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87. 대륙은 붉게 뒤덮이고(1)
이번 시준의 한양행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단순히 인민내무군 창설만이 목적이었다면 전쟁 사업 도중 남하할 이유로는 부족하다.
전시에 가장 중요한 후방 단속.
전체적인 목적을 따진다면 그랬다.
시준은 서울에서 인민내무군 외의 몇 가지 볼일을 보고 단전성까지 내려간 다음 평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때쯤이면 만주 전선이 대강 정리될 터. 만약 혁명군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면 시준은 봉황성이나 그 북쪽까지 나아가 혁명군을 격려하고 필요하다면 지휘 판단도 하게 된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만약 혁명군이 패배했다면, 수도 기능을 한양군이나 단전성으로 옮겨야 한다.
바로 그러한 ‘만약’을 준비하는 것이 시준의 역할이었다.
그래서 우선 옛 수경포도청 터에서 인민내무군의 창군식을 진행하던 시준은, 헛기침을 하는 김시택을 보고서야 자신이 뭘 실수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저편에 태연히 앉아 있는 기랑을 자꾸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는 괘씸할 정도로 아무 표정이 없었다.
시준은 지금까지의 업보를 되돌려 받는 줄도 모르고 그저 화가 났다. 하긴 원래 가해자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잘 모른다.
‘흥. 돌아가면 지유에게 다 불어 버릴 테다. 내가 먼저 말해야 의심을 안 받겠지.’
시준은 그렇게 두 여자의 우정을 파괴하려는 결심까지 서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눈 얘기를 모르는 시준 혼자만의 가련한 결심이었지만.
도대체 주석 동지가 뭐에 정신을 팔고 있는지 알 수 없던 김시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주석 동지?”
“아! 어, 어흠. 실례했소.”
시준도 이제 능숙한 정치인이다. 그는 고민을 잠시 접어 두고 식을 진행했다.
김시택에게서 자기가 갖고 다니던 붉은 깃대를 받은 시준은 그것을 인민내무군 총사령관 이택규에게 내밀었다.
“이 깃대는 한양군의 혁명 열사 김유근 동지의 것이오. 김유근 동지는 부귀와 가문과 사심을 모두 버리고 오로지 한성 인민의 혁명을 위해 앞장섰던 바 그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놓지 않았던 이 적기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신념 그 자체올시다.”
시준은 일부러 ‘한양군의 혁명 열사’ 부분을 강하게 발음했다.
혁명에 있어 김유근은 한양의 자존심이다. 그가 있기에 이 한양에도 반동만이 아니라 의인 있음을 증명할 수 있었다.
나와 있던 한양군의 유지, 그러니까 구 남조선혁명당 한성지부 당원들은 눈물마저 글썽였다.
괘씸한 놈들이 ‘반동의 소굴 한양은 이제 끝났다’ 따위로 떠들어대는 말을 참아야만 했던 치욕도 오늘로 끝이다. 주석 동지는 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해 준 한양군 인민을 잊지 않았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사령관 동지에게 이것을 위임하리니, 동지께서는 한편으로는 이 펄럭이는 적기처럼 혁명을 좀먹는 인민의 적을 단호하게 처단하되, 한편으로는 이 굳센 깃대처럼 인민이 기댈 수 있는 지팡이가 되어 주시오.”
이택규는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대신 열정적으로 두 팔을 내밀며 대답했다.
“이 깃대에 묻어나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처럼 언제까지나 정의롭게! 공화국 인민의 총의를 대표하는 주석 동지의 명을 기어이 완수하고야 말겠습니다!”
이제 공화국 사람에게 완전히 익숙해진 환호의 표시인 박수갈채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다만 시준은 기랑에게 말한 것처럼 어디까지나 축하 손님이기 때문에 그것이 공식적 상징은 아니다.
그저 주석이 주는 신뢰의 표시인 것이다. 인민내무군은 어디까지나 중앙인민회의 내무위원회의 지휘를 받는다.
그래서 공식 깃발은 내무위원회 위원장이며 평안도 인민위원장인 조흥진이 본(本) 축사와 함께 다시 수여했다.
언제 어디서나 날카롭게 사방을 지켜보라는 의미로 해동청(海東靑)이 그려진 적기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주석 동지가 줄 때보다는 환성이 덜했다. 조흥진도 당연하다고 여겨서인지 그다지 섭섭해하지는 않았다.
인민내무군의 충원은 간단했다. 먼저 한양군, 그리고 각지 상조농장이며 공창이나 면직소 등등에서 민간 치안을 담당하던 전위대들이 거의 그대로 편입될 예정이었다.
