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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61화 (261/284)

261화

88. 내부로부터의 중상(2)

입술이 떨어졌다.

방금 기랑이 마신 술맛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달콤한 감각이 코끝에 감돌았다.

시준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너 지금…….”

그리고 기랑은 그 말을 잡아챘다.

“항상 둘러대고 도망치는 네 변명은 이젠 뻔해. 지유 얘기 하려고 그러지? 지유는 상관없어.”

시준은 왜 상관이 없느냐고 반문하려 했다. 그러나 기랑은 한 점의 모호함도 없는 태도로 시준의 얼굴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양손이었다. 시준은 목이 딱딱하게 굳는 것 같았다.

‘기랑이가 이렇게 힘이 셌나?’

물론 기랑의 힘이 약한 것은 아니다.

허나 그녀가 시준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힘을 줬을 리는 없다.

영변도호부에서의 그 일처럼, 이번에도 시준을 구속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기랑은 ‘지유가 널 팔았어. 지유도 궁금해하더라고.’ 등의 말을 하지 않았다.

시준에게 어쩌면 가장 적합할지도 모르는 핑계를 주지 않은 것이다.

그건 옳지 않다. 지유가 허락했다고 하면 시준이 못 이기는 척하고 넘어올지도 모르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시준의 마음이 그리 쉽게 편해지는 것은 괘씸해서라도 용납할 수 없다. 게다가 기랑은 자신의 힘만으로 시준을 상대할 생각이었다.

“평양에서 네 주인은 지유지만, 여기 단전성에서 네 주인은 나야.”

공화국이 자랑하는 두 개 전위의 도시에서 두 인민에게 수평하게 소유되는 주석 동지는, 역시 혁명 그 자체를 체화하는 인간이라고밖에 평가할 수 없었다.

기랑은 그녀와 시준 사이에 있던 술상을 걷어치웠다. 동시에 기랑이 손을 어떻게 놀리자 시준의 무게 중심이 순식간에 뒤로 기울어졌다.

기랑은 그대로 시준을 넘어뜨렸다. 예전처럼 무너지듯 안기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내가 남의 손에 넘어진다는 말인가?’

쓸 일이 별로 없어서 그렇지 21세기에 알려진 모든 격투기를 구사할 수 있는 시준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혜 있는 자라면, 몸은 솔직하다는 한마디로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기랑은 마치 싸우는 자세처럼 시준의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시준을 바라보았다.

시준은 혹시 영변에서처럼 자기가 가만히 있으면 순진한 기랑이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다가 분위기 식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해 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발전하는 생물이다. 기랑은 중국에 있으면서 주로 송주령과 같이 있었고,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래서 기랑은 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한층 더 자신감을 얻을 수도 있었다.

“너도 좋지?”

“야. 너, 그러니까…….”

솔직히 시준이 기랑을 단 한 번도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젠 쟤가 남자라도 상관없다며 길명이를 비롯한 오만 잡놈들이 열광했던 그 미모 때문만은 아니다.

필요최소한도만 넘긴다면, 호감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이건 의외로 남자들이 더 그렇다).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사람들이 기랑의 위치를 이상하게 오해하는 바람에 흔히 무시되지만, 기랑은 차형기나 홍총각보다도 시준의 곁에 가장 오래 있었던 최고참 혁명가다.

시준이 책문에서 처음으로 혁명을 결심했을 때 그의 옆에는 기랑 혼자밖에 없었다.

결국 전통적인 애정의 법칙이 증명되었을 뿐이다. 오래 붙어 있다 보면 반드시 정이 든다.

시준은 그 인생의 거의 모든 일처럼, 빚지고 싶지 않다는 의무감으로써 자신을 억제해 온 것에 불과했다.

그 정도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준이 분쟁지역에서도 살아남을 만큼의 심기체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필요에 따라 쉽게 충동을 억제할 수 있었고 피로감이나 일시적 감정, 좌절에 잘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수많은 고비에서 시준은 항상 옳은 판단을 했다.

예를 들어, 지유가 납치되었을 때 시준이 섣불리 서울로 혼자 달려갔다면 결국 둘 다 죽었을 것이다.

시준이 평안도에서 혁명을 준비해 끝내 지유를 구한 것은 분명히 감정에 기반한 행동이었지만 감정에 지배된 행동은 아니었다.

