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85. 인간의 전쟁(2)
압록강을 건넌 홍총각의 본군은 성경 장군 송윤(松筠)과 자웅을 겨루게 된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동부 전선에 조공으로 나간 혁명군 제3사단을 상대할 자는 바로 길림 장군(영고탑 장군) 부준(富俊)이었다.
송윤은 문관에 가깝지만, 부준은 잊혀 가는 만주족의 상무 정신을 대표하는 순수한 무인이다.
기도위(騎都尉)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예부에서의 잠깐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경사와 변경의 고위 지휘관이었다. 이 동삼성에서만 해도 흑룡강 장군, 성경 장군, 길림 장군을 모두 역임했다.
한마디로 부준보다 더 실력 검증된 장군은 현재의 대청 전체를 통틀어 봐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길림과 흑룡강의 주방은 (수도에 대한 병사 공급창에 가까운) 성경 장군 휘하 주방과는 다르게 진짜 전투부대다. 러시아를 상대하는 일이 느긋할 리 없다.
그런 만큼, 부준은 고려의 침공에 대해 기민하게 대처했다. 어차피 예상 못 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음력 10월은 규정상 길림 장군의 휘하 부대가 모두 모여 동계 짐승 사냥을 하는 기간이다. 그들의 가상 적국이 러시아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는 굉장히 적절한 군사 연습이었다.
현대군으로 치면 마침 전투준비태세검열 기간에 전쟁이 터진 셈이다.
조선처럼 군사 훈련의 의미도 있고, 갑병(甲兵)들이 돈값을 하는지 점검하는 행사이기도 했다(성적이 안 좋으면 매 맞고 해고당했다).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북경에 바쳐야 하는 말린 고기나 가죽, 짐승 등 공물[amsun]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호랑이 생포를 유난히 좋아했던 가경제 때문에 길림 장군들은 해마다 많은 희생을 내야 했지만 분명 이들은 호랑이를 산 채로 잡을 수 있을 만큼 능숙한 사냥꾼이고 민첩한 기병이었다.
말과 한 몸이 된 듯한 기병 하나가 나는 듯이 달려와서 외쳤다.
“장군, 영고탑 부도통에게서 급보! 조선 놈들이 동쪽으로 치우쳐 훈춘을 들이치고 곧바로 영고탑으로 나아간 모양! 곧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고 합니다!”
대(對) 조선 동부전선의 최전방인 두만강 옆 훈춘 협령의 부대는 전령 하나 보낼 틈도 없이 박살 났다.
숫자가 불과 오백여 명 정도이니 그럴 만도 했다. 최근 고려의 사세 때문에 그쪽은 훈련 오지 말고 묶어 두라는 길림 장군의 지시가 없었으면 진짜 있는지도 모르게 소멸했을 것이다.
영고탑 부도통의 군세는 좀 낫다 하나 그래 봐야 1,500명 내외다. 그나마 이쪽은 규정에 따라 대부분의 갑병이 9월 말에 기린 울라로 와 있다.
따라서 영고탑에도 현재는 최소한의 수비병 정도였다.
영국이 대만을 점령했을 때부터 불온했던 고려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왜 팔자 좋게 계획대로 훈련이나 하러 갔는지에 대해서는 길림 장군도 할 말이 있다.
첫 번째로, 만주 동쪽 끝은 북경에서 너무 멀었다. 그래서 도광제의 명령이 제때 도달하지 못했다.
부준이 황제의 명령에 따른 대응책을 검토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갑병이 임지를 떠난 뒤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길림 장군 부준은 이곳 기린 울라(길림 장군의 본영. 현대의 지린 시 인근)에 모여 있는 편이 고려에 대한 압박에 더 좋다고 생각했다.
고려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그들은 성경 장군과 길림 장군 두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
그렇다면 병력을 둘로 나눠야 할 터. 그리고 동쪽의 군세는 어느 모로 보나 구석의 영고탑보다는 가운데에 가까운 기린 울라를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협격하든, 서쪽 군세와 합쳐 산해관으로 쏟아져 들어가든 두 군세가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
혼자서 삐죽이 나와 영고탑을 점령해 봐야 그 뒤는 바다 구경밖에 할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군은 그렇게 했다.
좌령(佐領, 니루 어전)과 필첩식(筆帖式, 비트허시, 문서를 맡아보는 군대 행정관) 등 장군의 곁에 있던 관리들이 술렁였다.
