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49화 (249/284)

249화

84. 전초전(1)

토마스 코크란(Thomas Cochrane)은 나폴레옹 전쟁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활약한 유능한 해군 지휘관이며, 후에는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10대 던도널드 백작이 되는 사람이다.

영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 있는 스코틀랜드계 귀족이다. 그의 형제나 친척들 중 많은 수가 영국 해군의 고위직에 진출해 있다.

서인도 제도의 유명한 제독 알렉산더 코크란이나, 이름이 유사해서 헷갈리기 쉬운 미래 뉴펀들랜드 총독 토마스 존 코크란도 모두 그의 혈족이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로열 네이비의 역사와 실적에 부끄럽지 않은 무문 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마찬가지로 무문 명가였던 원주 원씨의 후손 중에서도 원균이 있듯, 여기에도 혹시 뻐꾸기 알이 아닌가 의심되는 자손이 하나 있었다.

토마스 코크란의 아저씨뻘이 되는 앤드류 코크란-존스톤(Andrew James Cochrane-Johnstone)이 그 사람이다.

앤드류 코크란은 1814년 나폴레옹의 죽음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증권거래소 주가를 조작한 대사기 사건의 주범 중 하나다.

잘만 하면 왕 첸 리딩방의 전설을 한두 해 먼저 쓸 수도 있었을 이 야심 찬 사기꾼은 주석 동지의 영도가 함께하지 않았던 덕에 체포되었다.

그리고 조카인 토마스 코크란 역시 연루를 피할 수 없었다.

그야 주범이 숙부인 데다, 토마스 자신도 한 달 전에 14만 파운드나 되는 주식을 샀다가 올랐을 때 갑자기 팔아버렸으니 의심을 안 받으면 그게 이상하다.

당시 급진파 의원으로 하원에 진출해 있던 그는 4년간 막대한 돈을 써 가며 자신을 변호했다.

그러나 1818년, 즉 올해 끝내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바스 기사단 훈장[Order of the Bath]마저 취소된다.

토마스 코크란이 ‘세계에서 활약한’ 이유가 있다. 이때 영국 해군에 적을 두지 못하게 된 그는 전 세계에서 용병으로 뛰게 된다.

평생 배운 게 해군 업무, 그러니까 해적질인데 그걸로 먹고살아야지 않겠는가. 그의 복귀가 허락된 것은 1830년경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훨씬 빨라지게 되었다.

누가 봐도 몰락이 확실해 보였던 토마스 코크란은 화려한 부활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동인도 회사와 영국군이 적당히 혼재된 지금까지의 이름만 극동함대가 아니라, 로열 네이비의 정규 사령부[station]인 영국 동양함대[Far East Fleet]의 제독으로서 말이다.

어차피 대사기 당시에도 토마스 코크란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는 논란이 많았다.

그리고 원래 역사와 달리 토마스 코크란은 쓸 만한 무기를 쥐고 있는 상태였다.

‘고려 공사와 왕 첸 약방이 무죄면 나도 무죄다!’는 말은 재판 공방 내내 코크란이 be동사보다 더 자주 내뱉는 소리였다.

물론 코크란과 달리 정약용은 혼자 그걸 다 처먹지 않고 (고관들과) 수평하게 나누는 선비의 도의를 보였기 때문이지만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정약용 또한 ‘그의 죄는 배나무 아래에서 모자를 고쳐 쓴 것’이라 언급하여 그를 두둔해 주었다.

코크란의 의원직과 훈장을 취소하는 대신, 군 지휘관 자리는 유지하여 ‘명예롭다고 판단되지 않는’ 아시아인과의 전투에 차출하는 것은 적당한 타협점으로 보였다.

영국 해군을 맡지 않았을 뿐이지, 원 역사의 토마스 코크란도 사실 이와 비슷한 궤적을 밟는다.

본국에서 쫓겨난 이후 그는 해군 용병으로 각지를 전전하며 칠레 독립에 기여하고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한다.

그의 경력을 완전히 버리고 싶지 않았던 영국 해군의 의사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토마스 코크란이란 사람 자체가 정치적으로 반골에다 혁명파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런 코크란인 만큼 이번 임무는 아주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

단수이에 정박한 채, 우중충한 런던에서는 맛보기 힘든 남해의 햇살을 즐기던 코크란은 해군 제독이 아니라 하원 의원으로서 말했다.

