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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41화 (241/284)

241화

81. 거북이 뒤집기(2)

송주령이 기랑을 데리고 간 건 나름대로의 사의 표시를 위해서였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기랑이 툭 던진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중화 혁명당은 러시아와의 협상에서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놓일 수 있었다.

자기 처소로 기랑을 데려간 송주령은 화주(火酒)를 한 잔 내놓았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중화 혁명당의 형편으로 보았을 때 매우 후한 대접이다.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송주령은 기랑을 ‘동지’라고 부르지 않는 것으로 사적인 자리임을 분명히 했다.

기랑이 특별히 대답하지 않자 송주령은 형태를 질문으로 바꿨다.

“이 일까지 정시준이 예견하고 명을 내린 바인가? 그 영구혁명론은 아주 진감할 만한 경구였네. 그 말 했다는 ‘친구’라는 사람이 정시준인 게지?”

“아니. 시준의 아내야.”

송주령은 왜 기랑이 퉁명스러운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기랑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송주령은 기랑이 가장 원하지 않는 얼굴로 가장 원하지 않는 말을 툭 던졌다.

“처첩이 꽤 친한 모양이구나. 가화만사성이로다.”

“첩 아냐.”

기랑의 눈은, 조금 있으면 칼을 뽑을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염군의 수장에게는 통하지 않는 협박이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기랑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갔어야 한다.

그러나 기랑은 그럴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송주령은 기랑의 위치를 내심에서 확정해 버릴 것 같았다.

기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언제부터 기랑이 다른 사람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 부류였다는 말인가?

게다가 기랑이나 송주령이 가지고 있는 사회 윤리적 의식하에서는, 그야 물론 첩실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불성설의 패륜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기랑은 이 초조함의 정체를 잡아냈다.

‘이 말이 새어 나가면 지유가 서운해할 거야.’

지금이 21세기라도 누설되기 어려운 거리와 관계다. 기랑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타협한다. 그러나 기랑의 강고한 정신에서 불쑥 뒤퉁스러운 심경이 일어났다.

그녀는 그 근원을 다시 한번 끈질기게 추적했다.

얼마 가지 않아 머뭇대며 나타난 진실은, 그런 종류의 진실이 항상 그렇듯이 기랑을 후회하게 했다.

‘첩 노릇조차도 하지 못했는데 저리 말하니 그게 버성겼던 거야.’

여기에서 가장 진실의 농도가 짙고 위험한 부분은 ‘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하지 못했다’라는 점이다.

기랑은 그녀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을 시도했다. 이 원인이 된 송주령의 말을 말로써 깨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려면 파격적 준비도 필요한 법. 기랑은 원래 손도 안 대고 있던 눈앞의 화주를 벌컥 들이켰다.

뜨거운 날숨과 함께, 기랑은 단숨에 말해버렸다.

“첩은 너겠지. 그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기랑으로서는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송주령은 그 말을 기다렸음이 분명했다.

“나? 나도 아냐.”

“그럼 뭐야? 아무리 네가 먼저 나섰다 해도 결국 그가 너를…….”

“나를 뭐, 날 얻었다고? 아니, 거꾸로다. 내가 그자를 가진 거지. 누가 봐도 그렇잖아? 따지고 보면 위원장이 내 첩이라고 해야지.”

“뭐?”

“물론 위원장은 고향에 아내가 있어. 무슨 상관이야? 나도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위원장의 얼굴도 모르는 부인을 섬기며 그 아래에서 비질을 할까? 내가 그러한 위인으로 보이나?”

차라리 임칙서가 송주령의 남편(아마 높은 확률로 부하이기도 할 것이다)과 나란히 방 두고 사는 게 더 현실성 있다.

“그게 혁명 아닌가. 모든 것을 뒤집는 것. 뒤집어 놓고 보면 또 생각보다 별것 아니지. 군주를 필부로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고려국에 벼락이 치고 지진이 나지는 않았잖은가. 이것도 마찬가지야.

알아듣지 못하겠다면 우리 말하던 남녀의 일로 얘기해 볼까. 뜰채를 덮어씌워 펄떡대는 물고기를 잡을 때 물고기가 뜰채를 취했다고 하나? 뜰채가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지. 원래 여인이 사내를 취하는 이치가 순리인 게다.”