문제라면 지금까지 자원봉사나 이웃 간의 소소한 성의 표시로 끝났던 전위대 보수를 이제 공식적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어쩔 수 없다.
중국과의 거래가 전쟁으로 끊기는 바람에 살림은 더욱 쪼들렸지만 그렇다고 미룰 수도 없는 일. 대도시부터 차근차근 진행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류큐의 설탕을 조슈에 – 조슈 사람들은 사쓰마를 엿먹이기 위해 기꺼이 설탕을 사 갔다 – 팔아 얻는 돈과 영국 함대에 식수나 곡식 바가지 씌운 대금이 다시 풀렸다. 일전 정약용이 곡식 선물 팔아 보낸 대금 일부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또 전위대를 만드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이제 전위대가 인민내무군의 허가 없이 치안 핑계로 폭력을 행사하면 불법이 된다.
이것은 그저 전시 후방 안정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동안은 시준도 알다시피 전위대를 중심으로 한 자경단 수준의 지역별 치안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법 역시 인민재판이 아직 주류이기에, 솔직히 말해 형평성이나 일률적 공정성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개판이었다. 전쟁이 아니라도 이건 시정이 필요했다.
혁명군의 경우 군대라는 특성상 심각한 사안이 아니면 움직일 수가 없다. 공화국의 일반치안 권한을 집중시킨 인민내무군의 창설은 이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해 준다.
국가를 영토 내의 폭력을 독점한 존재로 정의한다면, 이제야 공화국은 진정한 국가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시준은 그런 사항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한참 안절부절못하던 국가보위총국장 방우정은 드디어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주석결사옹위대 병사들을 헤치고 다가왔다.
“주석 동지. 염려 마십시오.”
“뭘 말이오?”
“지금 자꾸 대열 바깥을 곁눈질하시는 것은, 혹시 괘씸한 반동분자가 주석 동지를 감히 해할 마음을 품을까 걱정되셔서가 아닙니까? 이곳은 반동의 기운이 강하게 서려 있는 한양군이니 아무래도 그러실 만하지요.”
시준은 흠칫했다. 자기가 자꾸 기랑 쪽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였다.
사실 한양군을 무대로 활동하는 조선공장회 회장 정대운이 이런 행사에 빠질 수가 없어서 노구를 이끌고 참석했고, 그래서 그에게 볼일이 있는 기랑도 자연스럽게 시준의 행보를 따라다니게 된 것이지만 시준은 알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다행히 방우정은 인민내무군의 창설 때문에 위협받는 자기 자리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 있게 장담했다.
“그러나 보위총국은 오래전부터 이 일을 해왔던 터라, 지금 막 생긴 인민내무군에 비할 바 아닙니다. 다 손을 써 놨지요. 지나가는 구경꾼 하나까지 미리 빈틈없이 수배해 놓은 사람입니다. 앞으로 주석 동지의 발길 닿는 곳 주변에는 그 어떤 불온한 적도 없을 것입니다.”
시준은 방우정에게 감사했다. 그가 시준의 어처구니를 날려버리는 바람에 냉정을 좀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무슨 상관이냐? 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친구끼리 다치면 손가락 좀…… 뭐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기랑이가 갑자기 쓰러지면 내외한답시고 CPR 거부하진 않을 거잖아?’
현대인처럼 생각한다고 그 말도 안 되는 자기기만이 합리화되는 건 아니다.
시준도 그걸 알아서 그런지, 평소라면 그 정도에서 떨칠 수 있었을 상념이 자꾸 떠돌았다.
‘그런데…… 만약 기랑이가 예전 영변도호부에서처럼 다시 직구로 그러면 어쩌지? 어떻게 피해? 젠장, 여태 가만히 있다가 왜 요새 자꾸 그러는 거야? 무슨 일 있나?’
시준의 윤리는 주로 타인에게서 비롯한다.
자기를 기다렸던 지유를 위해 왕의 목을 쳤다. 자신을 묵묵히 도와준 기랑을 위해 전쟁 계획까지 변경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해, 팔자에도 없고 취향도 아닌 혁명의 기수가 되어 있다.
이타적이라기보다는 부채감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안정적이라는 것은 불안 요소가 없는 것. 다시 말해 빚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간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기초까지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불쑥 솟아오른 다음과 같은 질문에 시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만약, 이게 지유가 권한 일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아무튼 그런 고민을 길게 할 새는 없었다. 시준의 일은 아직도 많다.
폐허가 되었던 창덕궁과 경희궁, 그리고 종묘와 사직단은 자투리 땅이라도 아쉬운 한양군 특성상 그 부지를 잘 써먹어 보기로 결정되었다.
