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60화 (260/284)

260화

88. 내부로부터의 중상(1)

분명 청군은 닐 캠벨 대령을 쫄게, 아니 놀라게 할 만큼의 정예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전에 입수된 중국군의 정보에 비해 놀랍다는 말이었다.

그 전까지 생각했던 ‘창 든 민간인 무리’가 아니라 ‘국가군대’라면 그것에 걸맞게 싸워 주면 된다.

“상대를 얕보고 방심하지 마! 러시아군과 싸운다고 생각해라!”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전파한 캠벨 대령의 경고였다.

조국전쟁 중 카자크족에게 직접 난도질당해 본 사람의 말인 만큼  그 경고에는 당사자적 진실성이 담겨 있었다.

비유가 아니다. 실제로 당시 캠벨 대령은 중상을 입고 자리보전을 해야 했다. 카자크는 ‘프랑스군으로 착각’했다고 말했고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캠벨은 그때와 같은 오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군은 이 전역에서 처음으로 ‘소탕’이나 ‘진압’이 아닌 ‘전쟁’을 준비했다.

그리고 전쟁을 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영국군은 당연히 약하지 않다.

좁게 봐도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앵글로색슨이 지구의 패권을 놓친 적은 없다.

전쟁 잘하지도 못하는 독일이나 그런 놈들에게 전쟁 배운 일본 정도는 애초에 대드는 게 아니었다.

영국이 정색하고 본다면 중국군의 ‘체계’ 따윈 야만족치고 기특하다는 정도일 뿐이다.

요크 대공 프레데릭 어거스투스가 완성한 현재의 영국군과 동렬에서 비교될 정도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 믿음은, 상당히 우악스러운 방식으로 증명되었다.

***

캠벨 대령은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위에 깃대를 콱 꽂았다. 숨이 견딜 수 없이 가빴다.

방금 생기긴 했지만 고지(高地)라면 고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동작은 아무리 봐도 영광된 진격의 마무리라기보다 곧 쓰러질 부상자가 지팡이에 의지하는 것 같았다.

대령의 머릿속에 문득 3년 전의 페르샹파누아[Fère-Champenoise] 전투가 떠올랐다.

그 타타르 새끼들, 종마에게 능욕이나 당해야 마땅한 카자크족의 ‘오인 공격’이었다.

대령은 몇 번이나 그때처럼 될 위기를 넘겼다. 뒤집어쓴 중국인의 피와 자기 상처에서 난 피가 뒤섞여 군복이 무거워질 지경이었다.

만주의 혁명군은 삭풍에 고생하고 있지만, 이 강남에서라면 동짓달도 그다지 춥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캠벨 대령은 엄습하는 추위를 느꼈다.

격심한 전투의 피로로 심신 양면에서 체력이 다 빠져나간 탓이다.

대령은 뒤를 돌아보았다.

제9창기병연대는 채 반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고, 그중 말을 제대로 타고 있는 자는 더 적었다.

당장 대령만 해도 그의 군마를 잃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에는 패배감이 떠올라 있지 않았다.

실제로 패배하지 않았으니까.

캠벨 대령은 제9창기병연대, 그리고 그를 따르던 영국 육군이 원하는 바를 확인해 주었다.

“신사 제군. 우리가 이겼다!”

장교들이 그 말을 전파할 필요는 없었다.

그에 호응해 함성으로 화답해 줄 수 있을 만한 영국군은 캠벨 대령의 목소리가 가 닿을 수 있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

청군과 영국군은 모두 실수하지 않았다.

이는 아편전쟁과는 상당히 다른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영국 해군이 반세기 뒤처럼 증기 철갑선을 끌고 강을 거슬러 올 수 없었던 게 결정적 차이였다.

청이 선택한 수륙 양로 대진격과  영국 함대의 상하이 방어는 모두 합리적인 전술이었다.

