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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42화 (242/284)

242화

81. 거북이 뒤집기(3)

적어도 현재, 세포이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날 요인은 없다고 보는 게 이성적이다.

약포에 기름을 떡칠했건 구운 쇠고기를 강제 배급하건 그건 ‘그 자체만으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항상 그렇듯 돈이다.

그러나 동인도 회사는 세포이들의 토지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고, 아직은 퇴직 연금 넉넉히 줄 만큼 돈이 있었으며, 진급 연한에 대한 불만도 세포이의 세습제가 관행으로 굳어지지 않은 현재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봉건 귀족에게 (동인도 회사가 판단한) 적법한 후계자가 없을 경우 그 영토는 회사령으로 편입된다는 정말 영국 같은 규칙도 제정되기 전이다.

따라서 세포이 반란을 후원해 줄 명문 거족도 많지 않았다. 후원하고 싶어도 동인도 회사의 강제 고리대금업 때문에 돈이 없기도 했지만.

아와드 영주와 동인도 회사군의 거래에서도 알 수 있듯 나름대로 영국과 상생 관계를 맺는 라자도 있었다. 이래저래 델리에 갇힌 황제만 불쌍하다.

이 모든 문제는 현재 싹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40년 뒤에나 심각해질 사안이다.

반란이라는 도박에 자기 목숨을 칩으로 던지려면 목숨값이 너무 비싸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현재 동인도 회사는 값을 잘 쳐주고 있었다. 적어도 반란에 투신하지 않을 만큼은 말이다.

허나 영국인들은 현지 ‘문화’에 대해 더 잘 이해했어야 했다.

실용주의자들의 착각과는 달리 문화나 종교도 다 먹고 살자고 생긴 것이며, 따라서 이득과 떼놓을 수가 없다.

인도 사람들은 기름 약포보다 훨씬 이전부터 기독교도들이 인도 전래의 전통과 문화를 파괴하려 한다는 – 다시 말해, 그들의 이득을 침해하려 한다는 –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침례교 선교사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바로 그 선봉장이었다.

윌리엄 캐리는 미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회개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정부가 마땅히 자기를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교사는 ‘미개인’을 정복하기 전, 혹은 정복하는 중에나 필요하지 정복한 후에는 필요성이 많이 줄어든다. 간첩과 정확히 쓸모가 똑같다.

많은 현지 지배층이 그렇듯, 동인도 회사도 쓸데없는 분란만 일으키는 선교사들을 귀찮아했다.

다행히 동인도 회사는 선교사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놔두다가 붙잡히게 하여 몸값을 물어준다거나 구출을 한다거나 하는 세상 최악의 돈낭비 따윈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윌리엄 캐리는 영국령에 아예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서벵골의 덴마크령인 세람포어(Serampore)에 머문 채였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시간이 꽤 흐른 1830년대에야 인도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지금 윌리엄 캐리는 꽤 초조했다.

미국 프로테스탄트의 2차 대각성(Second Great Awakening)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초 복음주의 운동(evangelical movement)은 그에게 행동을 촉구하고 있었다.

복음주의 교파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자선과 구호는, 똑같은 짓을 어느 교파보다 대규모로 거행한 정약용과 조지당 때문에 런던에서의 존재감이 살짝 희미해졌다.

교회 헌금 시스템이 그 어떤 인류 국가의 조세 제도보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이라 해도, 교파별로 흩어진 프로테스탄트 특성상 고려-유대 자본에 비길 규모는 아니다. 이 대흉년에 곡식을 그렇게 많이 사들일 돈은 없었다.

물론 명색이 이 짓으로 먹고사는 목사들이 돈 없다고 물러나면 프로 체면이 말이 아니다. 많은 교파는 런던에서 정약용의 ‘이단적 해석’을 공박했다.

그러나 그레이트 어웨이크닝의 바람을 타고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교파들의 첨예한 대립에서, 정약용을 비난하려는 시도는 자기들끼리의 더 많은 분쟁을 일으켰다.

“하느님은 유색인종에게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주지 않았다고? 너 이 새끼, 지금 우리 아프리카 교회 다 말아먹을 일 있어?”

“그리스도는 가난했으며 모두에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이 거짓이라고? 혹시 너…… 가톨릭이냐? 아일랜드 첩자인 거야?”

