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86. 무너지는 근본(2)
부준은 어리석은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무익한 분노로 패배를 더 크게 확대하는 대신 질서정연하게 철수했다.
혁명군 역시 무리하게 뒤쫓지는 않았다. 적지 한가운데에서 야간 추격을 감행하기에는 혁명 정신 말고도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야간 투시경이라든지, 무전기라든지. 하여튼 지금은 좀 어렵다.
부준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적의 정예함과 계교가 실로 가볍지 않다. 나의 실책은 따로 벌을 받아야겠으나, 우선 성경 장군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일러주어야겠다.”
부하들은 이때쯤 해줘야 할 배역대로 ‘태세를 다듬고 내일 결사항전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건의하였지만, 장군 역시 그의 배역대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패군으로 이기기는 어렵다. 우리는 우선 길림의 장군아문으로 돌아간다. 저자들이 이토록 작정하고 나왔다면, 어쩌면 우리의 빈틈을 노려 그곳을 먼저 쳤을 수도 있어.”
그 예측은 정확했다. 다만 때가 늦었을 뿐이다.
곧 부준은 이미 길림 장군아문이 점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기병 하나가 총 맞은 말에서 뛰어내려 울부짖었다.
“서쪽에서 조선구(朝鮮寇)의 본군 3만이 침입! 그쪽에서 교활하게도 기린 울라가 빈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3천여의 군세를 갈라 보낸 모양이오이다!”
전령의 말은 임무를 다하자 쓰러져 거품을 품어내었다.
부준도 비슷한 꼴이 되었다. 그는 한 소리 괴로운 외침을 발하더니 말에서 굴러떨어져 버렸다.
결국 다른 방도가 없었다. 대국적으로 보자면 남은 군이라도 수습해 성경부로 직행해야 했다.
거기에서 성경 장군의 지휘를 받아 혁명군에게 맞서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정신 차린 부준은 마지막 의무감과 힘을 끌어모아 군을 서쪽으로 돌렸다.
군은 가장 가까운 근거지인 알추카(현대의 하얼빈 시 인근)로 물러났다가 크게 돌아 이동하는 – 도망친다는 말은 쓸 수 없었다 – 길을 잡았다.
그러나 그들을 따스하게 맞이해 줘야 할 성경 장군 송윤 또한 그렇게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부준이 부하들의 부축을 받아 실려가고 있던 그 시점, 송윤 역시 정말이지 말에서 떨어지기라도 해서 요양하고 싶은 기분을 절감하는 중이었다.
***
성경 장군 송윤의 군재는 길림 장군 부준에 비하면 확실히 떨어진다.
그러나 성경 장군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술안이 아니라 종합적인 행정과 외교 능력이다.
그런 면에서 송윤은 적임자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각 대학사와 여러 변방 총독을 역임하고 학문은 물론 군사와 무역에 두루 능통하여 벼슬아치로서는 완벽에 가까운 경력을 밟았다. 지위로 따지면 일국의 왕에 못지않다.
그처럼 노련한 관리로서, 송윤은 지금 북경에 원군을 요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청은 지금 사상 최강의 대해적 영길리국을 막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하며, 동시에 반란군도 신경 써야 한다.
고려인민공화국이 전쟁을 결의했을 당시 도광제의 지시는 명백했다.
말하자면 얼마 전의 넬슨 제독과 미래의 케네디 대통령이 한 말과 비슷했다.
‘국가(나)는 그대가 의무를 틀림없이 수행하기를 기대한다!’
자꾸 나라가 무슨 지원을 해줘야 한다느니 징징대지 말고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물론 송윤은 넬슨도 케네디도 모른다.
하지만 황제를 그 둘처럼 만들어 주고 싶은 심정은 비슷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
국가 정신의 근본은 만주일지라도 그 정신을 유지시키는 국부의 근본은 화북과 강남이다.
국가 대전략으로 봤을 때 영국을 우선 쫓아낸 다음 의지할 데 없어진 고려를 쓸어버리는 것이 이치에 맞다.
산해관 방어선만 잘 지켜내면 최악의 경우라도 동삼성만 잃을 뿐이라서 나중에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다.
지금 자기 앞에 닥친 일만 아니라면 송윤도 그렇게 납득해 줬을 것이라는 의미다.
