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43화 (243/284)

243화

81. 거북이 뒤집기(4)

주식이란 건, 흔히 착각되지만 되팔아서 차익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게 아니다.

그 근본은 경영의 책임과 권리를 주주들과 나누는 데에 있다. 즉 회사에 대한 투자로서 기업 이념에 함께 참가하는 게 원래 주식의 목적이다.

21세기에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지식이긴 하다.

그러나 19세기의 ‘초보’ 주식투자자 정약용은 그 이치를 잘 알 수 있었다. 이강회처럼 타락하지 않으려면 주식이 아니라 회사 자체를 봐야 한다.

“악한이라도 목욕재계한다면 상제를 섬길 수 있고, 자로는 시장바닥의 일개 무뢰배에 지나지 않았으나 학문을 익히자 십철(十哲)의 반열에 올랐다. 동인도양행이 인의를 깨닫고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이깟 어음쯤이야 나중에는 반드시 저절로 회복되리라.”

정약용은 떨어진 동인도 회사 주식을 다시 사 모았다. 동인도 회사쯤 되면 잠재력은 충분하다.

그리고 동인도 회사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약용은 한탄하겠지만) 적당히 어디서 영국식 ‘경제교류’ 한 판 하면 다시 오른다.

일단 국가가 회사를 폐지해 버리지만 않으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공기업 좋다는 게 바로 이런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동인도 회사가 철밥통 믿고 무사안일 경영을 추구하는 업체인 것은 아니다.

무릇 신실한 경영자라면 주주들의 바람대로 회사를 발전시켜 주가 올릴 고민에도 전념해야 마땅하다.

도대체 언제 사장 자리 물러날 건지 알 수 없는 윌리엄 아스텔 역시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사업을 기획했다.

“이번 일로 알 수 있듯이, 인도의 회사령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곳에서 영토를 늘려야 해. 그래야 한 곳에서 일이 잘못되더라도 그쪽에서 벌충할 수 있다.”

원래 역사의 영국이었다면 이 경우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쪽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각각 인도와 유럽에서 가깝고, 항로와 현지 세력과의 접촉 등 준비되어야 하는 경험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아프리카는 동인도 회사의 아시아 독점권에서 벗어나 있는 곳도 많고, 동남아시아는 시장이 작은 데다 그나마 사라졌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다. 2년 전 화산 때문에 쑥대밭이 된 인도네시아의 시체는 네덜란드인들이 필사적으로 부둥켜안고 그 썩은 피를 빠는 중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동인도 회사가 정말 작정한다면 해결할 수 있는 범위다.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중국을 맨땅 들이받듯 침공하는 것보다는 쉽다.

황금군주 가경제가 자식과의 연금술 대결에서 패배하지도 않고, 대규모 반란으로 나라가 개판이 되지도 않아 제국이 건재했던 청은 찔러 볼 구멍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 사정이 다르다.

매카트니 자작이 주목한 황해의 용오름을 타고 반왕 정시준은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 바람은 조선은 물론 중국과 영국, 일본을 휩쓸며 모든 인과와 역사를 뒤섞어 버렸다.

영국과 중국의 ‘경제교류’ 역시 급물살을 탔다. 이는 거의 반세기 가까이 빠르게, 그리고 반세기 어치 정도 더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결과로 동인도 회사는 중국에 이미 6개나 되는 개항장을 갖고 있다.

제반 사정도 충분히 파악했으며, 중국 현지의 인맥은 물론 고려인민공화국이라는 ‘신뢰할 만한’ 동맹국도 보유했다.

물론 아시아 각지의 서상은 ‘우리는 힘이 없어 해적 놈들의 강요에 못 이길 뿐’이라고 주둥이를 털며 ‘영길리 놈들이 억지로 하청 떠넘긴’ 마약과 무기를 팔고 있지만, 영국은 고려 말고 그걸 자기에게 말해 줄 친구가 없어서 잘 모른다.

