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83. 붉은 짐승(1)
지금은 고대처럼 파(巴)‧촉(蜀)으로 들어오는 길이 딱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다.
강남으로 해서 진(晉)나라 용양장군 왕준(王濬)이 손오(孫吳)를 멸했던 그 길을 거꾸로 되짚어 올라갈 수도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아예 섬서성 서부로 크게 돌아 티베트 쪽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19세기는 파촉 이서(以西)가 이세계 다크랜드에 가까웠던 진한 시대가 아니다. 인구 분포를 무시하고 단순히 지도만 보면 파촉은 서쪽 변방이 아니라 오히려 제국 중앙에 가깝다.
그러나 지금 강남을 통과하다가는 가는 길에 있는 역적들 때문에 죽이다 죽이다 진 다 빠질 판이다. 게다가 반란군의 본거지는 사천 북부 쪽으로 판단되는지라 거리도 너무 돌아가게 된다.
청조의 멸망을 바라는 세력이 중화 혁명당뿐만은 아니라서 서북으로 크게 우회하는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기도 힘들다.
그렇다 보니, 북동에서 접근하는 청군은 힘들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가장 가까운 경로를 택해야 했다. 즉 관중에서 남으로 진령(秦嶺, 친링 산맥)을 넘는 길이다.
초한지나 삼국지연의 같은 곳에는 이 지방의 여러 길로 현란하게 펼쳐지는 전략가들의 수 싸움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지리의 천재 마속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여러 개의 안정적인 통로가 있었으면 범수가 미쳤다고 그 대공사를 할 이유가 없다.
일부 별동대가 목숨 걸고 내달릴 샛길이야 있겠으나 대군이 통과할 만한, 그리고 군사보다 더 중요한 평시 물류에 적합한 길은 19세기인 지금도 극히 한정된다.
그러니까 애초에 고대부터 여기에 잔도(棧道)를 만든 데에는 다 까닭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화 혁명당 군사위원장 송주령은 청군이 여기로 오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청군이 의외로 조심스럽게 나아오고 있다는 사실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청군 지휘관은 군공이나 무용보다는 정치적 이유에 따라 임명된 도광제의 장인 항주장군 서명아(舒明阿)였다.
다만 서명아를 저 옛날 정통 연간의 왕진(王振)과 같은 자로 보면 곤란하다.
그는 자신의 역량을 잘 안다는 아주 귀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중군에 머문 채 장수들의 정석적 지휘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군대가 황제에게 이반하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청군은 이 좁은 길에 대군을 그대로 밀어 넣는 위험천만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선봉과 본대는 적지 않게 떨어져 있습니다. 위원장. 아무래도 척후로 먼저 나아가 길을 살피러 온 자들인 듯합니다.”
“그러면 전부 걸려들진 않겠군. 어쩐지 너무 적다 했어. 한 일만 명 정도인가?”
“그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만 명 정도면 중화 혁명당 주력군과 정면으로 싸워도 되고, 잃는다 해도 대군의 궤멸까지 이어지지는 않는 딱 적당한 숫자다.
송주령은 아래를 힐끗 바라보았다. 과욕은 금물이다. 아무래도 적이 무능하기를 바라서는 안 될 것 같다.
“할 수 없지. 저놈들이 자세히 보다 보면 들킬지도 몰라. 시작한다.”
“예!”
송주령은 기랑이 준 발화철을 들고 톱니바퀴를 내리그었다. 실을 꼬아 만든 심지에 불이 붙었다.
중화 혁명당은 ‘잔도를 지키려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달아난’ 듯한 인상을 주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청군 선봉대는 반적들이 잔도를 진작 불태우거나 끊어 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경계를 하지 않았다.
역적의 입장에선 시간이 없었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다만 잔도가 이어져 있다고 해도 지형이 위태한 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선봉이 먼저 나아간 것이다.
말이 길[道]이지, 잔도 대부분의 구간은 절벽에 널빤지를 박아 넣은 것에 불과하다.
