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58화 (258/284)

258화

87. 대륙은 붉게 뒤덮이고(2)

도광제가 영국에 집중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원래 역사의 그 자신과 같다.

아편전쟁 때처럼 영국은 난징, 정확히는 그 옆 진강현(鎮江縣, 현대의 전장 시)의 대운하-장강 합류부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왜 대항해시대가 없었는가?

간단하다. 중국은 그 자체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깥의 바다로 나선다거나 하는 것은 개념 위반이다.

황제, 다시 말해 신의 손이 미치지 않는 바깥 같은 건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수로가 필요하다면, 바다를 중국 안으로 가져오면 된다.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실질적으로도 그랬다.

당시 화북을 정치적 중심지로 놓고 보았을 때, ‘진출’과 ‘무역’하기에 강남보다 더 인구 많고 부유한 곳은 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없었다.

중국인은 세계를 딱히 안 뒤져보지 않았느냐고? 아니다. 대운하를 사실상 완성한 영락제는 바다 쪽으로도 충분히 뒤져 봤다. 정화의 함대는 명백히 동아프리카까지는 갔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인도, 아랍과 동아프리카까지 갔으면 당대 문명이 있다는 세계는 대충 다 알아본 거다. 유럽은 이때 몽골족에 의해 모스크바가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실증적으로 해 보고 안 될 만하니까 포기한 것이다. 최대의 수확이 기린 정도인데 뭘 더 시도해 보겠는가.

배는 강남과 강북을 오가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풍랑을 예측하기 힘든 데다 해안 왕복이 한계인 바닷길보다는 강을 따라 운하를 파는 게 낫다.

해적의 약탈에서도 보호할 수 있고, 관이 확실히 장악하여 물류와 국익을 곧바로 연결할 수 있는 등 – 중요하다. 대항해시대 대부분의 기간 그 항해와 국익은 잘 연결되지 않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수여받고도 망한 포르투갈이 좋은 예시다 – 장점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 한 문명의 흥성과 쇠망에 필적할 만한 시간과 자원이 들어간다는 건데, 그건 중국 황제에게 그다지 큰 문제가 안 된다.

신민 수백 수천만의 시체를 쌓아올려 운하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만한 가치도 해 주었다. 심지어 21세기에도 이 운하는 기능한다.

중국은 바다 따윈 없어도 된다. 그래서 도광제도, 그리고 전의 청 황제들도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고 천계령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운하가 없으면 안 된다. 중국 물동량의 75%를 차지하는 경항대운하가 멈춘다면 청은 망한다.

도광제는 과거 사천에 원정 갔던 장인의 군대 약 8만으로 하여금 급히 귀주와 광서를 통해 돌아오게 했다. 또한 하남, 산동은 물론 직례의 병력까지 대거 남하시켰다.

성경부에서는 아직 병사가 오지 않았지만 그걸 기다릴 새는 없었다(도광제는 두 장군이 자기 명령을 무시하고 있는 중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했다). 일단 있는 병력으로 영국을 저지해야 했다.

***

청군 수뇌부의 예측은 영국이 대만 점령을 선언했을 때부터 대체로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본래 영국이 적은 병력으로 이길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 즉 수도 급습을 택하리라 여기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자기들이 해 봤으니 상상하기도 쉽다. 그렇게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몇 년 전 로드 암허스트 또한 곧바로 천진을 거쳐 북경을 기습했다.

그래서 전쟁 초기, 청의 병력은 주로 직례 부근에 몰려 있는 상태였다.

사실 나쁜 방법도 아니다. 그래서 아시아 주재관 존 레디 역시 그 방안을 권고했다.

허나 토마스 코크란 제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신은 아시아에 오래 있었으면서도 모르시오? 황제만 체포하면 지방군이 복종하리라 여기는 거요? 한 번 모인 군대는 아무 명분 없이 해산하기 어렵소.”

“황제의 명령이 있다면…….”

“중국인들이 다 바보인 줄 아나. 체포된 황제의 명령을 누가 듣겠소? 만약 듣는다면 그건 처음부터 싸우기 싫어서이지, 황제의 명령이 있어서는 아니오. 그 수비를 뚫고 설사 페킹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지방의 장군들은 왕당파(근왕병)의 명분을 내세워 몰려들 거요. 아마 우국충정이 아니라 차기 황제에 대한 욕심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우리를 치려 한다는 점은 같소. 그러면 탈환당하는 건 시간문제야.”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어떤 방법으로 황제가 나와서 협상 테이블에 앉도록 만들 수 있소?”

답답해하는 존 레디 앞에서, 토마스 코크란은 이제 떼어놓지 못하게 된 고려 담배를 탁탁 털었다.