헉헉대던 목사들은 결국 정약용이 하는 행동이 자선인 이상 이건 무익한 헛수고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몇 조지들이 길거리에서 ‘위선적인’ 목사들을 두들겨 팬 일은 이 ‘각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복음주의 교파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지금, 돈도 떨어지고 부인도 우울증 일보 직전인 윌리엄 캐리의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성과를 세워야 했다.

그래야 미국처럼 인도에서 ‘새로운 에덴’을 개척하고, 본국에서도 지원을 좀 보내 줄 것이 아닌가.

윌리엄 캐리가 면밀히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정시준의 ‘심복’이 이 인도에 도착했다고 한다. 캐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분개했다.

‘속셈이 뻔히 보이는군……!’

별명도 반왕(Anti-King)인 게 어째 적그리스도(Anti-Christ) 냄새가 나는데, 양 떼를 미혹하는 그 권세를 이 인도에까지 풀어놓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런던에서 요새 갑자기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윌리엄 캐리의 생각에는 전 세계의 종교계가 자신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참을 수 없었던 캐리는 행동을 개시했다.

몰래 세람포어를 빠져나와 벵골 전역에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하긴 원래 밀입국은 국가 첩보기관보다 선교사들이 더 잘하는 영역이다. 근성의 선교사 윌리엄 캐리는 몇 달 동안 불길과 같은 종교적 열정을 펼칠 수 있었다.

문제는 한창 윌리엄 캐리가 그러고 있을 시점이, 바로 기랑이 총알을 전해 준 시점과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더러운 돼지기름과 신성한 소기름을 입에 묻힐 경우의 카스트 하락을 걱정하던 벵골군 브라만 병사들은 윌리엄 캐리를 보자 ‘영국인들의 속셈을 알았다’고 생각해 버렸다.

‘기독교도들이 우리를 타락시켜 지배하려 한다. 우리가 천민이 되면 저들에게 투항하여 노예가 되리라 여긴 것이겠지!’

특히 캐리가 인도인들의 비위를 건드린 부분은 가정 질서의 파괴였다.

윌리엄 캐리는 남편이 죽었다고 부인을 불태우는 사티 풍습을 금지시키고 과부의 재혼을 허가하려고 평생 노력했다.

이 사업으로 그는 잔인하게 희생될 많은 과부의 목숨을 구했으며, 동시에 결과적으로 영국의 침공을 도와 훨씬 많은 사람의 목숨을 죽이기도 했다.

어떤 것이 옳다고 보느냐에 따라 문명 개화론자와 문화 상대론자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시점이 좀 빠르긴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사티는 심지어 영국인조차 마음 놓고 타민족을 비난할 수 있을 만큼 끔찍한 풍습이라 동인도 회사도 대놓고 캐리의 행동이 잘못되었다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이건 기름 총알 따위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

사티 풍습은 남편의 정복욕이 변태 같은 방향에서 발휘된 것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물론 그것도 있다).

‘전통’이 대개 그렇듯 이도 따져보면 돈 문제와 연관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문명권에서 형사취수제가 존재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조선에서는 왜 인구 때문에 항상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자결한 과부를 포상하였는가?

야곱의 손자 오난은 형수를 임신시키지 않겠다는 현대인 같은 생각을 한 죄로 고대신 야훼의 신벌을 받아 죽은 데다, 그 이름이 영세토록 수음의 대명사로 치욕을 남기게 되었다. 어째서 그러했는가?

모두 목적은 동일하다.

과부가 가지는 남편의 재산, 그리고 그녀가 시집올 때 가지고 왔던 지참금을 결코 가문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오난이 급살 맞은 것은 가문(의 돈)을 지켜야 할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형수에게 더 이상 아이가 없으면 그가 장자가 될 터이므로 오난에겐 이득이다.

허나 형수가 재산 일부를 가지고 다른 가문에게 – 고대 중근동의 바바리안 사회에서는 ‘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세력에게 – 가는 일은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을 번창시키겠다 약속한 야훼는 그 약속대로 건방진 오난을 쳐 죽였다.

그냥 형을 병으로 죽게 하지만 않았으면 모두가 행복했을 텐데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이처럼 형사취수는 실패할 수도 있는 방법이다. 무엇보다 동생이 없으면 별수가 없다(형제가 줄줄이 비명횡사한 오난이네 가족은 시아버지 유다가 나서야 했다).

그렇다면 과부를 재가시키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인가?