여길 지나가는 짓을 곡예가 아니라 도보라고 부르는 만행에 군마들은 격분했다.
사람은 어떻게든 자신을 속일 수 있지만 짐승은 그렇지 않다. 팔기의 군마는 어마어마한 높이와 너무 좁은 발판 때문에 공포에 질렸다.
잘 훈련된 군마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들은 짐승에게 너무 과도한 요구를 하는 주인을 향해 반항하며 날뛰었다. 몇몇 불운한 말은 주인과 함께 잔도 아래로 떨어져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예상한 손실. 서둘러 빠져나가 한중 안쪽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 선발대의 임무다.
그렇게 서두르던 선봉대는 기묘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 옆을 흐르는 포하(褒河)의 물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물소리보다 훨씬 컸다. 그리고 짧았다.
가장 먼저 청군을 덮친 것은 흙먼지였다. 최소한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병사들이, 그러니까 살아남은 병사들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뒹굴고 나서야 장수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폭탄인가!”
잔도의 벽면, 병사들이 간신히 손을 짚고 나아가던 거기에 구멍을 뚫고 심어 둔 폭탄이었다.
반란군이 자기들 편하려고 달아 놓은 줄 알았던 난간 비슷한 물건은 사실 도화선을 넣어 둔 대나무 통이었다.
그 안을 따라 치달린 불은 절벽 전체를 무너뜨리는 듯했다.
물론 중화 혁명당이 가진 폭약을 전부 다 쓴다 해도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지만, 폭탄이 품고 있던 날카로운 쇳조각은 그 위력 부족을 충분히 메워 주었다.
“으아아악!”
얼굴이 찢어지고 눈알이 뽑히며 팔다리가 날아갔다. 폭압을 일으켜 사람을 날려버릴 정도는 아니라는 게 더 악랄했다. 파편은 어디로 피할 수도 없는 청군을 갈가리 찢었다.
최근 급격히 늘어난 공화국의 광산 발파 경험으로, 고총련은 지향성 폭발이 뭔지 대충 알고 있었다.
시준이 개발한 것은 아니었다. 시준의 서바이벌 지식으로 IED를 만들 수 없는 건 아니나, 그건 적어도 주변에 시계라든지 트랜지스터(보통은 스마트폰이 있으면 된다), 플라스틱 폭약 같은 공산품이 있을 때 얘기다.
정말이지 능력치 선택 미스가 이토록 치명적인 사례도 별로 없을 것이다. 천재적인 삼겹살 요리 솜씨를 가지고 오스만 제국에 환생한 꼴이다.
다만 시준은 그것이 어떤 원리로 일어나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경험칙이 발견되었을 경우 ‘그게 맞다’고 확언해 줄 수 있었다.
현대인은 기술을 마법으로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 다시 말해 쓰기만 하지 재현할 수 없다고 – 조롱받지만, 이 정도만 해도 시행착오를 수십 년까지 줄일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중화 혁명당은 단번에 잔도를 끊거나 길을 터뜨리지는 않았다. 청군의 선택지를 단 하나로 줄이기 위해서다.
“뒤로 물러나라! 밀치거나 허둥대면 한꺼번에 밑으로 떨어진다! 소란을 일으키는 자는 선 채로 목을 베리라!”
여기서 허둥대지 않는 건 영국군이나 프로이센군도 하지 못하는 짓이다.
구멍 뚫린 자루에 급히 쌀을 담아 옮기는 형국으로, 청군은 아군을 우수수 포하에 떨어뜨려 가며 이동했다.
그리고 청군이 그렇게 밀집되었을 때가 중화 혁명당이 바라던 순간이었다.
중화 혁명당에 정확한 시간별 발파를 실행할 기술은 없다.
그래서 송주령은 잔도 건너편에 북한 땅굴포대 비슷한 호진지를 설치해 놓은 채 불화살과 총포를 퍼부었다.