따라서 윌리엄 아스텔이 보기에 상황은 낙관적이었다. 세계 어디보다 압도적 규모인 중국의 인구와 부는 제2의 인도가 되기 충분했다.

이사회의 위원들 역시 찬성했다.

“거만한 중국 관리들 상대하기도 슬슬 지겹던 참이지. 아예 일부 지역을 영토로 삼으면 우리가 사법과 행정을 관장하니 후진적인 중국 정치에 시달릴 일이 없을 거요.”

“그런데 인도처럼 중국 황제를 가두고 제후를 종속 동맹에 넣을 수 있을까? 중국은 인도보다 고도로 중앙집권화되어 있소.”

“실패한 방법을 뭐 하러 다시 씁니까? 그냥 처음부터 모두 직할령에 넣읍시다. 있지도 않은 중간 봉건 계급을 키우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고 저렴하오. 지배당하는 것에 익숙한 중국인들에겐 차라리 그게 나을 거요.”

“옳은 말이오. 그 교훈을 군사 쪽에서도 적용해 보지요. 세포이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극동 지역의 용병으로는 공화국을 고려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소. 근래에 군함도 몇 척 가져갔었지?”

“내가 아시아의 지식을 좀 조사해 봤는데, 중국인은 옛날에 고려 땅에 쳐들어가 그 왕에게 머리를 아홉 번 바닥에 박는 굴욕을 강요했다고 합니다. 결코 감정이 좋지 않을 거요. 우리가 요청하면 희희낙락하며 들어와서 중국인을 적극적으로 통제해 주겠지요. 과거 굴복시켰던 고려 사람들에 의해 그런 짓을 당한다면 중국인은 참을 수 없을 테고.”

“나누어서 지배하라(Divide and Rule)! 역시 전통적으로 효능 입증된 방법이 좋겠지.”

정약용은 동인도 회사의 확장에 약간의 타격을 주고, 조지당을 통해 도읍에 불안을 조성하여 중국에 대한 시준의 공작을 성공시키려 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건 정약용이 두 가지를 간과한 탓이다.

첫째로 동인도 회사는 주식보다는 정부 정책에 영향을 받는 회사라는 점이다.

따라서 정부가 그들을 버리지 않는 한 동인도 회사는 주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공세를 개시할 수 있다.

두 번째 역시 정약용이 전통적 조선 사람이라 저지른 실수다.

도읍에 정치적 불안이 있다고 해서 국가가 멈추는 것은 동아시아식 전제 왕국에나 해당하는 얘기다.

영국에게 있어 국가의 본령이란 해적이며, 정부니 의회니 왕이니 하는 것은 해적질을 좀 편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대륙 봉쇄령 당시의 런던은 조지당 궐기나 러다이트 운동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영국군은 세계 전역에서 하던 대로 전쟁을 수행했고 또 이겼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실수 모두 치명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동인도 회사는 총리 로버트 젠킨슨과 중국 공사 조지 스턴튼의 탈식민지 정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에 대한 정복을 결정했다.

시준이 애타게 바라고 있는 ‘중국 황제의 출병을 늦출 한 수’로서는 지나치기까지 하다고 할 수 있었다.

과연 희만 선생이었다. 다만 좀 지나치다는 그 점이 문제였다.

***

일을 시간 순서로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작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정약용은 기랑에게 계책을 보내며 공매도로 동인도 회사 주식을 후렸다.

그사이 기랑은 티베트와 한중으로 들어가 러시아와 중화 혁명당을 연결해 주고 동충하초를 받았다. 덤으로 류큐도 해방되었다.

그리고 그때 중화 혁명당의 본거지를 인식한 도광제는 15만 대군을 소환했다.

시준도 처음엔 그들이 반란 진압하는 동안 만주를 침공하려 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꿔먹었다.