지유의 일에서도 그러했으니 다른 사안은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랑은 지금 시준을 일개 평범한 인간으로 끌어내렸다.

그녀의 수단은 튼튼하고 차분한 애정 관계를 구축한 지유에 비해 불안정하고 거칠었다.

후발주자가 일발역전을 위해 쓰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혁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반대로 즉각적이며 확실했다.

야생의 조선에 아무것도 없는 신분으로 떨어져서, 맨손으로 나라를 뒤집고 혁명을 일궈내며 세계를 흔들 만큼 강인했던 시준의 정신은 처음으로 돌이킬 수 없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랑은 시준의 옷고름을 능숙하게 끌렀다. 남자 옷은 평생 남장하고 산 그녀에게도 익숙했기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시준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시준은 그 손끝이 심장을 뚫고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둘 다 이렇게 고동치고 있으니.

기랑은 나직하게 말했다.

“치사해. 이렇게 갈수록 사람 동하게 만들기나 하고…….”

“……뭐?”

“일부러 여자 옷 안 입고 왔어. 그런 예쁘장한 치장에 넘어갈 사내였으면 벌써 첩을 열두 명은 두고 있을 테지. 그러니까, 만약 너도 좋다면 네가 이걸 벗겨줘.”

기랑은 그러면서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혁명적 옷차림이 널리 퍼진 지도 오래되어 시준은 아예 상투를 틀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망건까지 쓰는 일은 드물었다.

외자상투를 틀고 다니던 기랑 역시, 망건 없이 머리끝만 묶어 올린 채였다.

별 특징 없는 검은 면포로 묶인 그 매듭은 끝이 단정하지 못하게 흘러내려와 있었다.

마치 이것만 잡아당기면 된다고 유혹하는 듯했다.

시준은 ‘자기도 모르게’라는 진부한 숙어가 정말 진실이었음을 깨닫고 전율했다.

어느새 끈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시준이 무슨 생각을 – ‘아냐! 이건 나와 별개의 생물이야!’  – 하기도 전에, 기랑의 풍성한 머리카락이 시준의 얼굴 위로 덮쳐왔다.

매체의 통상적인 ‘남장 해제’ 연출과 달리, 보통 머리를 오래 묶고 있으면 풀었다고 하더라도 금방 이렇게 흘러내리지는 않는다. 사람의 머리칼은 용수철이 아니다.

그렇다면 원래 풀었던 상태였다가 불과 조금 전 다시 묶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시준은 기랑의 머리카락에서 아직도 느껴지는 차가운 습기를 깨달았다.

‘어깨가 젖어 있던 건 눈 때문이 아니었구나.’

공화국 최고의 사냥꾼이 작정하고 왔으니 벗어날 수가 없다.

기랑은 긴 머리카락 사이에서 헤죽 웃었다.

“나도 네가 좋아. 그동안 많이 생각했고, 많이 참았는데…… 다른 사람은 안 되겠더라.”

시준은 자기 가슴팍에 뭔가 뜨거운 게 떨어진다고 느꼈다. 기랑은 웃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몇 년이나, 몇 번이나 나를 고생시켰으니…… 쉽게는 용서 안 해줄 테야.”

그녀의 손이 시준의 몸을 쓸어내렸다.

이론과 실전의 차이 때문에 기랑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여전히 단호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더 초조하고 안타까워 보였다.

시준도 더 이상 자기만 무결한 인간인 척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기랑이 벗어내린 저고리가 시준의 팔 옆을 스치고 떨어졌다.

그러자 시준은 손을 들어 기랑의 등허리를 안았다.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만져졌다.

기랑은 그 차가움에 약간 몸을 떨었다.

“아……!”

그녀가 강한 척을 해도 얼마나 여유가 없었는지, 시준은 손끝으로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그녀를 괴롭혔는지도.

시준은 다시 한 번, 손가락으로 그 물방울을 쓸어 올렸다. 마치 눈물 같았다.

그리고 그 물기는 마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기에, 물기는 채 마르기도 전에 땀으로 바뀌어 맺히고 있었다.

***

그날 새벽이 되자, 성경부 인근 세 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모두 결판이 났다.