폭약과 기름, 짚을 안 보이게 설치해 두었으니 진짜 딱 한 발만 맞으면 된다.
잔도의 지형상 그곳으로 사격할 수 있는 위치가 극히 제한되기에 편한 곳을 가릴 틈은 없었다.
이 포대를 마련하기 위해 중화 혁명당은 돌을 뜨겁게 달구었다가 냉수를 부어 가며 쪼개는 고대의 석문(石門) 공사 기술까지 동원해야 했다.
청군이 예상 못 한 사격에 당황하는 사이 기어코 불이 붙었다.
영화에서 휘발유 잔뜩 써서 일으키는 요란하고 커다란 화구(火球) 같은 것은 만들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잔도를 지탱하는 핵심 목재들이 불기운과 충격을 못 이기고 부러져 나가거나 뒤틀리기만 해도 충분하다.
그다음은 일만 청군의 무게와 중력이 해결해 준다.
청군의 대부분이 삽시간에 붕괴하는 다리와 함께 침몰했다. 남은 자는 절벽에 매달리다시피 한 자세로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송주령은 자신이 말한 대로 더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그녀는 끝까지 남았던 정예병을 데리고 철수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청군 지휘관 서명아는 잔도를 고치고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지에 대해 고심했다.
둘 모두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잔도 외의 다른 길도 만만찮게 험난하거니와, 그 샛길에도 다른 매복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서명아 자신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할 테니까.
허를 찔렸다고는 할 수 없다. 험지에 웅크린 반역도당의 토벌전이라면 이 정도 전술은 오히려 당연한 정석이다.
그래서 서명아는 군을 둘로 나눠 잔도를 보수함과 동시에 다른 길을 찾았다. 어차피 둘로 나눈다 해도 중화 혁명당보다는 압도적인 전력이다.
송주령이 지휘하는 혁명당은 그런 청군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계속해서 남쪽으로 물러났다.
기랑이 1년간 전수해 준 옛 남조선혁명당 빨치산부대의 경험은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청군에게는 악몽이었다.
그녀의 지휘 방식은 무자비했다.
가혹한 군율의 엄수를 추구했다는 뜻이 아니다. 실제로 송주령과 칼을 겨루어 이길 수 있는 자는 혁명당 전체를 통틀어도 없겠지만 그녀는 그런 수단을 쓰지 않았다.
염군과 강남 쪽 중화 혁명당 소속 자경단, 그리고 난민 장정들을 통합하는 일은 말만 들어도 지난해 보인다. 그러나 송주령은 그들을 전부 똑같이 취급했다.
물론 기존 그녀 휘하에 있던 염군은 서운해하고, 혁명당원들은 도적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데에 화를 냈다.
그리고 송주령은 대드는 인간들을 처형한다든가 하여 불안을 조성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 모자라 고민인 상황이다. 그런 반동들은 왠지 모르게 하나둘씩, 혹은 몇십 명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군조차 전모를 다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눈이 핑핑 도는 게릴라전 속에서는 간단한 일이다. 그저 한두 마디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만무례하고 난폭하여 인화를 해치는 자, 사세 불리하면 관군에 투항할까 눈치 보는 자(의외로 이 두 부류는 상당히 겹친다)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청군의 앞이나 보급 불가능한 오지에 남겨지게 되었다.
마치 돌을 정으로 쪼아 필요 없는 부분을 쳐내고 그 안의 조각을 남기는 것과 같았다.
청군의 타격은 쇠못이라는 표현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강했다. 중화 혁명당뿐만 아니라 ‘역적에게 부화뇌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읍락이 불살라지고 인민은 병사의 노리개가 되며 곡식은 약탈당했다.
하지만 끊고 갈고 쪼고 문지르다[切磋琢磨] 하였던가. 진압군의 잔인한 공격에 맞서고 또 물러나면서, 중화 혁명당이라는 느슨한 단체는 돌처럼 단단해진 조각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 전의 출신이나 계파는 일절 불문. 오직 반동 여진에 맞서 싸우겠다는 혁명 의지만이 그 조각을 빛내었다. 외부의 위협이 본격적으로 닥쳐오고서야 중화 혁명당은 진정코 한 무리[黨]로서의 정체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들은 나라가 아니므로 관군이 아니다.