송윤은 당장 총 들고 자금성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며 ‘의무를 수행했다’.
결국 황제가 이 동쪽에서 바라는 것은 장절한 전투와 통렬한 승리가 아니다. 그저 황제가 영국을 처단할 때까지만 저놈들을 막아내면 된다.
“일단 봉황성(鳳凰城)에서 힘써 막아라. 그리고 영고탑에 구원 간 마군(馬軍)을 돌아오게 해!”
돌아오긴 할 것이다. 길림 장군 및 그 휘하의 패잔병과 한 무리가 되어서이긴 하지만.
그 전부터 전운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성경 장군도 이 일대 기인(旗人)의 소집은 완료한 상태였다.
그래서 송윤 역시 마음에 약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동팔참의 선봉 관문이며 대(對)조선 접경의 전진기지인 봉황성이 아무것도 못 해 보고 함락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
역대 황제, 특히 건륭제는 동삼성 대부분의 지역을 봉금지로 지정하고 한인의 이주를 엄금했다. 심지어 유배조차 만인만 보내지 한인은 보내지 않을 정도였다.
만주족의 상무 정신을 지킨다느니 하는 핑계는 그가 황제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소리다.
건륭 치세의 명신 서혁덕(舒赫德, 슈허더)이 좌병부시랑 시절 이 일에 대해 상언한 표에서는 그 뜻이 조금 더 솔직하게 드러난다.
그는 ‘기인의 이득’을 위해 동삼성에서 한인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시대든 현명한 사람들은 한족의 전통 크릴새우 작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목적이야 어찌됐든, 건륭제의 조치는 한마디로 우유가 진공 포장되었으니 안 상하리라고 믿은 것이나 다름없다.
동삼성에서 기인의 이득을 보호한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그곳에 이득이 있다는 의미다.
황제가 뭐라고 지껄이든 한인은 계속해서 산해관을 넘어갔다. 범죄 도망자나 유민을 포함한 이들은 감시가 엄한 성경부 인근이나 진짜 황무지인 만주 동북부를 피해 길림성 남부에 주로 정착했다.
이들은 조선 사신 상대로 장사를 하기도 하고, 시준이 예전 기랑과 단둘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겪었던 것처럼 국경지대에서 다양한 불법 영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봉황성 수위 주개가(周凱歌)가 본 것은 고려군이 아니라 바로 그 한인의 무리였다.
***
몇 명인지 세기도 힘든 떼거지가 봉황성 앞에 몰려와 있었다. 주개가는 자기 수염을 잡아당기며 애달프게 호소했다.
“저놈들이 대체 왜?”
“아마 백성을 화포와 궁시 앞에 내세워 방패로 쓰려고 끌고 온 것 같소이다!”
그 설명은 그럴싸했다. 성벽 위의 장병들은 모두 의기충천하여 저 악랄한 조선놈들을 욕했다. 하긴 근묵자흑이고 초록동색이라. 영길리와 어울리는 나라가 어련하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애석하게도 혁명의 대의를 깊이 파악하지 못한 설명이었다.
물론 남공철도 귀중한 혁명군의 목숨을 봉황성처럼 끔찍한 지형의 산성에 들이박아 다 소모할 생각이 없었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길림성에 불법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을 모았다.
예전에는 만상 신디케이트가, 그리고 요즘엔 정찰총국이 여전히 남만주 어둠의 경로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것은 쉬웠다.
그가 압록강을 넘자마자 기린 울라의 공백을 파악하고 급하게 별동대를 차출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아무리 불법 거주라고 해도 사람 사는 사회이므로 지역 유지나 가장 같은 것은 다 있다.
남공철은 그들 앞에서 연설했다.
“오족공화와 하나의 중국을 지지하는 우리 공화국은 반동 여진족과 그에 부화뇌동하는 끄나풀 외엔 해치지 않는다. 주석 동지께서는 이미 약속하셨다. 공화국에 삿된 뜻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세계공의(인터내셔널)의 대의에 따라 투쟁에 참여하는 바로 그때부터 그대들은 우리 동지이며 반동의 땅 전부는 동지들에게 수평하게 분배될 것이다!”
