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83. 붉은 짐승(2)
요 1년간 시준이 외정만 신경 쓴 것은 아니다.
시준이 사려 깊고 두루 살피는 성격이어서는 아니고, 그의 자리가 그러한 나태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영농을 경제 구조에 편입시킨 뒤로도 ‘단결’을 위한 여러 조치는 이어졌다.
그중 하나는 지역마다 주먹구구식으로 설립, 운영되고 있던 야학을 일정한 체계하에 합친 것이었다.
이서구가 맡고 있는 교양권과부 야학과는 혁명재판소장 대리 이서구의 뒷배로 부서를 크게 확대했다.
교양권과부 학교국(學校局)의 새 간판을 달자 이서구는 나이답지 않은 의욕을 보였다.
그는 그간 혁명정부의 일을 도우면 역사에 오명이 남지 않을까 걱정하던 여러 선비들을 직접 찾아가는 정성을 보이며 끌어들였다.
이서구는 구세대의 선비 출신으로서 여전히 유생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기에 심리적 장벽도 많이 허물 수 있었다.
혁명 초기에 합류하지 않은 전조의 유생 중에는 이야순처럼 적극적인 공화국 진출을 시도한 자도 있었으나, 아무래도 유생의 입장상 혁명정부에 찬성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여진족의 문화 검열에 신음하는 한족 선비와 비슷한 위치로 포지셔닝했다. 그러고는 자기들끼리만 아는 은유와 암시로 혁명정부를 비판하는 중이었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21세기 키보드 워리어와 별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긴 모든 선비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국왕인 효종도 키보드로만 북벌을 했으니 그들이 특별히 더 욕될 건 없다.
물론 언제나 실천성을 중시하는 혁명의 자세에서 그런 자는 신경 쓸 것이 못 된다. 그래서 딱히 대규모로 숙청되지도 않았다.
옛날 같으면 선비가 숨어 산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사방의 제후가 흠모하고 천자가 기특히 여기는 아름다운 행동이다.
허나 이제 그런 속 편한 시대는 끝났다.
이서구가 겪었던 것처럼, 그들은 훈장 노릇 하기도 어려웠다. 주석 동지의 혁명사적을 빼놓은 교육이란 건 논어에서 예(禮)라는 글자를 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걸 배워서 어떻게 출세한다는 말인가? 시준은 자기가 학문이 얕은지라 고전 교육에 열의가 없었고 야학에서는 주석 동지를 찬양할 때가 아니면 고전이 잘 인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쓸모가 없는 학문이다.
다만 선비들이 굶주려 있는 건 돈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회 지도자이자 모범이 될 식자층으로서의 위치 회복을 갈망했다.
만약 생계 문제만 걸려 있었다면 차라리 상조농장에 들거나 자기 땅 파먹고 살지 굳이 공화국 정부와 연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서구가 내놓은 교원 대우는 선비들의 급소를 찌른 것이었다.
선비들은 양갈래 금발머리 소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글 읽은 선비로서 영달을 구하는 건 아니지만 후진 양성은 배운 자의 의무라…….”
“나라에서 선비를 천대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는 않소이다마는 척재 어른, 아니 국장 동지의 말씀이라면야 고명하신 문사의 체면을 봐서라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걸려든 사람들은 아직까지 근로기준법이 제정되지 않은 공화국 국무당에서 정시준식 공무원 행정에 시달렸다.
시준은 지금 시대에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혹은 고의로 무시한 채 직원들에게 21세기와 비슷한 성과를 요구했다.
차라리 농사가 낫겠다며 도망간 선비들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간신히 되찾을 가능성이 보이는 ‘존경’을 다시 버리기 두려웠다.
그들은 밤마다 저 뚝뚝 흐르는 영길리초의 길이가 자신의 남은 수명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공무에 매진했다.
그래서 성과도 빨리 나왔다. 학교국에서는 언문, 산술, 체조, 기예(미술, 음악) 등 다양한 과목을 획정하고 ‘정치 지도원’들의 빈틈없는 배치를 기반으로 한 위계 감독체계를 짜내었다.
물론 가장 많은 시수를 차지하는 과목은 이 나라답게 역사다.
종묘를 때려 부순 시준이라도 21세기 한국인인 이상 차마 조선왕조실록을 불태우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 보존 조치는 혁명 선비들에게 다른 방향으로 이해되었다.
‘걸주 같은 암군이라 할지라도 사서에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은 바로 후대에 교훈을 삼기 위함이다.’