“부유층이 유권자에게 뇌물을 나눠주고 선거구를 마음대로 획정하여 독점하는 폐단은 의회의 오래된 고질병이지. 공평하게 인구로만 선거구를 짠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 하지만 그러한 이상론이 여태까지 실현될 수 없었던 이유는, 당연히 법을 정하는 자가 기득권이기 때문이야.

고려인민공화국은 그것을 없앴다. 물론 백지에 그림을 그리는 게 덧칠이나 고치는 것보다 쉽듯 사회 체계가 더 단순하고 원시적이어서  가능했겠지만, 분명히 참조할 가치는 있어.”

영국 귀족치고는 약간 기괴한 말이다. 하긴 그래서 그가 급진파라고 불리는 것이다.

실제로 토마스 코크란은 나중에 정계에 복귀한 뒤 개혁법[Reform Acts]의 제정에 일조한다. 역사서에 차티스트 운동과 함께 언급되는 보통선거법의 첫 발걸음이 이것이다.

그는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나눠주는 일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따라서 런던 조지당에도 상당한 호의를 보였다.

정약용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주가 조작 혐의자를 역성든 게 아니다. 조지당은 그저 폭력 사태만 계속 일으키는 게 아니라 이렇듯 의회의 선거권 확대 계파와 연계하고 있었다.

아시아 주재관 존 레디는 코크란의 화법에 속으로 조소했다.

노동자의 선거권 확대라는 대의는 아름답지만, 사실 코크란도 이 시대의 ‘모든’ 영국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유권자들에게 뇌물 뿌려서 의원직을 얻은 사람이다.

“아시아 변방 끝에서 일어난 혁명과 그 성공에 대해 토론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당면한 전쟁이 더욱 급선무라고 생각되오. 제독.”

“아! 물론 그렇지요. 주재관. 하지만 그 전에 공화국 의장 정시준을 우선 만나보고 싶은데, 주재관께서 소개해 줄 수는 없겠소?”

“이 일대의 동인도 회사군과 영국 해군의 정리와 보급, 중국 황제에 대한 우리 입장의 천명,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막대한 실무적 조치가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면 그렇게 하지요. 지금은 도저히 그럴 형편이 아니오. 아마 공화국 정부도 그럴 테고요.”

코크란 제독은 레디 소령의 퉁명스러운 말이 안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읽고 있던 옛날 신문을 들어 보였다.

“아무리 더 타임스를 꼼꼼히 읽어도 고려의 혁명 성공을 정시준 개인의 놀라운 천품[charisma]만으로 설명하는 내용뿐이오. 정시준에게도 흥미가 있지만, 그런 가십 말고 ‘우리 동맹국’인 고려 정부의 체제도 한번 견학하고 싶군. 아시아적으로 변주된 유럽식 공화 혁명이라. 상상만 해도 학문적 호기심이 솟구치지 않소?”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다면 정시준은 제독을 국빈으로 대우하여 머무르게 해 줄 거요. 그때 실컷 보시지. 다만 전시나 다름없는 이때에 총지휘관이 군의 보호를 받지 않고 외국에 가는 일은 권하고 싶지 않소이다.”

“흐음,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코로 숨을 길게 내쉰 제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고려와 적대하게 될지도 모르잖소?”

레디 소령은 움찔했다. 코크란은 전쟁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영국 해군은 조금 전 ‘중국 총독’의 임명장을 향해 예포를 발사했다.

그런데 현재 중국 총독은 아직 공석이다.

암허스트 남작은 열성적으로 로비했으나, 일전 왕 첸 약방의 주가 조작 때문에 그의 재산 자체도 많이 줄어서 효과가 떨어졌을뿐더러 영국 내각이 미치지 않은 이상 사고 치고 소환된 자를 다시 임명할 리는 없다. 그는 원래 역사처럼 인도 총독으로 내정되었다.

정약용도 만난 적 있는 마드라스 총독 휴 엘리엇이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 정해지지는 않았다. 솔직히 당분간은 정해질 기미도 안 보인다.

