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84. 전초전(3)
말 그대로 천신만고 끝에 중국으로 돌아온 제임스 메디선은 상해에서 원고 집필 중이었다.
일찍이 유럽인으로서 답파한 자가 없었던 이 길의 여정을 책으로 내면 반드시 잘 팔릴 것이다. 또한 이름이 알려진 뒤에는 티베트 진출의 야망이 있는 동인도 회사나 다른 선장들이 자신을 비싸게 고용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한 포트폴리오적 목적상, 제임스 메디선의 원고는 자신의 활약을 과장하는 것이었다.
메디선은 백 년 뒤 아라비아의 토마스 로렌스가 크게 참고할 만한 허세력으로 자신을 묘사했다.
핍박받는 민중의 편에 서서 험산준령을 날아다니며 전제 군주의 군대에 맞서 싸우고, 더러운 러시아 놈들의 범죄를 능통한 국제 감각으로 응징할 뿐 아니라, 현지인 아가씨와 펼치는 가슴 떨리는 로맨스까지 그야말로 완전한 영웅의 서사시였다.
물론 관군에 맞서 싸운 것은 중화 혁명당이요, 카자크 모가지 벤 사람은 베니그센이었고, 현지인(아시아인이라는 점에서) 아가씨에게는 얻어맞거나 윽박질러진 기억밖에 없긴 하다.
하지만 메디선은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양심이나 정직함을 가진 상인은 이미 저 초고대 페니키아인이 배 띄우던 시절에 다 죽었다. 그것이 자연 선택이다.
그렇게 바쁘다 보니, 메디선은 오늘 유난히 손님이 안 온다는 사실을 좀 늦게 깨달았다.
본래 책상과 의자만 있으면 하룻밤에 5만 스페인 달러를 벌어들인다는 아편 장사다.
지금쯤이면 늦게 깬 아편쟁이들이 우글우글 줄 서 있어야 한다. 메디선이 여기서 글이나 쓸 수 있을 만큼 한가할 리가 없는 것이다.
메디선은 잉크와 노트를 잠깐 옆으로 치워 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저쪽에서 술에 취해 드러누워 있는 사환 하나가 보였다.
“이봐! 톰!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이리 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톰은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밖에 나갔다. 그러고는 곧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없긴 뭐가 없어요. 바깥은 완전히 축제 광경이구먼.”
“뭐?”
중국 추수절(중추절)은 지난 지 좀 됐다. 메디선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서둘러 나가 보았다.
“이게 뭐야……?”
톰의 말대로 확실히 바깥은 시끄러웠다.
단, 술에 취한 톰의 헛소리와는 달리 축제의 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피난의 열기였다.
상하이의 수많은 중국인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유 있는 자는 수레에, 그렇지 못한 자는 등에 각자 귀하다고 여기는 물건을 양껏 올려놓은 채였다. 사방에서 말과 소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가끔 사람의 것도 있었다).
고함과 욕설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며 채찍과 몽둥이가 춤추었다. 대갓집 하인이나 관리의 이속들은 씩씩대며 길가를 뛰어다녔다.
메디선은 아무나 붙잡고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려 했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기세는 흉흉했다.
만약 방해했다가는, 저 골목 구석에 심심찮게 보이는 시체처럼 만들어 줄 기세였다.
이 난리통에 약탈을 당했거나 시비가 붙었다가 살해당한 자이리라. 그리고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뭔가 타는 냄새를 맡은 메디선은 동쪽을 돌아보았다. 그쪽에 있던 민가 여러 채에서 연기가 솟고 있었는데, 명백한 의도적 방화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절규를 두어 번 반복하던 메디선은 곧 상하이의 동인도 회사 상관으로 달려갔다. 아마 그들이라면 훨씬 일찍부터 이 사태에 대한 정보와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청이, 아니, 중국이 해적의 침노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도광제의 조치는 위대한 선조들이 해적을 토벌해야 했을 때의 전범을 참고한 것이었다.
다섯 개 본토 개항장뿐만 아니라, 바다에 면한 모든 지역에서 해안 삼십 리(약 15킬로미터) 내의 주민을 전부 철수시킨 뒤 가옥을 불태운다.
과거 순치제와 강희제가 대만의 정성공을 상대할 때 썼던 천계령(遷界令)이 19세기적 규모와 정교함으로 발휘되었다.
