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44화 (244/284)

244화

82. 굴뚝을 구부리고 땔감을 옮기다(1)

중국을 정복하기로 결심한 동인도 회사의 전갈을 가지고 온 사람은, 일전 류큐 건의 성공으로 두둑한 보상을 받아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온 바실 홀 선장이었다.

존 레디는 자기가 너무 아시아에 오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가를 문질렀다. 이제 험한 꼴 그만 보고 켄트에 한적한 저택이라도 사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장사판 다 엎어 놓고 다시 전쟁을 하자는 거요?”

“현지 야만족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불안한 형태의 무역은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그간 전제 군주의 그날 기분에 따라 정책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어 앉아서 손해 볼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위원회도 인도에서의 일희일비로 회사 전체의 신용이 뒤집히는 일은 더 이상 원하지 않습니다. 주재관[Resident]께서 이 사업의 목적을 명확히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소령이라고 부르시오. 난 그쪽을 더 좋아하거든. 내 친구 정시준 의장도 나를 그렇게 부르지.”

존 레디는 자기가 친밀감을 표현한다는 식으로 바실 홀이 오해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레디는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로 질문했다.

“회사 외부인인 당신이 그렇게 열정적으로 회사를 대변하는 것을 보니, 당신도 뭔가 대단히 큰 것을 약속받았나 본데.”

“하하. 저야 말을 전할 뿐인데 뭐 대단할 게 있겠습니까. 다만, 아시아 질서가 재편되면 아무래도 이쪽 사정 아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긴 하겠죠.”

이 말도 다른 함의를 담고 있다. 만약 아시아 주재관 존 레디가 회사의 방침을 실패 보게 한다면, 그 ‘재편’에서 존 레디의 자리는 없을 거라는 의미다.

그런데 레디 소령은 한 가지가 켕겼다.

어쨌든 그가 보기에 정시준은 중국 침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동인도 회사의 급속한 영향력 확대는 고려에게 있어 옛 종주국인 중국의 위치를 동인도 회사가 대신하려는 것처럼 보일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 그가 이 위치까지 출세하는 데 도움을 준 정시준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짓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정신을 차렸다. 영국인이 은혜와 도덕을 가지고 고민하다니, 역시 아시아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존 레디 소령은 자신을 냉정하게 관찰했다. 결국 그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잘못 처신해서 정시준의 비위를 거스르면 아시아를 떠나기도 전에 살해당한다. 전쟁이 아니라 비합법적 방식으로.’

동인도 회사와 정시준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너 이 새끼 어디 사냐?”라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존 레디와 정시준의 차이가 있다면 시준은 국가 요인답게 엄정한 경호를 받고 있지만 레디 소령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뿐이다.

동인도 회사의 무력이 크게 떨어져서는 아니고, 다만 두 사람의 입장 차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레디 소령은 시준이 공화국을 세우기 훨씬 전부터 시준과 교우가 있던 사람이다. 그와 친우라고 자칭해도 시준 자신이 인정할 만한 몇 안 되는 인사인 것이다.

그래서 소령은 잘 안다. 지금은 존경받는 정치 지도자를 넘어서 수상쩍은 종교의 교주마저 되어가는 것 같고 그래서 아무도 그의 어두운 과거를 생각하지 못하지만, 시준은 원래 무법자[Outlaw]. 암흑가의 밀무역상 출신이다.

존 레디가 마음에 안 들 경우 시준은 상황 타파가 아닌 순수 보복 목적으로 그를 죽일 수도 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방식으로.

소령은 자신이 왜 망설였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중국에 대한 동인도 회사의 정책이 시준의 바람에 맞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시준도 어쩌면 영국의 본격 중국 침공에 한 다리 끼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우선 시준의 의사를 타진해 보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꼭 그 자신의 안위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동인도 회사가 극동아시아에서 움직이는 데 있어 고려를 배제한 예측은 무가치하다.

그리고 협의를 하려면 먼저 이쪽 패가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레디 소령은 바실 홀 선장에게 물었다.

“이사회가 생각하고 있는 중국 내 회사령의 범위는 어디요?”

“이사회는 우선 중국을 자극하지 않을 먼 개항장 단수이부터 실효 지배 영역을 넓히자는 계획입니다. 그러니까 포모사(대만) 섬 전체를 회사령으로 선언하고, 차후 중국의 반응을 보아가며 결정하자는 거죠. 그래서 제가 파견된 겁니다. 포모사는 류큐 바로 근처고, 류큐 왕국에 대해서는 제가 경험이 좀 있지 않습니까.”