갈아 엎어버리고 농지로 만들자는 의견이 꽤 거셌지만 기왕 해 놓은 토대나 주춧돌을 전부 무로 돌리는 것도 상당한 난관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한양군 인민위원회 사무실이나 임시 야학 등으로 전용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가난했다는 인식과 달리 조선의 궁궐 면적은 그렇게 작지 않다.
특히 최속군주가 그의 위업을 증거하기 위해 파괴되다 만 상태로 남겨 놓은 경복궁의 경우 정궁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규모를 자랑했다.
그 면적은 자금성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건물과 시설값까지 하면 좀 다른 수치가 나오겠지만 일단 조선의 자존심을 위해서는 여기까지만 말하면 된다.
인민이 분노하기엔 딱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조선이 그 역사 전체를 통틀어 중국 생산력의 절반씩이나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왕들은 그렇게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인민의 정치는 투명해야 하므로, 당시 혁명막부 공장영선국의 측량 결과는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제야 왕이 저 혼자 얼마나 넓은 땅 차지하고 살았는지 알게 된 사람들은 분개하여 팔뚝을 걷어붙였다.
“반동 군주들의 허세와 사치를 족히 해 주러 얼마나 많은 인민의 고혈이 흘렀다는 말인가!”
그래서 당시 경복궁의 광대한 부지에는 전쟁 와중 집 잃은 사람들의 ‘인민가사(人民家舍, 家舍=주택)’가 들어서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한양군이 원체 여러 가지 의미로 경원시되고 있었던 게 탈이었다.
그간 한양에서는 자원이 지원되기보다 주로 빠져나갔다.
그래서 공사도 지지부진하였는데, 공화국 정세가 좀 안정되고 2번째 총선거도 무리 없이 진행되자 2기 정치국의 중점 사업 중 하나로 선정되어 가속이 붙었다.
경복궁을 이루고 있던 자재는 다시 쓸 수 있는 게 거의 없어서 석재나 좀 골라내는 정도였다.
비원(祕苑)의 오래된 나무들까지 가차 없이 베어버린 끝에 간신히 100여 채의 다닥다닥 붙은 집이 완성되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인권의 최소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시준의 대피소 제작 지식도 약간 동원되었다.
보기에는 좀 후줄근하지만 그럭저럭 비바람은 막고 난방도 되는 수준이었다. 프라이버시 면에서는 별로 할 말이 없으나, 어차피 그건 다른 집도 마찬가지다.
다만 자기들 친한 사람 나눠주려 하던 한양군 인민위원회의 19세기식 행정은 저지되었다. 임대주택 추첨 과정에서 장난치면 민원인 뒷감당이 어렵다고 생각한 시준 때문이었다.
시준의 지시에 따라, 본래 남대문 시전에서 하던 작백계(作百契, 일종의 복권) 통을 돌리는 방식으로 입주자가 선정되었다. 모든 사람이 공정하기 짝이 없는 주석 동지의 정책을 칭송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노력이 동원된 끝에, 시준이 방문할 때에 맞춰 ‘주석 동지의 은혜로 마련된 살림집 입사(入舍)’ 행사를 열 수도 있었다.
일단 시준도 각오는 했다. 주석 동지의 은혜에 감사하는 현수막이라든지 두 손 들고 눈물을 흘리는 입주민들의 환호까지는 그 범위 안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은 그렇지 않았다.
십인지맹 제4번도 정길룡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는 한양군 일이 끝나면 단전성으로 주석 동지를 모셔가기 위해 대기하던 참이었다.
이제초만 없으면 대충 넘어갈 거라 생각했던 시준이 안일했다. 정길룡은 도저히 말릴 수 없는 기세로 강권했다.
“반동 군주의 궁궐에는 오래 묵은 요기(妖氣)가 서려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정 진인께서 친히 영력으로 내리눌러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인민들이 요사스러운 귀신에 해를 입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 단전성 동상 앞에 서서 수천 명을 상대로 기억에 남을 모병 독려 연설을 남긴 그의 패기는 시준마저 위축시킬 정도였다.
결국 시준은 정길룡이 시키는 대로 우보(禹步, 도교의 퇴마 보법)를 밟으며 경복궁 터 한가운데에 특별한 파사검(영국 기병도였다)을 꽂아야 했다.
저쪽에서 고개 숙인 채 부르르 떨고 있는 기랑 정도만 제외하고 모두가 정 진인의 도력과 위엄에 놀랐다.