이러면 황제는 혹시 영국이 중국을 정복하려는 의도까지는 없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는 영국의 의도를 ‘착각하지 않도록’ 강경하게 못 박은 것이다.

여기서 깨달음을 주는 대상은 물론 일차적으로 중국 황제다. 그러나 고려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시준이 영국의 의도를 고의적으로 축소 해석하여 보낸 ‘문서 조약’의 초안을 그들은 대놓고 거부할 수 없었다. 고려를 적대하게 되니까.

하지만 고려에 질질 끌려갈 수도 없다. 그들은 중국을 정복해야 하니까.

외교는 일종의 춤과 같은 것이며 상대방에게 한 번 박자를 맞춰 줬다면 한 번 강하게 끌어오는 것도 필요했다.

그리고 영국은 원래 외교를 대포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하지 않는다.

이 아이디어는 코크란 제독이 내어놓은 것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영국의 중국 정복 의사를 무시하겠음’이란 정시준의 책략에 골머리를 앓던 동인도 회사는 그것을 환영했다.

따라서 토마스 코크란이 고려에 대해 대책 없는 호인이 되리라 여기기는 어려웠다.

분명 조지당과 고려에 호의를 가지고 있으나, 중국을 정복하려는 데에 그 호의는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레디 소령은 자신이 왜 그걸 알아채지 못했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되도록 동맹이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적어도 중국을 완전히 정복할 때까지는 고려와의 우호가 이어졌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오. 해군성이 내 요청을 들어주기만 했으면 지금쯤 그들이 좋아하는 이름의 거선을 타고 공화국을 방문할 수 있었을 텐데.”

코크란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 ‘요청’이 뭔지 아는 레디 소령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토마스 코크란은 폴리머스에 있는 100문짜리 1급 전열함 HMS 로열 조지(Royal George)를 기함으로 요구했다.

고려 사람들이 조지라는 이름을 좋아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허나 아시아에서 그 배가 필요할 이유는 전혀 없다. 차라리 쥐 잡는 데 대포를 요청하는 쪽이 합리적이다.

무엇보다 그런 농담 같은 사유로 끌고 나가기에는 1급 전열함이 너무 비싸다.

로열 조지의 마지막 실전인 알렉산드리아 원정 이후, 해체될 때까지 두 자리 햇수 동안 폴리머스에 얌전히 정박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미래의 강철 전함과 같다. 막 굴리기 부담스러운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조지라는 이름이 붙은 배 중엔 영 자기 이름 같은 결말을 맞은 배가 많았다.

이 조지 말고 1756년에 건조된 전대(前代)의 로열 조지는 마찬가지로 100문형 1급 전열함이었으나 해난 사고로 가라앉았다.

1785년 진수된 2급 전열함 세인트 조지(St. George) 또한 난파로 끝났다. 둘 다 영국 해군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대규모 사상자를 낸 사고였다.

심지어 지금 코크란이 거론한 현재의 로열 조지도 1797년 만만찮은 선상 반란을 겪었다.

이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

바다 사나이들의 강인함에 어울리지 않는 미신을 비웃기 전에 잠시 생각해 보자. 21세기에 여객선 이름을 ‘타이타닉’으로 짓자고 제안한다면 어떨까?

따라서 해군성도 조지들의 전과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먼 곳까지 소중한 마지막 조지를 내보내고 싶지 않아 했다.

황해에서 일어난 프랑스 거함 아우스터리츠의 침몰은 이제 잘 알려져 있다. 해군성은 경기를 일으키며 단호히 거부했다.

토마스 코크란의 불명예스러운 위치는 좋은 핑계가 되었다. 주가 조작범 따위에게 내어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1급 전열함이면 대개 각 광역 해역의 총기함을 맡는 함급이다.

차라리 원정군의 배 중 아무거나 택해 이름을 조지라고 바꾸는 편이 이성적이다.

그래서 토마스 코크란도 더 투덜거리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누군가를 불렀다. 곧  스무 살도 안 되었을 법한 장교가 왔다.

풋내기 장교야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지만, 그 소위의 특이한 점은 영국군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군복을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자네도 정시준을 만나고 싶다고 했었지?”

