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83. 붉은 짐승(3)
기랑의 말처럼 윌리엄 캐리는 마음 놓고 선교나 염탐을 할 처지가 못 됐다.
공화국이 뭘 금지해서라기보다는 동인도 회사가 다시 자기를 쫓아낼까 봐서다. 아직 공화국과 영국의 관계를 모두 자세히 알지 못하는 캐리로서는 고려도 대충 동인도 회사령이나 회사령 되기 직전의 미개국 중 하나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캐리는 우선 지역 유력자에게 끈을 만들어 놓기로 했다.
조선말이 아직 능통하지 못하고 달리 인연도 없으니, 역시 같은 유럽인인 조제프 푸셰가 적격이었다.
다만 적격이라는 말의 의미를 잘 헤아려야 한다. 이는 최악은 아니라는 뜻에 가깝다.
푸셰는 우선 영국인을 보통 인류보다 한층 더 싫어할 수밖에 없는 프랑스 출신이다.
그리고 푸셰가 종교에 집착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가 편의에 따라 갈아 끼운 여러 종교 중 프로테스탄트는 없었다. 침례교 선교에 찬성할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캐리는 분위기도 파악할 겸, 아이들 상대로 연습도 해 볼 겸 먼저 여기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캐리는 짐짓 과자가 많이 들어 있다는 듯이 자신의 행낭을 추어올렸다.
과자 닳을세라 베어 물지도 못하고 핥아먹던 아이들의 시선이 단숨에 집중되었다. 캐리는 온화하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이 너희와 같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말을 들어 보았느냐?”
조선말이 유창하지는 못해도 선교 관련한 대사들은 미리 갈고 닦은 보람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렵잖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눈길이 자연스럽게 여명이에게 쏠렸다.
윌리엄 캐리 역시 프랑스인의 양자라는 이 아이에게 더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여명이는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명이는 겁먹지 않았다. 여명이는 아이들 특유의 좀 지나치게 또박또박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스도는 서양인이 모시는 현인입니다. 우리 공화국 인민은 경애하는 주석 동지를 섬기고 있습니다.”
수평도에는 맞지 않는 말이나, 윌리엄 캐리가 정보를 얻기에는 충분했다.
조제프 푸셰는 자기 양자를 기독교인으로 키우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 정부 치하의 이성숭배[Culte de la Raison]인지 뭔지 하는 불경한 지식을 이 백지와 같은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이 틀림없다. 윌리엄 캐리는 본연의 목적을 잊고 분개했다.
“그리스도는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분이시다.”
아이들은 이제 슬슬 ‘과자 더 안 줄 거면 들어 줄 필요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캐리는 화들짝 놀라 자신을 다잡았다.
선교의 기술에 있어 윌리엄 캐리는 달인이며, 이 아이들에게 안 되는 조선말로 대속과 원죄의 개념을 설한다는 건 그 기술자의 자부심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일이다.
윌리엄 캐리는 우선 아이들이 혹할 말로써 공략했다.
“예수님은 물 위를 걸으시고, 떡과 물고기를 5천 명이 먹을 만큼 만드신 분이란다.”
아이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몇몇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대부분은 떡국과 생선조림을 먹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복여명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쯤은 주석 동지도 하실 수 있습니다.”
“뭐라고?”
여명이는 책보에서 오늘 배운 교재를 꺼냈다.
최근 전쟁 준비 때문에 선전선동부가 그린 여러 포스터 중 하나였는데, 평양성에서 대동강을 박차고 날아올라[水上飛] 혁명의 첫 봉화를 올린 주석 동지의 용맹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도 오늘 배운 게 나오자 앞다투어 여명이를 응원했다.
“주석 동지는 대동강을 맨발로 달려서 건너셨는데!”
“그러고는 한 창을 내질러서 반동의 군세 오천을 단번에 무찌르셨다는 걸 모르나요?”
시준이 강물이 아닌 부교를 뛰어 건넜다는 것 정도야 누가 안 가르쳐 줘도 알 수 있다. 캐리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그게 무슨 허황된 소리냐? 너희들은 속은 것이다!”