조금 후에야 그 비유가 뭔지 알아들은 기랑은 얼굴을 확 붉혔다. 술 때문이라는 말은 해봐야 우스울 것이다. 송주령은 빙긋 웃었다.

“대충 알겠군. 시준은 아직 그대를 가까이하지 않은 게지?”

기랑은 다시 화주 한 잔을 마시고서야 대답할 수 있었다.

“……그래.”

송주령의 얼굴이 약간 기묘하게 보였다. 그녀는 밀어를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그러고 싶지?”

기랑의 주량이 술 두 잔에 이성을 상실할 만큼 약하지는 않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송주령이 말했다.

“여자끼리 말이지만, 더불어 논할 즐거움이 있는 자는 대개 늙어서 밤에 볼품이 없어. 반대로 젊고 강건한 놈들은 보통 낮에 눈 뜨고 못 봐줄 꼴이지. 둘 다 갖춘 자가 흔하지 않아. 찾았으면 바로 집어삼켜야 돼. 그런다고 꼭 작은방에 들어앉으란 법 있어? 군주는 섬기지 않겠다면서 남편과 그 부인은 섬길 건가?”

“……시준이 안 된다고 했어.”

항복 선언이나 다름없다. 송주령은 말없이 기랑에게 다시 한 잔을 따라주었다.

“왜지? 남자 옷을 입어도 한눈에 알 만큼 미인인데. 아, 부인이 투기를 심하게 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기랑은 여태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더듬더듬 설명했다.

멀리 외국이고 시준을 볼 사람도 아니라 새어나갈 염려가 없어서? 같은 여인끼리라 안심해서?

그렇지 않다.

처음으로 이 얘기를 자신에게 물어봐 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유는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고, 시준은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기랑은 평생토록 지금보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이야기 하나마다 한 잔씩 들어가던 화주는 곧 말 한마디마다 들어가게 되었다.

병을 기울이던 송주령은 그것이 비었다는 것을 깨닫고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으로 턱을 괴었다.

“듣자 하니 정시준은 정말 지독한 작자로군. 하긴, 그래야 혁명의 지도자가 되는 건가.”

“그래! 지독해! 나쁜 놈이야! 아예 매정하게 말도 섞지 말든가. 슬쩍슬쩍 웃으면서 뭔가 될 것 같이 굴고…….”

기랑은 보나 마나 내일이면 땅을 치고 후회할 말을 팔까지 휘저어가며 외치고 있었다.

그 서슬에 기랑의 여리지 않은 주먹이 술병을 후려쳤다. 산산이 박살 나는 병을 보며, 송주령은 술을 다 먹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툭하면 송강부니 흔도사단이니 이역만리로 보내 버리질 않나……! 혁명은 개뿔이 혁명이야! 다 때려치울까 보다! 언제까지 제 놈이 해 달라면 다 해줄 줄 알아!”

송주령은 여기에서 ‘그럼 잊어버리고 다른 남자 찾는 게 어떤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럴 정도였다면 이 ‘이역만리’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대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을 열었다. 말보다 빠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기랑이 술병 대신 다른 집기를 한두 개씩 부숴 먹을 것 같았다.

“내가 그대에게 보답으로 일이 성사될 만한 계책을 일러주겠다.”

‘씨, 내가 어디가 어때서! 나도 집에 왕비한테 얻은 예쁜 옷 있다! 나도 그거 입으면 지유처럼…….’ 어쩌고 하며 책상을 쾅쾅 치던 기랑은 고개를 들었다. 만약 동물이었다면 귀를 쫑긋 세웠을 듯한 표정이었다.

“뭔데?”

“아마 네가 꺼려져서 그러는 건 아닐 테다. 그보다는 뭐랄까, 배짱이 없어서라고 할까? 욕먹기 싫어하는 남자들이 있지. 대충 알겠어.”

“지유한테 욕먹기 싫어서 그런다고?”

“아니. 네가 아까 한 말을 들어 보니 심하게 타박하진 않을 듯한데? 그보다는 아마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서 그럴 거야. 부인이 병중이라면서. 화살 맞아서 폐병 든 부인을 내버려 두고 다른 여자와 놀아났다는, 그런 게 싫은 게지.”

기랑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 비난이 자기에게도 해당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 나는 그럴 생각이…….”

“알아.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그게 아냐. 만약 그 병이 낫는다면 어떻게 될까?”