“중국은 양쯔강 이남의 곡물 생산에 크게 의지하고 있소. 전쟁 이상의 손해를 보게 해 주면 되오. 우리 본거지인 포모사(대만)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질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천계령이 내렸다 한들, 해안 주민이 정말로 한 명도 안 남기고 다 철수한 건 아니다. 이 짧은 시간에는 현대 중화인민공화국도 그 사업을 문자 그대로 완수하지는 못한다.

영국군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주민을 잡아들여 ‘민간인 노동력으로 고용’했다. 영국은 어디까지나 노예 매매를 금지하는 문명 선진국이니까.

보수도 확실하게 지불했다. 목숨보다 비싼 건 세상에 없으므로 누구도 영국군이 임금을 헐하게 쳐 주었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같이 약탈한 전리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노동력은 많이 확보했다. 토마스 코크란은 상하이에 영국군 2만을 뒷받침할 만한 시설들을 건설하고, 조금씩 진지를 구축하며 서진했다.

운하 점령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전진이었다. 그러나 그 전진은 별로 빠르지 않았다.

고려와 마찬가지로 영국도 서두를 이유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남공철의 생각대로 해적 놈들이 자기 손해 봐 가며 공화국 좋은 일을 해 줄 이유가 없다.

코크란 제독은 그 점을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이 방안에는 한 가지 더 좋은 점이 있지.”

“그게 뭡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중국과 협상을 원한다는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중국 수도를 직접 위협하는’ 공화국에 집중하도록 만들어 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소.”

영국도 현재로서는 자기들이 더 중국의 적대감을 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도광제의 국토 연성진은 코크란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아무래도 총독 퍼포먼스가 좀 지나치게 먹혔던 모양이었다.

따라서 수도 급습 등 군주권에 당장 위협이 가는 행동은 자제하고, 그들의 의도가 일단은 협상에 있다는 신호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면 황제도 마음이 바뀔 것이다.

그리고 황제만 마음이 바뀌면 충분하다.

이 나라는 전제 군주국. 모든 것이 황제의 소유물이다. 황제 한 사람만 상대하면 되니까 협상이든 강탈이든 방법론은 간단해진다.

존 레디 역시 그쯤 듣고 보니 더 할 말이 없었다. 토마스 코크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야 할 곳은 전방이 아니라 오히려 후방이오. 항저우로도 별동대를 차출해야겠군. HMS 워스파이트(Warspite)와 호위함 두어 척이면 충분하겠지. 중국인들이 만들어 줄 참호와 목책으로 상하이를 굳히면서, 여기와 항저우를 거쳐 포모사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튼튼히 하며 저 개미떼 같은 중국군을 기다리는 게 정석이오.”

“직접 가시려고요?”

“그래야지요. 항구에 대한 공격이라면 아쉽게도 나보다 더한 전문가가 없군요.”

실제로 토마스 코크란은 함대전보다는 항구 습격, 제한적 상황에서의 육상전, 기습 나포(나폴레옹 전쟁 중 배가 급히 필요하자 지나가는 미군의 배를 나포했다) 등에서 더 많은 전과를 쌓았다.

영국이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만 그를 중국에 보낸 것은 아닌 셈이다.

어차피 중국에서 거대한 함대가 서로 맞부딪쳐 전쟁을 할 일은 없으니 코크란 제독의 소질은 딱 적당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본격적인 육상전이 되면 역시 육군의 몫이다.

코크란 제독은 항저우 공격 준비를 하는 김에 원정군 육군 총지휘관 닐 캠벨 대령을 호출했다.

“상하이의 방어와 중국군에 대한 요격을 귀관에게 맡기겠다.”

“전장(진강현)의 운하를 중국 돼지 놈들의 시체로 메워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곤란하지. 동인도 회사의 통치에 어려움이 있을 테니.”

코크란 제독의 의도대로 존 레디는 부채감을 느꼈다. 그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동인도 회사군이 인도에서의 일로 큰 도움이 못 되어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그러나 국왕 폐하에게 봉사하는 마음이라는 점은 같소. 시크교도들을 고용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현재의 영국에는 그 유명한 시크교도 창기병연대가 없다. 시크교도들은 아직 영국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시끄러운 일은 있지만 인도 거의 전역이 동인도 회사에게 무릎 꿇은 이 상황에서, 시크 제국은 고고하게 남아 있었다.

당연하다. 시크교는 디지털 인도가 낳은 최강의 전투종교다.

소도 먹고 돼지도 먹어 마음껏 근육을 키우는 그들은 수평도처럼 모든 인류의 평등함을 주장했다.