고학년들에게는 반동 조선의 인민 착취 역사가 중점 강의되었다. 물론 이어지는 주석 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적도 절대 빼놓을 수 없다.
분명 아직은 공화국보다 조선을 겪은 사람이 훨씬 많이 살아 있건만, 역사는 순식간에 재창조되기 시작했다.
시준이 내놓은 ‘정기 조회’와 ‘교장 훈화’, ‘아침 체조’ 등 혁신적인 – 그리고 틀림없이 학생들은 싫어할 – 신기한 의식 역시 속속 도입되었다.
‘멀리서 힐끗 보면’ 현대의, 정확히는 시준이 어렸을 때의 학교와 비슷했다. 만약 시준이 시간이 좀 있어 가까이에서 참관할 기회가 있었다면 여기 잔뜩 들어간 정감록파의 향취에 기함했겠지만 말이다.
학생들을 줄 세우고 일사불란한 동작을 취하도록 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에는 혁명무력부장 차형기가 답했다.
“모르는 소리 하지 말고 모두 얌전히 주석 동지의 영도를 따라라. 이는 장차 어떤 인민이라도 즉시 병사가 될 수 있도록 하여 누구든 수평하게 혁명군의 전 세계 인민 해방 대열에 참여하게끔 인도하기 위함이니. 이게 바로 전 인민의 무장화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주석 동지와 그 시선을 나란히 하는 혁명무력부장의 혜안에 감탄했다. 10년 전만 해도 깡패 두목이었던 차형기가 저런 유식한 말까지 하는 걸 보니 혁명이 대단하긴 대단했다.
***
과연 차형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머리 굵은 학생들은 물론, 이제 예닐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까지도(학령 구분을 나이에 따라 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이제 곧 일어날 중국 인민 해방 전쟁’에 대해 떠들었다.
가장 활발한 곳은 역시 평양이었다. 개화기에 보여준 것처럼 교육열이 높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혁명의 심장으로서 갓난아이까지도 혁명적으로 태어난다는 곳이기 때문이다.
보통교육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사회적 계급과 관계없이 인민들이 섞이는 공동체를 마련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오전 수업이 끝나자 – 오후엔 동생 보거나 소꼴 베어야 한다 – 와글와글 몰려서 하교했다. 인민위원회 위원의 자식도 있었지만 그냥 농부나 공장, 군인의 자식이 훨씬 많았다.
“어른들이 말하는데, 되놈들이 무섭지만 주석 동지께서 천지조화를 부리면 다 한 방에 몰살이라고 했어. 틀림없이 이겨서 반동의 재산을 몰수해 돌아오면 우린 배불리 먹을 수 있대!”
“맞아, 맞아! 우리 아버지도 이번에 혁명군으로 자원하신다고 했어.”
“우리 맏형도 그렇단다! 아, 그러고 보니 너희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우리 형과 한 방에서 막 울던데 병사로 나가서 못 보는 게 어지간히 서운했던 모양이더라.”
“응? 우리 어머니는 어제 외가에 다니러 간다고 하셨는데?”
“하지만 내가 봤는걸!”
“그래? 집에 가거든 아버지한테 물어봐야겠다!”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사회의 미래는 항상 밝다.
그리고 그중에는 현재 자기 발로 나다닐 수 있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후손이자, 선전선동부장 조제프 푸셰의 양자 복여명도 있었다.
하지만 여명이는 대화에 그다지 많이 참여하지 못했다. 부모나 가족에 대해서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동무들이 그를 두고 ‘그 녀석 양친이 없잖아?’라고 한 뒤로 여명이는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여명이는 그저 묵묵히 걸었다.
***
명색이 정치국 위원의 아들인데 골목대장 노릇은 못할망정 이게 웬 말인가 하겠지만, 사실 아이들의 권력관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친구가 집안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민감하게 느낀다. 부모의 사랑이 바로 아이들의 지상 과제이므로.
그런데 여명이와 푸셰는 그저 따뜻한 부자 관계가 아니었다.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푸셰에게 있어 복여명은 이제 그 존재가치가 희미해져 가는 안전장치다.
푸셰가 여명이를 거둔 것은 넘쳐나는 인류애 때문이 아니다. 반란으로 혁명정부가 뒤집히더라도 ‘자신의 안위만은’ 보장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재 공화국에는 복벽파의 씨가 말랐다.
국가보위총국의 노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조선의 마지막 세 왕이 워낙 인상적인 위업을 세웠기 때문이다.