친구 때문만이라고는 하기 힘들다. 혁명군으로서도 그 대군이 삽시간에 중화 혁명당을 쓸어버리고 동쪽으로 칼날을 돌릴 때까지 가시는 길 편안하게 내버려두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물론 그러한 방해 시도에는 위험이 따른다. 중국은 아직 고려와 공식적 적대 관계가 아니다. 자칫 트집 잡히면 15만 대군은 한중보다 먼저 압록강으로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시준이 처음에는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시준으로 하여금 이 위험을 무시하게 했다는 점에서 기랑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순 없다.

그러나 시준은 이 기간 기랑의 연락을 받을 수 없는 상태였고, 그녀가 정확히 어떤 위치에서 어떤 상황에 있는지 잘 몰랐다.

게다가 동인도 회사의 결의도 이제 막 된 시점이라 시준이 극동의 영국군을 움직일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따라서 시준이 올해, 그러니까 혁명력 7년(1817년) 한 일은 고려 자체적인 방해였다.

아직 공화국 혁명군을 움직여 중국을 치기는 시기상조다. 도광제가 제 애비처럼 비명횡사하는 게 가장 좋겠지만 탄소의 연금술사가 그리 쉽게 독살당할 리는 없다.

시준은 정말이지 복지 혜택 받을 때 유전자 조작 수준의 초인적 무력을 요구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것만 있었다면 혼자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자금성 담 넘은 다음 도광제의 머리통을 망치로 깨버리고 돌아오면 되는데 말이다. 이제 능숙한 광부가 되어 있는 전 무협작가 김조순이 들었으면 좋아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준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특기, 즉 신디케이트 수장의 경력을 발휘했다.

비장의 수로 쌓아 두었던 금은보화 중 시준이 서상의 대방으로서 가용할 수 있는 몫이 중국에 풀렸다.

시준의 사재에서도 절반 가까이가 여기에 소모되었다. 친구를 위한 일이기에 지유도 기꺼이 찬성했다.

이는 거의 전부 곡식을 사들이는 데에 사용되었다.

물론 시준이 그 광활한 대륙의 곡물을 전부 빨아들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구상을 한 건 아니다.

시준이 노린 것은 도광제의 15만 대군이 먹어야 할 군량이었다.

천진 인근의 서상은 직례의 관리를 매수하고, 상인에게 웃돈을 얹어주며, 서류를 위조해서 수레를 가로챘다.

가끔 일부 도고에게는 ‘적절한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직하고 충성스럽게 고려와의 거래를 거부하고 관에 군량을 납부하려던 곡식 도매상들은 어느 날부터인가 거래선 변경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건 부하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대독에 들어가서일 수도 있고, 창고에 불이 나서 급전이 필요해져서일 수도 있다.

때로는 어디 끌려갔다가 반 죽을 만큼 두드려 맞은 탓에 치료비가 급했던 경우도 있었다. 이 시절은 의료보험이 없어서 병원비가 많이 비싸다.

그리고 서상은 그런 상인들에게 쌀값을 높게 쳐 주었다.

아직 중국의 대외 무역은 톈진 조약, 그러니까 망국팔조에 기반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고려인민공화국은 거기에서 자기 유리한 부분만 계승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어디까지나 ‘영국에 얹혀서’ 대중국 무역을 하는 입장이다. 톈진 조약 당시 조선은 조약 당사국이 아니었다.

고려 사람들은 직접 말하는 것 외의 모든 방식으로 자기들이 ‘영국의 고용인’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이를테면 협박하려고 멱살 잡아 끌고 온 상인이나 농부 앞에서 자기들끼리 한바탕 굿을 하는 식이다.

“오, 블러디 헬! 그 영길리 깃발을 빨리 걷어내지 못해! 우리가 마치 영길리 사람들의 사인 같잖아!”

“즉시 치우겠습니다요, 캡틴!”

“다시 한번 말하는데, 우리는 절대로 영길리국과 관련이 없어!”

“아이 아이, 써!”

“자, 그러면 저놈들을 이 양총으로 몇 대만 두들겨 패 볼까!”

많이 맞고 곡식마저 ‘판매당한’ 중국 사람들은 살벌한 협박을 듣고 풀려나게 되었다.