“‘부터’라고? 그럼 최종적으로는?”

바실 홀은 머뭇거렸다. 그리고 레디 소령은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한마디 더 추궁할까 고민할 무렵, 바실 홀 선장이 입을 열었다.

“천진 등 기존 본토 5개 개항장과 산둥 반도를 포함한 중국 동부 해안 전역입니다. 고려와 중국을 양쪽에서 견제할 수 있겠죠.”

존 레디는 이 시점에서 바실 홀을 ‘외부인’으로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이자는 이미 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소릴 태연히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레디 소령의 비난은 바실 홀까지 싸잡아서 이루어졌다. 그는 공정한 사람이었으니까.

“당신들 미쳤어?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도 그건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요!”

“그야 처음부터 그렇게 떠들면 안 되죠. 그리고 그들의 용납이 무슨 상관입니까? 죽이고 빼앗은 다음 살아남은 녀석은 노예, 이크. 이제 불법이죠? 소작농으로 삼으면 되지 않습니까.

자유 무역은 구식이에요. 네덜란드도 동인도 회사를 되살리지 않고 농장 생산 체제로 전환하고 있죠. 고려의 경우 동맹으로 남아 준다면 좋지만, 만약 아니라면 하는 김에 그들까지 쓸어버리면 됩니다. 아무것도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다른 나라 사람이라면 할 말이 많겠지만 영국인의 경우 이 논리에 대한 반박은 불가능하다.

존 레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그렇지만…….”

그는 바실 홀의 말에서 뭐가 틀렸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레디 소령은 우회 공격을 시도했다.

“과연 그렇게 호언장담할 만큼의 군사력이 있소? 인도에서 더 이상 병력을 빼 오는 건 불가능해. 구르카족은 아직 완전히 굴복한 게 아니고, 마라타인과도 싸우는 중인 데다 근래의 세포이 건 역시 불안하니까. 설마…….”

“예. 그 설마입니다. 이사회는 웰링턴 공 아서 웰즐리의 원정을 요청했습니다. 본국 군대가 나설 겁니다.”

존 레디 소령은 두 번째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당신들 미쳤어?”

“아니, 왜 이러십니까. 아실 만한 분이. 당연히 공작은 거부했지요. 이건 단지 동인도 회사가 이 사안을 아주 무겁게 생각한다는 제스처입니다. 저는 거기까지만 보고 왔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영국 정규 해군과 육군의 출동은 이루어질 겁니다. 요체는 그거죠.”

시준이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였다.

나폴레옹 전쟁과 미영전쟁, 구르카 전쟁은 모두 끝났다. 영국은 이제 더 여유 있게 더 강력한 전력을 동아시아로 투사할 수 있다.

물론 정약용이 고의 또는 뜻하지 않게 유발한 것과 같은 불안 요소가 없지는 않다.

조지당의 소요는 역사보다 더 조직적이고 강력했다. 맨체스터와 런던의 많은 공장이 비자발적으로 폐업했다.

게다가 동인도 회사는 주가가 잠깐 떨어진다 해도 큰 문제가 없지만 동인도 회사의 하청 받아먹고 살던 다른 회사는 서리 맞은 푸성귀 꼴이 되었다.

윌리엄 자딘 역시 정약용이 미리 알려 주지 않았으면 템즈 강에서 질병 저항력을 시험해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자딘은 유능한 사업가였고, 이 위기를 (공매도 수익으로) 넘기자 하청업체로서 그의 동인도 회사 내 지분은 더욱 확대될 수도 있었다.

또한 인도군은 이제 중국에 추가 파병될 수 없다.

세포이의 항쟁 자체는 원 역사보다 소규모였으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인도 회사의 탄압은 원 역사보다 더욱 가혹했다.

이는 청나라의 도광제가 했던 실수의 반복이었다.

그 전까지는 음지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던 악랄한 착취는 이제 ‘반란군이니까!’라는 명목하에 동인도 회사의 표준 프로토콜이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기존의 통치가 너무 자비롭다 보니 힘이 남아돌아 반란을 일으킨 게 분명하다는 분석이 동인도 회사의 중론이었다.

90%였던 소작료는 95%로 오르고, 반란을 일으킨 지역의 세포이는 ‘연대 책임’으로 퇴직 연금이 싹 날아갔다. 싫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내부 단속을 하라는 식이었다.

