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혁명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239화 (239/284)

239화

80.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2)

2기 중앙인민회의 총선거 때, 이제초는 원래 지역구였던 개천군 대신 계룡산 단전성에서 출마했다.

종묘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영압은 여전히 초월적이었기에 남부로 내려가서도 당선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초는 21세기 사람들이 자기 지역 국회의원에게 바라는 바로 그 정치를 실행했다.

주석 동지의 영압을 받거나 중앙인민회의 무력위원회의 회의에 참가하러 올라가는 것 말고는 거의 계룡산에 머무르며 일을 처리한 것이다.

십인지맹이나 그 휘하에 소속된 무당과 승려, 도사들은 각 동리 인민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세부적인 사항은 많이 다르지만 마치 류큐의 노로와 비슷한 종교와 행정의 결합이었다.

그들 역시 평소에는 다른 인민위원장과 별다를 것 없이 업무를 처리했다.

다만 정치국에서 약간 무리한 지시가 내려오거나 사람들을 독려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다소 독창적인 수단을 썼다.

“그러니까, 인민위원장 동지. 평양에서 그림과 본뜰 기계 하나 말고는 아무것도 내려온 게 없는데 무슨 수로 그 방직기인지 하는 것을 열 대나 만들어 면직소를 꾸립니까. 인근의 바디장 전부에게 물어보아도 고개를 젓습디다. 적어도 한양군이나 다른 데에서 사람을 데려와야…….”

이럴 때 그 ‘수단’이 필요한 것이다.

연산현(連山縣, 현대의 계룡시 일부) 무당 덕이(德伊)는 한동안 눈을 감고 방울을 흔들더니 턱을 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한 소리 크게 갈(喝)했다.

“어허! 내 몸주신인 정 진인께서 말씀하신다! 무슨 사람이 모자라느니 자재를 댈 수 없느니 하는 따위는 반동의 소치! 오직 혁명적 기풍만 있으면 못 할 게 없다. 정치국에서 그러한 지시를 내린 것은, 베짜기 투쟁에 나서는 문제들이 어렵고 힘들다 해도 결국 단전성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결단해서인데 동지들은 어디에서 감히 중얼중얼 주위 사정 타발을 하는 것이야!”

형평사의 존재에서 알 수 있듯 칠반천인의 완전한 사회적 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통 무당이라면 – 현대에도 그렇듯이, 무례해도 된다고 합의된 점복 중이 아니고서야 – 사람들에게 함부로 이렇게 큰소리를 칠 수 없다.

하지만 덕이는 보통 무당이 아니었다.

그녀는 십인지맹과 부녀회에 동시에 적을 두고 있었고 두 단체 모두에서 낮지 않은 직위를 갖고 있다.

일종의 신도시라 전통 질서가 좀 약하고, 그 자리를 ‘정 진인의 도’가 채운 단전성에서 이것은 아주 막강한 이점이었다.

따라서 그 영향력을 높이 평가받아 연산현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된 공화국 유일의 무당 출신 인민위원장이 바로 덕이다. 전문위원으로서 중앙인민회의에 들어간 무당은 1기 때부터 있었어도, 지역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그녀 혼자였다.

그리고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덕이는 예전부터 계룡산에서 으뜸간다는 절색의 무당이기도 했다.

덕이의 미모 때문에 반 정도는 공무, 반 정도는 호기심으로 찾아갔던 농상위원회 위원들은 큰 호통을 듣게 되었다.

물론 그녀도 아무 생각 없이 마구 정 진인을 강림시켰을 리는 만무하다.

면직소가 장기적으로는 지역 경제에 도움이 되겠지만 당장에 무슨 포상이 떨어지는 일은 아니다.

따라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서 반의반쯤으로 줄여 엄살을 부리는 게 뻔했다. 이런 19세기적 태도는 시준보다 인민위원장들이 더 잘 안다.

농상위원들은 하릴없이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단전성의 면직소 건설은 빠른 시일 내에 이루어질 것이다.

자기가 여기저기에서 주술사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소환되는 중이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시준도 계룡산은 계룡산 인민이 추대한 인민위원회와 이제초에게 맡겨 둔다는 태도였다.

여기에 성까지 쌓은 건 솔직히 정치적 이유가 더 크기는 했다.

허나 짓고 보니 계룡산은 과연 이성계도 수도로 심각하게 고려했을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평양이 정치적 수도, 그리고 (다들 머릿속에서는 이미 반동 여진에게 몰수한) 심양이 군사적 수도라면 계룡산은 경제적 수도였다.