‘너희는 물론이고 일가친척에다가 숨겨둔 첩실까지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 쓸데없이 주둥이 놀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라!’

그런다고 주둥이를 가만 놔두면 사람이 아니다. 모든 피해자는 ‘조선인 뒤에서 악행을 조종하는 영길리 놈들’에 대한 기억을 단단히 새겼다.

다만 지금 도광제의 관군, 아니 황군(皇軍)이 그다지 국민적 신뢰를 받지 못하다 보니 관청에 고변하려는 자는 많이 없었다.

‘영길리 해적의 행패’는 음습하고 눅눅하게 직례 전역으로 퍼져 갔다.

세상에서 누명 씌우기 가장 좋은 나라가 영국이다. 모든 사람은 이 모든 행패와 곡물 대량 유출을 영국인이 저질렀다는 것에 한 점 의심도 가질 수 없었다.

물론 그건 일반인들 얘기고, 대청의 수뇌부가 이런 애들 장난에 넘어갈 만큼 멍청하지는 않다.

그러나 도광제는 항상 그렇듯 꼭 쓸데없이 한 번 더 머리를 굴리는 바람에 일을 망쳤다.

‘어차피 인심은 이미 영길리국을 지목하고 있다. 사실이야 어쨌건, 지금 고려를 건드릴 수는 없어. 북경은 압록강에서 닷새 거리도 안 돼. 고려는 나중에 손봐 주더라도 당장은 영길리를 내리눌러 조야의 지지를 모으고 반란군을 소탕하는 데 힘써야 한다.’

도광제의 판단은 천자다운 것이었다. 인심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천리에 따르니 어찌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지 처치해 버릴 수 있는 고려 때문에 당장 위급한 반란 대처의 여력을 분산시킬 수는 없다. 게다가 무슨 짓 할지 모르는 영국에 대한 견제 겸 경고도 필요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간 암허스트에 비해 온화하다고 평가받던 조지 스턴튼 역시 영국인이기는 매한가지였다.

‘개항장으로의 곡물 유통을 금지?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자살 욕구?’

망국팔조에는, 바로 그래서 정약용이 망국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기는 하지만 방곡에 대한 규정이 없다.

청은 ‘자유로운 시장 질서’하에 개항장으로 유출되는 곡식 유통을 정부 마음대로 통제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모독이다. 자유 시장경제에 대한 이 다시없는 폭압에 영국 공사는 분노했다.

그리고 시준과 달리 영국은 정말 자금성을 뚫고 도광제의 머리를 깨 버릴 수도 있다. 전력을 다한다면 말이지만.

물론 영국도 자기 이름 팔고 다니는 고려 사람들을 단속하고 청과 협상해 본다는 선택지가 있다.

그러나 그러면 고려 사람들은 “아이고! 저 영길리 놈들이 하나밖에 없는 동맹의 편을 안 들어 준다!”고 통곡할 것이다. 영국은 항상 친구가 적고, 고려에게 이 정도 ‘친구비’는 지불해야 했다.

게다가 외교란 미묘한 것이어서, 그 대처가 아무리 옳을지라도 영국이 그렇게 하는 순간 영국은 청에 숙이고 들어가는 게 된다.

따라서 영국인들이 그렇게 자기 욕먹어 가며 옳은 도리를 실천할 리가 절대로 없다. 시준은 그렇게 믿었다.

그리고 언제나 주석 동지의 영도는 정확하다.

중국에 대한 유화 정책을 표방하던 주중 영국 공사관은 황제와 대립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군의 집결과 재편성은 각지에서 삐거덕거리고 늦어졌다. 본래대로라면 여름에는 출발했어야 했을 15만 대군은 반도 채 모이지 못했다.

오는 도중 굶주리다 못한 병사들이 도망치거나 병으로 쓰러졌다. 그나마 그건 나은 축이고 많은 부대는 아예 반란군에 합류하기도 했다. 반란군에는 그나마 죽이라도 있으니까.