여명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 총명한 재능이 혈통인지, 호적인지는 불확실했지만 총명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교사(사제)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수상비는 어떻게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그때를 직접 본 사람들이 증언하여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참되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는…….”
“우리 아버지는 물론, 여기 있는 동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또한 모두 그것을 보았습니다. 교사께서 이 평양성을 한나절만 도시면 백 명의 증인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리더가 길을 밝혀 주자 다시 한번 아이들이 앞다투어 소리쳤다.
“주석 동지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쌀을 만들어서 오천이 아니라 오십만 명을 먹인다고 학교에서 그랬어요!”
“주석 동지가 대구의 평양성만 한 성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뻥 터지면서 다 불타 엎어진다구요!”
마치 누구의 초능력이 더 굉장한지 대결하는 양상이었다.
그리고 이때 아이들도 21세기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말했다면 그게 진실이다.
방금 전에 이러한 ‘진실된 역사’, 다시 말해 정시준의 혁명사적을 듣고 온 아이들은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윌리엄 캐리도 선교의 프로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콧방귀를 뀌며 말도 안 된다는 둥, 그들 전래의 가르침에 반한다는 둥 거절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봤다.
그리고 그런 가소로운 이교도의 자산을 격파하는 정도는 캐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윌리엄 캐리를 곤란하게 했던 건 몰려들어 교회에 불을 던지는 현지인이나 군대를 가진 유력자의 압박 같은 사안이었지, 논리와 신앙으로 그가 질 리는 없었다.
그자들이 대는 것은 그자들 스스로도 연원을 모르는 빈약한 미신이었다.
혹시 어떤 경전이나 구전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한들, 캐리가 보기에는 기독교 문명이 장구한 세월 쌓아 올린 방대한 철학에 맞상대할 것이 못 되었다.
게다가 오로지 확장과 투쟁으로 점철된 기독교 2천 년의 역사에 비해 너무나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그 호전적 폭력성에 비견할 만한 자들은 오리엔트의 무슬림 정도인데 아무래도 짬밥이 수백 년 차이 난다.
그러나 지금 이곳은 달랐다.
공화국이나 조선이 가지고 있는 문명은 유럽인이 보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다.
유교 문화권이라고 해서 선교가 특별히 더 어려울 까닭은 없다. 군주나 조상의 위업에 대해, 체감되는 증거 없이 그저 주입받기만 한 존경은 약간의 의료와 교육 지식만 있으면 손쉽게 허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곳은 아이들마저 ‘그들 자신의 세대에’ 계속되고 있는 신화를 말하고 있다.
이미 그들의 신이 지상을 거닐고 있는 것이다.
신앙 수확 업계에서 이런 짓은 솔직히 반칙이다. 어떤 박해보다도 더 강력한 방어였다.
동무에게 질세라 다투어 목소리를 높여가며 읊어대는 아이들의 ‘혁명사적’을 들으며 캐리는 공포마저 느꼈다.
그리스도와 그 삶을 같이했던 초기 원시 기독교도들은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의 지역 공동체를 회복하자는 대각성의 선봉으로서, 윌리엄 캐리는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뇌가 만들어낸 기억의 왜곡이든, 약을 빨고 환각을 봤든 스스로의 확신으로 무장한 사도들은 그 기적의 시대를 함께 한 세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생생함으로 그것을 증언했다.
복음서에서 수도 없이 강조하는 구절이 무엇인가. ‘이는 직접 본 사람의 증언이므로 참되다.’ 원시 기독교의 선교는 바로 그러한 ‘증언’이 핵심이다.
21세기에 매일 조롱이나 당하는 ‘간증’과는 무게가 다르다. 저 고대 구약 시절보다도 이전, 두 개의 강줄기 사이에 인간이 처음 벽을 둘러 자연과 자신을 구별했을 때부터 이어진 가장 중요한 관습이 재판과 증언이다.
그런데 캐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것보다 더욱 강력한 증거력을 가진 증언을 목도한 기분이었다.
캐리는 당당하게 서 있는 복여명 앞에서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붉은 깃발이 어디에서나 춤추고 있었다.
