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40화 (240/284)

240화

81. 거북이 뒤집기(1)

중국에 혁명 세력이 꼭 중화 혁명당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화기도 있고 철도도 있던 백여 년 뒤 한국에서도, 미래 한국근현대사 공부하는 학생들의 두뇌를 가혹하게 고문할 정도의 수많은 독립 단체와 항일 투쟁군이 넘쳐났다.

물리적으로도 훨씬 넓고, 통신 수단의 미비를 고려하면 더욱 넓은 이 대륙에 설마 중화 혁명당 하나만 혁명을 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다.

직례 부근에서 복명을 부르짖는 ‘숭정의화단(崇禎義和團)’, 중화 혁명당이 사라진 강남에서 많은 단체의 재집결을 시도하는 ‘십팔로혁명군(十八路革命軍)’, 산동에서 고려와의 연계를 별도로 꾀해 보는 ‘북두맹(北斗盟)’ 등 하나같이 개성도 넘쳤다.

그러한 개별 단체들은 모두 중화 혁명당의 수하에 통일된 것이 아니었다. 사정도 다르고 이념도 다르며 심지어 중화 혁명당을 적대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당면 목표는 모두 똑같았다.

멸청(滅淸).

옛 동방예의지국 조선이 국초부터 왜 여진이라면 이를 갈며 다 죽여 없애려고 난리를 쳤는지 중국인들은 이제야 깨달았다. 공포군주 세종의 선견지명은 대륙을 진감케 했다.

여진족은 ‘하나의 중국’이 아니다. 원래 근본도 모르는 동쪽 숲의 비렁뱅이들이었다. 조선에도, 중국에도 그들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하물며 군주로 섬겨 그 폭압을 감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요새 유행인 민주정을 주장하든, 옛 방식대로 군주정을 주장하든, 아니면 그냥 군벌이나 신정정치를 주장하든 그것은 똑같았다.

미래의 중국에 여진족은 없다.

“변발을 잘라야 하네!”

“그대는 어찌하여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가!”

학자에 따라서는 청 제국이 그 전의 왕조들과 달리 동아시아판 동군연합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확실히 청의 황제들은 그 전 중국의 군주들과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그들은 대륙의 유구한 전통인 배틀 로열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진 시황은 육국을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쾌진격으로 합병했다. 한 고조는 초패왕과 해하에서 건곤일척의 격전을 벌였다.

위진(魏晉)은 중간에 주인이 바뀌기는 하였으나, 결국 사마씨 역시 전면 침공으로 삼국 쟁패에 종지부를 찍었다. 수나라에서 선양받은 당도 정정당당하게 수도에 쳐들어가서 황제에게 관을 빼앗은 것이다.

반동 여진의 종놈이나 다름없었던 송나라는 안 쳐 주더라도, 뒤의 왕조 역시 비슷했다. 원래 죽이는 것 말고는 문제 해결 방식을 잘 모르는 원나라와 그걸 똑같이 갚아 준 명도 천하는 그렇게 얻었다.

불구대천(不俱戴天). 그냥 땅만 차지하는 건 통일이 아니다.

그 땅의 주인이었던 놈이 죽어야 통일이다. 대립황제나 전대 황제를 살려둔 드문 예는 대부분 그 황제가 주인이 아니었던 경우다. 대표적으로 촉한 유선이라든가.

무릇 중화의 패권을 다투는 자는 그런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진은 중화가 아니라 그런지 이 바닥 룰을 잘 모르는 듯했다.

청은 명보다도 훨씬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지만, 그 영토 대부분은 수장의 평화적 복속이나(인조의 복속보다 더 극적인 것은 없긴 했다) 일방적 학살로 획득한 것이었다.

강남의 삼번 정도가 청을 약간 긴장시켰을 뿐이고 그나마 내란이지 국가 간의 전투는 아니다.

그 전쟁에서의 승리를 가능케 한 자원과 영토를, 저 한줌도 안 되는 여진족이 어떻게 얻었는가.

‘하나의 중국인’이 웅장한 자금성을 쌓아 올릴 시점에는 제 손으로 괭이 하나 못 만들던 야만인들이, 어쩌다 시기를 잘 만나서 그 궁전에 슬그머니 들어와 걸터앉았다.

여진족은 명이 스스로 망하기 전까지 산해관 하나도 뚫지 못했다. 숭정제의 유산을 소매치기하기 전에는 기껏해야 조선 장목왕밖에 못 이겼던 놈들이다.