어떻게 난장판이 된 강남에서 그럴 수 있는가 하면, 강남이 민란 따위에 ‘구석구석 전부’ 혼란해질 정도로 좁지는 않다는 점을 들어야 한다.
중화 혁명당은 분명 한중과 사천에서 청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2차 대장정에 돌입했다.
그런데 이는 약간만 관점을 바꿔 말하면 본거지를 잃고 도망쳤다는 의미도 된다.
그래서 강남에서 중화 혁명당에 호응하는 민란도 많이 사그라진 상태였다.
중국의 여러 혁명 단체는 현재 광서로 돌아온 혁명당의 지휘 아래 음지에서 통합되고 있을 뿐 직접적 무장 봉기를 일으키는 곳은 적었다.
신하들의 말대로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인식은 강남의 신경망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그리고 일전 영국과 충돌하기 싫었던 시준의 현지 지휘 탓에 현재도 영국 개항장 근처에는 혁명 세력이 잘 크지 못했다.
게다가 청군은 베트남군을 상대로 한 승리 때문에 기세가 크게 오른 상태였다.
중국군이 언제까지나 깨지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독첨사(都督僉事)들은 이 조치를 충분히 뒷받침할 군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이상의 수많은 조건은 갑작스러운 천계령을 무리 없이 실행시킬 수 있었다.
깃발을 든 황제의 파발이 사방으로 내달렸다. 제독과 순무는 각지 현령과 지부에게 지시하고, 지방관들은 아전과 포리들을 닦달했다.
바로 이럴 때를 위해 만들어 둔 보갑제(保甲制)는 삐거덕대면서도 어떻게든 굴러갔다. 지보(地保)와 지갑(地甲)은 하필 이때 당번 하고 있는 자신의 불운을 탓하며 이웃들을 내몰았다.
지금은 영국이라도 그렇게 하기 힘들 정교한 관료 체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일을 진행시켰다.
흔히 전근대 아시아의 비상 대응체제는 느리고 비효율적이라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그런 부당한 인종차별은 위대한 조선 최속군주의 이름 앞에 무너진다.
‘근대적 프랑스’의 왕 루이는 진정 효율적으로 도망쳤는가?
윗대가리만 제대로 결심하면 그 어느 체제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게 전제 군주제다.
비스마르크가 민주주의 집어치우자고 권고한 이유가 다 있다.
물론 그 속도에는 대가가 따른다.
어리둥절한 채 끌려가는 – 그 와중에 관병에게 심심풀이로 노략질당하는 – 백성들과 설명 한마디 듣지 못하고 집과 배가 불타 버리는 어민들은 통곡도 크게 할 수가 없었다. 바로 살해당할 테니까.
그러나 영국군의 치하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
관청의 합리화가 아니다. 실제로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21세기에도 어느 나라든 자기 정부 욕하는 사람은 많다. 허나 그렇다고 ‘너 우리 ISIS의 동료가 돼라!’라는 제안에 찬성하는 얼간이는 극히 드물다. 영국의 이미지가 대강 그랬다.
관청이 끌고 가는 백성보다는 지역 유지의 인도 하에 자발적으로 내륙으로 이주하는 백성이 훨씬 많았다. 상하이에서 제임스 메디선이 본 것처럼.
청 정부는 그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주민들은 내륙 주요 도시로 향하는 길과 장강을 따라 잇대는 방어선의 축조에 투입되었다.
지금 청의 해안 인구는 순치제나 강희제 때와 비교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 규모 역시 비교할 수 없었다.
솔직히 목책과 녹각이며 포대가 아니라 그냥 사람만 늘어서 있어도 영국군은 뚫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천계령은 단순한 청야전술이 아니다. 자칫하면 해적에게 넘어갈지도 모르는 재산(인간도 포함된다)과 시설을 다 없애고 그 자원을 내륙에 집중시켜 방어전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한 국가 대전략이다.
그게 청야전술을 좀 길게 말한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천계령의 핵심은 ‘바다에’ 면한 육지를 비운다는 것이다.
육지의 청야전술은 상대방이 무식한 대군과 보급선으로 차근차근 점령하고 들어오면 큰 의미가 없으나 뒤가 바다라면 다르다.