조선처럼 법적으로 재가를 금지시키는 방법도 있다.

허나 인도 하면 또 합리의 학문인 수학으로 유명하다. 수학적인 인도인들은 어중간한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도의 방식은 1이 아니라면 0. 죽이면 된다.

죽은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 재가할 수 없다.

인류사에 빛나는 과학 문명으로 동쪽의 양자역학 조선과 서쪽의 위상변환 프랑스가 있다면 가운데에는 디지털 인도가 있는 것이다. 21세기에도 세계의 많은 IT 개발자는 불가해한 난관에 부딪쳤을 때 유투브에서 인도의 신을 찾는다.

디지털에는 애매함이 없다.

절대 돌이킬 수 없고 의심할 수 없이, 모든 사람이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마을 한가운데에서 활활 불태워 버려야 한다.

여자 쪽 집에서 사망에 의문을 제기하며 재산권 행사를 보류시키거나 할 수 없도록 말이다.

물론 불에 던지기 전에 마약을 좀 먹여 둬야 ‘자발적’인 것처럼 보여 주위의 기부를 받는 부수입을 올릴 수 있다.

이는 중요하다. 조선 열녀문도 자발적 자살일 때나 세금 면제해 주는 거지 시집에서 죽이면 그냥 살인죄다.

이게 사티다. 원 역사에서는 몇 년 후에 금지되지만, 불굴의 인도인들은 끝내 영국인을 내쫓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전통과 문화를 되살려 보존하게 된다. 21세기까지도.

실로 피억압자의 영광된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윌리엄 캐리는 선교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다시 읽어 봤어야 했다. 그가 유다 지파의 원조만 다시 되새겨 봤어도 이 사업을 재고해 봤을 것이다.

인도인들은 그들의 소중한 전통이 파괴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남편이 죽었는데 부인이 살아 있어야 한다고? 그런 못된 풍습이 퍼지면 모든 여자는 남편의 재산을 노리고 독살을 저지를 것이 뻔하지 않은가!”

“아들이 죽고 난 다음에 시집은 무얼 먹고 살라고?”

기름 좀 입에 묻힌다고 돈이 나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건 돈 문제였다. 그래서 디지털적 인도인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물론 아무리 인도인이라도 마누라 살 타는 냄새 맡으며 저승 가는 게 소원이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좀 힘들다.

그래서 여기서 이용된 게 (사실 별로 신경 쓸 생각 없었던) 기름 약포였다.

게다가 돼지기름 약포를 핑계 삼는 일은 또 하나의 이점을 가져다준다.

사티에 큰 관심 없던 무슬림 역시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다. 힌두교도 병사들은 여기에서 종교 대통합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기랑이 전해 준 새 탄환은 영국군에 일부 있던 강선총을 사용해 시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몇 가지의 복제품을 만들어 본국에 보내면 참모장 선에서 승인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그 업무를 수행하던 벵골군의 조병창은 소규모 병사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물론 원래 역사처럼 대규모 항쟁이 일어날 만한 공감대가 없었기에 말 그대로 소규모였고 금세 진압되었다.

옥털로니 장군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소기름과 돼지기름을 입에 댈 수 없는 게 문제라고? 그럼 그냥 약포를 손으로 찢으면 되잖아? 아니면 부속품만 나눠 줄 테니 저들이 알아서 ‘정결한 기름’ 구해다가 방수 처리하라고 해라. 야만인들이 별 같잖은 소리로 귀찮게 구는군.”

장군은 여기에서 끝날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요는 그치지 않았다.

애초에 기름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캐리가 근성으로 구축해 놓은 개척 교회는 불타고, 그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세람포어로 도망쳤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동인도 회사도 나름대로 고소해하고 있었으므로(“그러게 애초에 기어들어 오지 말랬잖아.”) 봐줄 만했다.

허나 한 번 터져 나온 불만은 그치지 않았다. 40년 뒤처럼 봇물처럼이라고는 못 해도 깨진 물독 새듯 하는 정도는 되었다.

기독교 선교 금지의 요구는 그나마 협상해 볼 만한 사안이다. 영국도 일부 과도하게 열정적인 성직자를 제외하면 선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영국인이 보기에는 어딜 가나 선교에 집착하는 프랑스인이 더 이상해 보였다.

‘짐승에게는 고기만 얻어내면 됐지, 뭐 하러 교회에까지 끌고 간다는 말인가?’