중국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전쟁군주의 위대함을 잘 모르는지라, 그들의 눈에는 어린애를 패 놓고 나 기운 세다고 자랑하는 꼴로밖에 안 보였다.

그런 녀석들이 만주족의 상무적 기풍 어쩌고 떠들며 한족이나 다른 족속이 나약하다 떠들다니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중국인들은 깨달았다. 저놈들의 천하는 정당하지 않다.

제대로 한판 떠 보지도 않았지 않은가.

지구에서 ‘전쟁’이라는 행위를 하는 단 두 종의 생물, 개미와 인간이 정정당당하게 한곳에 모여 맨몸으로 맞붙으면 어떨까?

인간이 질 공산이 높다. 인간은 항문에서 산성 물질을 쏠 수 없다거나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개미의 호전성은 둘째 치더라도, 과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전 세계의 개미를 전부 모은 체중은 전 세계 인간 체중의 총합보다 적지 않다.

사람이 개미집 한두 개는 맨손으로도 끝장낼 수 있듯 청 역시 그러했다. 그들은 오이라트를 멸절시킬 수 있고, 티베트를 밟아버릴 수 있었으며 강남을 파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륙 전체가 덮쳐 물어뜯는 데에는 격심한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하던 대로 수장과 협상하여 자치권 인정 정도로 타협하자니 도대체 수장이 누군지부터 알아내는 게 문제였다.

한 고을에 단체가 서넛씩이나 되는 경우도 있었다. 청의 가혹한 고문은 진실을 이끌어내기에 부족하지 않았지만 그 진실이 너무 많았다. 그야말로 런던에서 조지 찾기였다.

무엇보다 도광제는 자신이 닦는 빛의 길에 타협이나 평화 같은 오물이 묻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반역자는 모두 죽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중화 혁명당이 한중과 사천에서‘도’ 봉기한 게 아니라 한중과 사천‘에’ 있다는 사실을 도광제가 안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도광제는 허겁지겁 팔기와 향용을 불러들였다.

겨우 머리를 알아냈으니 이제 그것을 잘라버릴 일만 남은 것이다.

전직 지혜의 왕은 이미 꿰뚫어 보았다.

혁명 내세우는 역적들이 비 온 뒤 죽순만큼 많이 돋아나고 있긴 하나, 죽순 밭이 그렇듯 결국 이는 모두 하나의 뿌리를 공유한다.

그것이 바로 저 소위 중화 혁명당이다. 그 악적 놈들은 드디어 꼬리가 밟혔다.

도광제는 이제야말로 이 지겨운 반란이 끝나겠다는 희망마저 가졌다.

그리고 그 정보는 여러 혁명 동지들을 거쳐 엉성한 형태로나마 한중에 입수되었다.

***

베니그센이 이상의 사정을 정확하게 알게 된 건, 나를 그냥 죽이라는 제임스 메디선을 고총련 특작부대가 삶의 의욕이 일어날 만큼 패서 일으켜 세운 뒤였다.

이제 그들은 임칙서의 방에서 본격적인 회의라고 할 만한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임칙서는 송주령이 방의 가구나 집기 위치를 잘 안다는 티를 드러내며 자리하는 바람에 혼자 가슴을 졸였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훌쩍대는 메디선의 프랑스어 통역을 들은 베니그센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제야 머리를 떼어내려고 다른 곳을 포기한 채 대군을 집결시키고 있다 이건가.”

다른 곳을 포기했다는 말은 적절했다.

15만의 병력이면 현재의 청이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전군이다.

물론 대청의 전 병력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궁궐 문을 지킨다거나 높으신 분들 심부름한다거나 무한금고 소속의 토지를 습격하는 반적을 방비하는 등 아주 중요한 여러 업무를 마비시키지 않고 보낼 수 있는 전군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이제 대륙의 다른 인민들은 관군의 대규모 학살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임칙서가 말했다.

“그렇소. 만약 아라사국이 우리를 도와주어 하나의 중국 혁명이 완수되면, 중화 혁명당은 반동 여진의 땅 중 바다에 면한 마을 몇 개를 열겠소. 영길리국의 예처럼 말이오. 고려에서 듣자 하니 그대들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 포구를 원한다지요?”

중국으로서는 치가 떨릴 굴욕이겠으나 러시아 입장에서는 안 남는 장사였다.

차르는 히말라야에서 그 ‘바다에 면한 마을’까지의 일직선 북쪽 전부를 원한다.