이 시대에는, 그리고 21세기에도 오로지 미군을 제외하면 배로 육상전 급의 대군을 수송할 수 있는 군대는 없다.
그리고 미군을 제외하면 바다의 장거리 보급선을 마치 육지처럼 유지할 수 있는 군대도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천계령 30리는 괜히 정해진 것이 아니다.
이는 1사(舍)라고 하여 보병의 하루 행군 거리다.
손자 시절이든 19세기든 기계화보병이 없기는 매한가지라 이는 지금도 통한다.
게다가 군마를 배에 대량으로 싣기 어려운 것은 천하의 영국군도 똑같다.
영국군에는 기병이 별로 없었다. 기본적으로 숫자가 적은 영국군은 그 안쪽으로 아무 지원 없이 진군하기 부담스러웠다.
영국군은 본래 개전의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있었다.
청군이 상하이에 집중되면 천진을 털고, 황궁을 지키면 강남 해안을 유린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 경우 바다에서 막지 못한다면 청군의 패배다. 그리고 바다에서 영국군은 절대 지지 않는다.
이렇게 몇 달 정도 두드려 패면 국내 여론 때문에라도 황제는 협상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 협상을 통해 산동이나 직례 해안에 본격적 국가급 교두보를 만들고 나서, 2차 침공을 단행하여 황제를 체포한다.
그다음은 델리의 붉은 요새에 가둔 인도 황제처럼 자금성에 유폐할 생각이었다.
황제 둘을 묶어 두 제국을 얻는다. 이게 바로 영국이 구상한 인도-차이나 제국의 야심찬 얼개다.
그런데 청은 영국이 상륙해도 불리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었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다. 지금까지 침공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해줄 수 있었던 영국 개항장은 거꾸로 중국이 이쪽을 언제든 칠 수 있는 약점이 되었다.
코크란 제독은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항구 습격과 선박 나포의 전문가인 토마스 코크란은 자신의 여러 전술 계획을 쓰레기통에 던지면서도 허허 웃었다.
“내륙에서 대군을 모은 황제가 상하이, 광저우, 마카오, 톈진, 난징 중 하나라도 친다면 우리는 거기로 달려가야 하게 생겼군. 단 한 수로 공수를 뒤바꾸다니 이거 대단한데?”
“난징은 뺍시다. 어차피 우리 상인들이 몇 명 가 있지도 않았고 그나마 중국 내 반란군과의 싸움으로 초토화된 도시라 가치가 없소.”
어깨를 늘어뜨리고 대답하던 존 레디는 자기가 지금 강 건너 불구경할 처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다. 이건 동인도 회사령을 얻기 위한 전쟁이다.
레디가 황급히 말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독?”
“두 가지 방법이 있소. 우선 하나는 지금 당장 함대 전부를 거느리고 톈진을 습격해서 곧바로 중국 수도를 들이치는 거지. 빠르면 빠를수록 좋소.”
“그, 그럼 당장 그렇게…….”
“그런데 아마 톈진은 여기보다 먼저 이 조치가 시행되었을 거요. 당연하지. 수도에서 가까우니까. 수도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방어선이 준비되어 있을 거고, 황제와 정부 주요 기능도 수도에는 없을 가능성이 높소.”
그 말대로였다. 도광제는 몽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서북 내몽골로 가는 빛의 길이 서둘러 닦이고 황제의 새 행궁이 기존 건물들을 유용하여 초고속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청나라 전통의 몽진 핫플레이스인 열하가 왜 제외되었는가 하면, 이미 고려가 불측한 뜻을 품은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거기로는 갈 수 없다.
“하지만 수도 이전이 쉬울 리도 없고, 아직 톈진의 상관에서도 황제가 떠났다는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소. 일전의 조선 전쟁에서 증명되었듯 청군은 영국군을 막을 수 없습니다. 제독의 작전은 완벽해 보이는데, 더 늦기 전에 시행하는 게 어떻소?”
그건 영국이 2만도 안 되는 병력을 중국 정복하라고 보낸 근거이기도 했다.
영국군은 당시 7천 남짓한 병력으로 20만이 넘는 청군을 깨뜨렸다.
당시 파워풀한 지휘로 그 위업을 이루었던 윌리엄 드루리 제독은 자기 홍보를 위해 그 숫자를 더욱 과장했다.