그러자 부준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란 떨지 마라. 여기로 오지 않은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나가서 모두 죽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장군. 조선 놈들이 영고탑으로 간 것은 틀림없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수작입니다. 아마도 서쪽에서 다른 계교를 준비할 터. 먼저 의주 부근의 판세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필요 없다. 애당초 그런 희자(戱子, 길거리 광대)놀음에 이리저리 숙고하며 끌려 다니는 것이 바로 저놈들 바라는 바다.”
부준은 병사가 잡아 온 사슴에 장검을 꽂았다.
본래 이 사슴은 북경에 바치려던 것이다. 주의 깊게 정해진 규격대로 잘라서 절대 색깔이 변하거나 하지 않도록 조심히 말려야 한다.
그러나 부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큰 토막으로 죽 갈랐다.
이것은 지금부터 이 사슴을 황제에게 바치는 대신 지휘관과 병사들에게 먹일 것이라는 의미다.
지금부터 그들은 싸워야 하니까.
부트하[打牲, 수렵 및 그 결과물]는 원래 전사들을 위한 것이다. 간단하고 배짱 있는 그 행동 하나로 부준은 단숨에 휘하 병사들의 경외를 얻었다.
“도적이 가당찮은 지모를 자랑하며 이곳저곳에서 날뛴다면 하나하나 모두 정면에서 토벌함이 왕도다. 동쪽으로 영고탑에 가서 혁명군인지 무엇인지를 전부 때려잡고, 그 수급을 창대에 하나씩 걸어 다시 서쪽으로 길을 돌린다.
그쪽으로 나온 적도 역시 성경 장군에게 막혀 아래위로 어지러워져 있을 터. 마찬가지로 모두 죽인 다음 즉시 의주를 넘어 평양으로 짓쳐 들어가면 그만이다.”
불량배의 허풍 같은 말이지만, 사실 의외로 이것밖에 수가 없다.
길림 장군은 영고탑의 고려군이 기만임을 알았다 해도 무시하기 힘들다.
만약 부하들의 진언대로 가만히 시간을 보낸다면 그게 고려가 바라는 바요, 서쪽으로 성경을 구원하러 달려간다면 제3사단이 뒤를 칠 테니 말이다.
그러나 부준은 예기의 귀중함이 뭔지 아는 장수였다. 그래서 외통수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을 순식간에 호방한 사내의 결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병사들로 하여금 만주를 거의 두 번 횡단하는 고단한 원정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 않으려면 꼭 필요한 절차였다.
따라서 부준의 다음 선언도 상당히 강경한 것이었다.
“오만한 도둑놈들이 여태 명을 붙이고 있었으니 자기가 잘나서 그리된 줄 아는구나. 그것은 마치 방구석에 돌아다니는 비렴(蜚蠊, 바퀴벌레) 따위에겐 아무도 개의치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거늘. 성스러운 황제 폐하께서는 촌구석에서 간신히 목숨줄이나 이어 가는 버러지들을 관대하게 간과하여 주셨을 뿐이다. 그 사실을 잊다니 참으로 가소롭도다.”
병사들은 모두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다.
아무래도 영국과 멀리 떨어진 이 만주 동북부에 있다 보니 아직 그들의 천하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사냥감은 그 외에도 많았다. 황제에게 바칠 때는 영 의욕이 안 났지만 자기들이 먹는다고 생각하니 병사들은 신나서 잡아 왔다.
술과 고기로 이루어진 야성미 넘치는 잔칫상이 차려졌다. 부준은 잘 구워진 염통을 단숨에 물어 뜯어내었다.
과거 강남에서 (나라 들어 바치고 여진족 앞잡이 노릇 한다고 비웃는) 주민들을 위압하기 위해 일부러 원숭이 두개골을 따고 뇌를 퍼먹었던 오삼계군과 비슷해 보였지만 여기에는 부준을 조소하는 자가 없었다.
환갑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준은 마치 젊은이처럼 그것을 왕성하게 씹어 삼켰다.
그러고는 염통을 꿰었던 나무 꼬치를 가볍게 내던졌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소란을 떨거나 근심을 내보이거나 자발없이 수군대지 말라. 그저 올겨울 잡아야 할 것이 짐승에서 조선놈들로 바뀌었을 뿐이다.”
두만강 바로 옆인 훈춘 협령의 부대를 제외하면 길림 장군의 휘하 주방은 조선에서 봤을 때 모두 영고탑보다 후방에 있다.
제3사단이 훈춘 협령으로 하여금 단말마만 남긴 채 패사(敗死)하도록 만드는 사태는 미리 막지 못했다고 해도, 나머지 병력은 충분히 모을 수 있었다.