시준이 알았다면 공짜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징벌적 속담을 중얼거렸을 것이다. 황제와 달리 풍성한 베니그센 역시 솔직히 동의하기는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차르의 신하였다.

그래서 베니그센은 임칙서를 살짝 흔들어 보았다.

“그 말은 영국의 개항장 조약 승계도 그대로 한다는 말이로군? 중화 혁명당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을 영국이 러시아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는데, 어떻소?”

“강도의 칼에 재물을 내어주는 일이 강도를 대우하는 건 아니지. 혁명당의 인의는 마땅히 우리를 도운 아라사를 향할 것이며,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길리를 전부 싸워 몰아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할 수 있다면 그 항구는 그대들을 위해 열어줄 수도 있소.”

그건 세계 인류 누구도 성공한 적이 없는 일이다. 역시 임칙서는 그냥 호구가 아니었다. 차르의 명을 그대로 실행하는 것은 약간 어려울 듯했다.

베니그센은 자기도 임칙서를 본받기로 했다.

“우선, 우리 황제의 명은 청을 대상으로 한 전투가 아니라 고려인민공화국과의 연계였소. 공화국 의장 정시준에게 소식을 보내고 그 답변을 받기 전까지 내가 데려온 병사들은 사절 호위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것이오.”

임칙서는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15만 대군이 곧 들이닥칠 상황에서 무장 병력을 데리고 중립을 선언하다니, 그건 적대하겠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그것을 똑같이 짐작한 당 군사위원장 송주령은 입술을 뒤틀었다.

그녀가 폭언을 퍼붓기 직전, 기랑이 말했다.

“그럼 시준을 만나러 동쪽으로 가야겠네?”

베니그센은 당황했다.

일단 이론상으로 기랑의 말은 맞다.

그는 중국과 고려 겸임 공사이며, 둘 중 어느 임무를 수행하든 동쪽으로 떠나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동쪽은 청나라의 영향권이다.

한중에서 기어 나오는 거 뻔히 봤는데, 러시아 사절이라 밝힌다고 반적들의 땅을 지나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정중히 카펫 깔아줄 리는 만무했다.

임칙서와의 협상 재료로 꺼낸 말이 베니그센의 발목을 잡아 버린 것이다.

적당히 뭉개고 있다가 청군이 확실하게 이길 것 같으면 내부에서 이반할 생각까지도 해 봤던 베니그센은 곤란해졌다.

‘이거, 사절 본연의 임무라는 말을 괜히 했군.’

송주령은 기랑의 말에서 뭔가 영감을 받은 것 같았다. 그녀는 베니그센이 생각하지 못한 해석을 덧붙였다.

“지금 같이 싸울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삼천 명에게 공짜 밥 먹여 줄 만큼 우리도 여유가 있지는 못하오. 여기서 동북으로 가면 내몽고의 여러 부락이 있지. 먹을 것이 부족하지는 않을 거요.”

거기에 반응한 것은 베니그센이 아니었다. 그와 같이 배석해 있던 카자크 지휘관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예르몰로프(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Ермо́лов)였다.

코카서스에서의 잔학 행위에 대해 황제가 추궁하자 ‘내 이름이 공포로 알려지기를 원한다’는 꽤나 열다섯 살 같은 답장을 보낸 이 장군은, 실제로 젊기는 했다. 올해 마흔 정도니 베니그센에 비하면 청년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작년 그를 그루지야 방면군 총사령관에 임명한 황제의 조치는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예르몰로프의 범죄 때문이 아니고 그의 도무지 선배들을 존경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다.

결국 여기서부터 역사는 비틀어져, 황제는 마침 중국 가야 하는 베니그센의 호위 무관이자 카자크 부대의 지휘관으로 예르몰로프를 임명했다.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좌천이었다.

그는 악명 높은 카자크 중에서도 민간인 착취와 전쟁 범죄로 특히 유명했던 장군이며, 동시에 좌천 때문에 욕구 불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예르몰로프는 송주령의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그 지역은 황제의 편인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까?”

예르몰로프의 질문은 ‘우리가 지나가도 된다는 얘기는, 거기 있는 인간 전부를 죽이고 범하고 약탈해도 된다는 얘기지?’라는 말을 품위 있게 바꾼 것이었다.

개척 시절 카자크가 무슨 수로 보급도 안 되는 시베리아를 횡단했겠는가.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 있던 시베리아의 퉁구스계, 이누이트계 제부족은 보통 깡그리 몰살당하고 가진 것을 전부 빼앗겼다.