다만 그렇게 해도 아시아인에게 두 번이나 패배한 사실을 어찌할 순 없는지라 그는 여기 오지 못하고 서인도 제도에서 이만 갈고 있는 중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본국 군부는 한도 끝도 없이 중국을 깔보고 있었다. 건륭제 시절 매카트니 자작이 모욕을 받았을 때 그냥 쳐들어갈 걸 그랬다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그들이 ‘보수적으로’ 추정한 현재 중국군과의 교환비는 대략 30대 1 정도였다. 1만 8천이면 충분하고도 남았다(어차피 더 보낼 수도 없다. 유럽은 그렇게 평온하지 않다).
코크란 제독도 그런 줄 알았다. 허나 임무를 위해 심도 있게 공부하고 직접 현지에 와 보면서 그 생각은 많이 달라졌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오. 중국은 그간 당신네 회사를 통해 유럽 무기를 많이 수입했고, 내가 아는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반란 진압 때문에 군대를 상당 부분 개혁했소. 그때처럼 한 달도 안 돼 시급히 끌어모은 숫자만 많은 사람 무리와는 다를 거요. 불확실한 승산에 도박을 걸 순 없소. 이 멀리서는 패배의 만회나 병력의 보충이 어려워요.”
레디는 혹시 여기서 패배하면 진짜 주가 조작범으로 확정될까 봐 겁먹은 거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동인도 회사는 어디까지나 영국군의 ‘협조’하에 일하는 처지다. 영국군이 국가와 왕의 명예가 아닌 자본가의 이득을 위해 피 흘리며 전쟁할 수 없다고 훌쩍 가버리면 그들만 성기 된다.
그래서 레디는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코크란은 고려 담배를 문 채 몸을 뒤로 젖혔다.
“두 번째는 역시 지정학적으로…… 그들이 움직여 줘야겠지. 황제가 얌전히 육지에서 수십만 몽골 군단을 모을 수 없게 말이오.”
레디는 ‘그들’이 누구를 말하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제독은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네 동인도 회사는 우선 개항장의 상관을 서둘러 철수시키시오. 이제 그런 건 의미가 없게 됐어. 처음부터 시작하는 중국 정복 전쟁이란 말이오. 정말이지 로열 조지를 못 끌고 온 게 다시 한번 안타깝군.”
레디는 침을 삼켰다.
거대한 충돌이 있으리라 예상했건만, 양국의 첫수는 각자 한 발씩 물러나는 것이었다.
마치 끔찍한 파도가 몰아치기 직전 같았다.
***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개미들을 쫓아 마당을 아장아장 걷던 명주는 집으로 들어오는 기랑을 보고 소리쳤다.
“어마!”
아이의 범주에서는 대충 자기 어머니와 비슷한 연배의 여자면 다 그렇게 묶였던 것이리라. 물론 기랑도 그것을 짐작했지만 가슴이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곧 지유가 나와 명주를 안아 들었다.
“나 좀 봐. 일하느라고 명주를 깜박했네. 에구, 명주야. 이게 다 뭐니. 손에 흙 묻히면 병 걸린다고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시지 않니.”
“옛날부터 그런 거에 유난이긴 했어.”
“어머, 너한테도 그랬니? 아무튼 잘 왔다. 들어와. 바쁠 텐데 어쩌다 짬이 났나 보구나.”
그 말대로 두 사람은 많이 바빴다.
지유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침모나 사용인도 나랏일을 도우라며 거의 일터로 돌려보낸 것처럼, 현재 전시 체제로 돌입한 공화국에서 이 두 사람만 바쁜 건 아니다.
허나 지유와 기랑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의무를 짊어진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오해하곤 하나, 지유는 부녀회 회장이 아니라 부회장이다.
엄밀히 말해 부녀회 안에서는 회장 김부용의 지시에 따르는 입장이다.
물론 두 사람이 대립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부녀회의 안건을 점검하고 김부용을 보좌해야 하는 사람이 홍지유인 건 사실이다.
결재자보다 보고자의 일이 더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유도 정신이 없었다.
농상진흥부의 지도에 따라, 각지 면직소는 혁명전쟁이 요구하는 엄청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분업 체계를 잡아가고 있었다.