회사의 의도대로 서로 싸운 세포이도 있었지만 인도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멍청이는 아니다. 그보다는 동인도 회사에 죽기살기로 대드는 인도인이 훨씬 많았다.

다만 이번에는 동인도 회사도 정보를 통제했다. 사태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한 침례교 선교사 윌리엄 캐리의 경우 온갖 모욕과 살해 협박을 받아가며 인도에서 사실상 추방되었다.

돌아가는 배에 구멍을 내서 후환을 없이 하자는 의견이 꽤 지지를 얻었지만 일이 잘못될 경우 영국 기독교계 전체의 반발이 우려되어 다행히 취소되었다.

동시에, 인도 총독 헤이스팅스(Francis Rawdon-Hastings)는 ‘정의로운’ 마라타 전쟁의 승리와 그 성과를 선전했다. 동인도 회사는 이제 인도 내륙까지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정부도 동인도 회사의 폐지는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주가는 서서히 회복되었다.

그러니까 정약용이 저점에서 주워 모았던 그 주식 말이다.

이래저래 왕 첸 리딩방에는 더욱 사람이 몰렸다. 물론 밥 잘 먹은 조지들도 더욱 힘내서 공장을 습격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 같으면 주춤했을 듯한 이런 요인은, 영국에겐 거꾸로 더욱 대규모의 침공을 계획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것이 영국이다.

시준과 정약용 모두 크게 잘못한 점은 없다.

그러나 두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으로 청과 영국의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었다. 신산귀모의 사거리 바깥에 있는 그 미묘한 틈은 영국인의 성정과 맞물려서 가장 끔찍한 방향의 균열로 발전했다.

차라리 도광제가 더 상대하기 편하지 않을까 할 정도의 재해가 다가오는 것이다.

다행인 점을 꼽자면 당장 영국군이 들이닥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도였다.

국가 군대는 회사군과 다르다. 먼저 여론을 납득시켜야 하고, 의회의 승인과 인사 구성, 함대 편성 모두 금방 되지는 않는다.

일 자체가 많아서라기보다는 동의해야 할 사람이 많아서다. 그것을 위해 사이사이에서 윤활유처럼 칠해야 할 정치 행위까지 들어가면 실제로 영국군이 여기 나타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게다가 또 하나, 무엇보다 다행인 점은 영국군의 목표 순위에서 고려가 많이 낮다는 점이다.

바실 홀이 말했다.

“그래서 그사이에 주재관께서 고려인민공화국과 협상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협상이라고?”

“예. 우리도 가능하면 고려와 충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기긴 할 테지만 손해가 많이 나니까요. 정규군이 참가한다면 이건 만에 하나도 실패를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그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가는 영국 정부는 그대로 동인도 회사를 없애 버릴지도 모릅니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되도록 중국에 집중하고 싶다는 게 이사회의 뜻입니다.”

피 묻은 칼을 코 앞에 들이대고 협상한다. 그것은 영국인에게 익숙하고 취향에 맞는 일이었다.

담배 연기를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뿜어낸 존 레디는 침울하게 말했다.

“알겠소.”

***

이때, 그러니까 양력으로는 이미 1818년에 도달했지만 음력으로는 아직 넘어가지 않았을 즈음 기랑은 황량한 내몽골을 주파하고 있었다. 용맹한 고총련 특작부대도 함께였다.

말에 탄 건지 말에 묶인 건지 모를 제임스 메디선과 숫자가 많이 줄어든(도망치거나 죽었다)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 쪽 직원들도 함께였다.

기랑은 혹한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털모자를 벗었다. 안에 겹겹이 쓴 혁명모자까지 벗은 그녀의 목덜미로 긴 머리칼이 꾸덕꾸덕하게 흘러내렸다.

남장도 유지하려면 시간과 품이 든다. 지금은 도저히 그럴 새가 없어서 손을 놓고 있었다.

물론 이제 새삼 숨길 필요도 없다.

어차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제임스 메디선 혼자뿐이다. 그리고 그는 벌써 오래전에 눈깔을 파내서 네 국그릇에 넣어 주겠다는 특작부대의 친절한 경고를 받고 기랑을 미심쩍게 힐끔대는 짓을 그만뒀다.

기랑은 고개를 들고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멈춰.”

평안도 사냥꾼들이 능숙하게 흩어졌다.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 직원들은 많이 봤던 그 모습을 새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발자국과 배설물 등을 추적한 사냥꾼들은 얼마 가지 않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보고했다.

“여기에서 10킬로미터 내에 반드시 마을이 있소이다. 회장 동지.”