“제독. 죄송합니다만, 그런 어투로 말씀하시면 다른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그 억양에서 레디는 경계심을 느꼈다.

‘독일인?’

그러나 그건 프로이센이나 작센, 오스트리아의 군복은 아닌 듯했다. 코크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까지 알아채다니 자네 영어가 짧은 기간 많이 늘었군. 그런데 그 책, 봤나?”

소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디 소령은 상대가 독일인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저 도저히 농담이 안 들어가는 촌놈들이 다른 데 또 살고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토마스 코크란은 그 젊은 소위를 레디 소령에게 소개해 주지는 않았다. 아까 시준을 소개해 줄 수 없다는 말에 대한 복수라기보다는, 하급자를 동등한 사교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군인들의 습관일 것이다.

그래서 존 레디는 코크란이 소위를 자기 대신 전령으로 평양에 파견할 때까지도 그자가 누구인지 시준에게 미리 전해 주지 못했다.

***

사실 시준이 미리 들었더라도 별다를 것은 없었을 것이다.

시준은 자신을 덴마크 왕의 시종[page]이자 올덴부르크 보병연대의 소위인 헬무트 폰 몰트케(Helmuth von Moltke)라고 소개하는 그 젊은이에게서 어떤 전생의 기억도 떠올리지 못했다.

당연하다. 밀리터리나 군사사의 매니아가 아니고서야 누가 알겠는가.

오히려 어설프게 배운 사람이라면 1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 몰트케랑 헷갈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학연수 과정에서 겉핥기 유럽사나마 배웠기 때문에 비스마르크 정돈 들어봤지만(뭐 하는 사람인지는 잘 모른다) 거기가 한계다. 차라리 베토벤이 왔으면 시준도 더 격한 반응을 보여줬을 것이다.

게다가 몰트케는 아직 프로이센의 참모총장도 아니다. 덴마크의 초급 장교일 뿐이다.

시준은 어리둥절한 대로 몰트케가 가져온 코크란 제독의 첫 번째 용건을 받아들었다.

진부한 인사와 뻔뻔한 우호의 말을 다 건너뛰고 보자면, 영국군이 대만에서 청을 쓸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많은 도움을 바란다는 소리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맹군에 물자를 요청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영국도 고려가 가난한 건 안다. 더 중요한 건 아무렇지도 않은 안부 보고처럼 끼워 넣은 ‘중국 총독’과 예포 행사 건이었다.

시준은 혀를 찼다. 역시 영국군이다. 21세기 국회의원 보좌관들보다는 훨씬 더 똑똑하고, 훨씬 더 악의적이었다.

아무래도 중화 혁명당이 영국에게 ‘속지 않도록’ 정찰총국이 애를 좀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런 후에야 시준은 미뤄 두었던 호기심을 채우려 시도했다.

“영국군 소속이 아니라고? 관전무관이라는 건가? 덴마크 왕국에서 왜?”

뭐 좀 있는 듯이 지껄였지만 사실 시준은 덴마크에 대해서도 아는 거라곤 우유뿐이다.

몰트케는 선선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의장 각하. 덴마크 왕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간 군사 교류의 일환입니다.”

시준은 그 시점에서 이자의 목적을 눈치챘다. 하긴 아무리 전령 노릇이라도 일국의 장에게 겨우 소위, 게다가 외국인을 보낼 리가 없다.

이건 덴마크 왕국과 영국 간의 거래다. 덴마크에서 눈에 띄지 않는 형태로 시준과 말 한번 트고 싶어 하는 것이다. 총괄서결부장 정약전이 한번 만나 보라며 얘기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몰트케 자신은 그것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이쪽은 무슨 근거가 있다기보다는 몰트케의 억양과 표정, 태도에서 이끌어 낸 직관이었다.

시준이 역사나 군사에는 무식해도, 공무원과 신디케이트와 주석이라는 다종다양한 경험은 어떤 면에서 지식보다 큰 재산이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어느 정도 능숙하게 추리할 수 있었다. 하필 여인을 상대로는 잘 발휘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조금 더 고민하던 시준은, 이런 어린 장교라면 용건 자체가 그다지 무겁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여기에 더 이상 시간을 쓰는 건 낭비다. 그래서 시준은 간단히 물었다.