다만 이쪽은 전부 평등하게 죽여주겠다는 뜻이다.

무술 단련이 종교 교리인 만큼 이들은 언제나 칼을 차고 다니며 모든 1을 0으로 만들어 줄 준비 만반이다. 평화롭던 시크교의 수장을 쓸데없이 죽여 이들의 흑염룡을 깨워버린 아우랑제브 황제가 잘못했다.

나중의 시크 전쟁 때는 영국마저 ‘혹시 이러다가 지는 거 아냐?’ 수준까지 몰아붙일 정도로 강력한 위용을 보일 터이나, 아직은 몇몇 무용담으로나 영국에 알려진 수준이다.

(지금 당장은 없는) 동인도 회사의 군사적 가치를 증명하려던 존 레디의 군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켰다.

캠벨 대령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원정군에 포함된 제9창기병연대[9th Lancers]는 그런 야만 족속들과 비교를 불허하는 정예군이오. 다른 군사를 지휘할 것도 없이 그들만 가지고도 중국군을 모두 찔러 죽여버릴 수 있소이다.”

재미있게도 제9창기병연대는 나중에 왕립[Royal]이 붙어 시크교도들과 혈전을 벌이고, ‘영국 기병대가 동양에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의 이상’이라는 칭송까지 받는다. 지금 캠벨 대령이 호승심을 느낀 이유도 미래의 어떤 예감 때문인지 모른다.

부하의 의욕 고취와 뻔뻔한 동인도 회사에 대한 경고라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한 코크란 제독은 느긋하게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제독은 이것으로 가볍게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뒤, 캠벨 대령은 진짜로 제9창기병연대 하나만 이끌고 25만 중국군 앞에 나섰다.

***

남경과 진강은 굳이 따지자면 강남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장강 자체의 도시다. 두 도시의 생활권과 경제권은 장강 남북 전체에 걸쳐 있다.

따라서 이 도시들을 효율적으로 수비하려면 강의 남북 양안에 모두 군사를 배치해야 한다.

청군 역시 자기 땅인 만큼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강 남쪽엔 이쪽 지리를 잘 아는 옛 항주장군 서명아가 8만 대군을 이끌고 주둔했고, 강 북안에는 도광제가 각지에서 소환한 17만의 팔기와 향용이 도착했다.

캠벨 대령은 말 위에 앉은 채 느긋해 보이는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았다.

“많군.”

본래 그는 러시아 조국전쟁에도 참전한 몸이다. 유럽의 중국과 유럽의 몽골이 부딪쳤으니 규모가 작을 리 없다.

닐 캠벨 대령이 이제 와서 25만 정도에 위압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캠벨 대령이 참전한 전투에서는 대부분 분명히 이쪽 편 숫자가 더 많았다.

그리고 상대편은 보고보다 많이 적었다. 나폴레옹의 군대를 가장 많이 죽인 건 오는 길의 티푸스와 기강 해이로 인한 비전투 손실이었으니까. 하여간 중국 황제 아니랄까 봐 나폴레옹의 칠십만 대육군 운운은 부풀려진 감이 꽤 있었다.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진짜 25만 대군’을 ‘한 자리에서’ 본 닐 캠벨 대령은 식은땀을 흘렸다.

여기서의 방점은 25만이 아니라 대‘군’이다.

저들은 로드 암허스트가 상대했다는 민간인 무리가 결코 아니었다.

중국군의 군사 체계는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그다지 깊이 공부하지 않았지만, 망원경에 비치는 질서정연한 깃발이며 오가는 사람들의 움직임만 봐도 노련한 군인은 알 수 있다.

저들은 각자의 임무를 빈틈없이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 임무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도시만 한 이 군세를 작동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중국 수천 년의 정교한 체제를 얕봐서는 안 된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 또한 병사들의 사소한 임무와 상벌까지 모두 법규로 문서화된 체계가 갖춰져 있다.

장수가 한마디 하면 병사들이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는 따위는 군담에서나 사람들 이해하기 쉬우라고 쓰는 방식이다.

혁명군도 초창기를 제외하면 그런 원시적 패싸움에서는 탈피했다. 진짜 군대는 이렇다.

도광제가 부친의 무한금고로 일궈낸 빛의 군대였다.

해적 어둠군대의 지휘관 닐 캠벨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맹수를 노릴 때는 보통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한다.

총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건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총이기 때문에 이 방법을 쓴다.

자고 있는 틈에 총을 모르는 맹수에게 막대기를 들이댄다. 이상한 기운을 느낀 사자가 일어나더라도 당장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다음 순간이면 끝이다.