물론 한족의 숫자가 크릴새우 같은 거지 두뇌가 크릴새우 같은 게 아니다. 목창이나 농기구 따위 덜렁 들고 청군과 격돌하는 데 따라오라는 말에 선뜻 나설 리가 만무했다.
그렇게 침묵만이 흐르던 와중, 남공철은 갑자기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누구인가? 지금 어떤 자가 그 안에서 ‘옛날부터 사행길에 도적질이나 일삼던 조선 놈들은 믿을 수 없다’라는 반혁명적 언행을 하였어?”
맹세코 아무도 그런 구체적이고 사실에 입각한 비난은 듣지 못했다.
그러나 남공철은 자신이 연행길 정사까지 맡았던 경력을 역설하며 중국어에 능통한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주석 동지가 과거 아오지 탄광을 평양에 앉아서 발견할 정도로 돌과 산마저 꿰뚫는 관심법을 자신에게 잠시 빌려주었다는 주장은 덤이었다.
끝내 그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나섰다.
“조선에서 요사스런 방사가 날뛰어 상하가 뒤집혔다는 말은 들었으나 정말 눈 아래 사람이 없구나! 번방으로서 대국의 신민을 이토록 핍박하고 무사할 것 같은가!”
바로 남공철이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남공철은 군중이 미처 그자에게 호응하기도 전 재빠르게 움직였다.
“저놈의 머릿속에 반동이 가득하구나! 전위대! 전위대 동지들은 무얼 하는가!”
여전히 혁명의 전위를 자처하는 2영대, 그러니까 지금은 제2사단 1영대가 되어 있는 홍총각 직속 장병들이 나섰다.
그리고 고려 국경 밖에서 처음으로 혁명작두가 시연되었다.
주민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이제 이 지역 장정 전부를 합쳐도 상대가 안 되는 숫자의 무장 병력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청군이 그들을 구해줄 의지도 없겠지만, 있다 해도 청군이 오기 전에 그들은 확실하게 죽는다.
하지만 남공철은 ‘이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따라와라’는 둥의 유치한 협박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혁명작두와 시체를 치우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반동에 맞서 투쟁하여 생지당권을 되찾을 자가 없는가? 가슴 아프지만 병사의 진군에 있어 뒤쪽에 우환을 남길 수는 없는 법. 그대들이 진실로 반동 임금의 치하에서 수평도를 얻지 못하고 힘겹게 썩은 배를 떠받치는 일을 택하고 싶다면, 우리는 탄식하면서도 그대들을 장성 서쪽으로 보내 주리라.”
합류하지 않을 거면 여기서 나가라는 소리. 그리고 이 겨울에 터전을 떠나라는 말은 찔러 죽인다는 협박보다 더 무서웠다.
허나 남공철이 일부러 같은 소릴 길게 말한 것은 이유가 있다.
사람에게 자기 합리화는 언제나 소중하다. 협박받아서 내몰리는 것과 땅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겠는가?
어차피 청은 이들을 신민으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성경 장군의 임무는 군사령관보다는 국경 수비대장에 가깝다.
국경이 곧 전선(戰線)인 항재전장의 한국인들에겐 낯설지만 군대와 국경 수비대의 기능은 다르다. 조선으로 도망치거나 조선에서 도망친 범죄자의 체포 및 송환이 주된 업무였다.
그래서 이곳은 성경 장군이 실적 필요할 때마다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사냥터에 불과했다.
이제 와서 본토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그래도 옛날보다는 여기가 낫다며 스스로 위로하고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울타리와 주인을 부숴버리지 않고 그저 그 둘에게서 도망치기만 한 양떼가 뒤집어써야 할 대가였다.
그러나 지금 조선인들은 애초에 목장뿐만 아니라 주인집까지도 다 너희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이 약속을 지킬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그들은 청이 한 번도 한 적 없는 약속을 했다.
너희들은 이제부터 사냥감이 아니라는 것.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사냥꾼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길림성 인민들은 깨달았다. 저 포청천도 도망칠 끔찍한 작두 때문은 아니고, 생각해 보니 예전부터 혁명이 한번 해 보고 싶었다.
그들은 기꺼이 중화 인민 해방의 대열에 합류했다.