이들은 반동의 군벌 따위가 아니므로 임칙서군도, 송주령군도 아니다.
오로지 오족 인민의 위임을 받은 중화 혁명당의 당군(黨軍)인 것이다.
고려인민공화국과 같이 이쪽도 나라보다 군대가 먼저 탄생했다. 그렇다 보니 이 당 군사위원회 휘하의 무력집단을 고려처럼 혁명군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고려와 혼동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하나의 중국’으로서 무조건 고려를 추종하자니 자존심도 무시할 수 없었다. 유달리 성격이 고고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것 말고는 가진 게 안 남았기 때문에.
따라서 이들은 다른 이름으로 칭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처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라는 그 이름은 반대 없이 쉽게 수용되었다.
중화 혁명당의 사명은 말할 것도 없이 중화의 모든 인민을 해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은 반동과의 투쟁. 따라서 직관적으로 연상하기도 쉬웠다.
초췌하지만 강인하며 끈질기고 노련한 이 혁명의 노병[veteran]들은 사천 분지 곳곳에서 청군을 괴롭혔다.
분명 청군은 수많은 수급을 거두고 엄청난 포로를 잡았다.
그러나 반역도당은 붕괴는커녕 파악도 되지 않았다. 대륙의 무자비한 고문이라도 모르는 사실을 이끌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포로 대부분은 중화 혁명당조차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급이 어째 모자란다고 생각한 장군들이 잘린 머리는 말을 못 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대충 주위 민간인 모가지로 군공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사천의 여러 고을이 들고일어나 관군에게 맞서 싸우는 일은 드물었다.
힘없는 농민들에게 너무 가혹한 요구다. 그들은 그저 고향을 버리고 달아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관군은 곧 보급이 상당히 곤란해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진격 속도는 지체되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임칙서는 2차 대장정의 무게 중심을 서서히 동남으로 이동시켰다.
***
그해 봄이 절정으로 치솟기 시작할 때쯤, 베니그센과 러시아 사절단은 북경에 도착했다.
물론 기랑과 고총련 특작부대는 여기서 헤어져야 했다. 그들은 제임스 메디선이 중국에서 고용한 사람으로 꾸며 조용히 천진으로 스며들었다.
애초에 그들은 공식적으로 ‘동행하지 않은’ 것이다.
서쪽에서 러시아 사람과 같이 온 고려인이라면 대단히 수상하다. 허나 영길리 상인이 개항장을 벗어난 정도야 있을 수도 있는 탈법이다.
기랑 일행은 그런 식으로 청의 의심을 피해갔다.
반면 베니그센은 병부상서 화영, 그러니까 몽골 양황기의 수령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당연하다. 화영이 내몽골의 약탈 행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는 세 가지를 즉시 내놓아야 한다. 양황기 수령 자리, 병부상서 자리, 그리고 모가지까지 셋이다.
그러나 베니그센은 그것을 명쾌히 해결할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깃발에서 떼어 소금에 절여 둔 부하들의 목과 견장을 내밀었다.
“말씀하신 일부 병사의 일탈이 분명히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드립니다. 우리 황제는 파렴치한 대민 범죄를 절대 용서하지 않으시며, 따라서 황제에게 받은 권한으로 제가 처벌하였습니다.”
일부 병사도 아니었고 일탈도 아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접촉이 있었고 따라서 병부상서인 화영 역시 카자크에 대해서 알고 있다.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러시아를 더 몰아붙이기에는 청나라 사정이 좋지 않다.
아무튼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도와주겠다고’ 온 유일한 사람들인 것이다. 게다가 베니그센은 예전 북경에서 도광제를 도와 반란을 진압한 전적도 있다.