“낫는다고? 여태까지 백약이 무효였는데.”

약재의 대국 조선에도 치료법이 달리 없다면 다른 곳에 새삼 있을 리가 없다. 이유는 달랐지만 시준도 지유도 유럽 의사는 불신했다.

하지만 건륭제가 말했듯 대륙에는 모든 것이 있다.

게다가 영약이라면 중국 사람들이, 그중에서도 무림 협객인 염군이 빠질 수 없지 않은가.

송주령은 상자를 열었다.

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환약이라든가 사람 팔뚝만 한 삼(蔘) 같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잘 보지 않으면 쓰레기로 취급해서 갖다버릴 만한 볼품없는 외양이었다.

기랑의 눈에도 그것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정도로 보였다. 그녀는 술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눈을 비볐다.

그러자 곧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반은 기이한 버섯이요, 반은 바짝 마른 버러지 같은 물건이었다.

기랑이든 송주령이든 이 시대에 절지동물 따위로 기겁할 여자는 없다. 그것을 집어 들어 살펴보던 기랑은 부유한 고총련의 회장답게 금방 정체를 알아냈다.

“선화(蟬花, 동충하초)?”

“과연 조선 사람은 알아보는군. 고려국에도 아마 토산으로 있을 게다. 하지만 여기, 토번의 구름보다 높은 산 위에서만 나는 물건은 격이 다르지. 토번은 옛날부터 험한 산과 높은 봉우리가 많아 사람의 숨이 쉽게 차오르며, 그래서 폐병에 좋다는 약이 옛날부터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원래는 군자금으로 바꾸려고 구해 둔 것이지만…….”

어떻게 ‘구했’는지는 기랑도 묻지 않았고 송주령도 말하지 않았다.

중화 혁명당이 홍교의 교세 회복을 도우려 약간의 힘을 쓰는 과정에서 이 영약을 빼앗기게 된 황교 승려들은 통곡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비무 이긴 자가 영약 가져가는 게 무림의 철칙이다.

송주령은 호탕하게 말했다.

“네가 중화 혁명당에 해 준, 그리고 앞으로 해 줄 일은 군사 수만에 비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걸 네게 주마.”

현대에는 항암 효과로 유명하나, 전근대의 동충하초는 주로 폐병과 늑막염 치료 등 허파를 보하는 약재로 인식되었다. 18세기에 이미 유럽 학회에까지 소개될 만큼 그 효능은 잘 알려졌다.

그중에서도 야차굼바(དབྱར་རྩྭ་དགུན་འབུ་)라고 하는 티베트 동충하초는 해발 4천 미터의 악독한 고산지대에서 나는 것을 상품으로 치는데, 21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채취한다.

“무사히 해산까지 했다면 죽을병은 아냐. 이걸 먹고 활기를 되찾으면 정시준도 더는 쪼잔한 핑계를 못 댈 테지. 부인도 네게 고맙고 미안해서 눈감아줄 테고. 그때 형세를 잘 봐서…….”

송주령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잡아 먹어버려.”

기랑은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느냐고 호통을 치려 했다.

그러나 기랑의 손이 그녀의 의사를 배신했다. 기랑은 자기도 모르게 동충하초가 든 상자를 보물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딱히 그런 이유는 아냐. 지유가 나으면 좋은 일이니까. 응. 그런 거지.’

기랑은 허둥지둥 송주령에게 사의를 표하고 그 방을 나섰다. 송주령은 그런 기랑의 뒷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작년 기랑에게 지시를 보낼 당시의 정약용이 인도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수행했던 사업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입으로는 주식 시장의 광기와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한탄하던 정약용이었지만 현재 런던에서 가장 주식을 잘 이용하는 것도 정약용이었다. 그것이 ‘실학’이니까.

로스차일드는 동인도 회사 주식을 공매도(空賣渡, Short selling)하자는 정약용의 제안에 크게 놀랐다.

“아니, 동인도 회사가 부진할 거라 보십니까? 물론 10년 전쯤에는 동인도 회사를 폐지하자는 얘기도 많았죠. 그러나 지금은 그럭저럭 실적이 회복세이고, 중국도 안정화되어서 그럴 요인이 안 보이는데요.”

“주석 동지께서는 동인도양행이 백 년은 가지 못하리라 하셨소.”

