 많이 하니까 그렇…… 악! 때리지 마! 맨살이라 따갑다고!”
“넌 더 맞아야 돼. 지유 아프다고 오만 곳에서 호들갑을 떨어 놓고 정작 집안에서 이러면 나을 사람도 안 낫겠다.”
시준은 입을 다물었다. 지난밤 둘은 단 한 마디도 지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기랑은 시준에게 변명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고 시준은 기랑을 상처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준은 여전히 그의 공공재적 처지를 잘 모르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랑의 혁명은 성공한 것이라 평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랑의 지금 말도 별다른 의미는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준은 인간의 초능력, 그러니까 공감 능력으로 어렴풋한 진실에 접근했다.
그래서 시준은 ‘지유하고 어떤 얘기를 했지?’라는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다만 더 멍청할 수도 있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건 그…… 나도 그저 어쩔 수 없이 네게 응한 건 아니라는 거지.”
기랑은 몸을 돌렸다. 오전의 햇살이 쏟아지는 그녀의 나신에 시준은 살짝 숨을 멈추었다. 기랑은 시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너도 바랐다는 거니? 좋았다는 거야?”
차마 대답할 수 없었기에, 시준은 멋쩍게 자신이 어제 풀어냈던 기랑의 머리끈을 들어 보였다.
물론 기랑의 혁명 정신은 그런 어중간한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다.
“말로 해.”
“그래,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멀쩡히 아내 두고서도 너 볼 때 예쁘다고 생각했다. 옛날 영변부에서는 심장이 멎을 뻔했고, 얼마 전 배에서 생선 썰 때도 그랬다. 나는 미인에 눈이 먼 천하의 난봉꾼에다가 신의를 배반한 인간이다. 됐냐?”
다 포기한 듯한 시준의 자백이었다. 기랑은 마주 웃었다.
“이제 나는 북경에 갈 거야.”
시준은 뜬금없는 맥락 변경에 잠시 당황하다가 말했다.
“무리하지는 마.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전부 내버리고 도망쳐.”
“이제 하룻밤 지냈다고 비로소 챙겨 주는 거니?”
“그 말은 좀 서운하다. 어렸을 때, 그 장자도에서 너 처음 보고 같이 사냥이나 가자고 부른 것도 어린애가 위험한 일 하는 게 걱정돼서였어. 항상 그랬다고. 그땐 사내애인 줄 알았지만.”
기랑은 시준의 항변이 견딜 수 없이 귀여웠다. 그녀는 시준을 당장 끌어안고 싶은 충동과 싸워 가며 시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준비 잘해 놨잖아. 내가 위험할 일은 없어.”
결국 기랑은 충동에 졌다. 그녀는 시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시준이 지유나 기랑에게 그러하지 않았듯, 기랑 역시 시준의 몸만을 원한 건 아니다.
그녀의 마지막 탈취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사실을 말해 줘야 했다.
“내 남편에게, 벗인 지유에게, 그리고 내 딸 명주에게 꼭 돌아올게.”
전쟁이 끝나면 결혼하자며 반지를 품고 전선으로 떠난 병사의 상투적 불길함은 여기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튼 현실과 영화는 다른 법이다.
대신, 시준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다.
아까 어렴풋하게 윤곽이 드러났던 진실이 확정되었다. 시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서 처신 잘못하면 나룻배에 모가지만 실릴 텐데.”
“응?”
“아냐. 그래. 알았어. 내가 졌다. 난 너희 것이야. 마음대로 해.”
“그래야지. 말 잘 들어야지?”
기랑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준은 오늘처럼 그녀가 많이 웃는 날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시간 됐다며 옷 다 챙겨 입고 나가자, 시준은 그 웃는 얼굴을 조금 더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벌렁 드러누운 시준은 깍지를 껴서 뒤통수를 받쳤다.
‘제기랄, 불륜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시준은 지유가 양해했다고 해서 그대로 안심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대한 일반적 해답이 존재했다면 그야말로 치정계의 혁명일 것이다.
