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85. 인간의 전쟁(3)
콩그리브 로켓은 원래 그 끝에 달린 칼날로 적을 살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영국은 이걸 주로 함선의 무기로 썼기에 칼날을 없애고 대신 폭발력을 강화시켰으나 원조는 그것이다.
지금까지는 영국을 통해 전해 받은 탓에 시준도 몰랐던 데다, 비싼 금속 칼날을 소모품마다 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달랐다.
기랑은 인도에서 보고 온 이 칼날 장착형이 보병에게 꽤 강한 위압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고총련은 총검 생산 라인을 그대로 유용하여 여기에 칼날을 붙였다.
시준도 큰마음 먹고 돈을 내주었다. 주석의 사재 일부가 또 멸사봉공을 위해 ‘희사(喜捨)’되었다.
이때 안 쓰면 언제 쓴다는 말인가. 전쟁에 패배하면 그의 안락한 노후도 없다.
그렇게 완성된 주체신기전 1호 개량형 수십 발은 재차 연기를 뿜으며 치솟았다.
이걸 처음 만든 ‘마이소르의 호랑이’ 티푸 술탄이 의도한 것처럼 ‘마치 검이 날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체신기전 1호도 이제 최소한 원본과 비슷한 위력과 명중률을 보장할 정도로는 발전했다.
그놈의 부적만 없으면 공기 저항을 좀 덜 받을 것 같지만 그건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이것을 개량한 장인들조차도 주체신기전 1호의 성능 향상은 자신들의 손재주가 아니라 주석 동지의 신력에 크게 의지한다고 믿었다.
곳곳에서 폭음과 함께 여진 기병 부대가 난자당했다.
화살은커녕 강선총도 닿을 거리가 아니라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미친 듯한 불꽃과 연기는 덤이다.
오히려 사상자는 이쪽이 더 많이 발생시켰는데, 말들이 미쳐 날뛰었기 때문이다.
부준은 침착하게 영을 내렸다.
“못난 놈들. 겁먹지 마라! 고래로 화포에 맞아 죽는 자가 전쟁에서 얼마나 되더냐? 차라리 벼락을 맞을 것을 걱정하지 그러냐! 똑바로 달려! 저놈들이 화전을 쏘았다면, 우리는 화살을 잔뜩 먹여 주면 된다! 짐승처럼 만들어 죽여 버려라!”
그 말도 옳다. 부준의 명령은 곧 깃발과 악기로 언어를 바꾸어 퍼져나갔다.
그럼 벼락보다는 확률을 조금 더 높여 주겠다는 듯 쏘아대는 혁명군의 3킬로그램포(6파운드 야포)가 길림 장군의 체면을 약간 훼손시키기는 했으나, 기병들은 그럭저럭 앞으로 나아갔다.
곧 화살을 당길 수 있다. 게다가 청이라고 200년 동안 군대를 무슨 무형문화재처럼 보존하기만 한 건 아니라(그런 면도 없지는 않았다) 일부 병사는 마상총이라 부르는 카빈형 머스킷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 저 무력하게 모여 있는 놈들을 과녁으로 써 줄 차례다. 마치 짐승을 몰아붙일 때처럼 포위하여 화살꽂이로 만들면 된다.
혁명군 방진은 이제 꽤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동안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청군은 각자의 무기로 방진을 겨냥했다.
몇 발 쏴 주면 당연히 진이 흐트러질 터. 그때 뛰어들어가 피바다를 만들어 주면 된다.
그런데 이 흐름에서 청군이 깜박한 게 있었다.
보통 마상에서 쏘는 무기는 활이건 총이건 짧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길이가 짧다는 것은 사거리도 짧다는 뜻이다.
청군의 것보다 훨씬 크고 우람한 브라운 배스 머스킷이 그들을 겨누었다.
혁명군 병사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명령이 드디어 떨어졌다.
“동지들, 방포하라!”
매일매일 가지각색 혁명적인 체벌을 겪으며 훈련한 결과는 놀라웠다.
혁명군 대부분은 워털루에서 그 많은 장교들이 이루고 싶어 하던 경지, 즉 ‘지휘관의 명령 없이 절대 발사하지 않는’ 데에 성공했다.
심지어 일부 흥분한 청나라 기병이 먼저 쏴버린 화살이나 총탄이 간혹 방진에 닿을 때까지도 그러했다.
그래서 정해진 대로 딱 30미터까지 청군이 다가왔을 때 일제히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청군이 ‘겁먹고 움직이지 못하는 조선군’을 비웃으며 마상총과 활을 당기기 바로 일보 직전이었다.