삼남의 물산이 모일 수 있는 계룡산의 위치는 그 역할에 더할 나위 없이 걸맞았다. 계룡산에서 뿜어져 나오는 재부는 마치 내공처럼 공화국 곳곳의 기경팔맥을 휘돌았다.

말 그대로 혁명의 단전이었다.

***

십인지맹은 이미 오래전에 한푼 두푼 돈을 모으고 ‘정 진인에게 귀의한’ 사찰의 종을 떼다 녹여서 단전성 안에 동상을 만들었다.

평양 동상 건립은 시준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인민에 의한 지방자치를 실현하는 단전성이라면 문제없다.

본래 누군가를 기념하기 위해 상을 만드는 행위 자체는 동양에도 있었으나, 이렇게 만인 앞에 내보이는 목적인 경우는 드물었기에 이제초는 몇몇 서양인을 영입했다.

그 정성은 보답을 받았다. 사고나 실패 없이 – 복잡한 조형의 동상 제작을 단번에 성공하는 일은 드물다 – 완성된 동상은 단전성 한가운데에서 깃발을 든 채 무수한 인민을 이끄는 정 진인의 용맹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예전 남대문 시전조차 비교가 안 될 규모의 장시가 있었다.

누가 딱히 여기라고 지정한 건 아니다. 랜드마크라는 게 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여기로 사람이 모이게 된 것이다(일부러 지정하는 랜드마크는 오히려 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비한 일이다).

‘정 진인 앞에서 보세’라는 말은 일종의 관용구가 되었다. 수백 개의 점포와 수레, 그리고 그 몇 배는 되는 숫자의 사람들이 바삐 발을 옮기고 고함을 지르며 침을 튀겼다.

원래 조선에 장사꾼이 이렇게 많았나 싶은 느낌마저 든다.

실제로 약간이지만 늘어나기도 했다. 공화국이 수평해지면서 더 이상 길가에서 뺨 맞거나 대갓집에서 굽실대지 않게 되자, 상조농장에서 배급 알뜰히 모은 사람들 중에는 돈 더 벌려고 장사의 길로 나서는 축이 꽤 있었다.

장사꾼 출신들이 서상과 중앙인민회의의 요직을 차지한 것도 중요한 이유다.

조선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과거시험에 매달렸는가. 그것밖에 출세할 길이 없어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장사로 출세해도 서상이나 다른 거대 상계 연줄 타고 인민위원회와 국무당 고위직을 노려 볼 수 있었다.

교양권과부 일각에서는 이제 아마추어 같은 코드인사 그만두고 정규 관리 임용시험을 도입하자고 계속 주장하고 있지만 남인이건 북인이건 실학자들은 대체로 과거에 부정적이었다.

대표적으로는 정약용 같은 사람이 있었다.

조선 과거의 부정이나 청탁 사례는 유명하다. 그러나 정약용의 의견은 더 근본적 문제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평소부터 ‘벌열의 자제들이 시험의 문답만을 공부하고 진짜 경전의 뜻을 아는 일에는 소홀히 한다’며 과거제의 축소나 폐지, 최소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봤다. 절대로 자기가 과거에 19번 떨어져서는 아니다.

어쨌든 그래서 아직도 공화국 정부에는 딱히 관리 임용 시험이 없었다.

불타는 혁명 열의를 가진 자라면 그 빛은 평양에서도 눈에 보일 테니까.

그리고 그건 꼭 붓과 책으로만 뽐내야 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장사가 과거 시험 준비보다 쉬운가 하면 그렇지 않다.

공화국이 수평해졌다고 해서 갑자기 깨끗하고 투명한 상거래 풍도가 확립된 건 아니라서(대장부터가 신디케이트 두목이다) 비범한 눈치와 배짱이 있어야 하는 건 여전하다.

이 단전성 장터 또한 단순히 장사꾼들 모여서 물건 바꿔 가라는 취지만의 시장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곳은 삼남에서 모이는 상조농장 소출의 중계지이며, 언제나 물산이 부족한 북쪽으로 수송해야 할 여러 생산품의 집산지이기도 했다.

순수한 군사나 순수한 정치가 없듯 순수한 경제도 없다. 장사꾼 사이에는 인민위원회의 서리들이나 각지 전위대원, 학생들도 많이 오갔다.

본래 천안과 안성으로 모이던 사람들은 이제 계룡산에 모였다. (상주 인구가 아니라) 유동 인구로 치면 평양보다도 많았다.