공화국에는 이야순처럼 시준의 반대파도 분명 있다. 건전한 국가라면 오히려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푸셰가 당연히 예상했던 프랑스식 왕당파가 여기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던 게 그의 계산 착오였다.
쓸모가 없어졌다면 만들어서라도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푸셰가 여명이의 대부로 주석 동지를 세우려고 그렇게 노력한 것이다.
그가 ‘반동의 혈통을 보호한다’는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명이를 강철군주의 아들이 아니라 주석의 피후견인으로 더 강하게 채색하는 작업은 필요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푸셰의 생각대로 성공했다.
그렇다 해서 주석이 대부 해 준 것을 믿고 거들먹거릴 만큼 푸셰가 권력의 초보는 아니다. 푸셰는 오히려 자신과 여명이의 겸손함을 널리 선전했다.
“내 아들이자 주석 동지의 피후견인인 복여명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다른 인민의 아이들과 완전히 수평하오. 그 어떠한 특별대우도 없을 것이오.”
그래서 여명이도 평양의 계몽학교(啓蒙學校, 초등학교)에 똑같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여명이가 학교에서 뭘 배우고 어떤 생활을 할지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푸셰가 공정하고 인의로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 중요했다.
오로지 자신의, 자신에 의한, 자신을 위한 인생만을 사는 남자. 그것이 조제프 푸셰였다.
***
허나 그렇다고 여명이가 무슨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배운다. 그리고 그 부모는 여명이의 부모와 후견인이 누군지 아주 잘 안다.
조제프 푸셰가 여명이를 도구로 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푸셰는 여명이에게 충분히 명예로운 대우를 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명예보단 애정이긴 하지만.
푸셰는 평균적으로 봤을 때 모범적인 아버지였다. 유럽에서도 부친으로서의 경험이 있는 푸셰는 여명이와 사흘에 한 번은 저녁 식사를 같이했으며 프랑스어도 가르쳤다.
여명이를 통해 왕비 김씨를 설득하는 것도 목적의 하나였기 때문에, 푸셰는 여명이를 가죽 벨트로 후려친다거나 입에 잿물을 부어 넣는다거나 하는 ‘일반적’ 체벌을 거행하지 않았다.
아들과 같이 사랑의 도피를 꿈꾸던 애인의 모가지를 잘라 아들의 면전에 들이미는 프로이센 왕가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다.
조선도 사실 별로 다르진 않다. 서쪽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있다면 동쪽엔 과학군주 영조가 있다. 이 시대 아버지란 게 동서양 안 가리고 대충 그랬다.
견뎌내면 프리드리히 대왕이 되는 것이요, 못 견디면 사도세자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공화국 인민들에게도 복공은 충분히 양자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애가 굶어서 누렇게 뜨거나 어디가 부러져서 절뚝거리거나 갑자기 물고 났다는 소리는 안 들렸으니까.
만민 수평의 대의가 엄정하니 아이들에게 도련님 모시라는 당부는 못 하지만, ‘복공 댁 아들’과 친하게 지내라는 말 정도는 해 둘 수 있는 것이다.
복잡한 권력관계는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 역시 복여명의 위치 정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어른이 이해하기 힘든 기작이라서 그렇지 아이들도 나름대로의 고도화된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집단 괴롭힘은 고대의 인신공양과 그 프로세스가 대단히 유사하다. 희생양을 만들어서 단체의 결속을 도모한다는 면에서.
그래서 그 하굣길은 꽤나 치열했다. 분명히 어른들이 보기에는 같이 잘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베틀의 씨실과 날실처럼 복잡한 분위기와 암시가 오가는 중인 것이다.
그러한 불편을 깬 것은 아이들의 앞에 나타난 한 서양인이었다.
학생들은 모두가 여명이를 돌아보았다. 이 중 서양인과 관련 있을 듯한 아이는 여명이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중 한 아이가 소리쳤다.
“여명이 아버지다!”
아무리 여명이가 주눅이 들어 있다 한들 애비를 바꾸는 이 사태는 조선인의 효성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여명이는 동무들이 그 서양인에게 주춤주춤 인사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대머리 아냐!”
그 대머리 서양인은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그의 조선말이 아무리 서툴다 해도 아이들의 시선과 손짓 정도면 뜻을 알아채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대머리 예언자 엘리사를 놀리다가 암곰에게 모조리 찢겨 죽은 아이들 꼴로 만들어 주겠다고 외칠 수는 없다.