로드 암허스트가 중국을 사냥한 방식은 사실 이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그 사자가 완전히 죽지 않고 달아났다가 다시 사냥꾼을 마주친다면 어떨까?

자고 있는 사자는 쉽게 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사자가 갈기를 곤두세우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면?

과연 알량한 총 한 자루 믿고 목숨을 담보로 그 앞에 설 수 있는가? 고양잇과 맹수의 쇄도는 어지간한 인간이 방아쇠를 당기는 속도보다 빠르다.

닐 캠벨 경은 그것을 감지했다. 그는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말을 돌렸다.

“정찰은 끝났다. 돌아가자.”

용맹한 제9창기병연대병 중 아무도, ‘잠깐, 아까는 보나마나 왕창 모여서 허둥지둥대고 있을 중국 놈들 외곽 진지를 기습해서 노예 좀 잡아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반문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예병이기 때문이다. 정예병은 지휘관의 명령에 의심 없이 따를 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저 몽골 군단에 들이받기 무서워서가 아니다.

창기병연대는 실로 정예병답게 신속정숙히 퇴각했다.

그리고 닐 캠벨 대령은 그때부터 진지하게 방어 전략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공격이 아니다. 방어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

성경 장군과 길림 장군이 주변 병사를 전부 모아 남하했을 때, 그들이 봉황성 북쪽에서 만난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진법을 펼쳐 놓은 혁명군이었다.

먼저 여기 와서 준비한 것은 혁명군 쪽이다. 따라서 그들은 공격과 방어 중 어느 것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두 장군은 주로 지친 청군에 대한 공격 쪽의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병사들의 속도를 늦춰 가며 군세를 정돈했다.

그런데 혁명군이 늘어선 모양은 돌격 대형도, 층진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어진이라고 하기도 뭣했다.

방어라면 그들이 영고탑에서 보여주었던 방진이 가장 적절할 터. 그 치가 떨리는 위력은 길림 장군 부준이 증언해 줄 수 있다.

하지만 혁명군은 좌우로 길게 벌려선 채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군사에 그리 밝지 못한 송윤은 처음에 혁명군이 예상보다 엄청나게 많은 줄 알았다.

하지만 곧 부준이 그것을 정정해 주었다.

“저들은 기껏해야 대여섯 줄……. 아니, 두세 줄일 수도 있겠군. 아무튼 그렇듯 얇게 벌려서 있소. 층진이나 첩진(疊陣)이라면 마땅히 뒤에 여러 겹의 살수와 마군을 세워야 하는데.”

“이 사람이 보기에는 싸움이라기보다 그냥 누굴 맞이하려고 서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소. 장군께서도 모르는 진법이라는 말이오?”

“잘 알지는 못하겠으나, 생각은 짐작할 만합니다.”

“어떤 것이오?”

“저들은 모두 서양 총과 화포를 가지고 있소. 따라서 쏘는 것을 장기로 삼지. 열 명이 한 줄로 서면 앞의 한 명밖에 총을 못 쏘나, 그들이 벌려서 있으면 열 명 모두가 총을 쏠 수 있는 법이오. 저놈들은 단번에 많은 화포를 놓아 우리를 진멸하려는 것이 분명하오.”

이 시대에는 선형진이 그리 참신한 생각도 아니니 그 정도를 추론하는 것이 놀랍지는 않다.

설명을 들은 송윤은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하다면 우리 역시 병사들을 벌려 세워…….”

“안 될 말씀이오. 진법이라 함은 평소에 항시 조련해야만 비로소 싸울 때 묘용을 발휘하는 법. 익숙하지 않은 수법으로 상대하려 하다가는 낭패를 보게 되오이다. 저들의 군세는 정예하고 화포는 강성하오. 우리가 약간 숫자가 많다 하지만 그것만 믿을 수 없소.”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부준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혁명군이 상당한 고민 끝에 저 대형을 선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영고탑에서처럼 방진 여러 개를 이루지 않았다. 봉황성에서 오녀산성으로 가는 길은 서쪽 요동 벌판과 달리 꽤 좁다.

그리고 저 괘씸한 홍건적 놈들은 바로 그 길 양 옆의 산지를 끼고 진형을 펼쳤다.

이는 선형진의 최대 약점인 측후방 기동을 상당히 차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부준이 보기에도 한 가지 방법밖에 안 남았다.

“필사의 각오로 싸워야 하오. 다행히 저 진은 그 두께가 얇소. 두터운 갑옷을 두른 마군을 앞세워 쐐기와 같은 진[錐形陣]을 이룬 뒤 절대 물러나지 않을 각오로 달려들면 반드시 구멍이 생깁니다. 그렇게 적병을 둘로 나눈 다음 격멸하는 것이 최상이오.”