“비공식적으로는?”

몰트케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대답했다.

“덴마크령인 인도의 세람포어는 항상 영국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옆 벵골에서 근자에 일어난 폭력 사태에 관해, 고려인민공화국이 의도치 않게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요. 외교적 마찰은 전혀 원하지 않고, 그저 덴마크 왕국은 어느 나라에게나 우호를 바란다는 왕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접수했네. 나와 공화국 인민 또한 덴마크 왕국과 어떤 종류의 분쟁도 일으킬 생각이 없으며, 원한다면 평화적으로 교역을 개시할 수도 있다고 전해 주게.”

혹시 명주 먹일 고급 우유라도 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끼워 넣은 말이었다.

몰트케는 별로 표정 변화 없이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시준은 몰트케의 포커페이스에 그다지 감탄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다시 찔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용건은 뭔가?”

몰트케의 표정이 약간 흐트러졌다. 시준은 여유 있게 셋까지 세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토마스 코크란 제독도 당연히 자네가 덴마크 왕의 전갈을 비공식적으로 가져왔다는 사실은 알겠지. 그리고 그는 속은 거야. 사실 자네는 덴마크 왕의 사절이 아니니까. 물론 영국 관전무관도 아닐 테고. 허나 자네 나이로 봐서 정부 상층부에 긴밀한 인맥이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부친이나 가형의 명인가?”

몰트케는 이를 악물었다. 이자는 그가 유럽에서 ‘그 책’과 여러 평전을 보고 추측한 인물상과는 전혀 달랐다.

“가문과 관계가 있기는 합니다만, 그런 건 아닙니다. 저는 제 자신의 능동적 의지로 왔습니다.”

“삼가 듣고 싶군. 지금까지의 시시한 이야기 말고 조금 더 재미있는 용건이길 기대하겠네.”

“필시 그러실 겁니다. 각하. 저는 유럽 세계의 재편과 동맹의 전환을 고려해 보시길 부탁드리려 찾아왔습니다.”

시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뇌에 쥐가 나도록 고민했다.

하지만 그의 지식 어디에도 덴마크가 유럽을 호령했다는 이야기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준의 이미지에 있는 덴마크는 국제 패권 다툼과 어울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나중에 낙농업계를 호령하긴 하겠지만 설마 그 얘기는 아닐 터였다.

다행히 이번에도 몰트케가 먼저 말했다.

“나폴레옹이 패배하자마자 영국은 이빨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에 무지스러운 침략을 감행하고 있지요. 이번 중국 원정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들은 프랑스인만큼이나 야만스러운 약탈자이자 학살자입니다.”

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에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이번에 중국을 영국이 완전 정복하게 되면, 고려는 바로 다음 차례로 잡아먹힐 뿐입니다. 공화국을 위해서는 그런 사태를 막아야 합니다.”

“덴마크 왕국에서 영국 원정함대를 물리칠 대함대라도 보내 줄 건가?”

시준은 빈정대는 태도를 별로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몰트케는 진지했다.

“덴마크가 아닙니다. 그리고 함대도 아니고요. 하지만 고려가 동방에서 일익을 맡아 주신다면, 프로이센과 러시아의 최강 육군이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 동맹에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겁니다.”

“프로이센?”

“예. 제 부친은 독일계 귀족입니다. 제가 어릴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해 빈곤하게 되어 덴마크 사관학교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만, 솔직히 가정을 부양하려면 더 나은 조건이 필요합니다. 마침 프로이센군에 좋은 자리가 있더군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입사 조건으로 말 좀 전해 달라 부탁한 셈이다.

지금 적대 관계인 프로이센 출신 인사를 영국 함대에 태울 수도 없고, 프로이센이 여기까지 함대를 따로 보낼 여유도 없으니까. 허나 아무리 그래도 이런 어린 소년이 외교사절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아마 아버지가 힘을 좀 썼으리라. 확실히 의욕은 있어 보였다.

그런 사정을 짐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준은 어이가 없었다.

“영국을 배반하라고 설득하려면 최소한 영국군이 우리 눈앞에 없을 때 해야 하지 않겠나?”