베니그센이 끈질기게 암시한 덕에, 도광제는 러시아가 영국의 대항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다만 아쉽게도 베니그센이 가져온 영토 문제는 황제에게 올라가지도 못했다. 오랑캐 놈의 그 미친 소리를 그대로 상주한다는 것은, 어깨 위가 너무 무거워서 이제 그만 모가지 내려놓고 싶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게다가 화영은 몽골 양황기의 수장. 러시아가 멀쩡한 얼굴로 달라고 하는 그 땅은 바로 그의 세력 기반이며 고향이다.
당연히 화영은 베니그센을 꾸짖어 내쫓았다. 그나마 황제가 러시아 사절에게 관심이 있기에 선 채로 목을 베지는 않는다는 태도였다.
베니그센은 이 시점에서 중화 혁명당이 진짜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음을 알고 후회했다.
다만 병부상서 화영이야 어쨌든 황제는 러시아 사절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 황제는 젤토로시아 얘기를 못 들었으니까.
나는 관대하다는 표정을 만면에 지은 도광제는 러시아와의 공사 외교를 허가했을 뿐만 아니라 – 이미 영국 때문에 버린 몸인데 뭘 더 가리겠는가 - 북경에 러시아 공관을 새로 내어주는 성의까지 보였다.
“먼 길을 온 사절에 대한 대우는 이전과 같이 한다. 고려가 더 이상 조공을 바치지 않으니, 회동관까지 아울러 써도 좋다.”
또한 도광제는 이것이 고려에도 가벼운 경고를 보내는 좋은 외교적 제스처라 여겼다. 물론 공화국은 반동 황제가 회동관을 내어 주든 헐어 버리든 아무 관심이 없다.
그래도 도광제가 완전히 혼자서 망상에 빠진 건 아니다.
적어도 영국에는 도광제의 빛나는 영도가 잘 먹혔다.
중국 공사 조지 스턴튼은 갑자기 러시아가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온 것, 그리고 중국 황제가 최소한 겉으로는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죽일까?’
영국인이 아니라도 그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초패왕을 물리치자마자 대규모 내부 숙청을 실시해야 했던 한고제처럼, 패왕 나폴레옹을 물리친 유럽도 자중지란에 휩싸여 있었다.
언제 성립되었나 싶었던 빈 체제는 벌써부터 그 주요한 축이 기우뚱대는 중이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승전국으로서 각각 폴란드와 작센을 원했다. 하지만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그 희망이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망했던 프랑스는 이 틈바구니에서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다.
동쪽으로 사라진 조제프 푸셰를 대신하여 유럽의 배신력을 책임지고 있는 뇌물의 천재 탈레랑이 여기에서 많은 활약을 했다.
아무튼 그가 평생 바꾼 주군의 숫자는 여포와 시준의 애비를 다 합쳐도 반밖에 못 따라갈 지경인 만큼 그 민첩한 수완도 알만하다.
영국으로서도 떨떠름하게나마 프랑스를 받아들여 줄 수밖에 없었다. 저 훈족과 타타르족 놈들의 군홧발을 우선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특히 프로이센 놈들은 노래라고는 군가밖에 모르고 음식이라고는 짬밥밖에 모르는 전쟁미치광이들이다. 딱히 성과가 별로 좋지도 않은데도 전쟁 하난 유별나게 좋아했다.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영국은 (자기 쪽에서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폭력을 좋아하는 거지 전쟁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같은 독일계인 영국 왕실도 프로이센 왕가의 변태 기질은 외면해야 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현재 유럽은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 대 러시아-프로이센 구도가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후자가 불리한 조합이긴 하나 그래도 만만찮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영국은 항상 러시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한참 동안 책상을 딱딱 두드리던 스턴튼은 결국 결심했다.
“동인도 회사의 탐욕에는 어울려 주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군.”