청군은 대부분 잘 싸웠지만 병력이 너무 열세였고 기세도 꺾였다.

명장이라 할 수 있는 길림 장군 부준과 그 휘하 정예병이 증발하는 바람에 주축이 되어 나서 줄 군세도 없었다.

게다가 북경에서 대규모 원군이 아직도 파병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오히려 거꾸로 황제가 원병을 요구한 상황이었지만 그건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두 장군이 함구했다).

높으신 분들끼리의 일은 잘 모른다 해도 그 정도면 분위기 파악이 쉽게 가능하다.

일부 만주족 성지 절대 수호의 의지에 불탄 부대만이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한인이나, 이제부터 한인이 되기로 결심한 일부 만인은 그대로 탈주했다.

송윤 역시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남은 병사를 전부 모아 남공철이 일부러 비워 둔 서쪽으로 뛰쳐나갔다.

혁명군이 따라오지 않는 게 확실해지자 송윤은 좌우를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병사를 이끌고 즉시 경사를 수호하러 달려올 것을 명하셨다. 나는 이제 조칙을 받들려 한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성경 장군의 곁에 있을 정도로 똑똑한 군관들은 다 알아들었다.

송윤은 일의 선후를 뒤바꾸려 하고 있었다.

고려군에게 패퇴해서 북경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들이 성경부의 군대를 모두 이끌고 떠났기 때문에 만주가 실함된 것이다.

황제가 조칙을 보낸 시점과 고려군이 번개처럼 쳐들어온 시점은 별 차이도 안 난다. 창피하지만 성경 장군과 길림 장군이 워낙 빠르게 밀려버렸기 때문에 가능한 조작이었다.

조칙을 받고 준비해서 떠났는데 그 빈틈을 고려군이 친 것이다.

무리수가 아니다. 충분히 해볼 만했다. 송윤과 부하들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른다.

황제는 당장 캐묻지 못한다. 일단 원병이 급하고, 그도 성경부 군사를 보내라고 한 시점에서 만주의 일시적 상실 정도는 각오했을 테니까.

괜히 송윤을 추궁해 봐야 없는 군대 사기만 더 떨어뜨린다. 송윤을 숙청한다면 일이 다 마무리된 이후다.

그리고 그사이에 송윤은 자기와 부하들을 변호해 줄 고관을 포섭할 생각이었다. 일생 내내 고관이었던 송윤은 북경에도 당연히 다양한 교우 관계가 있다.

모든 부하들은 송윤의 신산귀모를 열렬히 지지했다.

“조칙은 성심을 다해 받들어야 마땅합니다.”

“저희들은 오직 장군을 따라 밤낮없이 달려 산해관을 넘겠습니다.”

상하 장졸의 단결이 이토록 잘된 군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송윤은 빠르게 서남으로 향하는 길을 지시했다.

아직 사정을 모르는 요동의 웅악(熊岳), 개주(蓋州)를 비롯해 산해관 앞의 광녕(廣寧), 의주(義州), 금주(錦州) 주방을 흡수하며 산해관을 넘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혁명군은 뒤늦게 달려온 북쪽 개원(開源) 주방을 격파하고 성경부 일대 진압을 완료했다.

공화국 혁명군은 마침내 여진족의 근본지지 성경부를 무력 함락시켰다.

만주에서 인간이 근성으로 버틸 수 있는 한계치에 가까운 한겨울, 동짓달 열사흗날이었다.

***

심양은 그 도시가 가진 의미상 당연히 황제의 행궁이 있다.

태청문(太淸門)이 그 궁을 지키는 문이요, 그 안에는 태청전이라는 전이 있는데 강희, 옹정 황제가 친필로 쓴 여러 글귀가 붙어 있다.

티베트의 예처럼 청 황제들은 많은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 다면적 군주가 되어야 했다.

티베트에서는 종교적 성자, 몽골족에서는 인장을 소유한 대칸, 여진에서는 영웅의 기상을 물려받은 전사다.

그렇다면 한족에게는 문예에 통달한 호학군주로서의 면모가 필요했다.

그래서 어디 나들이라도 가면 현판부터 시작해 가지각색 시나 줄글을 써서 내려 주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 어쩌다 발굴된 석기 시대 유물에도 몇 자씩 끄적여 놓았다.