전열보병의 통상 교전거리보다도 훨씬 가까운 거리. 많이 빗나가기는 어렵다.
말이 사람보다 훨씬 크다는 단순한 이유로, 대부분의 총알은 애꿎은 군마를 덮쳤다.
말발굽이 거꾸로 치솟고 흙먼지가 그 뒤를 따랐다.
비명이 아래로 깔리며 핏줄기는 반대 방향으로. 공포의 냄새는 배설물과 혈액의 악취가 뒤섞여 아주 고약했다.
정확하게 계산된 거리는 반드시 명중을 보장하면서도 총알 설맞은 말이 발작하며 방진을 덮치지 않게 해 주었다.
틀림없이 병사들이 목숨처럼 아꼈을 준마들은 볼썽사납게 다리를 버르적거렸다.
그리고 그 정도 큰 짐승이 버둥댄다면 그 힘은 보기보다 훨씬 강하다.
뒤에 오던 동료들은 거기에 치어 엎어지거나 날아가거나 다리가 부러졌다.
여기서 돌격이 좌절되고 끝날 것인가?
허나 장군 부준은 단순한 얼간이가 아니다.
부준은 혁명군이 결코 쉽게 청 기병을 막아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다 할 만하니까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혁명군 각 연대로 나누어 돌격한 기병대 대부분에서는 기어코 일부가 살아남아 방진을 타격했다.
그들은 방진의 가장 약한 부분인 모서리에 창과 칼을 꽂아 넣었다. 몽골족처럼 투창을 던지는 자도 있었다.
혁명군 병사들 역시 총검을 들어 대항했다. 그러나 근접전이 된다면 아무래도 기병을 이기기는 어렵다.
말을 찌르면 될 것 같지만, 그리고 파이크 방진 등 많은 실증 사례도 있지만 정작 보병 입장에서 하려면 그게 또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말하자면 ‘게임 니들이 해볼래’의 그 게임에 속한다.
말가죽은 채찍으로 쳐도 상처조차 남지 않을 만큼 튼튼하다. 근육과 골격에 이르러서는 인간과 비교가 무의미하다.
어린아이가 뾰족한 쇠젓가락 하나로 돌진하는 거한을 멈춰 세우겠다는 것과 비슷하다.
대부분 일반인의 운명은, 손목이 부러질 정도의 충격에 당황하고 그 직후 분노에 미쳐버린 말발굽에 짓밟히는 것이다.
게다가 말 위에 탄 기수도 역시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들은 총검보다 긴 창을 들어 혁명군 병사를 찌르거나 때로는 안장 위에 선 채 몸을 기울여 칼을 휘두르는 묘기를 부렸다.
기병이라는 건 그 자체로 숙련된 전사라는 증거다. 상비 직업군인인 갑병의 무예는 뛰어났다.
어깨를 맞대고 숨결을 공유하던 동료의 피가 끼얹듯이 뿌려졌다.
진저리쳐질 정도로 뜨거웠다.
그 피가 내 것이 아닌 이유는 순전한 우연 이외에 없다. 다음번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순간 나의 모든 것은 끝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공포에 질려 일어서거나 돌아섰다간 가장 먼저 죽을 뿐이다.
대부분 실전은 처음이나, 혁명군 병사들은 가혹한 주입식 교육으로 그것을 몸에 새기고 있었다.
한번 이룬 방진은 절대 엄수. 살아남으려면 그것만이 길이다. 혁명군은 공포를 떨쳐내기 위해 악을 썼다.
“정렬! 정렬!”
“그대로! 그대로!”
그러나 청군 역시 악에 받쳐 있었다.
청군 역시 동료들의 무수한 시체를 제물로 바쳐 여기까지 왔다.
청군은 기어코 뚫겠다는 듯 그악스럽게 밀고 들어왔다. 하긴 여기에서 밀려나면 아까와 같은 참상을 다시 반복해야 할 테니 그럴 만도 하다.
자신의 영토를 침범당한, 그것도 ‘아랫것’들에게 하극상을 당한 봉건 군사들의 응당한 분노가 터져 나왔다.
“주인을 물어뜯고 윗사람을 배반하는 난신적자는 죽어라!”
“혁명인지 뭔지 촌놈들 하는 노릇을 그대로 넘겨줬더니 한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는구나!”
방진은 여러 개 있었다. 그중에서 청군이 특히 기세를 올려 몰아붙이는 한 방진은 마치 금방이라도 돌파당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그 진의 가운데에서 깃대를 받들고 있던 한 젊은이가 미친 듯이 분노했다.
“이런 반혁명의 악질분자 놈들을 보았나!”