‘킬로미터가 뭐냐?’ ‘한 반 마일쯤 되나 보더라고.’ 등의 불경한 대화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 주체신기전 3호가 발사되었다.

고총련은 공화국의 병기 생산을 일부 담당하는 단체이기도 하다. 이것도 1년간 한중에서 여러 무기 기술을 전파하며 만들어 둔 물건 중 하나였다.

하늘 높이 치솟은 주체신기전은 공중에서 터지며 연기를 뿌렸다.

잠시 후 기랑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자크 부대가 지나치게 빨리 왔기 때문이다.

“벌써 왔어?”

베니그센은 피로한 표정으로 답했다.

“군사들을 좀 독촉했다.”

그 짧은 말에 담긴 사정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몽골 팔기의 근거지를 가로지르며 ‘보급’을 하는 중이었다.

현재 목적상 무엇보다 빠르게 청군을 피해 동쪽으로 가는 것이 중요했다.

약탈은 주의를 끌 정도로, 그러나 너무 많은 주의를 끌지는 않을 정도로만 해야 했다. 중화 혁명당을 향해 드디어 진군을 시작한 십만(좀 줄었다) 청군 중 핵심 주력인 몽골 팔기가 동요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게 안 되니 문제였다.

처음에는 주의를 끈다는 계획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다. 소식이 퍼져나가야 팔기도 알아챌 텐데, 카자크는 말 전할 사람을 하나도 안 남겼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것은 전부 죽였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죽이고 나서 그 고기를 먹었는가 여부밖에 없었다.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챙기고, 그렇지 못하면 불을 질렀다. 여자는 갓난아이부터 노파까지 예외 없이 끌려갔다. 그녀들은 단지 조금 더 늦게 죽었을 뿐이었다.

워낙 빠르게 이동했기 때문에 군대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직 마주치지 못했지만, 여기는 몽골족의 땅인 만큼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카자크 병사들은 더욱 즐거워했다.

명예로운 전사에 대한 마땅한 예우로, 카자키들은 저항자의 손가락을 엮어 목걸이를 만들고 그들의 가죽을 벗겨 무두질했다. 동방의 타타르 전사라면 칼집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러나 카자크 3천 명에게 아무것도 못 하고 유린당할 정도로 청이 약하지는 않다. 이곳을 지키고 있는 부(部)의 정규군을 만나면 3천 명 정도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가만히 이 꼴을 지켜보던 베니그센 장군은 끝내 결심했다.

이대로라면 이 극지에서 대군에게 포위되어 전멸당한다. 러시아 사절이니 뭐니 하는 정치적 무기는 우선 청 황제의 직신쯤은 만나 봐야 내밀 수 있는 것이고 이 대막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약탈의 문제는 군대의 통제가 느슨해진다는 점이다. 그는 우선 시간이 많이 들며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전지 강간을 금지했다.

가혹하단 말 정도론 표현이 안 된다. 카자크보고 겁탈을 하지 말라니 인간보고 숨을 쉬지 말라고 한 것과 다름없다. 심지어 지휘관인 예르몰로프까지 대단히 강경한 태도로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조국전쟁의 영웅 레온티 베니그센의 권위는 그렇게 약한 것이 아니었다.

베니그센은 군 장악을 온전히 예르몰로프에게만 맡겨 둘 만큼 멍청하지 않았고 – 외지에서 지휘관 살해는 흔한 일이다 – 그의 친위 세력이라 불릴 만한 카자크족도 있었다.

결국 특히 거칠게 반항한 몇 명이 참수되었다. 총살이 아니라 참수로 처리한 이유는 그 모가지를 항명에 대한 불명예로서 해당 중대의 깃발에 달게 하기 위해서다.

아시아인의 풍습을 살짝 차용한 것인데, 이는 꽤 효과가 있었다. 원래 같은 타타르족이다.

보나 마나 이번에도 한참 뒤에야 어슬렁대고 바지춤 매며 걸어오겠지 했던 기랑은 꽤 일찍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이런 전차로 베니그센은 휘하 병사를 확실히 통솔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대충 사정을 알게 된 기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영어도 1년 동안 꽤 나아졌다. 그래 봐야 가르쳐 준 베니그센의 수준을 넘어서진 못했지만.

“안 그래도 더 이상 분탕 치는 일은 위험하다고 말하려 했어. 자취가 꽤 많은 것을 보니 이 부근 마을은 소문을 듣고 대비하고 있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남동으로 돌아 장성(長城)을 넘어야 한다.”