인류사의 숱한 전쟁 중에서 이토록 바보짓이 드물었던 전투도 많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두 세력 모두 자기가 패배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일단 청군은 영국군에서 운하를 지켜낸다는 당초 목표에 성공했다. 영국군은 진강현의 운하 합류지점을 점령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군 역시 영국군을 상하이까지 밀어붙여 바다로 쓸어버리는 데에 실패했다.

캠벨 대령은 중국군을 시찰하고 나서 작전을 방어로 전환했으니 이쪽도 전략 목표 달성이다.

손실 비율도 공정했다.

양군 공통으로 총전력의 약 4할이 ‘전사’했다. 죽지만 않았을 뿐 전력에는 포함될 수 없는 숫자는 안 세는 쪽이 정신 건강에 좋다.

그야말로 혈투라고 불러 주기에 아깝지 않았다.

양군이 가진 자원과 능력을 모두 동원하여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

한마디로 전사학자들이 매우 좋아할 형태의 전투였다.

뒤집어 말하면 지휘관들은, 특히 영국 지휘관들은 끔찍하게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비율의 손해를 봤다면 중국군과 영국군의 상대적 격차는 당연히 훨씬 더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간 항주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상하이에서 캠벨의 뒤를 받쳐 주며, 장강을 따라 내려오는 중국 함대를 모조리 격파하고 있던 제독은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멍청한 놈! 야만족 무리 상대로 잘하는 짓이다! 요새화된 방어선에서 오리 사냥하며 버티는 것도 못 했다는 말이냐!”

적군의 숫자가 20배라는 사실 따윈 변명이 못 된다.

영국군이 계산한 교환비는 30대 1이다. 20배 정도는 ‘당연히’ 적은 손실로 격파했어야 했다.

“이래서 땅개 새끼들은 안 돼! 이기면 뭐 하냐고. 이제 반도 안 남은 절름발이 병사들로 뭘 어떻게 하란 말이야!”

동일한 이유에서, 현재 임시 청군 총대장인 서명아는 오히려 느긋할 수 있었다.

10만 정도가 죽고 다시 5만여 명을 부상 악화, 도주, 질병, 실종 등등으로 잃었지만 그건 대륙에서 별로 큰 손실이 아니다.

대왕고래는 크릴새우 숫자를 걱정해 가며 삼키지 않는다. 어쨌든 운하를 지켰다는 게 중요하다.

서명아는 이 ‘황제의 위엄’을 북경에 보고하고 영길리 해적을 완전 말살하기 위한 추가 병력과 물자를 요청했다.

이제 영국군의 괴멸은 시간문제다. 정의 구현이 임박했다고 해도 좋다.

이 명제를 반박하기 위해 애쓰던 코크란 제독은 결국 작전 초기에 포기했던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적의 손해도 만만찮으니 황제는 반드시 다시 군대를 모을 거다. 이미 보낸 군대만 해도 엄청난데, 재차 징병을 하면 수도권은 텅 비게 되겠지. 톈진의 정보를 모아라. 비밀히 중국 수도를 기습한다.”

처음 걱정했던 근왕군의 탈환 시도 같은 건 이제 부차적 고려 사항이다.

탈환당할 때 당하더라도 성과를 올려야 했다.

이대로 물러나면 토마스 코크란은 진짜 주가 조작범이 된다.

코크란은 관련자 모두에게 재차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다시 고려 담배를 빼물었다.

***

그동안 단전성에 내려가 있던 시준은, 굉장히 의외이지만 오히려 한양군보다도 스트레스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단전성 사람들이 진인의 옷깃을 만져 병을 치유하러 몰려든다거나, 시준이 머무르는 방 지붕을 뚫고 환자를 도르래로 내려보낸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십인지맹과 그 관련자 대다수가 정치장교로서 전쟁에 나가 있어 정 진인과 신도들을 연결해 줄 ‘사제’ 계급이 없는 탓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시준의 평화에 더 도움이 된 것은 선전선동부장 조제프 푸셰의 조언이었다.