평안도 곰이 이미 포수들에 의해 씨가 말라서는 아니고, 그가 그렇게 당당한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인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복여명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영길리 사람 가리일(加利壹, 윌리엄 캐리의 조선식 이름)이라고 한다.”
그의 어휘는 거기까지인 듯 보였다. 간첩과 마찬가지로 선교사들 역시 언어에 능통하기는 하나 배울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캐리는 프랑스어로 바꿔 말했다.
“대충 들었다. 네가 오트란토 공 조제프 푸셰의 양자라지. 친구들과 어디 가는 길이냐? 우선 이거라도 좀 하나씩 나눠 먹거라.”
윌리엄 캐리가 준비한 것은 평양성 인민당과점(人民糖菓店)에서 파는 설탕 과자였다. 요즘 류큐에서 들어오는 설탕을 독점한 서상은 일종의 공공판매소를 열어 그것을 팔았다.
원래 역사의 효명세자도 아이답게 과자를 참 좋아했다. 외숙부 김유근에게 과자 좀 달라며 여섯 살짜리 고사리손으로 편지까지 쓸 정도로 말이다.
지금은 효명세자라는 이름을 달 수 없고 외숙부 역시 과자를 줄 수 없지만, 복여명은 아까까지의 일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손을 내밀었다. 양부에게 약간 배운 프랑스어가 유창하게 튀어나왔다.
“Merci beaucoup(고맙습니다)!”
다른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즉시 복여명 동지의 추종자가 되었다. 아무래도 저 양귀자 말을 하지 않으면 과자를 못 얻어먹을 듯해서였다.
***
인도에서 쫓겨난 윌리엄 캐리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사태의 원흉이라고 짐작되는 고려에 다시 밀입국한 처지였다. 중간에 들른 중국 개항장에 고려 사람들이 있어, 거기에서 몇 개월 머물러 말을 배우면서 기회를 노렸다.
들어오는 것쯤이야 벵골 밀입국보다 쉬웠다. 선교사에게 있어 국경을 몰래 넘는 정도는 기본 소양이다.
이발사가 의사도 겸업하던 것처럼 원래 선교사와 간첩은 동종업계에 가깝다. 종교가 국가를 대변하던 시절이 길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간첩이 잡히면 온갖 비합법적 처형을 피할 수 없듯,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기름에 튀겨지거나 앞뒤로 노릇하게 구워지거나 산 채로 짐승에게 던져졌던 일은 비기독교 문명권의 잔인성이라기보다는 간첩이 당연히 감수해야 할 위험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지금 윌리엄 캐리는 그런 위협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고려인민공화국은 딱히 기독교 선교를 탄압하지 않았다. 사학죄인 출신이 득실대는 공화국 정부에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잘하면 일요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던 시준 역시 특별히 기독교를 막으려는 시도는 한 적 없다.
무엇보다 윌리엄 캐리에게는 좋은 협조자가 있었다. 캐리가 상하이에서 우연히 만난 그 사람은 사정을 듣더니 흔쾌하게 일행으로 끼워 주었다.
그저 사냥꾼이나 허름한 뱃사람 같았던 그자의 정치적 지위가 꽤 높은지, 삼화부 항구에서는 어떤 종류의 불쾌한 검문이나 돌발 상황도 없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협조자’는 고려인민공화국의 대의원이자, 공화국에서 가장 큰 이익단체 중 하나의 수장이며, 정치국 위원을 제외하고 주석 동지와의 일상적인 독대가 가능한 몇 안 되는 비선 측근이었기 때문이다.
1년이 넘는 시간 만에 다시 시준을 본 기랑은 마치 근처 마실 다녀온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모르는 척하고 데리고 왔어. 그자를 통해서 흔도사단의 사정을 들어 두면 영길리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 온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시준은 기랑에게서 생경한 기분을 느꼈다.
단지 오랜만에 만나서는 아니다. 기랑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 전까지의 기랑은 시준이 진행하는 사업을 수동적으로 돕는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에서 있었던 여러 보고를 종합해 보건대 기랑은 이제 명백히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부정적인 표현은 아니다. 시준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같다. 달라진 점은…….
‘더 이상 내 생각을 물어보지 않는다는 점이지.’
예전의 ‘죽일까?’ 하던 기랑이가 아니라는 의미다. 솔직히 그쪽이 더 신경 쓰여서, 시준은 선교사 한 명 따위에겐 관심 가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동안 기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준은 기랑이 고개를 갸웃하자 황급히 말했다.