이튿날은 김조순의 옛집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이 아직 헐리지 않은 이유는, 여기가 김조순의 집이라기보다는 혁명 열사 김유근의 생가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사는 사람은 없었지만 선전선동부와 한양군 인민위원회의 노력으로 이곳은 썩 잘 보존되어 있었다.
시준은 인민을 대표하여 김유근의 순사를 기리는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읊었다. 어째 점점 정치인이라기보다 교주가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제수 음식은 주변의 환과고독(홀아비, 과부, 고아, 노인)을 모아 나눠주었다. 대부분 시준이 일으킨 혁명전쟁 때문에 그렇게 된 사람들인데도, 어느새 ‘반동 군주가 저지른 재난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주석 동지’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이 정도면 한양군의 민심을 위무하는 일은 대강 마무리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시준은 단전성으로 출발할 일정을 잡아 놓은 채로 김조순의 집에서 그대로 쉬었다.
어차피 같은 한양군 안이지만, 그가 묵던 인민위원회 관소보다 조금이나마 남쪽에 있어서 여기서 출발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저녁때쯤 되자 기랑이 들어왔다.
시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주석결사옹위대 병사들을 죄다 해고해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툇마루에서 어색하게 옷깃을 만지던 시준이 물었다.
“공장회 쪽 일은 잘됐어?”
“응. 삼남에 사람들 보내주기로 했어. 너 단전성 갈 때 같이 데리고 갈 거야.”
“그래. 그런데 여기는 왜?”
시준으로서는 꽤 긴장한 채 던진 질문이었으나 기랑은 시준의 비대한 자의식을 가차없이 깔아뭉갰다.
“너 보러 온 게 아냐. 너야말로 왜 여기 있어?”
“그, 그럼? 나야 제사 지내러 왔지.”
“나도 비슷해.”
시준은 곧 기랑이 김유근의 죽음을 지켜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로서는 한 번쯤 추도의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기랑은 김유근이 마지막 순간에 누워 있던 방 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시준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
시준은 그때 문득 생각나는 사실이 있었다.
하도 떠들고 다녀서 자기도 어느새 그렇게 믿어버렸지만, 김유근의 유언은 불타는 혁명 의지의 계승이 아니었다.
그리고 기랑이 듣고 싶은지 물어봤을 때 시준은 그것을 거절했다.
내용이 뻔하고, 어차피 김유근의 유언은 필요에 따라 정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랑은 모든 일이 끝난 지금까지도 그 유언을 말해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제 볼일 다 봤다는 듯이 돌아섰다.
시준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섰으나, 기랑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등을 보인 채로 말했다.
“여자인 거 사람들이 다 아니까 이제 잘 자리 고르기도 불편해졌어. 오늘은 부녀회 관소에서 잘 거야. 광통방 근처니까 내일은 남대문에서 보면 되겠네.”
명백한 뜻이 담긴 말이었다. 시준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시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
우연히도, 그때 홍총각의 참모 역할로 따라와 있는 혁명무력부 제1부부장 남공철 역시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총참모장 동지. 미안하지만 그 정도 생각은 여진족도 할 수 있을 것이오.”
홍총각은 자존심이 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참모며 사단장들이 다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얘기한 남공철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렇소이까? 무릇 병귀신속이라 하였거늘, 이대로 북쪽을 타고 올라가 오녀산성(五女山城)을 친다면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심양이 코앞이오. 어째서 적진이 줄줄이 버티고 있는 서쪽 길을 택한단 말이오이까?”
봉황성을 점령지로 굳힌 혁명군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그대로 북쪽으로 진격해 오녀산성, 그러니까 심양 바로 남쪽에 있는 현대의 번시[本溪] 시를 뚫고 성경부에 직행하는 것이다. 홍총각의 말마따나 이 길에는 산성을 제외하면 변변한 부대가 없다.
나머지 하나는 마찬가지로 북진이지만 그보다 더 서쪽 경로로 올라가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요양(遼陽)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이 서쪽 길에는 순서대로 수암(岫巖), 우장(牛莊), 요양의 주방 주둔지가 줄줄이 펼쳐져 있다.
성경의 주방팔기는 조선의 침공 대비보다는 산해관이나 북경과의 원활한 연결을 목적으로 하는지라 주둔지가 주로 서쪽에 있는 것이다.
남공철은 오히려 그 어려운 길로 가서 청군을 순서대로 격파해야 한다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가 동쪽 길을 택한다면, 반드시 그 삼진의 팔기가 우르르 뛰쳐나와 우리의 옆을 후려치려 할 것이오. 아니면 우리가 오녀산성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뒤를 끊을 수도 있겠지. 우리가 길림 장군이 자리 비운 새에 그의 본영을 친 것처럼 말이오.”