그러므로 오늘 정시준 동상 아래에 나붙은 선전선동부의 그림을 본 사람도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 그림에는 동상만큼이나 역동적인 모습이 표현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정 진인인 젊은 남자가 바로 그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모습이었다.

혁명모자 사이로 나른하게 빠져나온 듯한 머리칼은 혁명의 노고를, 한 점의 흔들림도 없는 그 강렬한 눈빛은 혁명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평소 관리하고 있는 시준에게는 실제로 잘 관찰되지 않지만 사내라면 갖추어야 하는 정도의 수염과, 무엇이든 이뤄낼 것 같은 거친 손마디는 단호하게 인민을 인도하는 주석의 위엄 그 자체였다.

일찍이 ‘중국에서 백마를 타고 혁명을 이끄시는 주석 동지’ 그림으로 대호평을 받은 선전선동부 부부장 김득신의 역작이었다.

이건 그 백마 그림과 달리 시준의 스트레스를 유발하지 않았다.

김득신이 사소한 몇 군데에서 발휘한 창의성을 제외하면 시준 자신이 제안한 구도이니 말이다.

이번 일에는 시준도 의욕이 있었고, 거기다가 또 ‘그 나라’ 같은 포스터 나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국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시준이 알았다면 재고해 봤겠지만, 미국 버전이 유명해서 그렇지 사실 이 구도의 모병 포스터는 영국이 원조다).

그 아래에는 다른 글씨체가 있다는 것을 생각조차 못 하게 될 만큼 널리 쓰이는 ‘붉은 혁명체’로 기운찬 글씨가 춤추고 있었다.

<공화국은 바로 동지를 원한다!>

장터에 모였던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일이 다 그렇듯, 아마 여기에도 저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사람이 있을 터였다.

그 역할을 맡는 데에 십인지맹이 빠질 수는 없다. 십인지맹 제4번도의 위를 자처하는 충주 출신의 젊은 도사 정길룡(鄭吉龍)은 원래 역사처럼 지금도 열렬한 정감록 신봉자였다.

감히 강철군주에 대항해 반란을 모의한 그때는 본인의 성(姓)도 한몫을 했을 것이나, 지금 그는 약간 아래로 내려와 ‘진인 일가’의 자리를 기꺼이 자임했다. 혈연이 아니라 신앙이 일족의 규정 요소라는 점에서 먼 영국의 로스차일드가 좋아할 것도 같았다.

정길룡은 벌써 수십 번이나 했던 말을 지치지도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의 혁명 정신에 엄숙한 비판이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간 얼마나 게으르고 염치가 없었단 말인가?”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는 단전성 사람들은 그런 부당한 모욕이 어디 있느냐는 눈으로 정길룡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시선을 모은 정길룡은 더욱 크게 말했다.

“공화국 혁명군은 채 삼만도 되지 않는다. 반면 저 여진족은 백만의 강병을 불러 모을 수 있으며, 호란 때 그 십분지 일만을 휘몰아 쳐들어왔음에도 저 반동의 왕은 아홉 번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그때는 비록 반동의 주구라 하지만 관군이 십만이나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그러나 진인께서 새 나라를 세우신 지도 7년. 한 줌도 안 되는 혁명군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여태 공화국이 무사했던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거야 영국의 ‘프렌드 실드’ 때문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유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백부와 며느리에다 아들까지 가리지 않고 죽여 난폭 잔인함을 자랑하였으면서 정작 힘 있는 여진족 앞에서는 벌벌 기었던 그따위 왕과 우리 정 진인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압록강을 둘러싼 정 진인의 도술은 오랑캐의 침범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화국 전체로 보면 아직 유럽인과 접촉한 사람은 소수다. 그리고 그중에서 시준과 친구들이 펼친 주가 조작과 외교 협잡의 결과라도 아는 사람은 더욱 소수다.

그런 그들에게 정길룡의 설명은 더할 나위 없이 맞아떨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동지들 역시 들었겠지만, 올해 봄의 유구 해방으로 진인께서는 적지 않은 진기(眞氣)를 소모하셔야 했다. 생각해 보라. 바다에 풍랑을 일으켜 왜적의 배를 가라앉히고 혁명해군의 포탄을 해적선에 인도하시는 그 기이한 조화가 과연 아무 노고 없이 되었겠는가?”

주술에서도 인과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들은 모두 안타까움을 못 이기고 신음을 흘렸다.