단순히 많이 모여 베틀 철커덕대는 것만으로는 정치국이 제시한 베짜기 산성을 타넘어 점령할 수 없다.
권사(捲糸, 실을 짜기 좋게 감는 준비), 조방(粗紡, 방직의 기초가 되는 조사를 잣는 일), 연조(鍊造, 실을 고르는 작업) 모두를 엄정히 분리하고 조직하는 관리가 필요했다.
지유가 요즘 하는 일이 이것이었다. 각 분야별 직장(織場)의 성과를 평가하고 공표하는 일은 혁명 경쟁을 통한 베짜기 투쟁의 불을 붙이는 데에 필수적이다.
영국이 그러했듯 산업 혁명은 직조에서부터 시작된다.
기기가 발달하고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 더 이상 길쌈이 가내수공업에 머물 수는 없게 된다. 가내에서 만드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게 이득이니까.
그런데 방직공 길드 같은 이권집단도 존재했고 산업혁명 초기에는 집안에서 남자도 (돈 많이 주니까) 면직에 매달렸던 유럽과 달리, 조선에서의 길쌈은 전통적으로 여인만의 일이었다.
이는 그러한 노동이 여인에게 전가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뒤집어 말하자면 남자들이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도 된다.
이러한 전통적 관념은 의외로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관념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어려웠다.
공화국은 이 시대 지구에서 유일하게 여자들도 선거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건넛마을 최 부자가 농상위원 자리 하나 얻더니 우리 면직소를 탐내고 있네. 인민위원회에서 허락하면 정식으로 나라에서 자기가 사들일 수 있지 않느냐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있어!’
‘이런 천벌 받을, 아니 반동 같은 놈이 있나. 내가 당장 평양에 달려가서 고해야 하겠네!’
‘그것도 좋지만 우선은 다음번 혁명경연(생활총화) 때 엄중히 비판을 제기하여 위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여야지. 우리 고을 부녀회만 다 나와도 숫자가 얼만가. 인민위원장 동지는 틀림없이 우리 손을 들어 줄 게야!’
이러한 요인은 공화국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면포 산업의 독점을 부녀회가 지킬 수 있게 해 주었다.
부녀회는 각지 면직소의 사업권을 불하받고 그 사업에 누가 참가할 수 있는가를 결정했다. 국가에 필요한 면포를 공급하는 중대사인 만큼 그 정도 권한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아무도 공공연히 말하지는 않지만, 부녀회의 부회장이 누구인가도 여기에 상당히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옛날 첫 번째 총선거 때도 여인과 칠반천인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에 대해 비슷한 소문이 돌았듯, 사람들은 주석 동지가 부인을 움직여 이 거대한 사업을 ‘장악지도’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랑의 경우에도 약간 다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착각이 퍼지고 있었다.
병기는 군국기무(軍國機務)의 으뜸으로 국가의 중대사다.
상식의 눈으로 봤을 때 군사무기 생산에 민간단체를 높은 비중으로 참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든지 반란 세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외국에 기밀을 팔아넘기거나.
하지만 고총련은 옛날 백발백중회 시절부터 주석 동지의 비호를 받으며 급속히 성장했다. 초기부터 그 회장이었던 기랑이 아니라면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기랑인가? 고향 친구라는 이유 때문인가?
물론 그건 조선 사람들의 가치관에 그럭저럭 거슬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 시대에 출세했다고 고향, 친척, 친구를 외면하는 일은 오히려 비도덕적인 것에 속했다. 그래서 시준의 코드인사가 반발 없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허나 시준의 생각보다 훨씬 눈치 빠른 공화국 사람들은 ‘진짜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랑의 성별 공개에 따른 정치적 입지의 동요도 거의 없었다. 길명이만 크게 동요했을 뿐이다.
또 하나 국가경제에 빼놓을 수 없는 분야로는 식량을 들 수 있다.
다행히 시준은 다른 여자를 하나 더 데려다가 여기 배치하지는 않았다. 이쪽은 시준 자신이 있다.
언제나 모든 일을 맹렬하고 신속하게 처리하여 중국이든 영길리든 때려잡는 주석 동지가 매점매석과 주가 조작으로 곡식을 긁어오기 때문에 장기전이 아닌 이상 군량도 튼튼해 보였다. 임칙서가 괜히 천안문의 환상을 본 게 아니다.