출발하기 전, 푸셰는 시준을 독대했다. 그러고는 친구로서 편하게 말했다.

‘많은 풋내기 청년들은 자기 마음속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피그말리온의 인형과 같은 우상으로 만들어 놓은 채, 그 창문 밑에서 노래를 부르고 그녀의 명예를 위해 결투하지. 심지어 얼굴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러하다네!’

열네댓 살짜리들이 처음 만난 지 닷새 만에 동반 자살하는 유럽식 감성은 그런 모양이다.

하긴 로미오와 줄리엣이 진짜 결혼했으면 아마 한 5년 뒤에는 각자 정부 하나씩 만들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허나 21세기 사람인 시준은 별로 공감할 수 없었다.

현대의 연애는 결혼과 불륜 모두에서 독립된 사업이고 개인적 성공의 척도다.

연애가 일부의 일탈이나 인생의 대사건이 아니라 보편적 성장 과정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별 감동을 받지 않은 시준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지금 갖고 온 김조순의 딸 석방 안건 설명하는 겁니까? 하긴 둘이 얘기해 본 적도 없죠?’

‘그 얘기는 좀 전에 끝났잖은가. 한양군 가서 김유근 제사 지낸다고 했잖아. 단전성에서도 혁명열사릉을 방문하겠지? 그때 김조순을 제외한 식솔들을 혁명열사 김유근의 얼굴을 보아 용서한다고 발표해 주면 공화국에 아직 남아 있는 불순분자들의 의욕을 꺾고 대통합을 이룰 수 있다고! 결코 여명이 때문은 아냐!’

‘여명이 때문은 아니겠죠. 당신 때문이겠지.’

‘아, 아무튼 좀 들어 보게. 이건 단전성에 가서 자네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야.’

시준은 조제프 푸셰가 또 이상하고 신비스러운 선전선동 행사를 기획한 줄 알고 흘려들으려 했다.

하지만 푸셰의 조언은 그 반대였다.

‘아까 하던 말로 돌아가지. 그러므로 에로스가 입을 맞추어 인형이 갈라테이아로 바뀌었을 때, 그건 사랑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종말이기도 했을 거라 확신하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조각상 얘길 괜히 한 건 아냐. 거기에는 이미 자네가 있어. 그 동상 말이야. 그거면 충분해. 금송아지를 섬기는 사람들에게 진짜 송아지는 누추하고 냄새나는 가축일 뿐이라고. 잘 듣게. 환상은 만질 수 있게 되는 순간 환멸이 된다네. 단전성 사람들이 자네를 ‘만지지’ 못하게 해.’

조제프 푸셰라는 인간이 마음에 안 들 뿐, 의견 자체는 합리적이라는 것은 시준도 인정했다.

게다가 그 역시 단전성 한가운데에서 광대놀이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양군에서 정길룡의 강권 때문에 굴욕을 겪고 나자 그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단전성 같이 가서 무슨 일 저지를지 모르는 정길룡을 즉석에서 정치장교로 임해 공화국 해병대에 보내버린 시준은 단전성에 들어가자마자 인민위원회 관소에 칩거했다.

그리고 거기서 사무를 처리하며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할 일은 무당 노릇 외에도 많았다.

단전성을 통해 올라오는 삼남의 물류 통제, 이 겨울을 나기 위한 곡식과 생필품의 분배, 시준과 달리 단전성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삼남에 내려갔던 기랑의 후방 지원까지 중요하지 않은 사무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 시준은 그중에서도 가장 긴급한 글을 보는 중이었다.

심양에서 봉황성과 의주까지는 빠른 파발로, 거기서부터는 천리마 봉화로 전달된 전문이었다.

공화국 혁명군은 현재 심양을 에워싸고 있다.