***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냥 백성의 무리다.
전력에 큰 도움은 안 된다. 특히 공성전이라면 더욱 그렇다.
몽골족이라면 즉각 떠올릴 인간 방패는 혁명의 이념이나 윤리 이전에 공감대 형성의 시간이 부족해서 곤란했다. 그건 적어도 칭기즈 칸 정도의 실적을 보여 줘야 포로들도 찬성하고 방패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 봉황성은 천 년도 더 된, 즉 천 년 전의 사람도 알 수 있을 만큼 명백히 유리한 지형에 지어진 요새다.
봉황성 수위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전원 순절의 각오로 싸운다면 저 민간인 무리에 고려군까지 뭉쳐 몰려온다 해도 능히 지킬 수 있다.
어차피 작렬탄이 개발되기 전의 대포라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서 고려군의 포로 성벽을 무너뜨릴 순 없다. 이성적으로는 못 지킬 요인이 없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렇다.
허나 원래 대포로 성벽을 무너뜨려서 이긴 공성전이란 건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메흐메트 2세가 통 크게 지른 우르반 대포는 인상적이지만, 콘스탄티노플 성벽이 포탄에 무너져서 뚫린 건 아니지 않은가.
대포는 돌과 나무를 부수는 무기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을 부수는 무기다. 세계대전 당시 참호에 있던 병사들은 증언해줄 수 있을 것이다.
주위에 백성들을 죽 벌려 세워 포위한 채, 혁명군은 ‘사격 연습’을 개시했다.
혁명군이 이제 조지 없이도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하는 16킬로그램 혁명포를 시작으로 가지각색 혁명의 주체적 무력이 불을 뿜었다.
이 중에는 중소구경의 작은 포도 많았다. 기랑의 지휘하에 고총련이 만든 것이었다.
혁명정부는 솔직히 시간으로나 돈으로나 여유가 없어서 몇 개의 규격화된 대포에만 집중했다. 소형 포는 3킬로그램포(6파운드 야포) 정도다.
그러나 현대만큼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19세기는 ‘범용 무기체계’라는 개념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아직은 병종과 무기의 다양화로 전술 공백을 메워야 하는 시기다. 복잡하고 지루한 군사사적 설명은 다 필요 없고, 왜 아직 병사들이 칼을 차고 다니는지만 보면 안다.
그리고 그것은 고총련에서 맡아 주었다. 소규모 공창을 여러 개 가진 고총련은 그 일에 적합했다.
소포든 대포든 봉황성을 일격에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러나 포환이 날아와 성벽에 부딪치며 가슴 시린 소리를 낼 때마다 주개가와 장병들의 정신력이 깎여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봉황성의 군비는 썩 좋지 않다.
조선이 멸망하고 육로 사행이 끊기면서 봉황성 근처는 사행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다 흩어져 버렸다. 자연스럽게 성곽 수리와 군량 징발에 써먹을 민호가 사라졌다.
물론 송윤도 요즘 봉황성에 수비병을 증원시켜 놓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그곳에 지원되는 군량이며 군비가 만족스러울 리 없다.
끝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마음이 파괴된 봉황성 장병들은 나와서 항복했다.
고려군이 공성전 하다 피폐해지면 뒤에서 들이치려고 준비하고 있던 성경 장군 송윤은 사태를 깨닫고 경악했다.
고려군을 막아내지는 못해도 그 기세를 한껏 꺾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요새 봉황성이 적병 한 사람도 사살하지 못한 채 함락된 것이다.
최전선 기지인 봉황성과 훈춘이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붕괴. 게다가 후방 지원을 해줘야 할 영고탑과 길림 장군도 패배했다.
성조의 근본지지(根本之地)인 만주가 무너지고 있었다.
허나 그렇다고 성경 장군도 무너질 수는 없었다.
아무리 청이 요즘 어지럽다 해도 이 성경부는 기르는 군마만 일만이 넘는다는 제국의 요충이며 황실의 고향이다.
게다가 길림 장군 부준의 패잔병이 합류한 일은 송윤의 사기를 크게 올려 주었다. 이제 고려군에 비해서도 숫자가 그리 밀리지 않는다.