지금까지 캐리는 이것을 그가 익숙한 프랑스 혁명의 잔재쯤으로 생각했다.
스스로가 냉철하다고 생각하는 유럽의 많은 지식인처럼, 고려인민공화국을 조제프 푸셰의 정치적 오입질로 탄생한 프랑스 혁명의 사생아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제프 푸셰의 양자조차도 푸셰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
‘가장 천국에 가까운 자’들은 오로지 정시준을 말할 뿐이다.
신앙심 가득한 윌리엄 캐리는 등골을 따라 흐르는 냉기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정시준이 인도에서 자기 일을 방해한 목적을 알았다고 생각했다.
정식으로 선포된 적은 없으나 누구나 고려인민공화국의 국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 적기는 이제 캐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묵시록의 붉은 용(Red Dragon of Apocalypse, 天魔赤龍)……!”
마치 용이 꼬리를 휘둘러 별 삼분의 일을 떨어뜨리듯 런던 증권거래소를 휩쓴 뒤, 그 돈을 가지고 사특하고도 교활한 성경 해석을 퍼뜨려 양 떼를 미혹하던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자선 활동이라는 점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악마의 권속이라는 증거다.
원래 악마는 직접 악행을 하지 않는다. 그건 악마의 일이 아니다.
성경에서 악마가 사람을 죽이던가? 사람들을 툭하면 떼몰살시키는 것은 오히려 신이다.
이건 능력이 아니라 자격의 문제다.
원래 주인만이 종을, 그리고 아버지만이 자식을 죽일 수 있다.
만약 프리드리히 2세와 사도세자를 누구 다른 사람이 죽이려고 했으면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영조도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악마들은 빛과 선으로 위장하여 사람들을 유혹한다. 그럼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 그들의 기쁨이고 목적이다.
악하면 당연히 악마고, 선해도 그건 악마의 교활함이다. 이처럼 무적의 논리가 있었기에 기독교도들은 네로 황제부터 유럽 연합까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모든 인간과 조직을 용의 명령 받은 666의 짐승으로 몰아붙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사실인 것 같았다.
***
물론 지금이 무슨 십자군 시절도 아니고, 윌리엄 캐리의 맹목적 신앙 해석에 동의할 자는 교계에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짐승’들은 확실히 그 주인 되는 붉은 용과 같은 색깔을 가지고 용의 머리처럼 여러 곳에서 출현하고 있었다.
다만 짐승이라고 하면 떠올릴 무분별한 야만성과 잔혹성이 그들을 구별하는 특징은 아니다.
세 사람 이상이 모여 살기 시작한 이래, 지배자의 자원 추출기로서만 그 삶의 가치를 인정받았던 ‘인간’들과 달리 고고한 자존심을 다시 회복했다는 의미에서의 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맑고 푸른[淸] 나라의 군주가 자신을 다시 착취의 그물 아래 포획하려 내민 손을 사정없이 물어뜯고 있는 중화 혁명당 인민해방군의 피는 붉고 진했다.
전선은 크게 남쪽으로 물러나 있었으나 혁명당원 중 아무도 그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운남과 귀주의 총독은 사색이 되어 황제의 급한 허가를 받아 베트남에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병사’를 요구했다.
자롱 황제는 상국에 대한 충정으로 기꺼이 허락했다. 베트남 병사들은 청 황제의 지능을 비웃으며 희희낙락 국경을 넘었다.
그들이 잡으라는 반란군은 안 잡고 청나라 서남부를 은근슬쩍 타고 앉으며 관청을 점거하기 시작하자 도광제는 격노했다.
자롱 황제 역시 국내의 정치 불안정을 진화하기 위해 외부로 불만을 돌린다는 명쾌한 해결책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 하는 건 선을 넘었다.
연탄의 연금술사를 무슨 성기로 보지 않고서야 못 할 짓이다.
그는 세계 최강의 제국 대청의 전제 군주다.
1818년 여름, 도광제는 막대한 출혈과 희생을 감수하고 강남에 주둔하던 향용을 대규모로 늘려 베트남 전선에 투입했다.