봉황성 인근에서 대승한 본군은 거침없이 북상했다. 오녀산성을 점령했다면 심양은 그 외성을 잃고 벌거벗은 거나 마찬가지다.

동쪽에서 길림 장군을 깨뜨리고 서진한 제3사단 또한 심양 동쪽의 흥경 주방을 맡아 포위했다.

심양만 떨어지고 나면, 한겨울이라는 핑계로 진격을 미룬 채 만주의 정지작업에 집중하면 된다.

시준은 산해관을 돌파할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오히려 청이 협상을 제안한다면 북만주는 다음 혁명까지 – 혁명은 연속적이다 – 잠시 양보할 용의도 있었다. 어차피 그 많은 주민을 다 일거에 흡수하기에도 부담스럽다.

고양이가 쥐를 몰아붙일 때도 도망갈 곳을 남겨둬야 하는 법인데, 쥐가 고양이를 함부로 몰아붙인다면 결과는 자명하다.

그리고 시준은 다른 글을 집어들었다.

이쪽은 상하이 부근에서 어정거리던 정찰총국 요원들이 풍랑을 마다하지 않는 쾌속선으로 갖고 온 보고였다. 공화국이 영국군의 보급선 일부를 부담하는 만큼 영국군 내에 고려인이 없을 수는 없었다.

‘난징 근처에서는 영국과 청이 거의 공멸했군.’

시준은 그 첩보를 토마스 코크란 제독과 별로 차이 없는 시점에 받아볼 수 있었다.

선비의 기풍을 따라 하찮은 재물 따위가 아닌 귀한 서적으로써 우정을 돈독히 하여, 이제 연락장교인지 간첩인지 잘 분간이 안 가는 몰트케 소위가 애써 준 덕분이다.

영국도 영국이지만 청군의 동태가 더 중요하다.

청군의 숫자가 아주 많은 것 같지만, 남은 인원의 대다수는 전투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던 지원 병력이다.

영국 육군이 반신불수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청도 핵심 전력을 거의 상실했다.

이제 도광제는 새로 병력을 뽑아야 하는데, 전통 있는 팔기군이 거의 산화하였으니 신병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러시아 원정 후의 나폴레옹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물론 영국 하나를 밀어내는 데에는 그 정도로도 해볼 만 하다.

하지만 청의 적은 영국만이 아니다.

시준은 중화 혁명당에 사람을 보낼까 하다가 관두었다.

그쪽의 정세는 자기보다 임칙서가 당연히 먼저 탐지했을 터. 알아서 움직여 줄 것이다.

사람을 더 급하게 보내야 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그도 언제까지나 지리산 갖고 이불 걷어차는 수준은 아니다. 시준의 생각에도 이제 영국이 취할 방도는 하나밖에 안 남았다.

아마도 텅 비었을 직례 기습.

천진을 지키는 함대 따윈 영국군에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최근까지 개항장이었던 터라 천진에는 변변한 방어시설도 다 세워지지 않았다.

북경 근처에는 물론 금군이 주둔하고 있고 튼튼한 성곽도 있다.

허나 그게 궁지에 몰린 마족의 발악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육군이 거의 사라졌다 해도 위험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영국군이라면 그냥 배에서 내린 수병만 가지고 싸워도 된다. 실제로 로드 암허스트가 그렇게 이기지 않았는가.

‘영국이 황제를 정말 체포해 버린다면 골치 아파진다.’

그다음부터 영국의 전략 목표는 그들에게 땅을 줄 청 황실의 사수로 변한다.

즉 중화 혁명당은 영국군의 다음 과녁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영국군이 많이 지치고 꺾였어도 청 정규군으로도 못 당한 놈들을 혁명당이 어찌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시준에게는 거기로 뭔가 병력을 보내 간섭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원병이라고 공식 파견하면 원병인 이상 영국군을 도와야 하니 활동이 상당히 제한되고, 몰래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시준은 절망하지 않았다.