송윤은 자신의 특기인 행정력을 발휘했다.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노비는 물론, 주변의 모든 백성이 샅샅이 뒤져 징발되었다. 대륙은 우선 숫자로 승부한다.
또한 송윤은 패배한 동료 장군을 힘써 위로한 뒤 앞으로의 대책을 물었다. 현명한 처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혹한 텃세와 조롱, 지휘권 다툼을 각오했던 부준도 한결 마음을 놓았다.
대청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두 장군은 애국충정의 한마음으로 굳게 손을 잡았다.
하지만 꼭 눈치 없는 놈들이 있다. 이를테면 지금 달려온 전령 같은 게 그랬다.
“북경에서 군령이 내려왔습니다!”
매체에서는 시인성 문제로 임금의 명을 전령이 외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만인에게 알려야 하는 포고 같은 게 아니라면 일반적 전령으로서는 황제의 글을 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칙사가 아니라 급한 파발로 알리는 군사 작전이라면 더욱 그렇다.
송윤은 왠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그것을 펼쳐 보았다.
내용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었다.
영길리 해적이 송강부(상하이)에 똬리를 틀고 강녕부(난징)와 항주를 치려고 장강을 따라 대군을 집결시키는 중이며, 운하가 적도의 손에 들어가게 놔둘 수 없으니 급히 성경부에서 보낼 수 있는 모든 병사를 보내라는 하교였다.
게다가 이 명령서(칙서가 아니다)는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사본을 만들어 보관하지 말고, 참고해야 하면 진중에 그냥 뒀다가 돌려보내라는 지시까지 붙어 있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준가르 정벌 당시 군대 진격에 참견하며 보냈던 옹정제의 명령과 똑같다.
한마디로 나는 이 명령으로 인해 발생할 결과에 대해 면피하겠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때의 옹정제처럼 도광제의 판단이 정확한지도 모른다.
성경에서 정예병을 차출하는 것은, 다른 성의 주방팔기들과 합세해 영길리를 통쾌하게 무찌르는 데에 필수적인 도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만주는 반드시 함락된다.
그리고 두 장수의 목 역시 반드시 날아간다.
황제가 시켰다는 발악은 해 봐야 전혀 소용이 없다. 혼자 죽고 끝날 일을 삼족멸로 확대할 뿐이다.
길림성에 몰래 모여 살던 한족 난민처럼, 이들 역시 황제 앞에서는 공평하게 양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민이다.
물론 두 장군이 즉각 신민을 그만두고 군주를 초월하기로 결심한 건 아니다.
다만, 황제의 명을 받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고려군을 막아낸 ‘이후’가 되어야 했다. 그 전에는 안 된다.
송윤은 부준을 마주보았다. 부준도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진중은 원래의 분위기, 즉 조선놈들을 어떻게 막느냐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갔다.
마치 황제의 편지 같은 것은 오지도 않았다는 태도였다.
만주에 호랑이가 좀 많기는 하다. 이번 겨울은 전쟁 때문에 사냥도 못 했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황명 들고 오는 전령이 호환을 당하는 것도, 슬프지만 일어날 수는 있는 일이다.
감히 이런 슬픈 일의 흔단이 되어 황제의 성총을 어지럽힌 소위 공화국 놈들은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황제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재차 독촉하기 전에 판을 다 짜 놔야 한다.
다음번 명령이 왔을 때 ‘처음 보내신 성지라는 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선 놈들을 패퇴시켰으니 즉시 황명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해 주면 다 부드럽게 끝난다.
물론 그러한 문서를 올릴 때의 두 장군은 황제와 달리 공문서의 사본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병부를 포함한 육부(六部)에 빠짐없이 조회시키고 각지 필첩식(서기관) 중 이를 못 본 자가 없도록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법도이니까.
그들은 저 무군무부한 무뢰배들이 흔들어대는 근본을 지키는 싸움에 임하고 있으니까.