섬유와 무기, 그리고 식량 세 분야는 평시에도 중요하지만 전시에 더욱 긴급해진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주석 동지가 지유와 기랑을 통해 오묘한 정치술을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주석 동지는 인민에게 수평하게 이권을 나눠 주는 척하면서도, 국가 최중요 분야의 수장들을 ‘장악’하여 – 장악의 결과보다는 장악의 방식을 부러워하는 남자도 많았다 –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쥔 것이다.
이러한 비선 의혹에 대해 두 사람에게 정면으로 물어보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기랑과 지유도 특별히 남에게 해명하지 않았다.
그럴 틈도 없을 만큼 바빴다. 당장 지유의 업무는 지금 아기 볼 새도 없이 쌓여 있는 서류가 말해주고 있고, 기랑 역시 곧 삼남 쪽의 공창을 둘러보러 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랑은 지유를 찾아왔다.
그건 그만큼 중요한 용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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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통칭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그 사람입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아라비아의 봉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죠. 근대 후방교란과 첩보전의 시효가 됐다고도 평가되나, 현대에 알려진 그의 무용담은 극적이고 과장된 면이 많다고 하는 평가도 있습니다.
2.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이 연경에 갔다가 길거리에서 ‘누구와 싸웠는지 죽어 나자빠져 있는’ 시체를 보고 황급히 지나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같이 본 다른 사람은 ‘하늘에서 천도복숭아를 훔치려다 두들겨 맞고 툭 떨어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하지요. 이때는 대낮 시내에 시체가 널브러진 것도 가끔 있었던 일인가 봅니다.
3. 명의 해금령이 외양 항해와 교역 금지에서 출발했다면, 청의 해금은(그것도 금지하지만) 해적 대비를 위한 소개령 쪽에 더 무게를 둡니다. 청은 후금 시절에도 같은 이유로 요동의 주민을 만주 안쪽으로 이주시킨 적이 있는지라 이 방면에선 전문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청의 이수는 1리=500미터 정도라서 30리가 15킬로미터입니다.
이 천계와 무역 금지령은 강희 말년부터 풀려서, 19세기 중후반기에는 거의 자유로운 교역이 이루어집니다. 청은 외국인의 자국 무역을 여러 가지로 제한했을 뿐, 자국인의 외국 무역은 (천계령 당시가 아니면) 딱히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인은 동남아시아 여기저기로 나가서 서양인과 많이 교역하고 정착촌을 이루었습니다.
4. 보갑제는 명나라(이갑제)부터 청나라, 그리고 일제 치하 만주국과 대만에서까지 사용되는 국민 통제 제도입니다. 연좌제와 치안 분담, 세금 징수 등이 핵심 내용입니다.
5.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이 위치한 인도차이나 반도의 명칭은 스코틀랜드 출신 동양학자 겸 시인 존 레이덴이 제안했다고 하며, 1813년경부터 문헌에 관찰되기 시작합니다. 이때는 신조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본문의 인도-차이나는 그쪽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6. 코크란 제독이 말한 ‘몽골 군단’은 몽골 팔기를 가리키는 건 아니고, 몽골 제국 침공 당시 유럽인의 이미지에 박힌 ‘잔인한 아시아 대군’의 종족 기억을 말한 겁니다. 현대 영어에서도 ‘몽골 군단’은 종종 쓰이는 관용구입니다. (주로 성적인 면에서의) 대규모 약탈자라는 뉘앙스.
7. 완전한 보통선거는 작중 고려가 세계에서 최초지만, 여성 선거권에 한정한다면 최초는 아닙니다. 18세기만 해도 코르시카 공화국(곧 프랑스가 점령해서 무산), 스웨덴 자유시대(귀족 여자만), 뉴저지주(재산 있는 미혼만), 시에라리온(가장만) 등등에 사례가 있으며, 19세기에도 외부 식민지의 사회 실험적 정착촌 몇 개 정도에는 여성 선거권이 일부 실현되었습니다.
주권 독립국이 정식으로 선거권뿐만 아니라 피선거권까지 보장한 사례는 1902년 호주가 최초입니다. 선거권만이라면 그 몇 년 전 뉴질랜드가 최초죠. 의외로 유럽이나 미국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