병력이 이미 가 있으니까.

거기에는 레온티 베니그센과 3천 카자크가 있다. 반파된 영국군의 상태로 봤을 때 그 정도면 사세를 바꿀 만한 캐스팅보트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공화국 혁명군의 무력이 아니다.

능란하게 잠입하여 공화국과 합을 맞추게 해 줄 연락 담당이 필요하다.

시준의 고민은 따로 있었다.

‘기랑이 말고 다른 사람 보내고 싶은데 누가 좋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보다 적임자가 없다.

하지만 시준은 더 이상 기랑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아직까지라면 그녀를 거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랑이 더욱 시준에게 무언가를 준다면 어떨까.

공화국의 전쟁 향방이 중대한 기로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는 시준의 마음을 붙잡아 놓았다.

‘이렇게 고민할 시간도 없는데.’

이런 종류의 작전은 속도가 생명. 아마 코크란 제독은 벌써 함대를 꾸려 천진으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시준은 머리를 감싸 쥐고 끙끙거렸다.

잠시 후, 시준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는 무엇이 자신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렸는지 알아보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해는 떨어진 지 오래고 주위는 겨울밤답게 무척 조용했다. 누가 지나다닐 리는 없었다.

그래서 시준은 사유를 조금 늦게 깨달았다.

이제야 시준에게도 감지된 그 고소한 냄새가 시준의 정신을 깨운 것이다.

시준은 냄새만 맡아도 그것이 자신의 장기였던 요리임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을 발소리도 안 내고 가져올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기랑이냐?”

“응.”

“벌써 돌아왔나 보네. 들어와.”

기랑은 투박한 쟁반과 술병을 하나 들고 있었다.

어깨가 약간 젖어 있는 것이,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급양과장도 아닌데 뭘 이런 걸 가지고 오냐.”

“오다가 잡았어.”

기랑은 그러면서 쟁반을 내밀었다. 고기 맛을 본 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닭이 아닌가?”

“꿩이야. 네가 한 대로 튀겨 봤어.”

“오다가 잡았다는 게 진짜 쏴 잡았다는 거였군. 맛있는데? 꿩은 진짜 오랜만이다.”

아마 어쩌다 겨울 꿩을 보고 그 자리에서 쏴 잡은 것 같았다.

겨울에는 눈 때문에 짐승의 발자국이나 모습을 추적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겨울이 사냥철인 것이다.

기랑이 마음만 먹으면 꿩과 처지가 별다를 것도 없는 사냥감인 시준은 기랑의 말에 유의했다.

우연히 잡은 김에 가져왔다면 음식 대접은 기랑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기랑은 가져온 술을 시준과 마시고 꿩 튀김을 뜯을 뿐이었다.

시준은 그 모습을 보고 그 옛날 정약용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시준과 기랑은 같이 꿩을 사냥해서 먹던 중, 의주로 귀양 온 정약용을 마주쳤다. 세 사람이 얽힌 기나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한 모금 마시고 뻗었는데, 이제 꽤 잘 마시네.’

그러던 기랑은 조금 후에야 용건을 말했다.

“전쟁은 어떻게 돼 가?”

시준은 기랑에게 간접적으로 압박을 주지 않도록 조심했다.

“다행히 혁명군은 거의 성경부를 떨어뜨릴 태세야. 영길리와 청나라 군세도 서로 많이 꺾여서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고……. 그래서 이제 내일이면 떠날 거야. 북쪽으로 가서 군의 형세를 봐야지.”

“그래? 그러면 북경의 황제는?”

“너도 알잖아. 지금 혁명군이 산해관을 뚫을 수는 없어.”

“방금 영길리 군도 거의 꺾였다며? 그럼 그걸 누가 하는데? 중화 혁명당은 너무 멀리 있는 데다 병사도 정예하지 못하고.”