마땅히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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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봉금 정책은 전체적으로 실패했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기인들에게 안정적 생계를 주어 군사력을 유지하고자 한 건륭제의 금령은, 가족 단위로 넘어가던 한인을 개인 단위로 탈출하게 하는 정도밖에 효과가 없었습니다(건륭 6년 청실록). 다만 ‘열하일기’ 등 당대의 다른 기록을 기반으로 하면 적어도 조선 국경지대에서 일종의 DMZ 조성 자체는 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봉황성은 실제로도 악랄한 지형의 요새입니다. 중국에서 조선으로 오든 아니면 그 반대 방향이든 놔두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뒤를 끊기 쉬운 길목이고, 들이치자니 오목한 산을 뒤에 두고 있어서 대놓고 병법상 들어가면 죽는 모범 지역으로 언급할 만한 곳이거든요. 괜히 고구려 때부터의 요새가 아니었습니다.
3. 몽골 제국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실제로 인간 방패를 매우 즐겨 썼습니다. 살아남아 공을 세우면 이론상 정규병으로 승진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대 유럽의 묘사에 따르면, 뒤에서 독전대가 찔러 죽이기 쉽게 하기 위해 ‘앞은 두껍지만 뒤는 얇은 갑옷’을 입혀 내몰았다고 하지요. 다만 무조건 몽골인이 아니면 방패라는 식은 아니었고, 유럽에서의 전투에서 몽골군의 척후병으로 나온 유럽인이 잡혔다는 기록을 볼 때(척후나 정찰은 상당한 신뢰가 없으면 맡길 수 없는 병종입니다) 국적이나 인종을 확실히 덜 따지긴 했던 것 같습니다.
4. 기르는 군마 1만 얘기는 가경 25년의 ‘계획’이라서 사실 다 지켜졌는지는 의문입니다. 어쨌든 문서상으론 그랬습니다.
그리고 성경 장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의 총수는 약 1만 5천 정도입니다. 성경 장군은 최접경 봉황성부터 시작해서 산해관 인근까지 총 14개 요충지의 주방을(작은 것까지 전부 합하면 41개) 지휘했고 각 주방에는 부도통, 협령 등 지휘관 아래 정해진 숫자의 장교와 천 명 안팎의 갑병이 있었습니다. 원래는 훨씬 더 많았는데, 강건성세 시기부터 한인 팔기를 지속적으로 출기(出旗)시키면서 많이 줄었습니다.
따라서 1만 4~5천이 기본, 더 끌어 모으면 불릴 수도 있겠지요. 갑병은 각자 노비도 꽤 갖고 있었고…
하지만 일시 총동원은 불가능합니다. 14개 주방 중에서는 위치상 작중 상황에서 도저히 조선 국경까지 달려올 수 없는 부대도 많거든요. 물론 국경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당연히 수도 주둔군과 다른 군사들이 소집되어 파견되어야겠지만 그럴 상황이 안 되는지라.
5. 옹정제 얘기는 1729년 호톤노르의 전투 이후의 상황을 말합니다. 호톤노르에서 참패한 청군은 전사한 총사령관 푸르단 대신 부관 악종기(악비의 자손입니다)가 이어받게 되는데 이때 황제가 악종기에게 보낸 문건이죠.
내용은 ‘제발 (푸르단처럼) 경솔하게 진격하지 마라. 승기가 보여도 쫓지 마라’ 정도입니다.
그리고 명령서를 복사하지 말고, 다시 볼 거면 진중에 두었다가 다른 서류와 함께 돌려보내라는 말을 끝에 덧붙이는데 이게 재미있습니다.
통상 황제의 공문서는 진본과 사본이 엄격하게 구별되어 진본은 원칙적으로 열람만 가능하고 소유는 불가능합니다. 중반에 김조순이 장자도 일로 스트레스 받을 때도 한번 언급되었죠.
행정상의 필요가 있을 때는 사본을 만듭니다. 따라서 옹정제의 명은 요즘 말로 번역하자면 ‘대외비니까 시스템에 올리지 마’ 정도겠군요.
옹정제가 이렇게 한 데에는 짐작 가는 이유가 있는데, 그 전에 자기가 굳이 검증된 한족 명장을 내버려두거나 숙청하고 만주족 우장인 푸르단을 기용해서 일을 망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장수에게 함부로 소극 대응하란 명령을 공식적으로 내렸다가 일이 꼬이면 연타로 다 자기 책임이니까…
악종기는 그 명을 따랐고, 다행히 악종기가 유능하기도 하여 특별한 일은 없어서 옹정제는 결국 평화 협정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