“진정한 우정은 힘들 때 빛나는 법입니다. 저희도 고려가 영국과 정면 대결해 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중국에서 영국이 지나치게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 일을 외교적으로 저지해 주십사 하는 겁니다.”

몰트케는 그러면서 프로이센이 프리드리히 대왕부터 쌓아 올린 정예군과 상무 정신을 언급했다.

안타깝게도 강철군주가 생각난 시준의 표정은 더 안 좋아졌다.

꼭 편견에 기인한 것만은 아니다.

혁명군과 오래 함께 한 프랑스군이나, 별로 함께하고 싶지 않지만 강제로 그렇게 된 영국군에 대해서는 시준도 그 역량을 잘 안다. 러시아의 경우는 청과 기랑에게서 입수한 정보가 대강 있다.

그런데 프로이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시준 안에서 ‘현재의’ 프로이센이 가진 이미지는 그냥 대불동맹에 한 자리 끼어 승전국 의자 앉은 나라라는 정도였다.

세계대전을 일으킬 만큼 발전하는 거야 나중 일이다. 그나마 두 번 다 깨지지 않았는가.

세계사에 대해 포괄적인 지식만 있는 시준이 ‘독일군’에 대해 가진 인식은 상당히 거시적인 것이었다.

‘음? 나치? 독일 제국? 근데 그 녀석들 전쟁에서 이긴 적 없지 않아? 자, 쓰레기죠? 영국에 맞설 만한 나라를 찾고 있었는데? 우리 공화국은.’

솔직히 현재 극동아시아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느니 그냥 청나라와 맺고 만다. 지금, 그리고 여기로 한정한다면 청나라 쪽이 단연코 영국에 이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뇌물의 천재 탈레랑이 말했듯 외교에서 섣부른 거절이나 허락은 둘 다 절대 금물이다.

상대방에게 끝까지 애매모호한 희망을 가지게 해 줘야 한다. 상황이 언제든 바뀔 수 있으니 말이다.

시준은 대답할 말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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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오늘도 좀 길군요.

1. 토마스 코크란은 동아시아에 파견되었다는 것만 빼고 모든 서술이 역사와 동일합니다. 던도널드는 북아일랜드에도 있고 캐나다에도 있습니다만, 던도널드 백작의 영지 던도널드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도시입니다.

그리고 바스 기사단의 그 바스는 목욕, 욕조의 bath가 맞습니다. 정결 의식을 의미하는데, 목욕 기사단이라고 하면 좀 없어 보이니까 원어 그대로 발음하는 편이죠.

2. 헬무트 폰 몰트케에 대해서도 원 역사와 크게 바뀐 것은 없습니다. 집이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해서(본가도 당하고 브뤼셀의 다른 부동산도 당함), 귀족 신분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 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나중에 프랑스를 조져버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덴마크군에서 프로이센군으로 옮긴 것도 재정적 조건 때문이 큽니다. 딱 이 나이 때 옮기죠.

그런데 여담으로 왜 처음에 덴마크로 갔느냐 하면, 헬무트 몰트케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몰트케(이 사람은 반대로 원래 프로이센 장교였습니다) 때문입니다.

결혼을 위해 장인의 요구로 군인을 포기한 프리드리히 몰트케는 재산을 일찌감치 탕진했습니다. 그래서 지주로서의 투자를 계획하는데 구입하려던 농지가 덴마크 땅이라 덴마크 시민 자격이 필요했습니다. 21세기에 주택 청약 때문에 주소 옮기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여러 투자는 다 잘 되지 않았고, 자식 일찌감치 군인으로 키워 부양도 받고 입도 줄일 겸 덴마크에 보내지게 된 거죠. 아버지 프리드리히도 덴마크군에 다시 입대합니다.

어려운 형편과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몰트케는 독일군, 덴마크군 모두에서 성공한 장교였으며 몰트케 가문 자체가 명문 무가였습니다. 따라서 작중 나온 것과 같이 어느 정도의 인맥을 기반으로 한 영향력 행사가 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3. 탈레랑은 실제로 외교에서 어떠한 단언을 해서도 안 된다는 유명한 금언을 남깁니다. ‘고려하겠다’는 ‘안 된다’는 말이고, ‘안 된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죠. 현대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모든 ‘외교관 화법’의 기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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