정약용은 더할 나위 없는 두괄식 설명으로 그 뒤에 무슨 소릴 지껄이든 로스차일드가 받아들이게 할 준비를 갖췄다.

그러고는 희만 선생의 시그니처인 고증을 발휘했다.

“그리고 이제 흔도사단에서 편지를 받아 보니 그 교시가 옳았음을 알게 되었지. 그대는 모르겠지만 진(秦)이 천하의 수레바퀴 폭을 같게 한답시고 선비를 묻고 책을 불태우자 육국의 후손들이 떨쳐 일어났으며, 여진족이 머리를 깎고 호복을 입으라 하자 삼번이 난을 일으켰소. 둘 모두 머릿수 적은 자가 많은 자를 마음으로부터 꺾어버리려 했기 때문이오.”

로스차일드가 여진족이 뭔지 알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유대인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인으로서 그는 모욕에 화냈을 수도 있다.

“영길리국 동인도양행은 흔도사단의 황제를 가둔 채 소위 종속동맹이라는 것을 만들어 번국을 제 뜻대로 하고 있소. 그 나라 사람들 역시 천자의 가르침을 중히 여기지 않음이 없을 텐데 스스로 제후를 세우고 폐하기를 멋대로 하며, 전래의 제사와 교의를 마구 훼철하고 길리시단의 도를 따르라 하니 이는 필시 큰 변란이 날 징조요. 많은 사람들이 뻔히 원망할 것을 알면서도 흔도사단 사람들을 병사로 부리고 있는데 어찌 무사하겠소?”

사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그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영국인은 남을 때리면 남이 원망할 거라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한다. 이건 유전병일 뿐만 아니라 전염병이기도 해서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대인으로서의 그는 이스라엘 건국의 초인 정시준과 그 대리인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대박을 쳤는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번에도 정약용은 그저 우정으로 돈 될 정보를 알려줬을 뿐 로스차일드가 안 한다면 자기만이라도 한다는 태도였고,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속절없이 끌려 들어갔다.

곧 런던 증권거래소에는 기이한 루머가 떠돌게 되었다.

‘왕 첸 약방에서 동인도 회사 주가가 떨어진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정말로 대규모 공매도를 준비 중이야. NM 은행에 내 친구가 있는데 확실하다더군!’

‘이번에는 헛짚은 것 같은데? 그럴 이유가 새삼 없잖아.’

‘듣자 하니 인도에서 무슨 일이 터질 거라 예상하는 모양이야. 그런데 왜?’

런던의 주식 투자자들은 옛일을 떠올렸다.

아이작 뉴턴은 과거 남해 회사 주식 거품 사태에서 큰 손해를 봤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교훈은 ‘뉴턴 정도 되는 천재도 주식은 별수 없다’로 이해해선 안 된다.

뉴턴이 천재인 건 과학과 연금술에 한정된다. 그는 ‘우주의 운행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내가 계산할 수 없다’고 외치며 막대한 재산을 갖다 박았다.

인간을 우주보다 덜 복잡한 것으로 본 시점에서 그는 사람에 관해 완전히 문외한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계산할 수 없다는 걸 알면 들어가질 말아야 했다.

반면 뉴턴보다 사람을 더 잘 아는 영국 정부의 관료들은 달랐다.

물론 그들은 프린키피아를 저술할 수학과 물리학 지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쓸모 있는 것을 갖고 있었다.

바로 정부의 내부정보였다.

남해 회사가 속 빈 강정이며 곧 파멸할 것이라는 예측은 그에 깊숙이 관련된 영국 정부가 가장 먼저 할 수 있었다.

물론 시장 대혼란 때문에 그것은 철저히 비밀이었다. 친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줬다는 뜻이다.

내부정보를 아는 관료들은 파멸의 조짐이 나타나자마자 잽싸게 대규모 공매도를 시전했고,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쥐었다.

잘 알려진 말처럼, 인터넷 계좌의 돈을 훔치기 위해서 솜씨 좋은 해커와 수백만 달러의 장비는 필요 없다. 5달러짜리 몽키스패너 하나만 있으면 된다.

돈은 인공지능을 위한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열쇠는 결국 사람에게 있다.