송윤 역시 듣고 보니 그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은 곧 니루 어전과 군관들을 통해 명을 전달했다.

이전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조선군’이 쓰는 화기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병사들로 하여금 함부로 놀라지 않게 즉석 교육이 이루어졌다.

“어지러이 쏘아대는 총탄이나 신기전 따위에는 개의치 마라. 오직 한 점을 향해 돌진하는 거다. 달리는 인마에게 명중시키기는 어렵다!”

“총포는 저들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라. 뒤에서 우리 군세도 포를 놓아 저들의 기세를 꺾고, 한편으로는 마군이 가까이서 활과 총을 당길 수 있다. 용장과 선비가 나라를 위해 의기를 떨칠 곳이 달리 어디이겠느냐?”

현재 청군이 가지고 있는 자원과 정보로는 가장 합리적인 대응이었다.

그래서 병사들 역시 일단은 안심했다. 최소한 대장들이 아무 생각 없이 싸우는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리고 혁명군의 경우, 애초에 불안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편안히 앉아서 청군을 기다린 상태였으며 무엇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혁명의 신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양군의 대치는 묘하게 차분해 보였다.

청군이 싸울 조짐을 보이자, 홍총각은 자신의 클레이모어를 높이 치켜들었다.

“정치국 결정 관철을 위해 떨쳐나선 우리 혁명 동지들 앞에 적은 없다! 동지들이여, 저 반동 놈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 만세!”

2만 명이 일제히 그 말을 받아 외치는 소리가 만주를 진동시켰다.

더 이상 기세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길림 장군 부준 역시 그 나이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의 성량으로 호령했다.

장대한 나팔 소리와 함께, 만주 최후의 팔기군 기병대가 비장한 각오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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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중국 경항대운하는 중국이 극도의 혼란에 빠졌던 20세기 초중반에도 많은 복원 노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죠. 21세기에도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졌고… 다만 이제는 옛날처럼 물류에 필수불가결한 비중까진 아닙니다. 19세기 중후반 황하가 갑자기 태산 북쪽으로 흐르는 바람에 일부 구간은 쓸 수 없게 되기도 했고요.

예전과 달라진 점을 꼽자면, 화물 말고도 강남과 강북의 ‘물’을 교환하여 황하의 유량 보충 등 치수 관련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황하의 갈수는 현대 중국에서 심각한 문제이기도 하죠.

2. 시크교도는 이때쯤부터 무굴 제국(아직 있긴 함)에 항거하며 독자적인 국가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그 뒤에는 보통 인류 국가가 대개 한 번씩은 그랬듯 영국과 싸우는데, 잘 단련된 시크교도 기병대는 영국군에게도 찬사를 받지요. 영국에 정복당한 후에도 종교는 유지하고 영국에 군사적으로 협조하게 됩니다.

17세기의 무굴 황제인 ‘세계의 정복자(진짜 자기가 이렇게 자칭 붙임)’ 아우랑제브는 이슬람 외의 다른 종교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시크교 지도자 테그 바하두르를 처형하고, 이게 시크교의 대 무슬림 저항의 불씨가 됩니다.

다만 ‘테그 바하두르가 (타 종교인) 힌두교에 대한 무슬림의 압제를 해소하기 위해 평화 협상을 하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는, 다시 말해 다른 종교를 위해 희생했다는 이야기는 출처를 의심받고 있습니다. 아우랑제브에게 처형당한 건 사실이지만, 나머지 디테일은 대체로 나중에 시크교도들이 자기네 지도자를 찬양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의혹이 짙습니다.

3. 영국 제9왕립창기병연대 역시 굉장히 유서 깊은 부대입니다. 자코바이트 반란 때 창설된 이 부대는 2차 세계대전(물론 이때는 기갑부대)까지 주요 전쟁에 모두 참전하고 1960년 다른 연대와 합병되기 전까지 무려 250년의 세월 동안 유지된 부대죠. 원래 역사라면 나폴레옹 전쟁 후 잠시 공백기인 상황입니다.

캠벨 대령이 원정군 육군 총지휘관이라서(그리고 얼마 없는 기병 전력이라서) 데리고 나왔기는 하나, 실제로 닐 캠벨 대령은 보병 출신이라 원래 여기 연대장이었던 건 아닙니다.

4. HMS 워스파이트는 나폴레옹 전쟁에도 참전했던 76문 탑재 3급 전열함입니다. 1817년에 (재)취역하고 한참 있다가 서인도 제도에서 활동하나, 지금은 바로 중국에 와버렸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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