그의 이름은 이광로(이항로). 과거 포천에서 반동 무리를 가차없이 처단하여 공화국 최초 정치 지도원의 영광을 얻었던 그 사람이었다.
***
이광로와 같은 정열의 차세대 혁명 열사가 이번 전쟁을 나 몰라라 할 리 없었다.
보직은 물론 정치장교다.
혁명군의 정치장교는 그 지위와 상관없는 감찰권을 가지고 있으며 지휘관에게 자료를 요구하거나 시정을 권고할 수 있다. 적전도주 현행범처럼 특수한 몇몇 경우에 한해서는 직접 형벌을 집행할 권한도 가진다.
그러나 정치장교가 병사들 상대로 권세나 부리는 편한 자리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책임 없이 권한만 크다면 그건 수평이 아니다. 둘은 동등해야 한다.
모든 인민이 알고 있듯이, 주석 동지 또한 전 인민의 영도라는 무거운 책임을 ‘영구히’ 걸머지고 있지 않은가?
정치장교는 정 진인의 그처럼 불멸하는 의지를 현실에 체화하는 존재다.
따라서 아무나 임명할 수 없다.
겸직 금지라고 했더니 진짜 대의원직 내던지고 참전한 혁명군 총정치국장(總政治局長, 정치장교들의 우두머리) 이제초는 정감록파 안에서만 정치장교를 고르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가진 신심에 비춰볼 때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윌리엄 캐리가 복여명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들은 것처럼, 정 진인의 도는 구구한 속임수가 아니라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기적으로써 자신을 증거한다.
저 태평도나 오두미도, 혹은 서양 길리시단 따위의 사이한 요술과 같은 반열에서 취급되는 것이 이미 모욕이다.
그중 누구라도 그들이 떠드는 이적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재현할 수 있는가?
정 진인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력의 확대라든지 정치적 계파 암투 따윈 그저 하찮다.
그건 자기 자신도 못 믿는 이들이,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허겁지겁 벌이는 난장판일 뿐이다.
따라서 이제초는 오히려 이광로를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끌어들였다. 이광로의 업적과 재능으로 볼 때 충분히 차세대 총정치국장도 노릴 만했다.
원래의 위정척사파 선비 이광로라면 진인이 어쩌고 하는 도참에 버럭 호통을 쳤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 시준은 주나라 이전의 이상 사회에 대해 공자의 유(儒)보다 더욱 잘 설명하는 사회 체계를 이루어냈다. 직접 보여주었으니 이보다 좋은 설명은 없다.
정약용이 런던에서 이강회에게 가르쳤던 논변처럼, 이는 공자조차도 그저 현인의 하나 정도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업적이다.
공자만이 아니다. 그 이전의 요순우탕 문무주공, 그리고 공자 이후의 정현(鄭玄)이나 마융(馬融) 및 주자 등등까지 그 모두가 정 진인이 지금 궁극적으로 이루어낼 혁명의 이상을 위한 초석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미 혁명 공화국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新)유학파의 이론은 거의 완성 단계였다.
‘공자의 학문은 아름답지만, 닿지 않으면 빛나지 않지.’
이상은 높았지만 실적이 없었던 공자의 업적은 딱 그만큼만 평가되어야 했다.
정 진인의 도래를 대비하기 위해 인류를 준비시킨 수많은 학자이자 디딤돌 중의 하나로서 말이다.
그리고 유학자들은 공자를 디딤돌 중에서 특별히 큰 디딤돌로 쳐 주기 위한 작업에 몰두했다.
왕씨 고려가 망하고 시골에서 학문을 닦다 끝내 조선의 지배계층이 된 사림처럼, 지금 공화국의 유학자들도 훗날 일익을 맡아 날아오를 때를 대비해 새로운 학풍을 닦고 경전에 다시 주석을 달았다.
종교의 중요한 속성이 불변이라 한다면, 종교적 의미에서의 유학은 이미 사라졌다.
따라서 진인으로 부르든 미륵으로 부르든 상관없다. 만류귀종이라 함은 이런 것이다.
이광로는 기쁘게 정치장교 자리를 수락했다.
***
제3사단 2영대 3대대 수석정치장교(首席政治將校) 이광로는 어디서 솟아나는지 알 수 없는 힘으로 깃대를 들어 올렸다.
혁명군 정치장교의 상징, 오죽적기(烏竹赤旗)가 찢어질 듯 펼쳐졌다.
꼿꼿함과 절개의 상징이자, 주석 동지가 처음 몸을 일으킬 때 그 상징으로 삼았던 검은 대나무[烏竹]가 붉은 기에 가운데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었다.