송주령은 간단히 답했다.

“그렇소.”

너희가 정말 시침 뚝 떼고 ‘사절의 임무’만 수행하고 싶다면 가라. 딱히 우리가 줄 건 없고, 현 몽골팔기의 고향인 내몽골 지역을 ‘지나가면’ 된다.

대충 그런 말이었다. 사절단 통과하는 마을이 민폐 입는 것이야 이 시대에 특별한 일도 아니다.

다시 말해 송주령은 지금, 너희가 우리 동지가 될 수 없다면 우리 적의 적이라도 되라고 한 셈이다.

중화 혁명당과 청나라 사이에서 각을 재야 하는 러시아 입장에서도 의외로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청 황제도 자신의 군에 직접 맞서 싸운 게 아닌 이상 그 정도는 묵인할 것이다. 러시아까지 청에 적대한다는 상상은 도광제에게도 긴장을 유발할 테니까.

하지만 가만히 앉아 있다가(그리고 약탈도 좀 하다가) 중화 혁명당이 이길 것 같으면 그쪽을 돕고, 청이 이길 것 같으면 배반해서 청 황제에게 부채를 쌓는다는 처음 계획보다는 많이 번거롭고 위험하다.

베니그센은 원망을 담아 기랑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기랑은 그 시선을 받아넘길 생각도 하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아라사 사람들이 떠난다면 나와 고총련 사람들도 같이 떠날 거야.”

임칙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수습했다.

하긴 제임스 메디선의 수행원들까지 합쳐서 오십도 안 되는 기랑의 부대가 굳이 있어 봐야 크게 도움될 건 없다.

그들은 러시아와 중화 혁명당의 연결이라는 역할을 위해 온 것이고, 그 임무는 사실상 끝났다. 엄밀히 말해 기랑의 볼일은 고려로 간다는 베니그센 쪽에 더 있다.

“숙녀에게 보여줄 수 없는 일이 많을 텐데.” 어쩌고 이죽거리는 예르몰로프의 말은 아무도 듣지 않았다. 메디선이 나중에 맞을까 봐 통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칙서는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는 고약한 사실을 깨닫고 우두커니 말했다.

“그러면 우리 홀로 황제의 십오만 대군을 맞아 싸우라는 거요?”

사실 임칙서의 말은 정당하지 않다.

아직 그는 러시아에 차르가 만족할 만한 이권 제공 약속을 하지 못했다.

따라서 러시아가 목숨 바쳐 대군에 맞서 싸워야 할 의리는 없다. 어차피 이건 그들의 싸움이다.

송주령은 당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임칙서의 나약한 의견을 제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기랑이었다.

“왜 맞아 싸워야 하지? 호랑이 마주치고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건가? 그러면 총이 있건 없건 죽어. 사냥할 때는 며칠 동안 밥 못 먹고 산 타는 한이 있더라도 안전한 곳을 골라야 해.”

임칙서와 송주령은 머리를 무언가로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다른 자들이었다면 한고조의 예를 본받느니 하며 한중과 사천의 웅거를 정당화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그처럼 옛 반동을 답습하는 흔한 군벌이 아니다.

중화 혁명당은 어느새 소박한 안식처를 얻고 안일에 빠져 있었다. 여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말이다.

모두가, 심지어 당 수뇌부마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대장정은 끝나지 않았다.

“혁명은 투쟁 다음의 투쟁, 투쟁에서 이어지는 영구한 투쟁이야. 내 친구의 말이다.”

기랑은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말 많이 해야 하는 일을 시킨 시준이 다시 한번 괘씸했다.

다행히 더 길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임칙서가 주먹을 부르쥐었다.

“동지의 말이 실로 옳소. 이 어리석은 사람은 큰 깨달음을 얻었소이다. 여기에서 험한 산 믿고 밭 갈아 먹고살다가 삶을 마칠 생각이었으면 그냥 고향을 지키다 죽었지! 혁명은 어디를 불사르건 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어서 사람들을 수습해 대장정을 재개해야 하겠소!”

그건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임무다. 그리고 같은 중앙위원장이자 당 군사위원장인 송주령의 임무는 청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강요하면서 퇴각할 군사적 준비다. 두 사람은 베니그센이 놀랄 정도의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베니그센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부담 가는 일은 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렇게 우리 필요성이 희박해지면 더 곤란한데.’