그 군세는 총합 9천 명. 지금 성경 장군에게 원군을 요청하고 인근의 원주민 수렵부족인 허저[赫哲], 솔룬[索倫], 삐아커[费雅喀], 어룬춘[鄂倫春] 등등을 합하면 꽤 많이 늘어난다.
부준은 기린 울라에서 폭풍처럼 동진하며 그들을 흡수했다.
척박한 만주 동북에서 눈썰미 하나로 삶을 이어가며, 러시아가 오면 러시아에 붙었다가 청군이 오면 청군에 붙었다가 하는 재주를 부리던 원주민들은 일단 눈앞에 나타난 9천 병력에 합류했다.
결론적으로, 혁명군 본군이 압록강을 건너던 시점 백윤구의 제3사단은 이미 길림 장군 부준의 1만 2천 병력과 막 전투를 개시하고 있었다.
***
영고탑 수비병 약 천 명이 서쪽으로 일제히 달려가기 시작했을 때 백윤구는 이겼다고 생각했다.
십분지 일밖에 안 되는 숫자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완전 괴멸하기 전에 빠르게 퇴각을 결정한 적 지휘관을 칭찬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망친 게 아니었다. 적어도 결과만 보면 그랬다.
처음에는 도망칠 생각이었는지 몰라도, 마침 서쪽에서 오는 길림 장군 부준의 본대를 만나자 영고탑 수비병들은 이것이 마치 처음부터 정교하게 계산된 합류 기동이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천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백윤구는 그 천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1영대장 동지! 적에게 화포가 있는가?”
원래 혁명군 7영대장이었다가 이번 개편으로 제3사단 최선임 영대장이 된 김개동이 즉시 망원경을 내리고 대답했다.
“보이지 않소이다. 아마도 급히 오느라 뒤에 오게 한 모양입니다. 사단장 동지!”
백윤구는 그 시점에서 굳이 이제 비어버린 영고탑 성에 들어갈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봐야 성안에서 적의 뒤를 따라올 화포를 기다려 주는 꼴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반혁명적이다.
반동 중의 반동인 여진족이 눈앞에서 저 추악한 오랑캐의 변발을 늘어뜨린 채 빛나는 대머리를 과시하고 있는데, 어찌 문명한 혁명 인민으로서 숨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말 타고 활쏘기로는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는 여진족답게 그들은 고려군을 인지하고서도 부드럽게 속도를 줄였다.
일만에 달하는 군대 대부분이 기병이라 그 광경은 아주 장관이었다.
한 번 숨을 고른 뒤 공격할 모양이었다. 울면서 그들에게 달려온 영고탑 갑병들을 수습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은 이쪽에서도 귀하게 써야 한다. 백윤구는 즉시 호령했다.
“병서에 이르기를 적을 칠 때는 층진(層陣)보다 좋은 것이 없고, 적을 막을 때는 방진(方陣)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였다. 각 영대장 동지들은 방진을 급히 짜도록 하라!”
“동지들! 방진의 대오로 속히 모이자!”
복명복창이 이어지고, 바로 이때를 대비해 훈련한 혁명육군이 재빠르게 흩어졌다.
이들도 근본은 조선인인지라 여진족에 대한 종족적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며칠 전, 그리고 지금도 청군을 일방적으로 유린한 경험은 혁명군의 가슴을 자신감으로 가득 채워 주었다.
혁명군은 단 한 명도 무기를 내팽개치고 도주하지 않았다.
길림 장군 부준은 가볍게 놀랐다.
‘조선군이…… 도망치지 않아?’
청군이 가장 최근에 입수한 조선군의 실전 정보는 옛 훈련 대장 이득제의 탈출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조선군은 언제나처럼 극성의 양자보법을 시연했다. 북경에서 파견된 정예 팔기는 도저히 그들을 잡을 수 없었다.
도광제가 나중에 이득제를 비롯한 수뇌부들의 목을 잘라 공화국에 보냈다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이 행적이 드러나는 간부급들이지 나머지는 지금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책임자들은 그들이 조선군 으레 하던 대로 대충 산에서 목매어 죽었으려니 하고 잊어버린 상태였다.
도주하는 조선군을 어떻게 잡는다는 말인가? 그건 프랑스군의 항복을 막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러기에는 청나라의 과학력이 조선에 비해 좀 부족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원래 조선군은 위풍당당한 만주족 기병이 나타나자마자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달아나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그들은 반동 군주의 소유물인 조선군이 아니라, 혁명의 총의를 무력으로 대변하는 고려인민공화국 혁명군이기 때문이다.