총정치국장 이제초는 모든 정치장교에게 그 권한에 걸맞은 용기와 신심을 요구했다.
따라서 정치장교들은 주로 기수나 나팔수를 맡았다.
실전에서는 희생이 클 수밖에 없는 자리다. 어설픈 각오로는 애초에 일반병보다 몇 배는 힘든 훈련을 수료할 수도 없다.
방향은 달라도 위정척사의 한마음은 같은 이광로에게 더 이상 적합한 자리는 있을 수 없었다.
이광로는 무너지는 방진 모서리로 주저 없이 달려갔다.
이광로도 물론 기초적 군사 훈련을 높은 수준으로 마쳤다. 하지만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고, 이광로의 무예는 솔직히 그 열정에 비해서는 약간 떨어졌다.
허나 영구 투쟁에 있어서 승산을 생각하는 순간 그건 이미 반혁명적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근거를 준다면 그제야 믿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자는 합리인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인은 결코 될 수 없다. 신앙은 그 자체가 논거이며 증험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보고 나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자는 복되도다.
예수의 말은 그런 뜻이다.
그래서 이광로는 땅을 박차면서도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자신의 무예는 필요 없다. 이 혁명의 창날은 바로 공화국 억조창생의 총의가, 그리고 그것을 대표하는 정시준 주석이 인도할 것이므로.
“혁명 만세!”
이광로는 마치 몸을 던지듯 창을 내찔렀다.
깃대 끝에 달린 창날은 신묘하게도 아군을 피해 정확히 나아갔다.
그것은 아까부터 불경한 언사를 서슴지 않던 여진족의 주둥이에 그대로 틀어박혔다.
창날이 인중을 뚫고 이빨을 깨버리자 도대체 어디 들어 있나 싶을 정도로 많은 피가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힘없이 말에서 떨어지는 꼴을 볼 것도 없이 즉사다.
이광로는 창을 휘둘러 그 옆의 놈도 떨어뜨리는 기염을 토하며 크게 포효했다.
“동지들이여! 일어서라! 반동에게 무력하게 죽을 것인가! 모두가 하나의 폭탄으로 화하여 혁명의 적과 같이 죽을 각오를 새겨라[總爆彈精神]! 정시준! 결사옹위!”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은 힘이 두 배로 솟는 듯했다.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전열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정시준! 결사옹위!”
3대대 장병들은 기세가 잠시 주춤한 청군 기병대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방진의 철칙을 위반하는 이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놀랍게도 기병대를 밀어붙였다.
인간의 전쟁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뒤에서는 다시 총을 장전한 동지들의 엄호 사격이 쏟아졌다.
잠깐 기세를 올렸던 청군은 혁명군의 총폭탄정신에 기가 꺾였다. 그들은 곧 황급히 말을 돌렸다.
돌격은 한번 멈칫하는 순간 끝이다. 방진을 뚫지 못한 기병대는 그저 사격을 피해 주위를 빙빙 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백윤구는 청군이 그렇게 한가한 놀음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원래는 서쪽에서 홍총각이 진군하는 사이 시간만 끌려고 했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여기에서 심대한 타격을 입히는 쪽이 더 좋은 것이야 당연하다.
결심한 백윤구는 손을 들어 올렸다.
***
한편 의주에서 혁명군을 전송한 시준은 평양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공화국 최초의 전함 하백을 타고(이제 전투용으로서는 약간 한가해져서 이렇게 중요한 수송에 쓰고 있었다) 삼화부에만 보급과 현안 확인을 위해 들렀다가 그대로 남하했다.
오랜만의 한양군 방문을 위해서였다.
한양군은 그간 반동의 굴혈이라는 이유로 많은 견제를 받아 왔다.
한양을 근거지로 한 경화 사족과 끝까지 시준의 편으로 돌아서지 않았던 경강상인, 그리고 그에 기대어 사는 많은 사람들은 공화국 초창기 내내 심대한 위협이었다.
물론 혁명열사 김유근을 비롯해 남조선혁명당 한성지부의 동지들은 그만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한성부라는 도시는 그렇지 않았다. 성은 해체되고 종묘와 사직은 파괴되었다. 강상은 갈가리 찢어져 해병대와 서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한양 시전에는 한때 장 보러 온 사람보다 국가보위총국 요원들이 더 많다고 할 정도로 경기가 죽어버렸다.
그러나 한양은 여전히 공화국 최대 인구의 도시다.
이 시대에는 멀리 이사 간다는 행위가 그렇게 쉽지 않다. 강철군주가 버리고 김이익이 짓밟으며 김조순이 초토화시켰어도 한양에 살던 대부분의 인구는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사업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 언제까지나 그대로 푸대접할 수는 없었다.