결국 이 임무도 그저 친구 보러 가는 유람행으로 끝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노인의 사고는 젊은이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경험의 도움을 받기에 최종적으로 거의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검토해야 할 정보량이 너무 많아 속도가 느린 것은 단점이었다.

아무래도 천천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베니그센도 일단은 자리가 파한 데에 동의하고 몸을 일으켰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시오. 우리도 떠날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임칙서도 생각해 보니 우린 혁명 정신이 충만해서 너희 필요 없을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맙소.”

남자들은 다들 머리가 각자의 사정으로 복잡했기 때문에, 송주령이 기랑을 은근히 잡아끌며 얼굴 좀 보자고 따로 데려가는 것은 아무도 유의하지 못했다.

***

북경은 중국에서 북동으로 치우쳐 있다. 따라서 도광제가 각지에 토벌 나가 있던 대규모 군대를 소환했다는 소식은 중화 혁명당보다 평양에 먼저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시준은 긴장했다. 사람들이 물밀 듯이 혁명군에 지원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 중국을 선제공격하기에는 준비가 너무 부족하다.

중화 혁명당이 최선을 다해 버텨주기를, 그리고 러시아가 개입한다면 최대한 빨리 개입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청의 핵심 전력이 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면 그때 상황을 봐서 개전한다.

시점은 아무리 빨라도 청군이 전투를 개시하는 때다. 얽혀 버려야 얼른 빠져나오기 어려우니까.

이것이 전략의 대강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들은 지유는 화난 눈으로 시준을 쏘아보았다.

“진심이야?”

“응? 아, 그, 약간 몸 사리는 것 같지만 이편이 희생이 적고…….”

지유는 19세기와 21세기 모두, 그리고 아마 고대에도 여자들이 사용했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몰라?’

시준은 전생부터 소급되는 경계심을 느끼며 황급히 자기를 검열했다. ‘내가 뭘 잘못 말했지?’

지유가 나직하게 말했다.

“거기 기랑이가 있잖아.”

시준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기랑의 위치를 깜박한 건 아니다.

그렇다기보다는 기랑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깜박했다는 쪽이 더 옳다.

시준이 봐 왔던 한에서 기랑은 무적이었다.

그러나 ‘기랑이라면 전쟁터에서도 알아서 잘 빠져나올 거야’ 따위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지유가 화를 내서가 아니라 시준 자신도 걱정되어서였다.

예전 홍경래가 지유를 납치하자 평화로운 소시민의 길을 포기하고 급거 귀국할 때, 기랑을 떼어놓으려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전쟁은 개인의 무력으로 회피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공화국의 주석이다. 친구 위험하다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가며 국가 대전략을 바꿀 수는 없다.

그래서 시준은 무섭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작가의 말

1. 실제로 중국의 통일 개념에는 최후의 하나가 남을 때까지 국가가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관념이 있습니다만(그래서 21세기에도 미완성임), 뭐 꼭 무기 들고 싸워야 인정해 준다는 어디 고대 게르만 같은 의식은 아닙니다. 작중 서술은 반란군이 그런 명분으로 여진족 지배를 부정했다는 정도입니다.

2. 작중 내용과는 관계없긴 한데, 실제로 개미는 가장 성공한 동물 중 하나로 그 과를 다 모으면 전 인류의 생물량 이상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한 종인데 걔네는 과(科) 아니냐는 항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인간 외의 사람과 동물은 대부분 (인간에 의해) 멸종 일보 직전이라 별로 도움은 안 되겠군요.

3. 공짜 좋아하면 대머리 된다는 속설이 현대 한국에는 확실히 있기는 하나, 조선 시대나 다른 전근대 국가에 있었는지는 불확실합니다.

4.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예르몰로프는 실제로 코카서스 전쟁에 큰 공을 세운 장군입니다. 원 역사에서는 중국에 파견되는 대신 그대로 장기간 그루지야(조지아)에 머무르며 주 페르시아 대사도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작중 서술은 역사와 동일합니다.

장군으로서는 유능했고 병사들의 존경도 받았지만, 피정복민에게는 잔인하고 가혹했으며 정치와 행정 면에서는 사람들과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도 같습니다.

이 사람이 코카서스 일대에서 쌓은 증오가 얼마나 컸는가 하면… (공포가 러시아의 방벽이 되리라는 그의 장담과 달리)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반발만을 불러일으켜 이슬람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체첸 등지의 분쟁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또 의외로 이 사람은 정복한 조지아에 도서관과 신문사 등을 차리기도 했습니다. 신문사는 조지아어로 된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