받는 자들의 기분은 현대인도 잘 이해할 수 있다.

역대급 상품이라고 해서 열심히 뛰었더니, 회장님이 직접 취미로 그리신 풍경화를 수여받는 사내 축구 대회 우승팀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황제 어필이라면 어디 함부로 팔아먹을 수도 없지 않은가. 자기도 믿지 않는 자랑을 손님마다 하며, 상대도 속으로는 비웃고 있을 껍데기 찬탄이나 듣고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적어도 만주족 황제보다는 문재(文才)가 뛰어나다 자부하는 남공철은 조소했다.

“반동의 글이라서가 아니라, 영자팔법(永字八法)이며 시구의 작법으로 보아도 유치한 것들이거든! 그 조야한 잡문을 필시 황제님의 소위 어필이랍시고 황송해하며 갖다 붙였겠지. 내가 예전 연행길 오면서도 보았네만, 한마디로 시상에 되어먹은 게 없었다네[一言以蔽之 曰 思無成]!”

그러면서 그 글귀며 편액을 모두 떼어내게 했다. 비석은 통째로 파내거나 쪼아내서 실었다.

주위 사람들은 혁명적인 동조의 의미로 왁자하게 웃었다.

이 물건들은 태우거나 부수지 않는다.

문명 대국 고려 사람이 보기에는 형편없는 수준이라 해도, 눈깔이 옹이구멍이나 다름없는 영길리 오랑캐들은 좋다고 사 갈 것이다.

영국 담당 외사통호부 부부장 박득출이 연결한 이 문화재 거래는 이미 전쟁 전부터 진행되던 사업이다.

몰수한 반동의 재산 중 서책이나 병풍 같은 것은 빼앗기는 했는데 별로 쓸 데가 없었다. 이런 것들은 시준의 나불대는 혓바닥 아래 바가지 가격이 매겨졌다.

‘몇 년 전 내가 김치 줄 때 기억나지요? 동방 박사의 보배로운 거울[東醫寶鑑]! 그래. 그 책 맞소. 이런 동방의 신비한 유물(Oriental mythic relic)이 좀 더 있는데…….’

영국 해군의 괴혈병이 그간 극적으로 감소한 건 사실이었다. 과학적 유럽인들은 경험칙에 의거하여 시준의 보증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본국에 돌아가 개인적 재산을 축적하고 싶은 장교들은 적극적으로 노비 거래 문서라든지 요강이라든지 하는 잡동사니를 사들였다.

진인의 도로 개종한 절의 불상과 탱화 같은 물건은 물론, 궁녀의 신발이며 양반가 처마 밑의 풍경까지 팔 수 있는 건 다 팔았다.

당시 시준은 종묘랑 사직도 좀 남겨 두는 편이 좋았다고 후회할 정도였다.

선전선동부 또한 옛 유명 화가들의 낙인을 날조하여 위조 동양화를 양산했다. 유럽인들이 아직 동아시아를 자세히 모르는 지금이 아니면 무식한 양귀자 놈들을 등쳐먹을 수가 없었다.

전쟁 전, 올해 초까지만 해도 삼화부에서는 매일같이 이런 진품명품 거래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부에 많이 나도는 가짜 청동기도 역시 싹 수거되었다.

이것도 일전 정약용과 북경 갔을 때 시준이 생각한 사업이다.

청동기를 산(酸)에 담그거나 적당히 훼손시켜 낡아 보이게 해서 사기 치자는 범죄적 아이디어는 혁명 때문에 뒤늦게야 실현되었다.

런던에 보내서 희만 선생의 엄정한 고증을 거치게 되면, 지금 유럽에서 한창 붐이 일고 있는 고고학 종사자들이 눈을 뒤집고 달려들 것이다.

물론 그런 건 모두 부차적인 일이다. 혁명은 항상 재물보다 우선한다.

태청문 안 비룡각(飛龍閣, 용이 날아오르다)과 상봉각(翔鳳閣, 봉황이 돌아 솟구치다)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전각에도 끝부분에 붉은 적기가 내걸렸다.

남공철의 모든 약탈, 아니 수평적 분배가 완수되기도 전인 정오였다.