혁명군은 재빨리 사각 대형을 갖추었다.
백윤구가 말이야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를 인용했다지만 이들이 만들어낸 것은 거의 완벽한 프랑스식 4열 머스킷 방진이었다. 항복 잘한다는 점만 빼고 그들은 프랑스군의 모든 것을 배웠다.
전쟁은 불합리의 극치에 다다른 행위이며, 극과 극은 통한다는 원리에 따라 그 수단은 거꾸로 매우 합리성을 추구한다. 발상지가 어디든 수렴 진화가 가장 쉽게 관찰되는 분야 중 하나는 전쟁이다.
따라서 부준 역시 ‘저 이세계의 진법은 뭐냐?’하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저 방진이 기효신서의 방진과 발상 자체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사실쯤이야 노련한 지휘관이라면 어렵잖게 꿰뚫어 볼 수 있다.
부준은 코웃음을 쳤다. 범용한 장군이라면 혁명군의 모이고 흩어지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음을 보고 긴장하겠지만 부준은 그렇지 않았다.
의외로 저런 훈련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에서 본질은 놀이와 같다.
진정코 어려운 것은 실제로 살인과 고통을 마주하고도 도망치지 않는 훈련이다.
“흥. 우리에게 큰 화포가 없음을 믿고 잔뜩 모여 어깨를 맞댄 채 두려움에 떨고 있구나.”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분명 저렇게 촘촘히 모인 보병 방진은 대기병 방어로써 강력한 수단이다.
하지만 완벽한 수단은 아니다.
보병 방진은 많은 경우 기병 돌격을 훌륭히 막아냈다. 그러나 또한 적지 않은 경우 기병의 타격에 무너지기도 했다.
주로 비숙련병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한두 명씩 자리에서 이탈할 경우가 그랬다.
부준은 정석적으로 결정했다. 그는 방진의 가장 약한 부분, 즉 모서리를 때리기로 하고 각 니루에 명을 내렸다.
“바로 도망치지 않은 것은 신기하다만, 그래봐야 아이들의 병정놀이일 뿐. 일각만 싸우면 흩어질 것이다.”
부준의 폄하는 꼭 조선군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정규 청군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주민 ‘지원군’을 (도망 못 치도록) 중앙에, 그리고 걷는 병사들이 그 좌우를 둘러싼 채 굳건히 나아간다.
그 좌우를 날개처럼 감싸다가 펼쳐지는 기병대는 청이 자랑하는 팔기. 여진족이 세계를 지배하게 만든 그 군대다.
팔기의 ‘기’는 깃발이란 뜻이다.
팔기군은 깃발이 곧 그 정체성이며, 깃발로써 모든 것을 표시하고 판단하고 지휘한다.
곧 병사들은 자신의 부대이며 가족인 그 깃발 아래 일사불란하게 모여 대열을 이루었다.
물론 영화와 달리 실제로는 처음부터 전속력으로 땅을 박찰 수 없다. 말이 지치고, 활을 쏘기도 힘드니까.
청군은 일단 걷는 속도부터 시작했다.
따라서 그 행렬은 느리고, 또 숫자가 많았다.
혁명군 쪽 방진 사이에서 멸적의 포문을 열기만을 기다리던 주체신기전 1호에게 아주 탐스러운 목표였다.
만주 기병들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갑자기 옆에 달려가던 동료가 말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놀라서 돌아보면 그 동료는 거대한 화전(火箭) 끝에 달린 칼날에 꿰뚫린 채 땅에 박혀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화전은 아직 아쉽다는 듯 추진체를 불태우고 있었고 그 불쌍한 동료는 비명도 못 지르면서 팔다리만 버르적거렸다.
‘주석 동지가 개발한’ 주체신기전은 분명히 혁명군에게 사랑받는 무기다.
그러나 근접 폭동 제압용 겸 독병기인 2호, 개인용 소화기인 3호는 그 뚜렷한 단점 때문에 사실 많이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주체신기전이라고 하면 보통 가장 처음의 1호를 의미했다.
바로 영국군조차 존경을 표했던 디지털 인도의 첨단병기, 콩그리브 로켓이다.