요 한두 해 대륙 전체에 그렸던 피의 연성진은 헛수고가 아니었다.
항상 그렇지만 저항자는 어디까지나 소수다. 대규모 학살은 분명히 많은 주민들을 복종시켰다.
그 공포와 도광제의 돈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대군을 신속하게 갖추게 해 주었다.
외침이라면 명분도 있다. 황제의 호령 아래 8만에 달하는 양광, 복건, 강소 각지의 향용과 잔존 관군이 솟아나듯 집결했다.
혁명군 늘리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잔 시준이 봤다면 피를 토했겠지만 원래 대륙이 그렇다. 모으는 게 문제지, 자원 자체는 ‘그냥 많다’.
그 대군은 서남으로 달려갔다. 물론 시간이 없는 탓에 준비가 충실하다고 보긴 어려웠으나, 그 모자란 군비는 가는 길에 우연히도 적발된 ‘반역자’들에게 몰수한 재산으로 많이 충당되었다.
나름대로 구조조정도 진행하고 중화 혁명당과의 ‘실전’ 경험도 있는 강남의 군대 8만. 그 정도면 아시아 군대 상대로는 충분하다. 도광제는 영국에게 졌지 다른 나라에겐 진 적 없다.
‘사실 좆밥이었나? 나도 한번?’ 하는 심산으로 침공했던 자롱 황제의 군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몽골에게도 이기고 영국에게도 이기니까 뭔가 착각한 모양인데 베트남의 제국 상대 무적 전설은 어디까지나 ‘자국 방어전에서만 무적’이다.
다행히도 불요불굴의 군주 자롱 황제는 딱히 크게 실망하지 않았다.
돈은 백성들에게 있으니 말이다. 반란에 쫓겨 도망 다니던 시절에 비하면 이건 고민거리도 아니다.
그의 통치 철학으로 볼 때 백성은 쥐어짜면 짤수록 열심히 일해서 돈을 내고, 쓸데없이 선정이니 뭐니 해서 풀어주면 나태해지는 법이었다. 적어도 건축과 토목 역사(役事)로 논한다면 당시 베트남의 기상은 거의 대륙에 필적할 정도다.
과중한 세금과 노역에 고통받던 베트남 인민들의 생활은 전쟁 패배 복구 때문에 더욱 고달파졌다. 어느새 베트남에도 ‘붉은 책’이 은밀히 돌기 시작했다.
한편 베트남의 코뼈를 주저앉혀 아직 나 안 죽었음을 과시한 청나라는 일단 체면상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중화 혁명당의 대장정이 그 자취를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침투한 뒤였다.
적어도 666개는 넘을 것 같은 중국의 혁명 단체들은 혜성처럼 나타난 중화 혁명당의 영도 아래 뭉치기 시작했다.
여기서 혜성이라는 말의 의미는 갑작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돌아왔다는 뜻이다.
궤멸된 줄 알았던 중화 혁명당은 죽음에서 부활했다.
그리고 청조는, 3천 년 봉건 왕조의 죄악을 대표하여 위대한 혁명 앞에서 대속해야 할 것이다.
류큐에서는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는 왕에 대한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이강회의 유구 근문소는 전혀 상관없다. 영국의 대만 점령 선언에 맞서 그 코앞의 유구를 지켜야 한다는 정치국의 결정 같은 건 공식적으로 절대 없었다.
니라이카나이(ニライカナイ)라 이름한 그 운동의 뜻은, 번역하기 어렵지만 굳이 의역한다면 ‘지상낙원’쯤이 된다.
공화국 사람들이 모두 믿고 있는 정 진인의 낙원처럼 이것도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유구 근문소에 속한 노로와 유타들이 붉은 깃발과 신복으로 치장하고 앞장섰다.
“군주니 관리니 헛된 의관과 제도를 만들어, 하찮은 인간끼리 서로 치하하고 굽실대던 때는 이제 다 지났다. 마땅히 옛일을 회복할 때는 바로 지금! 끊어졌던 영험한 줄기[シジ, 시지]가 되살아날 때이며, 그 신도(神道)의 모범은 바로 북쪽에서 온 정 진인이 보여 주었다!”