도광제의 가장 큰 실수는 외교 정략에 정신이 팔려 영국과의 대립이나 시준의 방해를 수습하기 전에 수확기의 도래를 막지 못한 것이었다.

가을이 지나면 겨울. 이는 황제의 권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치이며, 겨울에 그 험한 산지로 진군할 수는 없다. 군대는 직례의 백성을 가차 없이 착취하며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물론 그로 인한 민란도 계속해서 솟구쳤다.

마치 거북이를 뒤집는 것처럼 사방에서 청을 걷어차고 있었다. 아직 누구도 본격적으로 침공하지는 않았음에도 도광제는 속이 뒤집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해 겨울이 깊어갈 무렵 동인도 회사의 새 방침이 극동 지역 회사 책임자 존 레디에게 도달했다.

***

잔도에 마른 짚과 기름을 쌓아 놓은 채 한중을 요새화하고 있는 송주령은 관군의 출정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더욱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그사이 임칙서는 사천 남부와 운남을 통과해 귀주로 다시 돌아가는 2차 대장정의 경로를 구성했다. 미리 사람을 갈라 보내어 해방구를 늘리고 여러 겹의 거점과 도주로를 확보하는 등 최대한의 심혈을 기울였다.

밤이나 낮이나 호흡이 척척 맞는 두 위원장의 지휘 아래 중화 혁명당은 희망을 얻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기랑도 좀 다른 방면의 희망을 얻었다.

동쪽에서 시준이 오직 그녀를 위해 재산을 다 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랑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허나 시준의 염려처럼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무용과 지략을 시험할 생각도 없었다. 이는 그저 합리적 판단의 결과였다.

관군이 오기도 전에 내몽골로의 약탈 행진을 개시하면, 최악의 경우 기랑 쪽 부대를 향해 관군이 먼저 머리를 돌릴 수도 있다. 카자크는 누군가의 최우선 대처 목표가 되기에 부족함 없는 악랄함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관군이 진군해 오면 그때 내몽골 쪽으로 러시아군과 함께 우회한다는 계획을 세워 둔 상태였다.

그 판단은 기랑이 생각하지 못한 면에서도 옳았다.

중화 혁명당은 필사적으로 관군의 이동 정보를 수집하고 있으며, 따라서 직례에서 목숨 걸고 암약하는 동지도 꽤 많았다.

이는 똑같이 직례에서 신디케이트 짓거리 하는 서상과 접촉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다급하게 뿌린 시준의 지령은 대부분이 분실되거나 도달하지 못했지만 딱 하나가 한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서구와 비슷한 방식이었다.

그런 형태인 만큼 공화국의 주석인 시준이 기랑에게 어떤 지시를 한다는 투의 내용이 될 수는 없었다. 표면적으로 현재 공화국은 중국과 어떤 적대도 하지 않는다.

암호 정도로는 마음을 놓기 힘들다. 암호는 대단히 역설적이고 위험한 수단인데, 우리 편은 다들 잘 알아야 하지만 상대편은 다들 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과 중국은 서로의 말을 아는 자도 많고 교류도 잦다.

암호가 결국 까발려질 수밖에 없다면? 답은 간단하다. 암호로 보내지 않으면 된다.

결국 이런 종류의 전갈은 노출을 감수해야 한다. 암호가 아니기 때문에 해독할 수도 없는 추상적 구조가 필요하다.

비유하자면 문에 정교한 자물쇠를 다는 대신 문이 있다는 것도 모르게 회반죽으로 발라 버리는 식이다. 따라서 세세한 지시나 구체적 상황 파악은 불가능하다.

기랑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온 당원의 서간을 펼쳐 볼 수 있었다. 처음 전해 준 사람조차 자기 신분을 숨긴 데다 중화 혁명당 아무도 이게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 해서, 임칙서도 이 서신이 동쪽에서 왔다는 것 하나만 떠올리고 기랑에게 보여 준 것이었다.