시준은 결국 대가를 피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원래 잘못한 사람은 상대가 만족할 때까지 두드려 맞기만 해야지, 용서를 받을 명쾌한 솔루션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진짜 잘할게.’
그러려면 일단 전쟁에서 이겨야 했다. 그래야 나라도 있고 가정도 있고 가족도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준은 자신이 어젯밤부터 대체 얼마만 한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깨닫고 기겁했다.
튕겨 오르듯 일어난 시준은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시준의 시간 낭비가 치명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코크란 제독은 시준의 예상대로 천진 기습을 결심한 게 맞다.
그러나 곧바로 실시하지는 않았다.
우선 서명아가 이끄는 10만 이상의 청군은 아직 엄연히 존재했다.
아직 도광제의 지원은 딱히 없었지만, 서명아는 부담을 지지 않고도 가볍게 영국군을 상대할 수 있었다.
쳐들어가서 전멸시키라면 어려워도 괴롭히는 정도라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쪽의 숫자가 훨씬 많으니까. 서명아는 툭 치는 기분으로 1~2만 정도를 갈라 내보내곤 했다.
영국군은 자기들 전체 숫자에 해당하는 병력을 잃어도 상관없다는 식의 별동대로 사용하는 청군에게 치를 떨며 다시 점화끈을 당겼다.
청군도 크게 의욕을 보이지 않고 물러가는 일이 잦았던 게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하이는 바닷가의 도시다. 해군과 육군이 함께 지키는 이상 현재의 청군으로 완전 함락은 불가능했다.
서명아는 바다와 육지 양면에서 공략해야 한다는, 연금술의 군주 도광제조차 들어줄 능력이 없는 지원 요청을 한 채 기다렸다.
서명아는 느긋했다. 어쨌든 황제는 운하를 지키라고 했고, 운하가 함락되지 않은 이상 그의 작전은 실패가 아니다.
그리고 그사이, 코크란 제독은 당장 천진으로 출동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를 실행했다.
영국군의 패가 수도 점령밖에 안 남았다는 것은, 코크란 제독이 즉각 떠올리고 시준도 바로 깨달았듯이 도광제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영국군의 의도를 모호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반쯤 살아남은 제9창기병연대 등 영국 육군과, 아시아 곳곳에 치안 유지용으로 주둔하고 있던 동인도 회사군까지 합쳐 일종의 기병대 태스크포스가 꾸려졌다.
그들은 천계령으로 막을 자가 없어진 중국 해안 여기저기에 상륙하여 재빨리 내륙에 달려 들어갔다.
도광제가 천계령으로 얻은 내륙 수비 강화는 어디까지나 요충지 한정이다.
중국이 얼마나 넓은데 시골까지 모두 튼튼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을 리가 없다.
코크란 제독은 영국의 적성과 소질을 100% 해방시켜 주었다.
인류가 수만 년간 경험한 모든 전쟁범죄가 압축적으로 저질러졌다. 애꿎은 백성들이 내지르는 비명은 어쩔 수 없이 근처의 관군을 불러들였다.
그러고 나면 영국군은 그들을 격파했다.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캠벨 대령의 처절한 절규가 메아리쳤다.
그동안 코크란 제독은 예정대로 함대를 꾸렸다.
여기에는 영국 극동함대의 거의 모든 전투함이 동원되었다.
어차피 중국 상대로 상하이나 항저우, 포모사 방어용 함대가 필요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가 상대라면 그렇지 않다. 주력이 북상하고 남은 극동함대는 고려의 프리깃 함대로도 시비를 걸어 볼 만하다.
그러한 염려 제기에 대해 코크란 제독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어디로 가나? 톈진이다. 만약 그런 습격이 있다면 볼 것도 없이 거기에서 삼화부로 직행하면 된다. 정시준도 그것을 아니 함부로 불장난을 하진 않을 거야. 무엇보다 그래 봐야 얻는 이득이 없어.”