월간 대혁명을 벽지 대신 발라 놓고 매일 읽던 류큐 사람들도 호응했다.
류큐가 원래 이렇게 난폭한 고장이 아니지만, 류큐인과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긴 어떤 사람들이 불어 넣는 논리가 너무 완벽했다.
“열심히 농사 지어 놓으면 다 가져가는 왕부가 한 일이 무언가. 왜적에게 머리를 조아려 그나마 하나 뺏기던 걸 세 개 뺏기게 만들지 않았는가?”
“왜적은 이미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든 공화국 인민들이 쫓아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굴 쫓아내야 하겠는가? 남이 다 밥숟갈 떠먹여 줄 때까지 기다리고서야 어디 유구의 인민이 생지당권을 지켰다 하겠는가?”
목표는 유구 조정만이 아니었다.
“내가 듣기로 이기리스(영국) 사람들은 저 옆의 이주(대만)를 점거하였는데, 부녀들은 모두 병사의 노리개가 되고 남자들은 저 해적 놈들 좋아하는 배를 만들려 물속에서 다리가 썩어가며 일하고 있다 하네.”
다리 어쩌고는 영국이 아니라 옛날 조선에서 일어나던 일 같았지만 영국인에게 덮어씌워도 그럴싸했다.
“자네들도 조상 대대로 해적이라는 서양인의 소문은 들었지? 귀축(鬼畜)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믿을 건 오직 생김 비슷한 사람뿐이네! 저놈들 봐봐. 척 봐도 냄새나고 끈적끈적하게 생겨서 마치 사람이 아니라 누런 털의 이리나 승냥이 같지 않은가!”
귀축. 그렇다. 그 단어는 왠지 모르겠지만 대단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 시점에서 류큐 니라이카나이 혁명단은 약간 주춤했다.
류큐 사람들은 잘 아는 슈리성과 관부를 습격할 각오는 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에게 맞서 싸울 각오까지는 해 두지 않았다.
그건 인간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다. 그래서 그 ‘유구 혁명 열사’들도 적절히 흐름을 통제하여 동인도 회사 소유의 설탕 농장에 대한 습격은 막았다.
류큐인들은 어쩔 수 없이, 정말 어쩔 수 없이 참는다며 영국인을 ‘봐줄’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그 전위대 동지들이 막지만 않았으면 이기리스 놈들을 죄다 요절내었을걸! 정말이고말고! 절대 무서워서 물러난 게 아니라니까!”
‘류큐인들을 설득한’ 유구 근문소가 동인도 회사와의 우정을 공고히 한 것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행복했다.
쇼코 왕만 빼고 말이다.
더 이상 민심을 감당할 수 없어지자, 쇼코 왕의 애첩 중 하나였던 노로가 몰래 성문을 열었다.
그해 처서가 오기도 전에 왕은 쫓겨나게 되었다. 원래 역사보다 상당히 빠른 시점이었다.
다만 혁명작두는 아직 가동되지 않았다. 류큐인에게 있어 참수라는 관습이 그렇게 오래된 게 아닌 데다가, 더욱 충분히 공화국의 영향력을 침투시키지 않은 채로 남의 나라 왕을 덜커덕 죽여 버리는 일은 정치국으로서도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쇼코 왕은 제발 누구 왕처럼 다리 자르고 머리 자르지 말고 그냥 한 번에 죽여 달라며 감옥에서 애원하게 되었다.
짐승들이 날뛰기 시작하는 것은 징조[Omen]의 하나다.
그리고 징조는 연이어서 발현한다. 그해 추석이 되었을 즈음, 동아시아의 모든 혼란을 한 번에 대표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다.
드디어 대만에 영국 본국 해군 함대가 도착한 것이다.
육해군과 기타 지원 인원을 합쳐 총원 1만 8천여 명. 배는 30척이 넘는다.
나폴레옹 전쟁기에조차, 트라팔가와 같은 건곤일척 정도를 빼면 이 정도의 해군 전력이 한 전투에 집중된 사례는 찾기 힘들다.