베니그센은 그 말을 무슨 공성전을 시작하자는 뜻으로 오해하진 않았다. 이번의 습격을 마지막으로 입 싹 씻은 그들은 러시아 황제의 점잖은 사절단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더 물어볼 말도 없군. 병사들이 유의할 점은?”

“있었는데, 이젠 없다.”

베니그센은 이 말이 자기에 대한 고평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조금 있으면 시준을 만날 수 있겠구나. 지금쯤이면 그도 나름대로 대비를 하고 있겠지?”

베니그센의 기대와 달리 기랑은 꽤 심상하게 대답했다.

“그럴 거야. 하지만 죽으면 못 만나.”

“옳은 말이야. 갈까?”

“그래.”

***

두 사람의 짐작은 옳았다. 기랑에게 보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연락을 받은 시준은 본격적인 ‘만주 혁명’ 전 단계 개시에 들어갔다.

시준은 조선의 대(對)여진 투쟁에서 상당히 의미 깊은 사적지에 와 있었다.

불민한 후손 인조는 믿지 못하겠지만, 조선도 여진 상대로 날리던 시절이 있었다.

저 공포의 군주 세종과 그 아들들의 치세가 바로 그것이다.

세종은 새삼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문종은 여진족을 죽이기 위한 교범인 오위진법을 창안했으며 그 공동저자인 동생은 실제로 전쟁을 일으켰다.

그 삼부자의 여진에 대한 증오, 그리고 조선이 한때 여진족을 발아래 두었음을 증명하는 궁극적 표상이 바로 지금 시준의 등 뒤에 버티어 섰다.

지금은 반동을 교화하는 혁명의 산실이 되었지만 원래는 여진을 깡그리 쓸어버리고 지은 고대의 성채, 사군 육진 중에서도 거의 최북단에 있는 경흥부 아오지성이었다.

그리고 그 성 앞에 늘어선 것은 거의 1만 명에 가까운 대규모 부대였다.

그들의 이름은 혁명육군 제3사단. 인민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동쪽에서 두만강을 건널 부대다.

반동 여진을 짓뭉개버릴 만주 해방의 전위는 신심 드높이 혁명과업을 수행할 각오 만반이었다.

그들은 이게 정녕 조선 땅의 군대인가 싶은 대오를 이룬 채 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파리도 잡아챌 것 같은 집중력이었다.

시준은 열병식 때를 떠올렸다. 그때와 형태는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그의 다리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시준은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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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작중 시점의 인도 총독 프랜시스 로든 헤이스팅스는 18세기 말 인도를 잔인하게 통치했던 워런 헤이스팅스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성이 같은 것으로 보아 혈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가깝지는 않습니다. 워런 헤이스팅스는 목사의 아들이고, 정통 귀족 가문이라면 헤이스팅스 후작인 프랜시스가 더 그에 근접합니다.

2. 마라타 전쟁은 작중 배경에 포함되지 않아 간략히 넘어갔는데, 영국 동인도 회사가 벵골이나 기타 해안이 아닌 인도 내륙까지 지배력을 뻗치게 해 준 전쟁입니다. 무굴 제국에 반대하는 일종의 힌두교 연합인 마라타 동맹과의 전쟁이죠. 18세기 후반부터 3차례에 걸쳐 있었으며, 이 전쟁 초기에 영국이 콩그리브 로켓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것을 획득합니다.

3. 조선 초기 조선의 주적은 여진이었고 오위진법 역시 여진을 주로 상정하여 구성되었습니다. 문종이 명령했고 실무자가 수양대군이었죠. 다만 꼭 여진 상대로만 쓴 건 아닙니다.

4. 소제목의 ‘굴뚝을 구부리고 땔감을 옮긴다’는 곡돌사신(曲突徙薪)이라고 하여 재해나 재난을 미리 대비하는 일을 뜻합니다. 작중 극초반에 대사헌 권유의 상소에서 한 번 나왔던 말이죠.

5. 혁명육군의 부대 명칭을 다시 짚고 넘어가자면 방대(분대)-단대(소대)-복대(중대)-전대(대대)-영대(연대)입니다. 원래는 영대가 최고위 단위부대였죠.

사단이라는 말은 처음 나왔는데, 이건 왜 그때처럼 어원을 따져서 현지 번역하지 않았는가 하면 지금 공화국에 정약용이 없어서입니다. 그래서 시준에게 익숙한 명칭이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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