이처럼 영국인은 종교에 항상 관대했다.

그러나 흐름은 선교 거부에서 끝이 아니었다.

‘이것저것 보장하라! 아무거나 규탄한다!’식의 주장이 때를 타고 쏟아져 나왔다.

예를 들어 상위 카스트는 천것과 같이 복무하는 마드라스와 뭄바이군(軍)의 잘못된 모병 행태를 시정하라 요구했고, 하위 카스트는 벵골군의 상위 카스트 중심 모병제와 군 내 제도적 카스트 차별의 철폐를 희망했다.

둘 다 표현 방식은 폭동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영국의 의사고 뭐고를 논하기 이전에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요구다. 모순되니까.

게다가 인도 주둔 영국군도 엄연히 군대인 이상, 요구에 대한 협상과는 별개로 폭동 주모자와 참여자는 용서할 수 없었다.

많은 세포이가 교수대에 매달렸다. 몇몇 영국군 장교들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힌두인들의 배후 중상’을 구르카 전쟁에서의 졸전 원인으로 변명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 모든 정보는 런던 증권가 신사들이 인도에 파견한 첩자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주식쟁이 일과의 반은 하늘에 뜬 무지개도 투자 길조에 끼워 맞추는 자기 합리화다.

이런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의 투자와 맞는 증거가 나온다면, 그것은 신앙이 된다.

“인도에 군사적 불안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닌가?”

“동인도 회사의 관리 방안을 논의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사실 파악이라기보다 희망 사항에 가까웠지만, 어떤 연금술사(뉴턴은 아니다)의 말처럼 원래 간절히 희망하면 온 우주가 돕는 법이다.

동인도 회사는 그 독점적 지위로 인해 영국 내에도 적이 많았다. 왕 첸 리딩방에서 숏 친 신사들은 그러한 적대감을 응원했다.

그간 동인도 회사가 자행한 불법 노예 매매를 비롯한 여러 만행도 알려졌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동인도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값을 올리려고 다카 방직공들의 손가락을 모조리 잘랐다더라!”

“세금을 내지 않은 지역의 모든 장자를 쇠꼬챙이에 꿰어 걸어 놨다 하던데!”

소문의 진실이야 어쨌건, 보통 때라면 영국인 중 그런 일을 비난하는 자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21세기에도 영국인 대다수는 인도 식민 통치를 악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돈이 걸렸으니까.

영국 사교계와 정계에는 ‘윤리’라는 이름의 귀부인이 갑자기 데뷔했다.

지금까지 천대만 받던 이 귀부인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당장 동인도 회사에 대한 규탄이 이어졌다.

1817년 1월에 있었던 핀다리(Pindari, 인도 약탈병)족의 식민지 습격도 알려졌다.

물론 동인도 회사는 신속하게 그들을 찍어 누르고 3차에 걸친 마라타 분쟁을 종식시킨다.

그러나 주가 떨어지기만 바라는 공매도 패거리는 이를 ‘해이해진 동인도 회사군 기강의 증거’로 여겼고, 그렇게 말했다.

주가는 빠르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

이 일로 뒷날 싹을 틔울지 모르는 여러 분쟁의 씨앗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당겨진 세포이 반란이 현재 어떠한 세계사적 변동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인도에서의 분란은 딱 숏 치기 좋은 정도로만 발생했다.

동인도 회사의 폐지까지 검토하기에는 너무 작은 사안이었으나, 증권거래소 회원들이 역시 왕 첸 리딩방이라며 다투어 이성을 잃기에는 충분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동인도 회사로서도 정약용을 원망할 새가 없었다.

주가가 하락한 것은 인도에서의 분쟁이 특급으로 런던에 알려지기 시작한 뒤다.

(만행을 저질렀다는 점이 아니라 만행이 알려졌다는 점에서) 명백한 동인도 회사의 관리 실수지, 정약용이 뭔가를 해서 주가가 떨어진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정약용은 그간 선비의 지란지교를 나누어 둔, 다시 말해 왕 첸 리딩방에서 최우선 정보를 받던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인도양행은 고려인민공화국과도 오랜 우의가 있소. 주식이니 뭐니 하는 장사판의 허망한 숫자에 휘둘려 조정의 관헌들이 쉽사리 혁파의 논의를 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게 네가 할 소리냐고 역정 내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이 관료들이 정약용과 같이 공매도 수익을 나눠 먹은 사람들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대국적으로 보면 영국은 아직 동인도 회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하지 않는 참선비 정약용은 막대한 공매도 수익을 힐끗 보고 잊어버렸다. 그는 여전히 검소한 관사에서 살며, 본국에 이득을 갈라 보냄과 동시에 조지당의 구호 사업을 더욱 크게 벌일 뿐이었다.