물론 이번엔 전역 전체를 감당해야 하므로 사정이 다르다.
게다가 거리가 멀다 보니 여러 종류의 보급함이 많이 포함되어 규모가 커진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해도 아시아에는 전무후무할 정도의 규모다.
용의 머리는 일곱 개다.
그리고 일곱 개의 대접이 땅에 쏟아지며 또한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분다.
아직 임명되지 않은 ‘중국 총독’ 위임장을 앞에 두고, 총독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발사한 예포[Salute]는 마치 그 나팔 소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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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이성숭배’는 종교를 지워 버리고자 했던 프랑스 혁명정부가 가톨릭을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이신론 사상입니다. 로베스피에르 정부 때 이루어진 일이며, 전직 가톨릭 사제 조제프 푸셰는 여기에서도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건 다음해에 최고존재에 대한 제전[La fête de l‘Être suprême]이라는 거창한 행사로도 발전합니다.
대우주 자체와 인간의 합리에 대한 갈망, 지식 추구를 본령으로 지정하여 어떤 황제 폐하… 가 아니라 현대인이 보기에는 꽤 매력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게 당시 가장 잘 활용된 부분은 인류 문명 자체의 발전이라기보다 프랑스 각지의 교회 재산을 전부 몰수하고 교회를 ‘이성의 제당’으로 바꾼 부분이죠.
2. 자롱 황제는 업적만 늘어놓고 보면 군대 개혁, 세제 개혁, 도로와 성곽 건축, 과거제 정비, 서양 문물 도입 등 개화기의 위대한 군주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이 대개 그렇듯 이것도 기득권 편중적이고 백성에게 과중한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중 많이 나왔던 베트남 해군과 강건한 요새 및 발달된 서양식 육군 역시 실속을 따져보면 구멍이 많았죠(그래도 윌리엄 드루리가 패배한 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자롱 황제 사후로는 거듭된 민란 때문에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쇠퇴합니다.
3. 작중에서는 고려의 일이 아니라 간단하게만 나왔습니다만, 태평 천국의 난 당시 청국이 동원한 병력은 (연인원으로) 적게 잡아도 100만 이상, 많이 잡으면 3백만 이상까지 추정됩니다. 작중 진행된 도광제의 구조조정으로 규모가 줄었다고 해도 8만 정도 새로 급히 모으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을 겁니다.
4. 영력, 영험한 힘, 신력 등으로 번역되는 시지는, 사람만이 아니라 물건에도 깃든다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디나 보편적으로 흔한 신목 전설에서, 이 나무를 베면 ‘나무의 무언가’가 노하여 재앙이 일어난다고 할 때도 그 무언가에 대해 시지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한국인이 ‘용한 무당’이라고 표현할 무속인은 류큐에서 ‘시지가 높다’고 하지요.
시지는 이후 (일본 등지의 사족 질서를 수입하여) 부계 질서의 ‘계보’라는 뜻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조상에게서 내려오는 ‘업보’의 의미도 포함하는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뜻이 있습니다.
5. 노로의 위치상 류큐 왕과 여러 가지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입니다. 일례로 15세기 후반의 왕이었던 쇼토쿠 왕과 그 연인 쿠니차사(クニチャサ)의 유명한 전설이 있는데, 두 사람이 밀회를 즐기다가 반란을 막지 못해 동반 자살했다고 하며 현재도 무용극 등 관광 상품으로 잘 팔리고 있습니다.
6. 물론 예포를 저런 식으로 쓰진 않습니다. 방문한 쪽은 오히려 해군이기도 하고요. 나중에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독자분들이 짐작하시다시피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있는 행위입니다.
다만, 비슷하다고 해도 될진 모르겠습니다마는 유럽에도 물건으로 사람을 갈음하던 사례가 전혀 없던 건 아닙니다(동양에는 적잖게 있었음). 막시밀리안 1세가 합스부르크의 주특기인 결혼으로 카스티야-아라곤을 집어삼킬 때, 프랑스가 혼사길을 막아서는 바람에 장갑을 대신 보내 결혼한 사례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