마찬가지로 뉴턴이 탐구한 세계의 심오한 비밀은 주식 손해를 막는 데에 한 푼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고고한 과학자쯤으로 취급되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뉴턴은 정계에도 많은 경력과 인맥이 있었으나, 왕립 학회에서 휘두른 비열한 협잡질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이 귀중한 정보를 알려 주는 친구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런던의 신사들은 뉴턴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인맥을 총동원하여 화이트홀을 더듬고, 더 여유가 있는 자들은 인도로 빠른 배를 보냈다.

그 정도 투자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불과 3년 전이었다면 ‘수상한 중국인’의 헛소리 따위 웃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런던에서 왕 첸 약방의 전망을 무시할 수 있는 투자자는 아무도 없다.

영국의 시선은 인도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

다만 정약용이 기랑을 시켜 주석탄을 거래한 건 영국에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주식 시장의 광기에 대해 한탄한 참선비 정약용이 그런 악랄한 주가 조작을 시도할 리는 없다.

지금도 그는 기름 약포가 무언가 유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영국군과의 우호 증진과 거래선 개발을 위한 일이다.

정약용의 추론은 그저 영국의 학정에 대해 곧 일이 터지리라는 정도였다.

동인도 회사의 혁신적 경영 방안인 계열사 동맹은 정약용이 보기에는 협천자영제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이는 역사가 증명하는바 반드시 제후의 반발을 불렀다.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다. 동인도 회사의 돈벌이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동포를 학살하는 일이 어찌 지지를 얻을 수 있겠는가(물론 이때 인도라는 개념은, 적어도 인도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정약용은 잘 알지 못했다).

용병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정약용으로서는 세포이들이 불만을 갖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게 더 어려웠다.

병법에서 제일로 치는 도(道, 일관되고 단결할 수 있는 전쟁목표)가 위태롭다. 현자라면 마땅히 동인도 회사에 희망을 걸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신 있게 일을 추진하기에는 빈약한 근거이긴 하다.

그러나 정약용이 이렇게 사안을 밀어붙이는 데에는 항상 그랬듯 시준의 탓도 절반 정도는 있다.

동인도 회사가 왜 망하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는 ‘동인도 회사가 오래 가진 못할 것’이라고 정약용에게 장담했다. 어쨌든 21세기에는 없지 않았는가.

그래서 정약용은 자신의 비약적 예측에 뚫린 구멍을 시준의 보증이라는 반죽으로 보강할 수 있었다. 정약용은 ‘주석 동지가 말한 동인도 회사의 운명’이 이제 기울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러나 정약용은 그저 공매도 단타보다 더 먼 것을 보고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지금’ 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글 배운 자로서 영국 자본이 주는 이득에 기대어 조주위학(助紂爲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이런 식으로 학정에는 주가 하락이 따른다는 경각심을 줘야 바른 도리를 찾을 수 있다.

돈이야 그 과정에서 부작용처럼 떨어지는 하찮은 것. 이것이 바로 참선비 정약용의 훈도였다.

허나 정약용이 가진 군자의 뜻과 달리, 안타깝게도 소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주가에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인도 일대에 집중된 런던 고위층의 시선은,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과 비슷한 전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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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동충하초가 고대부터 의서에 기록되어 있었으며, 티베트 고원의 동충하초가 굉장히 비싸게 팔려나가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과학적으로 정말 효능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2. 공매도의 역사는 의외로 오래되었습니다. 사실상 주식 회사의 성립과 궤를 같이한다고 봐도 무방하죠. 최초의 대규모 체계적 공매도를 논할 때는 보통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 과정이 많이 언급됩니다.

3. 뉴턴은 왕립 학회 시절 존 플램스티드의 천문표 관측자료를 아무 대가 없이 빼앗아 자신의 논문을 출판하거나(프린키피아의 데이터로 쓰임), 로버트 훅의 성과를 권력을 이용해 비방하는 등 정치 권력을 학문에 많이 이용했습니다. 과학자는 뉴턴의 직업 중 하나였을 뿐이고, 전통 있는 귀족이며 권력가이기도 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제지할 수가 없었지요.

경제에도 비전문가는 아니었습니다. 영국 조폐국장도 했었거든요. 남해 버블 주식도 뉴턴이 많은 손해를 보긴 했지만 사실 그의 재산 전체에 비하면 큰일은 아니었고 그나마 얼마 안 가 다 회복합니다.

뉴턴을 과학자로 보는 것은 세종을 언어학자로 보는 것과 비슷한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지 전체, 혹은 대부분을 대표하는 속성이라고는 하기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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