코크란 제독의 결행일은 북경의 반응을 충분히 탐지할 때까지로 미루어졌다. 기만 작전이 충분히 먹혀 황제가 강남으로 다시 한번 대군을 모아 파견할 때가 승부다.
이제부터는 정말 실패하면 안 된다.
***
영국군이 겨울 내내 강남에서만 깽판을 치리라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도광제도 결국 결심했다.
서명아의 군을 철수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었다가는 최악의 경우 영국군이 다른 방향에서 중국 내륙 운송을 마비시킬지도 모른다(백성들은 딱히 걱정이 안 됐다).
결국 황제는 다시 직례에서의 징병을 결정했다. 성경부에서 참 빨리도 온 ‘원병’의 처리가 확정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성경 장군 송윤의 수작질은 대충 알 만했지만 이건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에 속했다. 요동 방어선에 아직 남아 있는 병사들의 사기가 문제다.
원숭환을 처형한 숭정제의 말로가 사방에서 암시되었다. 도광제는 ‘실책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송윤을 영국군 면전에 백의종군 시키는 선에서 ‘관대하게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만주에 기반을 둔 권귀들은 동프로이센 압수당한 융커같이 날뛰었다.
그러나 황제가 그럼 네가 가서 되찾아오라고 진짜 직인 준비하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결국 근본지지고 나발이고 일단 제국의 실질이 더 중요하다는 공감대 형성은 부드럽게 이루어졌다.
황제는 송윤의 병사들을 본래 임지인 산해관 동쪽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에게 영원성 등 부근의 방어를 강화하도록 명하고 어떤 도발에도 대응을 금지했다.
고려군이 심양과 영고탑을 떨어뜨렸다 한들, 그 규모로는 요동 방어선을 정면 돌파할 수 없다. 거기서부터는 본격적인 공성전을 몇 차례나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치스럽지만 도광제는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태연한 척하며 ‘옛 친구’ 정시준에게 보내는 밀서가 산해관을 넘었다.
고려로서도 청과 국가의 운명을 걸고 사생결단을 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도광제는 남만주 일부를 ‘하사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어볼 계획이었다.
‘저놈들은 나중에 천천히 정리해 주면 된다. 우선은 영길리 해적 놈들이야.’
서둘러야 했다. 무한금고가 고갈되기 전에 말이다.
불멸의 재보는 이제 필멸의 푼돈으로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여전히 세계 최고의 부자들 중 하나에 속했지만 도광제로서는 하계의 인간과 같은 열에 섰다는 것 자체가 참을 수 없는 굴욕이다.
결국 도광제는 그 부족분을 다시 신민들에게 전가했다.
그래도 황제가 돈 써서 만들었던 기존 신군(新軍)과 달리 이번 군대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징집병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군대가 남하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영국 육군은 상하이에 도로 집결했다.
그러고는 힘겹게 겨울 행군을 이어가는 누더기 군대에게 맞서 전투와 후퇴를 반복했다. 서명아의 본군에 대해서도 최대한 필사적인 방어를 연기했다.
결과적으로 이는 영국군의 배가 대규모로 상하이와 항저우에서 출항해도 별로 이상하게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영길리 해적 놈들이 이주(대만)의 저들 소굴로 도망치는 것 같소이다!”
청군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서명아는 거드름을 피우며 ‘장졸의 노고’를 치하하고 ‘주위의 부로자제가 바친’ 술과 고기로 소박한 잔치도 베풀었다.
그들은, 영국을 이긴 것이다.
이런 위업에는 마땅히 역사에 남을 상표(上表)가 빠질 수 없다.
서명아는 사위에게 올릴 표문을 사흘 동안 구상하고 닷새 동안 정서(正書)했다.
황제의 위엄과 열성조의 가호, 외적에 맞서 나라를 지킨 전무후무한 업적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거기에 겸손히 표 안 나게 집어넣은 자신의 공적까지 도무지 흠잡을 곳이 없는 완벽한 표문이었다.
한 가지 사소한 문제는, 그 표문보다 먼저 영국 해군이 천진에 도착해 버렸다는 점이었다.