이 두 건물을 배경으로, 선전선동부는 멋진 그림을 완성했다.

베를린에 적기를 내거는 소련군 그림과 비슷한 구도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잠시 후, 만주에 남은 청군 소탕 및 장악 계획을 논의하려던 남공철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총참모장 동지. 괜찮으신 게 맞소?”

홍총각은 심양 진입 이후 혁명군 유일의 전사자로 기록될 뻔했다.

혁명화(革命畵)는 오직 실제의 일을 그려야 한다고 우기며, 깃발 든 채 전각 꼭대기에 그 덩치로 오르다가 미끄러진 것이다.

그는 꿋꿋하게 말했다.

“이까짓 것은 다친 축에도 들지 않소.”

미끄러져서 긁힌 팔의 상처는 거창해 보이나, 멀쩡히 걷고 말하는 걸 보니 뼈가 상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 정도면 경상이 맞다. 남공철은 총참모장의 체면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혁명을 위해 한 몸 돌보지 않는 주석 동지의 기풍은 바로 총참모장 동지께서 본받고 계시오.”

홍총각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군의 인화를 완성한 남공철도 뿌듯했다.

그래서 군의(軍議) 또한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처음 정치국에서 결정된 대로 산해관과 영원성 등 요동 방어선은 공격하지 않는다. 어차피 겨울에 이 만주에서 대규모 전투는 어렵다.

만일을 대비해 남아 있던 1사단만을 진군시켜, 봉황성과 책문 및 성경부로 이어지는 동팔참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것이 전부다.

봄이 오면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

거의 비어버린 요동 반도로 밀고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이 대승의 기세를 몰아쳐 정말 산해관을 넘보는 것도 의욕만으로 본다면 가능은 하다.

남공철은 우선 혁명군이 지나치게 들뜨지 않게 단속하는 방향에서 의논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그 뒤의 일은, 주석 동지께서 오셔서 광명영도를 밝혀 주셔야겠지요. 주석 동지께서도 지금쯤이면 어떤 용맹한 장수보다도 중요한 저 소하(蕭何)의 안배를 마치고 북상하셨을 거요.”

***

남공철의 말은 반 정도만 맞았다.

시준은 확실히 혁명을 위해 그 한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러나 소하의 공적을 이루고 북상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날 오전, 시준의 상태는 성경부와 비슷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완전 함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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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조선은 청에 대해 군사적으로 완전히 박살난 뒤에도 여전히 문화적 자부심은 가지고 있었던지라, 박지원을 비롯한 여러 선비들은 북경과 심양 등지에서 황제의 어필이나 시를 보고 조악하고 유치하다며 매우 비웃는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물론 시재는 어떨지 모르나, 사무 능력에 있어서는 강건성세의 황제들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남공철의 말은 공자가 시경 삼백 편의 시를 평한 ‘한마디로 사악함이 없다[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에서 사악하다[邪]를 완성되다[成]로 바꾼, 일종의 조선식 패러디입니다.

2. 19세기 초는 고고학과 고생물학 등이 매우 발달하던 시기였습니다. 화석 발굴도 활발히 진행되었고요. 작중에 한번 조르주 퀴비에가 언급된 적이 있는데, 이 시대 사람입니다.

이러한 고생물학 발달의 중심 중 하나는 역시 영국이었습니다. 퀴비에는 프랑스 사람이지만 영국 사람을 들자면 여성 고생물학자인 메리 애닝(작중 시대 사람이긴 합니다만 아직 어립니다) 등이 이 분야에서 많은 업적이 있지요. 이 시대 흔치 않았던 여성 학자가 나온 분야라는 건, 당대 영국에서 고생물학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외에 필트다운 인 위조 사건도 영국 고생물학의 발달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죠. 이 영향력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일례로 고생대 6기 중 4개 기(期)인 캄브리아기,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는 모두 해당 시기의 화석이 발굴된 영국의 지명에서 딴 명칭입니다.

3. 시준이 처음 청동기 사기판매 생각할 때 한번 언급된 적이 있는데, 이 당시는 청나라도 골동품 장사를 위한 고대유물 발굴이 꽤 되었습니다. 황제들이 석기시대 돌칼이나 보습 같은 거에 낙서해 놓는 부작용은 있었지만(중화민국 중정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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