물론 청군에게 있어 이 무기는 처음이 아니다. 과거 천진 전투에서 뜨거운 맛을 본 몽골 팔기는 콩그리브 로켓의 위력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러나 정훈장교나 교육장교가 있는 시대도 아니다 보니 이 먼 만주 동북의 주방팔기에게 정보가 촘촘히 전달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이건 조선군이 쐈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나 보통 ‘조선의 무기’라고 생각하지, 현상만 보고 바로 자신이 들은 소문과 끼워 맞춰 영국의 것이라 확신하기 힘들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옛 종족의 기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여진족 말살에 인생을 걸었던 불꽃의 군주, 문종 이향의 유산이다.
병사들은 목이 졸린 듯한 소리로 외쳤다.
“신기전!”
그 당시, 원시의 문명밖에 갖지 못했던 여진족은 옛 대금(大金)의 영광을 잊어버린 채 매일같이 노략당하고 학살당하고 지배당했다.
그런 나날은 이제 끝난 줄 알았다.
그 일곱 개로는 표현할 수 없는 큰 원한[七大恨]을 갚으려 일어선 대영웅 누르하치의 영도에 의해, 그들은 세계를 지배했다.
툭하면 쳐들어와 가족을 죽이고 친구를 잡아가던 조선 놈들은 땅에 아홉 번 머리를 박아야 했다.
정묘년과 병자년에 청이 조선에게 한 짓은, 여진족 입장에서 보기에는 관대함의 극치였다. 그들은 옛 선조의 복수를 반도 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인의를 베푼 보람이 있어 조선은 옛 오만한 상국에서 공손한 번방이 되었다.
웬만한 인생역전 드라마도 이보다는 통쾌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2백 년간 여진족은 그 톡 쏘는 시원한 단맛을 가득 즐겼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시간은 다시 역전되었다.
세종이 펼친 공포의 그림자가 4백 년 만에 부활하여 여진 기병의 위로 드리워졌다.
말과 자신을 한꺼번에 통제하려다가 모두 실패한 기병들은 그저 목이 터져라 외칠 수밖에 없었다.
“흩어져라, 흩어져!”
“어떻게 이렇게 멀리까지 날아올 수 있다는 말이냐!”
마치 그 옛날 명에 짓눌리고 조선에 핍박받던 그 시절의 올적합, 올량합 따위로 돌아간 듯했다.
미지의 화약 무기에 놀라 짐승처럼 뛰어다니다 살해당하던 그 시절로 말이다.
엄정한 대열과 민첩한 행군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부준은 인상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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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길림 장군의 휘하 부대를 설명하자면 본영은 현대의 지린 시에 있습니다. 원래 영고탑에 있다가 옮겼죠. 그리고 영고탑에 하나, 훈춘에 하나, 현재의 하얼빈에서 동남쪽에 있는 알추카와 라린에 각각 하나, 마지막으로 한참 동북쪽 자무쓰[佳木斯]에 있는 삼성 주방이 있습니다.
짐작하실 수 있듯 사실 조선보다는 러시아의 남하를 가정한 포진입니다. 직업 상비군인 갑병의 수는 강희제부터 광서제까지 그다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총원 약 8,500~9,000명 정도죠.
2. 나중에 자세히 나오겠지만, 길림 장군 말고 성경 장군 휘하의 주방 14개는 본문에 서술된 대로 북경에서 필요로 하는 병사를 공급하고 기인들의 안정적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데에도 꽤나 중점을 두었습니다.
주방의 위치를 보면 대부분 (험지의 산성보다는) 평지나 주요 교통로가 많죠. 성경부의 대조선 역할은 국경 경비대로서 행정 업무를 많이 처리하며, 안으로는 북경과의 연결이 긴밀해야 해서 그렇습니다. 반면 길림, 흑룡강 쪽은 진짜 척박하고 험난한 ‘최전방’에 가깝습니다.
3. 열거된 송화강, 흑룡강 일대의 소수민족들은 나선 정벌 때도 처음엔 러시아에 협조하다가 눈치 봐서 청군에게 붙어 전쟁을 수행한 부족이 많습니다. 아마 다른 수단도 달리 없었을 겁니다.
그중에서도 작중에 언급된 허저족은 위에 언급된 자무쓰 시 근처에서 살며 신유의 북정록에 ‘견사족(개를 부리는 족속)’으로 기록되었는데, 만주 극동~홋카이도에 걸친 아이누, 퉁구스계 민족의 생활 양태를 보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썰매개 등을 적극 활용하여 사냥을 하던 민족이었죠.
4. 칠대한은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핍박 일곱 개를 열거하며 내세운 저항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다 말하자면 아마 7백 개는 되겠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우니... 사실 지금 보면 이도 지배층 중심의 원한이라, 그보다 더 중대한 원한이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은 들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