정길룡은 정 진인의 내력이 전 세계 인민 동시 혁명을 위한 유구 정벌에 소모되었으며, 따라서 압록강의 방어가 약해졌다고 주장했다.

평양에서 왔다는 장사꾼 한 명이 생각났다는 듯 마주 외치는 말은 그 추론의 합리성을 더욱 강화했다.

“그러고 보니 의주 근처에서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들렸다 하던데!”

조선 사람에게 화약이 낯선 물건이 아님에도, 그 말을 듣고 광산 발파 아니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다.

불세출의 예술영도에 온 힘을 쏟은 정 진인의 방벽이 약해지고 있다. 이건 위기다.

따라서 모든 인민은 총궐기하여 공화국 수호에 나서야 한다. 지금까지 안일하게 정 진인의 보호에만 의존해 왔던 태도는 반혁명적이다.

정길룡은 뜨겁게 부르짖었다.

“이러한 때에 혁명의 단전인 우리 계룡산 사람들이 아니면 어디에서 혁명의 공력을 솟구치게 하여 나라를 지키겠는가? 자랑스러운 혁명 동지들, 하나가 된 공화국 인민들이여! 내가 깃발을 들고 앞장서겠다. 모두 다 같이 혁명군 영채에 가서 총과 칼을 들자! 나라의 반동을 쳐부수었던 그때처럼 여진족을 쳐부수러 가는 것이다!”

정길룡은 그러면서 의도적인 동작으로 비켜서서 동상을 우러르는 형태를 취했다.

단전성이 통째로 흔들릴 만한 함성이 터졌다.

***

도광제의 지휘하에 전 대륙에 피의 연성진을 그리고 있는 신(新) 청군의 주축은 만몽 팔기다.

그처럼 몽골족은 여진족 편에 붙은 것처럼 보였다.

허나 도광제가 동원한 부족은 주로 청의 직접 지배력이 잘 미치는 내몽골 쪽의 부락이 많았다.

준가르 제노사이드 이후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딴생각하는 외몽골의 칼카(할하) 쪽은 아직도 청 황제를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중화 혁명당은 강희제 시절부터 몽골 부족 사이의 외교사절 역할을 하던 라마승들을 통해 몽골 부족과 연결할 수 있었다. 티베트 홍교와 친해 둔 보람이 발휘되었다.

물론 주류인 황교 쪽에서 더 많고 튼튼한 연락선을 가진 건 분명하다.

그러나 혁명이란 항상 어렵고 불리한 데에서 시작하는 법.

그런 짓에 이골이 난 임칙서라면 어느 정도 벌충이 가능한 정도였다.

영국의 심판자, 인류 역사에 몇 명이나 있었던가. 임칙서의 능력은 깔볼 것이 아니었다.

지금 송주령이 ‘미인계 또 할까?’ 어쩌고 하며 임칙서와의 결속을 유지하려 하는 것도 그저 재미나 보자는 심산은 아닌 셈이다.

따라서 러시아 황제의 사절이자 중국 및 고려 겸임공사인 레온티 베니그센 장군을 무사히 중국까지 데려오는 일도 가능했다.

볼가 강에서부터 칼카족과 호쇼트족의 인도를 받아 티베트를 거쳐 한중에 오는 경로는 중화 혁명당의 대장정에 비견할 만큼 위험하고 험난하다.

그러나 대장정과 달리 경로상의 외몽골 부족들이 협조했고, 무엇보다 초라한 난민 무리에 가까웠던 중화 혁명당과 지금 레온티 베니그센이 이끌고 온 ‘사절단’은 격이 많이 달랐기에 불행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떤 난폭한 몽골족이라도 거의 그들만큼이나 사나운 카자크 3천 명의 대부대를 공격하는 것은 숙고해 봐야 할 일인 것이다.

알렉산드르는 중국이 내전으로 엉망인 상태라고 파악했다.

공식적으로 알렉산드르가 가진 건 중국 황제와 신민에 대한 지극한 우정과 사랑이지 절대로 침략 야욕 따위가 아니다. 그런 건 영국인이나 갖고 있는 거다.

허나 사절단을 호위할 부대는 당연히 있어야 했다.

다행히 아라사가 여기 군사 많이 보낼 수 없다고 장담한 기랑이 잘못된 예측에 책임을 져야 할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어쨌든 3천 정도는 중국 사람에게 있어 전쟁보다는 패싸움에 어울리는 정도의 숫자였기 때문이다. 대륙에서는 보통 십만 이하를 군대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대륙의 기상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러시아 장군인 베니그센 역시 자신이 데려온 것은 ‘약간의 호위병’뿐이라는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당 군사위원회 위원장 송주령은 곧 알 수 있었다.