드루리나 암허스트 같은 사람은 너무 표시 나게 사고를 쳤다 하나, 이번 원정에 아시아 사정 아는 제독을 하나도 포함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옛 흑산도 주둔군 대장 헨리 호프도 함장으로 승진해 따라왔다. 어쨌든 그는 설사 좀 한 것 말고는 별다른 실수가 없었다.
이제 깨끗한 바지를 입고 있는 헨리 호프는 최선임 함장으로서 제독에게 보고했다.
“각 함선 전투 배치 완료!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제독!”
“좋다. 영국은 제군이 각자의 의무를 수행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
이 말 한 지 조금 뒤에 넬슨이 어떻게 됐는지 생각하면 상당히 불길하기는 하지만, 총 맞을 것을 두려워해서야 군인 노릇 못 한다.
그리고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로 충분히 용맹했다.
그들은 제독의 명령대로 의무를 수행할 것이다.
인간 세계를 삼킨다는 의무를 말이다.
“중국의 전제 군주는 우리가 체포한다. 승리만 한다면 그 뒤에는 뭐든지 자유다. 페킹의 모든 것은 제군의 소유로 정해졌다! 전투 개시!”
당연하지만 천진은 전쟁 이후로 더 이상 개항장이 아니었다. 천계령이라도 여기를 완전히 비워 둘 수는 없어서 상당한 수준의 해안 방어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물론 그건 인간계의 수준일 뿐이었다.
선봉에 선 HMS 워스파이트의 일격이 항구를 봉쇄하던 정크선을 격침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20여 척에 달하는 영국 해군의 전함 모두가 트라팔가의 각오로 전투를 개시했다.
***
기랑은 영국군이 천진을 반드시 습격할 것이라는 시준의 말을 듣고, 고총련 특작부대원들과 함께 고기잡이배로 위장하여 천진 근해를 어정거렸다.
하지만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시준이 틀리지 않았나 하는 의심 끝에, 돌아가서 이 책임에 마땅한 호된 벌을 줘야겠다고 결심했을 무렵 영국 해군은 도착했다.
이번에는 죽어도 같이 간다고 따라온 길명이가 요란을 떨었다.
“우와. 저거 대단한데요! 아주 다 박살이 나고 있소이다. 회장 동지! 지금 들어갈까요? 저는 회장 동지의 명령만 있다면 타는 불바다 속이라도…….”
시준의 마음을 확인한 뒤였던지라, 기랑도 이제는 그렇게 길명이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다. 원래 승자는 여유가 있다.
다만 냉담한 건 여전했다.
‘지금은 전투 중이라 위험하다. 모두 끝나고 어수선해지면 그때 주위의 피난 가는 백성들과 섞여 들어가자.’ 정도의 말을 기랑은 한마디로 끝내 버렸다.
“기다려.”
길명이는 같은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찌그러졌다. 나머지 특작부대원들은 낄낄댔다.
코크란 제독은 주위의 민간인이나 어선에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북경성을 들이치는 것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태풍처럼 천진 항구를 쓸어버린 뒤 최소한의 후방 병력만 남겨두고 진군했다.
그리고 그 후방 병력 중에는 총사령관인 토마스 코크란 제독과 관전무관인 헬무트 폰 몰트케 소위도 있었다.
몰트케는 말 그대로 태풍 맞은 것처럼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는 중국 어선 – 설마 그게 군함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영국 해군이 방기해 버린 군선도 있었다 – 쪽으로 망원경을 고정했다.
코크란 제독은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예정대로 기습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몰트케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격전은 육지에서 벌어지고 있네. 어딜 보고 있는가?”
몰트케는 망원경을 내리고 빙그레 웃었다.
“이 짧은 시간에 항구 수비 병력을 완전히 격멸한 제독의 전술을 재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다 쪽부터 관찰하는 중이지요.”
해군 육전 전문가 코크란 제독은 어쩔 수 없는 고양감에 껄껄 웃었다.