그리고 정약용과 주식 리딩방으로 연결된 영국의 각계각층 동지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지당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고려 공사의 명예로운 자선 활동이 부당한 오해를 받고 있소.”

“구호 중에 낭독하는 성경 말씀을 듣고 빈민들이 어떤 영감을 얻은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러나 그게 공사 각하의 죄는 아니지 않소? 그럼 모든 교회의 설교를 금지할 건가?”

“바로 그거요! 내가 절대 주식 때문은 아니고 호기심에 한번 가서 시험 삼아 들어 봤는데, 말이야 다 옳은 말이더군. 사람들이 괜히 편견에 빠져서 아시아인은 성경을 읽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그런 게지. 지성인이라면 자기 자신을 독선과 아집에 가두지 않는 법일세.”

이는 런던 시경으로 하여금 끈질긴 수사를 슬그머니 포기하게 했다.

정약용과 조지당의 연관성은 시경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약용은 특별히 그들과 같이 공장을 습격한다거나 한 적도 없고, 어떤 종류의 행동도 촉구한 바 없었다. 어떤 조지를 잡아다 조져 봐도 그런 자백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나왔다고 한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다. 법은 존귀한 데에 미치지 못한다는 『춘추』의 대의는 여기 영길리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찰 역시 고대의 아름다운 선비를 본받았다.

그들은 안 그래도 심문 중 조지 소리만 계속 들어 이상해진 귀를 허유(許由)처럼 씻어버렸다(템즈강에 씻은 건 아니다. 역효과다). 그러고는 깔끔하게 배후 수사를 포기했다.

실제로 공장 부수러 오면 그제야 대충 체포해서 그날 기분 따라 교수대에 매달든지 호주로 보내 버리는 식이었다.

열심히 탄압해도 늘어날 판에, 경찰이 손을 놓자 조지당은 더더욱 활개 쳤다.

그들은 곧 다른 도시의 러다이트 운동 조직과 연계했다. 맨체스터 부근의 웨스트호튼(Westhoughton) 패거리가 대표적이었다.

러다이트 운동은 원래 일정한 배후 세력이나 정치 지도자가 없던 산발적 테러에 가까웠다. 그래서 조직간 계파 싸움이나 교묘한 모략이 동원될 필요도 없었다.

누가 데려가 주기만 기다리던 그들은 손쉽게 조지당에 흡수되었다.

오해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절대로 정약용의 지휘가 아니다. 실제로 정약용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폐하고 고통스러우며 짧은 생을 동물처럼 반복하던 영국 빈민들의 자발적 군집이었다.

조지들은 원래부터 하느님이 주신 삶이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가난한 줄 알았던 아시아인이 그것을 부정했다.

그가 거리낌 없이 내민 인류애적 구호의 손길은 잊고 있었던 희망을 생각나게 했다.

‘어쩌면 더 나은 삶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의 손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곧 영국의 산업도시 곳곳의 교외에서는 기묘한 움직임이 관찰되었다.

빈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마치 어떤 스포츠를 하듯이 뛰어다녔다.

그들에게 무기 같은 건 별달리 없었지만 능숙하게 대열을 이루고 흩어지며 다시 모이는 그 모습은 군대를 방불케 했다.

어쩌다가 그 근처에 얼쩡거릴 만큼 할 일 없는 사람들은 기묘한 구호를 듣게 되었다.

“나는 조지다[I am George]!”

“너는 조지다[You are George]!”

“우리는 조지다[We are George]!”

“우리는 하나다[We are the one]!”

그리고 어떤 사람의 무지스러운 횡포로 인해, 시간과 공간 둘 모두에서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말도 들렸다.

조지들은 마치 한 사람처럼 낮고 힘 있게 말했다.

“조지가 잃을 것은 사슬뿐이요, 조지가 얻을 것은 온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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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윌리엄 캐리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때이른 밀입국만 빼고 실제 역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인도에서 돈 없어서 고생 많이 했고, 아내가 우울증에 걸린 것도 맞습니다. 인도의 사티 폐지 운동에 큰 기여를 한 사람 중 하나로 평가받지요.