만주 북부와 몽골 고원의 황량한 땅을 받아봤자 뭘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무사안일주의는 러시아에 적용해선 안 된다. 러시아의 탐욕은 끝이 없다.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영토’ 정도로는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러시아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장벽에 부딪칠 때까지 처먹고 또 처먹을 뿐이다.
그 넓은 시베리아로도 만족하지 못해 아메리카(알래스카)까지 뻗어 나간 실제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영국이 중국에 확고한 영향력을 확보해 두지 않으면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굶주린 짐승처럼 돌진할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 러시아가 부동항을 확보한다는 의미는 극동에 러시아 함대가 안정적으로 주둔한다는 뜻이며, 이는 알래스카와 연결되어 영국령 캐나다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 될 수 있다.
스턴튼은 태도를 전환하기로 했다.
그는 본국에 ‘동인도 회사의 중국 정복 정책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검토될 가치가 있는 한 수’라는 의견을 보냈다.
동인도 회사의 정책을 철 지난 확장 모험주의라며 비난하던 휘그당 계파는 중국 공사의 견해에 주춤했다.
유화 정책을 추구하던 스턴튼마저 이럴 정도라면 정말 침공하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반면 강경파는 기세를 올렸다. 위상 회복이 필요했던 암허스트 남작이 그 필두였다.
그리고 애초에 영국에서 반전파가 이기기는 어렵다. 북한에서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것보다는 약간 나은 수준일 뿐이다.
중국 정복 준비는 급물살을 탔다. 적어도 시준이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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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잔도는 하나가 아니고, 흔히 알려진 포야도를 포함하여 여러 구간이 있습니다. 작중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관중-한중 사이의 여러 루트에 대한 설명은 많이 생략되었습니다.
잔도를 건설했다는 범수는 그 진나라의 범수 맞습니다. 또한 명나라의 왕진은 토목의 변에 많은 책임이 있는 그 환관입니다.
2. 왕준이 손오를 멸한 길이라는 것은, 오를 침공하던 서진이 택했던 6개 침공로 중 하나입니다. (이미 편입된 상태였던) 촉에서 출발한 왕준은 함대를 동원해 장강을 따라 내려가며 가장 먼저 건업을 쳐서 대공을 세웁니다.
3. 서명아는 현재 살아 있는 도광제의 부인 중 가장 서열이 높은 효신성황후 동가씨의 부친입니다. 항주 장군을 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원래 역사에서는 군대를 끌고 원정을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정후는 효목성황후 뉴호록씨(작중 도광제와 협상했던 계모 효화예황후 뉴호록씨와는 다른 사람입니다)이나, 이 사람은 1808년 죽었습니다.
4. 탈레랑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나올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능력은 대단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뇌물과 여색을 너무 밝히고 신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지라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지만(심지어 사절에게 대놓고 뇌물을 요구해서 미국과의 외교를 파탄낼 뻔하기도 함) 그 능력을 외면할 수 없어 왕정, 통령정부, 나폴레옹, 그리고 왕정복고 후에도 프랑스의 외교를 전담했지요. 그의 주군은 13명이었습니다.
또한 당대 유럽에서 날렸다 하는 인사가 대개 그렇듯 이 사람도 정부를 많이 두었는데(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 사생아는 확인된 것만 35명이고 그 외에 수십 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일례로 탈레랑은 화가 들라크루아의 친부라거나 나폴레옹 3세의 친조부라는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다만 정식 부인과는 애초에 결혼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결혼하자마자 별거했고, 적자는 없습니다.
이런 천재성에 비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는 미터법의 기준을 사실상 제정하고 최초의 근대적 보통 국민교육을 체계적으로 구상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5. 이때 알래스카는 형식상 러시아의 영유지였습니다. 다만 저항하는 원주민 정복이 완료되지 않아 실질적으로 여기서 뭔가를 얻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지요. 미국이 알래스카를 매입하는 것은 작중 시점부터 반세기 뒤인데 이때까지도 러시아는 사실 알래스카를 완전 정복하거나 개발하지 못했습니다. 쉽사리 헐값에 팔아넘긴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