“그건 여러 가지로 생각 중이야. 네가 마음 쓰지 마.”

대화를 너무 서둘러 마무리하려다 퉁명스럽게 말해 버린 시준은 기랑의 표정을 보고 황급히 덧붙였다.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더 위험한 일은 할 필요 없다는 뜻이야.”

기랑은 술잔 대신 술병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시준이 눈을 크게 떴다.

술병을 쾅 내려놓은 기랑의 입에서 뜨거운 기운이 새어 나왔다.

“내가 북경의 아라사 장군(베니그센)에게 갔다 올게.”

피하려 했던 주제가 나오자 시준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기랑은 자신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준에게 반대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소반을 사이에 둔 채 상체를 숙여 시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준의 옆얼굴에 손을 얹었다.

그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자기 한 몸 지키는 데에는 충분한 소양을 가진 시준조차도 전혀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만약 기랑이 시준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면 지금 시준은 죽었다.

시준은 자기가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곧 이유를 깨달았다.

기랑이 명백한 강탈자의 어조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할 사람 나밖에 없잖아. 왜 더 말 안 하고 쫓아내려 했어? 내게 더 이상 안 받고 너도 안 주겠다고?”

시준은 침을 삼켰다.

“지금까지는 알고도 당해 줬지만 오늘부턴 어림도 없어. 나는 너한테 전부 주고, 전부 가져갈 거야.”

시준이 손가락으로 기억하고 있는 그 감각이 다시 다가들었다.

이번에는 입술로.

“이제 못 피해. 잔머리 굴리지 마. 말해 봐야 안 들을 거니까.”

어차피 시준은 더 말할 수도 없었다.

기랑은 다시 한 번, 그 어떤 재갈보다 강력한 방법으로 시준의 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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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의외지만 영국군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더 좁게 말하면 나폴레옹 전쟁이나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일관된 근대군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작중 시점에도 현역인 요크 대공 프레데릭이 그 공로자죠.

그 전에도 물론 훈련을 안 한 건 아닙니다. 허나 ‘통합 훈련’과 일관된 매뉴얼 같은 것이 미비하고, 대충 연대나 대대별로 ‘알아서’ 훈련하는 식이라 개판인 데가 많았습니다.

프레데릭은 영국군 최초의 통합 훈련 체계를 마련하고 열심히 시찰과 감시를 다녔습니다. 이러면 영국의 권율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프레데릭은 처칠과 더 비슷했습니다. 호색한에 도박광에다 사치가 심했죠(초상화 보면 대머리에 후덕해서 얼굴도 좀 비슷함). 다만 처칠과 다르게 군재는 뛰어났습니다.

2. 로미오와 줄리엣이 무도회에서 처음 서로를 만나고부터 여차저차해서 동반 자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5일이며, 그때 줄리엣의 나이는 만 13세였습니다. 로미오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지만 줄리엣보다 아주 약간 연상.

여담으로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이라 그런지 어린이용 도서 같은 데에는 배경을 그냥 영국으로 그려놓는 경우가 있는데,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부분이 그렇듯 이 이야기도 이탈리아가 배경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처음부터 스토리의 원조가 이탈리아 설화이기도 하고요.

3. 천장을 뚫고 환자를 내려 보낸다는 말은 누가복음 5장과 마가복음 2장의 일화입니다. 예수가 가버나움에 있을 때 신유를 받기 위해 중풍환자의 친구들이 지붕을 벗겨내고 환자를 침상에 매달아 늘어뜨렸다고 하지요.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환자를 문짝 째로 떠메고 지붕까지 올라갔느냐가 궁금한데(사다리 같은 걸로는 불안정하죠), 당시 팔레스타인의 전통 가옥 구조상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통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성경에는 종종 나옵니다. 지붕을 그냥 즉석에서 중장비 없이 벗겨낼 정도로 약하다면, 당연히 수리할 일이 많을 테니 계단이 필요했을 법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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