<물건 댈 시일이 급하다. 이번 상행은 책문에서의 전례를 따라라>

얼핏 보면 그냥 장사꾼끼리 납품 기일 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은 많이 쇠퇴했지만 책문이 무역의 성지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기랑은 알 수 있었다.

그 이상한 글씨는, 중국은 물론이고 공화국에서도 거의 모르는 시준의 진짜 글씨였다.

예전 시준이 주석 더 하기 싫다고 땡깡 부릴 때, 오늘 밤은 네가 필요하다느니 꼬리 쳐 놓고 정작 아무도 안 봐줄 현수막 만드는 데에나 동원한 그때의 분노 때문에 기랑은 시준의 진짜 글씨체를 잘 기억한다.

따라서 그 내용도 기랑에게는 다르게 읽혔다.

기랑과 시준이 함께 책문 부근에 있었던 것은 정약용 모시고 중국에 사절로 갔던 그때뿐이다.

그리고 그 당시, 홍경래가 사고 쳤다는 임상옥의 전갈을 받은 시준은 사절단이고 뭐고 내팽개친 채 조선으로 급하게 돌아왔다.

다시 말해 이는 풀이하면 이런 뜻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본국으로 급히 귀환하라>

기랑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지만 청나라의 어떤 관헌이라 해도 알 리가 없다.

다른 사람은, 설사 지유라도 알지 못할 암시였다.

기랑은 그 부분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흠칫하여 동충하초 상자에 손을 얹었다. 좀 작고 더 튼튼한 상자에 옮긴 뒤 아예 기랑의 몸에 잡아매어 둔 그것을 훔쳐갈 수 있는 자는 없었다.

그녀는 지유도 모른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몰아내려 노력했다.

그러자 약간 더 온건하고 보편 도덕에도 어울리는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건 시준과 나만 알 수 있는 암호야.’

같은 말이지만 느낌은 달랐다. 기랑은 동충하초 상자에 맨 끈을 다시 점검하고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21세기라면 센스가 있다고 표현할 만한 감정을 기랑도 느꼈다.

‘제법이네. 이거 수십, 수백 개 쓰려고 고생 좀 했겠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시준을 용서한다는 건 별개의 얘기다.

기랑은 송주령의 말처럼 이 약을 지유에게 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희망을 눈감아 달라는 식의 협상을 할 생각이 없었다.

1년 가까이 여기에서 지내는 동안 기랑은 마음을 굳혔다.

이 약은 그녀의 친구인 지유를 치료하기 위한 물건이다. 기랑이 명주의 이름을 지어 줄 때 말한 대로 ‘중국에 좋은 약이 있으니’ 가져가는 것이다.

시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고 있어서도 안 된다.

기랑이 시준에게 바라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녀가 시준과 같은 대가를 치르면 그만이다.

혁명 당시 복공은 왕의 ‘건방진’ 은사 따위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이 옳다. 기랑은 시준이 무슨 보답이나 은혜로 그녀에게 애정을 주길 바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반동의 구습이며 신민의 방식이다.

그녀는 사들이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탈취할 뿐이다.

그것이 혁명이니까.

시준에게 ‘혁명’ 맛을 보여주려면 일단 동쪽으로 가야 한다. 기랑은 베니그센이 머물고 있는 천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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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작중에서는 간략화되었지만, 동인도 회사의 아시아 독점권은 정말 아시아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희망봉에서 아시아를 포함하여 인도양, 태평양 전부와 남아메리카 남단까지가 엘리자베스 1세가 부여한 동인도 회사의 ‘독점 영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아프리카로의 확장도 가능은 하죠. 다만 이때 아프리카는 전염병이라든가 아직 만만찮은 토착 이슬람 왕국들이라든가 하는 이유로 그렇게 (통치가) 쉬운 곳은 아니었습니다.

2. 디바이드 앤 룰은 연원을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격언입니다. 동쪽에는 이이제이라는 말이 있죠. 카이사르와 나폴레옹이 즐겨 말했다고 전해지나, 지배자라면 참고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만큼 발화자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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