머릿수만 세면 3천이 맞지만, 그 위험도는 3천의 열 배는 되는 듯했다.

일반적 인식보다는 사람이 꽤 많이 살았던 시베리아를 ‘사실 여기 아무도 안 살았음’으로 만들어 버렸던 돈 카자크 병사들에게는 양심도, 도덕도, 연민도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 있는 건 살인과 약탈, 강간뿐이다.

특히 마지막이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미래 볼셰비키가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을 때 박수를 보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카자크의 악명을 모른다 해도, 송주령이 그 위험성을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녀의 남다른 기민함과 통찰력 때문이 아니다. 벌써부터 흉성을 못 참고 어디서 암말을 빼앗아 와 차마 보지 못할 짓거리를 하고 있었으니 바보라도 저놈들과 상종하면 안 되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옷만 걸쳤지 야수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이자들을 성공적으로 통제하는, 다시 말해 말 대신 사람에게 같은 짓을 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사람이 저 노장임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송주령은 그 노장을 제어해 줄 자를 바라보았다.

명분상 러시아와 중화 혁명당 사이의 중재자인 고려인민공화국의 대표 기랑이 앞으로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제임스 메디선이 기랑과 베니그센 사이에서 프랑스어와 조선어로 통역을 맡아야겠지만 그는 지금 장거리 여행을 감당하지 못하고 퍼져 있었다.

그래서 기랑이 짧은 영어로 말한 첫 마디는 마치 시비 같았다.

“살아 있었네.”

베니그센은 화내지 않았다. 원숙하다는 표현으로는 다 설명이 안 될 그의 나이나 경력에 우스운 짓이다.

그는 기랑이 ‘오랜만이다. 당신이 설마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안면 있는 사람이 직접 와서 편해질 것 같다. 당신과 나의 행운에 감사한다. 잘 해 보자.’라고 말했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래. 오랜만이로군. 그때 중국 수도에서 나눠 먹은 닭고기 맛이 그립구먼. 시준은 잘 있느냐?”

베니그센도 프랑스어보다는 약간 못한 영어로 대답했다. 비영어권 사람들끼리의 영어 대화가 그렇듯, 어차피 둘 다 잘 못하니 기랑도 그럭저럭 알아들을 만했다.

“잘 있어.”

“흐음. 역시 여자아이, 아니, 이제는 숙녀인가? 아무튼 여자였군.”

오래 같이 지낸 공화국 사람들이나 같은 여자인 송주령이 알아본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생 부인 외에 여자를 몇 명이나 봤을까 싶은 무골 노장이 그런 감식안을 가졌다는 것은 의외였다.

그런 의문이 기랑의 표정에 드러난 모양이다. 베니그센은 유쾌하게 미소지었다.

“남자 옷 입고 총칼 휘두르는 여인이 세상에 하나뿐일까? 헤세-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Wilhelmina of Hesse-Darmstadt, 예카테리나의 며느리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를 보면 그 고귀한 신분에도…… 아니, 넌 모르겠군. 아무튼 너와 같은 사람도 나는 몇 번 봤다. 연륜이라는 게 괜히 존경받는 것은 아니지.”

사냥 때문에 남자 옷을 자주 입었다는 그녀의 일화는 그래도 온건한 축이다. 유럽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나 개인적 취미 때문에 남장하고 공공장소에 드나들거나 아예 남자 행세를 한 여성 지식인이 좀 있었다.

다행히 베니그센은 송주령과 달리 기랑에게 오해에 찬 암시를 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시준과 기랑의 관계를 새삼 언급하는 것에 별다른 이익이 없다고 판단했다(오해한 거나 다름없다).

베니그센은 그저 재빠르게 용건으로 넘어갔다.

“한담은 나중에 내가 동쪽으로 더 가면 그때처럼 시준과 셋이서 했으면 좋겠군. 지금 상황이 어떤가?”

그 ‘동쪽으로 가는’ 일이 중화 혁명당과 함께하는 전쟁일지, 아니면 중화 혁명당을 버린 외교일지는 기랑의 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랑은 시준처럼 잔머리를 굴리지도 않았고, 베니그센이 기대하는 대로 섬세하게 대답하지도 않았다.

기랑의 머리가 나빠서라기보다는 원래 성격이 그랬다. 그녀는 베니그센이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안 좋아.”