“아주 잘 해 줬다. 고마워. 윌리엄 캐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기 영길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그자는 동인도양행 사람들과 사이가 안 좋아. 그래서 복공 얘길 해 줬으니 아마 거기로 갔을 거야.”
시준은 그 뒤에 할 말을 떠올려 보았다.
꺼낼 얘기는 많았다.
영국군과 신무기 판매의 끈을 만들어 준 것, 의도하진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발생한 공매도 수익의 이득, 그리고 중화 혁명당과 러시아의 연계라는 본래 임무의 완벽한 완수까지.
무엇보다 기랑이 무슨 전설처럼 가져온 약은 지유의 완쾌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분명 시준의 입장에서 다른 모든 사항보다 동충하초가 더 반가운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시준은 어째 그 얘기를 쉽게 치하하기 힘들었다.
그랬기에 그 일보다 ‘사소한’ 여러 국제관계에서의 성공에 관해서도 먼저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시준은 다 건너뛰고 뭉뚱그릴 수밖에 없었다.
“먼 곳에서 정말 고생이 많았다. 고총련에는 앞으로 있을 전쟁의 병기며 기계 대는 일감이 많이 갈 거야. 하지만 네가 해 준 일에 비하면 부족하지. 또 뭐 원하는 건 없어?”
기랑은 희미하게 웃었다.
상당히 무례한 생각이었지만 시준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원천이 뭔지 알 수 없어서 고심했다. 왜 자기가 자꾸 몰리는 느낌이 드는지도.
기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등을 돌렸다.
“곧 가지러 갈 테니까 기다려.”
기랑은 그대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문을 나가기 직전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기랑이 물었다.
“왜?”
시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할 말을 왜 네가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바로 자기가 방금 기랑을 불러세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그 직후였다. 시준은 허둥대며 말했다.
“아, 그래. 그러니까…….”
시준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오늘처럼 멍청이 같은 날이 또 있었을까 생각했다. 당장 바깥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조금 뒤에야 시준은 간신히 평이한 말을 꺼내놓을 수 있었다.
“잘 돌아왔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기랑은 다시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뒤돌아 나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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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아들에게 9살 때부터 군사 훈련을 시키고, 영유아기부터 대포를 기상 나팔로 쓰게 하고, 남자다워져야 한다는 구실로 매일같이 패고 또 팼습니다. ‘감히 (날씨가 춥다고) 장갑을 껴!’ 하는 이유로 구타당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왕자입니다.
아들한테만 그런 게 아니고 딸(공주입니다)과 부인(왕비입니다)에게도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둘렀죠. 영유아 때 사망한 프리드리히 대왕의 두 형이 이런 식의 학대 때문에 죽었다는 말이 있지만, 반론도 있어서 확신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했습니다.
그런 그의 눈에 아들 프리드리히 2세(프리드리히 대왕)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겁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가정교사 겸 친구 겸 동성 연인이었던 한스 헤르만 폰 카테를 참수시키고, 그 광경을 아들이 보도록 강요합니다.
볼테르는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아들을 확고히 죽이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군법재판만 요란하게 했을 뿐,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가족 관계로 봤을 때 아마 중간에 막혔을 겁니다. 실제로도 황제나 다른 제후들은 아들 패는 것까진 몰라도 죽일 기세가 되자 많은 압력을 행사했고요.
성적 지향 때문인지, 아니면 가정이 막장이어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은 자손을 보지 않았습니다. 결혼은 했지만 순전히 정치적 이유였고 즉시 별거했으며, 정황상 왕비와 단 한 번도 동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의 왕위는 조카에게 넘어가죠.
2. 윌리엄 캐리는 조선에 온 적이 없어서 저 조선명은 창작입니다. 선교사들은 현지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현지식 이름을 많이 만들어 썼습니다. 구한말의 원두우(언더우드)라든가, 아니면 훨씬 전의 이마두(마태오 리치)라든가.
3. 엘리사는 구약에서 활약하는 예언자입니다. 현대에 익숙하실 프랑스어 버전 이름으로는 엘리제(남자입니다).
수많은 이적을 일으키고(타인의 부활, 치유, 음식, 해독 등등 신약에서 거론된 예수의 기적을 거의 다 행합니다. 예수 자신도 언급하죠.) 지지자를 모아 북이스라엘 왕조 재건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을 보면, 흔히 예수 그리스도의 대체역사로 논의되는 ‘유대인의 왕’ 실현 루트와도 비슷해 보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