홍총각도 어렴풋이 알아들을 만했다. 체계적으로 병법을 배운 적은 없어도 그에게는 혁명군 중 누구보다 많은 전투 경험이 있었다.
“본래 적을 남겨둔 채 진군하는 것은 우책이외다. 병자년의 호란 때 여진족은 그렇게 했지만, 그건 그때의 반동 조선은 군주만 무너지면 끝나는 나라, 암군 한 사람의 소유물이었기에 오로지 한양만 노리고 달려온 것이오. 그러나 심양을 친다고 여진 황제가 항복하겠소? 지금 혁명군의 계책에 꼭 있어야 할 것은 견실(堅實) 두 글자요.”
홍총각은 뭐라고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남공철의 다음 말은 홍총각의 이의 제기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주석 동지께서는 성급히 진군하지 말고 영길리의 동태를 살피라고 하셨소. 곧 우리를 뒤쫓아올 파발이 전해 줄 거요. 위험을 무릅쓰고 서두를 이유는 전혀 없소.”
영국이 아직 본격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힘을 다 쏟아내는 건 얼간이 짓이다.
해적을 신뢰할 수는 없다. 그들은 사세가 불리해지면 다 모른 척한 채 배 타고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홍총각 역시 얼마 안 가 남공철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 장군 송윤이 다급하게까지 보이는 속도로 남진하면서 그 사이에 있는 군을 모조리 흡수한 것이다.
성경, 요양, 우장, 수암을 거친 송윤은 그대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혁명군의 예상 진로를 가로막으며 접근했다.
홍총각이 주장했던 바로 그 길이다.
만약 혁명군이 그대로 북진했으면 뒤를 끊기거나 측면을 당했을 것이다.
송윤은 동쪽 제3사단을 방어할 심양 바로 동쪽의 흥경(興京, 허투알라) 주방만 남겨 놓고 가능한 한 모든 군대를 소환했고 그 규모는 만만치 않았다.
그 정보를 입수한 남공철은 홍총각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었다.
“어쩌시겠소? 물론 봉황성까지 물러나 유리한 성새(城塞)에 기대 싸우는 방법도 있지만…….”
홍총각은 주먹을 꺾어 우두둑하는 소리를 내었다.
“제1부부장 동지께서 나를 시험하시는구려. 혁명의 길은 오직 정면돌파전! 저 반동 여진족 놈들이 쓸어버리기 좋게 모여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본관의 일이오.”
혁명군은 기린 울라를 점거한 별동대를 제외하고 약 2만 명, 그리고 송윤과 부준이 모은 청군은 이놈 저놈 합해서 3만 정도로 추정된다.
길어야 며칠만 지나면 합계 약 5만 명의 대군이 격돌하는 것이다.
다만, 홍총각의 기세에는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되겠으나 아직도 도광제는 이쪽의 충돌 규모에 그리 유의하지 않았다.
황제는 다시 성경부에 사절을 보내 독촉하라는 명을 내릴 뿐이었다.
5만 정도는 지금 먼 강남에서 꿈틀대고 있는 대전에 비하면 국지 분쟁이라고 해도 좋았기 때문이다.
태초의 상태가 되어버린 상하이에서 그간 힘겹게 교두보를 쌓고 보급선을 마련하던 토마스 코크란 제독은, 추정 25만에 달하는 군대가 난징 남북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잇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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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흔히 고독하다라고 하지만 원래 ‘고’는 부모 없는 아이(그래서 고아라고 하죠), ‘독’은 자식 없는 노인을 이르는 별개의 단어입니다. 이 둘이 합쳐져서 외롭다는 뜻이 된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복지 대상 계층을 이르는 말이었습니다.
2. 작중 주방의 위치가 혼동되신다면 심양(성경부)를 기준으로 동쪽 흥경(현대의 센양과 푸순 사이쯤), 남쪽으로 요양(현대 랴오양 시)–우장(현대 안산 시)–수암(현대 슈엔 만족 자치현)–봉황성(현대의 펑청 시) 순으로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위치는 이해를 돕기 위한 개략적인 것입니다). 그중 봉황성은 혁명군이 점거했지요. 오늘 본문에 열거된 성경부의 주방 외의 다른 큰 주방은 모두 전장보다 한참 서쪽, 산해관 근처나 요동 반도에 있어서 언급이 안 되었습니다.
3. 오녀산성은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도 불리는 고구려의 그 성이 맞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지요. 졸본성이 이 성(혹은 부근)으로 추정되며, 이성계가 요동 정벌 당시에 점거했고 정약용 또한 이 성에 대해 연구하는 등 조선 사람들도 잘 아는 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