“과찬이군. 아시아 군대 상대로 이 정도도 못 하면 옷 벗어야지. 캠벨 그 새끼는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장성이 되지 못할 거야. 아무튼, 뭐 참고할 만한 점이라도 알아냈는가?”
“제가 감히 보탤 말은 없습니다. 중국 해군도 통상 경비 수준이었고, 공화국이나 다른 나라 배도 안 보이는 것을 보니 그야말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습이었나 봅니다. 지난달의 기만전까지 합쳐서, 실로 고속 기동 작전의 모범이로군요.”
코크란은 예의를 아는 신사였다. 그래서 ‘해군으로는 아시아인과 거기서 거기인 게르만족 따윈 역시 모르겠지’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영국 해군이라면 이 정도는 보통의 성과에 불과하다는 겸손과 자만을 동시에 표시하고 몸을 돌렸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내륙 침공을 지휘해야 했다.
그리고 몰트케 소위는, 그 후에도 토마스 코크란의 외국 장교를 의식한 아름다운 지휘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아까 망원경이 향하던 방향을 돌아보고 날카로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는 기랑이나 고총련 특작부대의 얼굴을 모른다.
허나 여기에서 가랑잎처럼 떠밀려가는 수많은 소선(小船) 중, 영국 해군에서 멀지 않은 딱 한 배에서만 선원들이 침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몰트케는 그것을 코크란에게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이 거대한 함대의 제독이 주의하기에는 너무 작은 일이었다. 나무랄 수 없는 판단이다.
코크란 제독은 영국군에게 작전 목표만 달성하면 중국에서 무슨 짓을 해도 좋다고 약속했다.
뒤집어 말하면, 이는 승리하기 전까지는 금지라는 얘기다. 제독이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작전에 방해가 되니까.
군의 약탈과 범죄가 얼마나 승리에 해로운 요소인지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그 몸으로 증명했다. 통제가 안 되는 군대는 군대가 아니다.
그래서 영국군 역시, 윌리엄 드루리가 천진을 정복했을 때처럼 여유 있게 건물까지 세워 놓고 전쟁범죄에 매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재빠르게 대열을 갖추고 북경으로 진군했다.
그렇다 보니 기랑과 고총련 역시 멍하니 두리번대는 천진 어민들 틈에 섞여 손쉽게 천진에 상륙할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는 내륙의 관리와 관군이 있으므로 평소라면 더 어렵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랑보다 앞서가는 영국군이 그런 귀찮은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있어서 얘기가 달랐다.
고려는 개항 이후 중국과 오래 거래했다. 그래서 천진에서 북경으로 가는 여러 샛길을 안다.
물론 비슷할 정도로 중국과 오래 교류한 영국도 알기는 알지만, 많은 군대가 통과하기는 어렵고 여행자의 오솔길 정도였다.
기랑과 고총련은 그 길로 앞질러 왔다.
영국의 침공 소식이 막 전해진 북새통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북경성에 경계령이 내려지기 전까지의 절묘한 시점을 잡은 기랑은 약간의 폭력과 수완만으로 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베니그센을 찾는 것도 어렵지는 않았다.
회동관은 그녀도 가 봤으므로 길을 헤맬 이유가 없다. 내비게이션이 없는 시대의 사람은 대개 현대인보다 길눈이 훨씬 밝다.
어려운 것은 지금부터였다.
========================
작가의 말
1.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때, 나폴레옹을 포함한 모든 프랑스군은 약탈에 정신이 팔립니다. 러시아군은 청야전술을 취해 물러난 상태였죠. 그때까지 비전투손실이 심각했지만 어떻게 보면 이겼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모스크바가 함락되었지 러시아가 진 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현실을 인정하고 모스크바에서 후퇴를 결심했을 때는 짐이 너무 많아서 군대가 움직일 수조차 없을 정도였죠. 군율이 완전히 무너진 프랑스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쫓기며 식인마저 일삼다가 참패를 당합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자군을 잘 통제했다면 방화와 습격으로 혼란이 일어날 일도 많이 줄어들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