그 위상에 걸맞은 역할을 줘서 딴생각을 못 하게 만들어야 했다.
마침 많은 사람이 필요한 사업이 하나 있었다.
그 사업에 대해 생각하던 시준은, 누군가 어깨를 툭 치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실 그건 비이성적이다. 이 배 안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누군지 아는데 놀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시준이 놀란 이유는 그게 ‘모르는 누군가’였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뭐, 뭐야. 기랑아, 왜 그래?”
남쪽으로 가야 하는 기랑은 삼화부에 왔다가 하백에 얻어 탄 참이었다.
그녀가 지휘하는 고총련의 일은 무기, 특히 소화기의 생산과 운반 및 관리다. 아직 한양군에 터 잡고 있는 조선공장회와도 만나 보고 충청도로 내려가 삼남의 공창을 점검하는 쪽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분명 그렇게 설명이 되는데도, 시준은 뭔가 자신이 중대한 사항을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인 기랑은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꽤 큼지막한 도미였다.
“조금 전에 잡았어. 먹자.”
시준이 바쁘다는 둥 핑계 대며 거절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다.
시준은 그 태도에 반박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억울했다.
시준도 기랑이 갖고 온 동충하초에 나름대로 보답하고자 했다. 바쁜 전쟁 사업에도 불구하고, 그간 기랑은 자기가 원하면 시준에게 뭐든지 얻어먹을 수 있었다.
서바이벌 상황에서는 불이 없는 일도 많다. 그리고 바다 생선은 보통 회로 먹어도 별 탈이 없다.
그래서 시준은 21세기에도 통할 만큼의 회뜨기 장인이기도 했다. 단지 써먹을 일이 별로 없었을 뿐이다.
기랑은 그중 도미회에 매우 크게 만족했다. 하긴 19세기와 21세기의 맛이 전혀 다르지 않을 요리가 있다면 그중 하나는 생선회다. 양념이랄 게 없으니까.
일본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조선인은 잘 안 먹는 생선이었던 도미는 곧 기랑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이 되었다. 어차피 산속 포수 출신이라 아는 생선도 몇 없지만.
어쨌든 시준은 이번에도 거절할 수 없었다.
“너 낚시도 할 줄 알았냐?”
바다낚시는 그냥 아무 작대기나 바로 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랑은 태연히 말했다.
“수병이 잡은 거 가져왔어.”
“너 말이다……. 그렇게 함부로 권세 부리고 그러면 안 된다.”
“괜찮아. 네가 먹을 거라고 했어. 제발 가져가 달라고 하더라고.”
기랑은 생선을 내려놓고 칼을 꺼내어 시준에게 내밀었다. 도대체 얼마나 갈았는지 푸른빛마저 내는 칼날에 시준의 한숨 쉬는 얼굴이 비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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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사람만 그런 건 아니고, 영장류 전체가 사실 다른 포유류에 비해 피부가 얇은 편입니다. 말가죽은 엉덩이가 특히 질긴 편인데(그래서 채찍으로 거길 때림) 소재로서도 이 부분 가죽을 조직이 치밀한 고급 가죽으로 쳐 주고 있습니다.
2. 나폴레옹 전쟁기 방진에서의 이상적 사격 거리는 통상 본문대로 약 30미터 내외라고 합니다. 다만 이상적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꼭 이렇게 싸운 건 아닙니다.
영국군의 4열 방진은 무려 11차례의 기병 돌격을 막아냈지만, 반대로 프랑스군 신병으로 이루어진 방진은 러시아 흉갑기병에 뚫려 버린다든지 하는 것처럼 병사의 정예도나 전장 상황에 따라 뭐라고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긴 무적의 진법이라는 것은 없는 법이죠.
3. 여기서의 총정치국은 군대의 기구로, 정부의(실제 공산국가라면 당의) 회의체인 정치국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혁명군 휘하의 정찰총국이 국무당 휘하의 실, 국과 위계 관계가 동등하다거나 하진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별개의 조직이죠.
4. 일제강점기 초기 일본은 조선의 어자원도 근대적으로 조사했는데, 여기에서 조선 사람은 도미를 잡아 봐야 값어치 없는 생선으로 여기니, 일본 도미를 조선에 갖다 팔려고 애쓰는 대신 수입을 해야겠다는 말이 나옵니다. 반면 조선에서 많이들 잡는 조기는 일본에서 잘 안 먹어서 (일본 상인들이) 영 재미를 못 보고 있다는 보고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