베니그센 장군은 참을성 있게 다시 한번 말했다.

“무언가를 결정하기에는 너무 짧은 대답인데.”

기랑은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손가락까지 동원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진중함이 약간 퇴색되는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토벌군을 이 한중으로 출진시킨다고 한다. 숫자는…… 열다섯, 만.”

베니그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15만 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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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모두가 아실 그 엉클 샘이 삿대질하는 포스터는 유명하죠. 허나 그 이전에 있었던 영국의 키치너 모병 포스터(아마 거기 영어가 적혀 있지 않았다면 소련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스탈린과 닮은 사람이 삿대질하고 있습니다)가 이미 그 구도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2. 정길룡은 순조 치세 후반기(작중 시점으로부터 10년쯤 뒤) 정감록을 기반으로 하여 요서를 퍼뜨린 혐의로 처벌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3. 작중에서는 간략하게 나왔는데, 청대 몽골-티베트 관계도 한두 마디로는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합니다.

강희-옹정-건륭 사이 이어진 서방 평정과 그 전후 사정을 보면 준가르, 칼카 등 몽골 제부족과 티베트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여러 관계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관점에서 보듯 변경 약탈에서 토벌로 이어지는 단순한 관계는 아니었다는 거죠.

라마승들은 준가르와 칼카 등 여러 몽골 제부족 사이의 외교 사절과 유사한 역할도 했죠. 몽골 부족들과 티베트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복속과 저항을 때에 따라 유연하게 교환합니다.

강희제 당시 첫 준가르 정벌에서 준가르부의 수장이었던 갈단 체렝의 경우에도 그 자신이 라마교 교육을 받았고 모친이 티베트의 공주(비슷한 것) 신분이었습니다.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가 준가르와 야합하였다는 것에 큰 분노를 일으키고 이는 그 후 청의 티베트 정책이 폭압적으로 변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4. 정약용은 의외로 과거에 많이 떨어졌습니다. 대과 장원을 하기까지 10년간 대과에만 4번, 총 횟수로는 19번 낙방했다고 하지요. 박지원도 그렇고 실학자들은 어째 과거와 안 친한 경우가 많은데, 솔직히 그런 감정도 과거제 개혁 주장에 어느 정도 들어가긴 했을 겁니다.

5. 카자크 병사들의 야만성은 먼 조선의 한참 후대 저술된 매천야록에서도 나옵니다. 그때쯤 러시아와 조선이 접촉하기 시작한 영향도 있습니다.

‘가사극’이라고 표현되는 카자키들은 ‘부녀라면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범하며’ ‘암말을 데리고 있던 사람이 그 병사들을 보고 도망치자 그 암말을 가지고 (중략) 하였다’ 는 일화가 기록되었습니다. 매천야록 특성상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최소한 당대의 이미지는 알 수 있지요.

전쟁에서도 극도로 잔인하고 호전적이었으며 실력도 뛰어나서 나폴레옹도 탐냈습니다. 이는 많은 러시아 군주와 지도자들이 그들을 중용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지만,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는 이유도 되었죠.

볼셰비키가 돈 카자크와 쿠반 카자크에 대해 감행한 대탄압인 ‘라스카자치바니예’에서, 카자크족은 그들이 시베리아와 오리엔트 일대에서 행한 만행을 거의 그대로 되돌려 받습니다.

6. 베니그센은 점잖은 예를 든 거고, 그의 고향 독일에는 괴테의 친구이자 저명한 작가 샤를로테 폰 슈타인처럼 그냥 거의 남자같이 살았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괴이쩍게 보는 것까지 피할 수는 없었지만, 기랑이와 같은 사례는 유럽에서도 아주 불가능하거나 없는 일은 아니었죠.

참고로 나탈리아 황후,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나는 러시아 로맨스 판타지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인으로 유명했던 그녀는 활달하고 사교적인 성격이었으며, 러시아 궁정의 ‘활기를 고양시켰다’라고 표현되지요.

그런데 시집와 보니 시어머니가 예카테리나인 데다가(러시아 전통적으로 황실 고부 사이가 안 좋음), 그녀 자신 또한 영국 외교관 맘스버리 백작 제임스가 ‘남편을 다스렸다’고 표현할 만큼 만만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별개로 남편 파벨 1세는 그녀를 지극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매력적인 서브남주…… 아니 정부도 두었고,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파벨 1세의 자식이지만 실제로는 출생이 불분명한 자식도 임신했습니다. 산고로 죽는 불행한 결말까지 여러 의미로 극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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