작중에서 기독교 선교와 사티 폐지가 중점적으로 나온 이유는, 실제 역사에서 이 시대에 기름 약포와 맞물려 촉발될 수 있는 항쟁 원인이 저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요인인 직접적 경제 차별은 대개 동인도 회사가 본격적으로 인도를 감당 못하고 쪼들리면서 시작된 거라서요. 그래서 작중에서는 항쟁의 규모도 작았지요.

2. 인도는 현대에도 눈치 없이 아직도 살아 있냐며 사회적 압력을 주거나 안 되면 약 먹이고 강제로 밀어 넣는 방식으로 사티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불법입니다. 허나 인도는 법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나라이고(정확히는 법보다 우선시되는 규칙이 많고), 특히 대도시가 아닌 지방에서는 더욱 그렇죠.

3. 옥털로니 장군이 말한 기름 약포 대처법은, 실제 세포이 항쟁 당시에도 영국이 생각했던 대안 중 하나입니다. 불만이면 밀랍이나 식물성 기름 구해다가 알아서 하라고 툭 던졌는데… 사실 작중 내용처럼 ‘그게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항쟁은 그치지 않았죠.

4. 덴마크는 19세기 중반까지 인도에 식민지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덴마크 동인도 회사도 파산하고 여러 일이 많았지만, 영국에 의해 뺏기는 거나 다름없이 판매할 때까지 근성 있게 붙들었습니다. 의외로 덴마크, 노르웨이가 원조 해적 바이킹 스웩 과시하려는지 여기저기 뜬금없는 곳에 식민지 욕심이 많았죠.

5. 오난은 인류 역사상 이름의 오용이 가장 억울한 사람 중 하나일 겁니다. 그가 한 건 피임뿐이었거든요.

오난의 사례를 고대 중근동 가문 질서의 일부로 보는 이유는, 결국 이 막장 이야기의 끝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자식으로 이 가문이 이어진다는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너무 어린 셋째아들 이외에는 그 가문에 남자가 시아버지밖에 없었습니다. 시아버지까지 나서서 며느리 다말이 가진 ‘장자의 몫’을 밖으로 유출시키지 말아야 했다는 소리가 되죠.

그래서 남편 줄초상 난 다말도 다음 타자 셋째 아들이 장성하길 기다리며 ‘친정 대기 상태’ 였습니다. 장자를 바꾸거나 하는 더 상식적 판단이 아니라요. 이건 남편이 아니라 다말 자체에게 중요한 몫이 있었다는 방증입니다.

다만 아무리 이 때 중근동 유목민이 야만인이었더라도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결합은 금기였던지라 구구절절 시아버지 면피할 변명은 늘어놓습니다. 그치만 롯의 딸들과 비슷한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글쎄? 진짜 변장했다고 며느리 못 알아봤어? 하는 생각이 들죠.

참고로 이 시아버지 이름이 유다고, 이 사람이 ‘유다 지파’의 시조이며 다윗과 솔로몬의 조상… 다시 말해 (족보상)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입니다.

6. ‘새로운 에덴’은 대각성 운동 당시 미국에서 이 ‘사람 없는 신천지’ 위에 원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맥락으로 쓰인 말입니다. 원래 거기 많이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지랄한다고 해 줄 수 없었던 이유는 다 죽어서입니다(어쨌든 사람은 없음). 미국 프로테스탄트는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수많은 신앙 부흥 운동을 일으켰죠.

7. 조지들의 집단 훈련은 정약용이 가르친 건 아닙니다. 러다이트 운동 당시 영국 빈민들도 저렇게 교외에서 공장 습격 훈련을 한 다음 들이쳤습니다. 대표적인 게 작중 언급된 맨체스터 옆 웨스트호튼의 노동자들입니다.

8. 인도가 배경이 아니다 보니 카스트 얘기는 깊게 다뤄지지 않았는데, 사실 현대에는 ‘서구인들이 아는’ 카스트라는 건 인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업인 ‘자티’ 등 복잡한 사회적/지역적 관계를 배제한 단순 4계급 구분, 또 계급 간의 일직선 상하관계 등 다른 나라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정리된 ‘인도 카스트’는 사실 영국의 식민지배 도구로서 창조된 개념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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