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79. 다시 번지는 혁명의 불길(2)
송주령은 별문제 없이 중화 혁명당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중화 혁명당의 실질적 무력인 염군의 통솔자이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리고 무력을 가진 사람에 대한 당연한 의심, 즉 염군이 혁명당을 집어삼킬지 모른다는 염려에 대해 송주령은 중화 혁명당 중앙위원회 공화위원장(共和委員長, 공동위원장) 취임으로 대답했다.
다시 말해 송주령은 중화 혁명당으로의 완전한 결합과 편입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고 공동 일인자 자리를 얻은 것이다.
이는 앞으로의 전범이 된다. 강남 한족과 천리교를 대표하는 임칙서, 백련교와 묘족 잔당을 대표하는 송주령 말고도 향후 들어올 몽고족, 티베트족, 위구르족의 대표 인사 또한 이렇게 집단 체제를 이룰 수 있는 초석을 놓은 것이다.
공화국의 체제를 오족공화의 이념에 맞게 이식했다고도 볼 수 있다. 반란군 무리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아주 세심한 정치적 포석이었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설명은 송주령의 취향에 안 맞았다.
그녀는 자기 측근은 물론, 심지어 며칠 뒤 성공적으로 한중에 들어온 기랑에게도 이것이 미인계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미인계라는 말은 송주령 자신이 미인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하나도 성립하지 않았다. 그게 미인계면 묵돌 선우가 여후에게 보낸 편지도 미남계다.
임칙서는 그를 놀리려는 송주령의 의도대로 대노했다.
“젠장할, 내가 무슨 여색에 홀려 공화위원장 자리를 내준 것처럼 되었잖소!”
“아니야?”
“아니야! 어차피 동지 말고 누가 군사위원장 자리를 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건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소!”
“그럼 왜 그날 밤에 바로 도망치거나 뿌리치지 않았지? 역시 입은 그래도 몸은…….”
“그만해! 어, 실례했소이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았소. 동지.”
그 말은 송주령에게 한 것이 아니었다.
예의 바르게 천장을 쳐다보고 있던 기랑은 고개를 내렸다.
기랑은 묵묵히 시준의 친서를 내밀었다.
임칙서는 친서는 물론 따로 온 정약용의 안부 편지까지 꼼꼼히 읽었다. 무기라든지 고려의 명약 등은 어차피 가지고 온 양도 얼마 안 되거니와 핵심 사항도 아니었다.
“아라사국이라……. 믿기 어렵지만 그들이 도와준다면 큰 힘이 되겠지. 허나 공짜는 아닐 텐데?”
기랑은 고개를 기울였다. 글을 읽었으면 다 알지 않겠느냐는 태도였다. 임칙서가 편지를 읽는 사이 기랑을 유심히 지켜보던 송주령이 불쑥 말했다.
“그냥 말해도 된다. 고려인민공화국 대의원 동지가 여인이라는 것쯤 이미 보자마자 알았으니. 그 지위가 낮지 않은데 여기에 덜렁 종이 한 장이나 전해주러 오진 않았겠지. 정시준이 생각하는 것을 말해주길 바란다. ‘동지라면’ 공화국 주석 정시준의 내밀한 뜻을 더 잘 알리라고 믿는다.”
임칙서의 찔끔한 표정을 보고서야 기랑은 송주령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랑은 화내지 않았다. 게다가 송주령의 암시를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아라사는 땅을 탐내고, 영길리는 바다를 탐낸다. 그러나 길이 다를 뿐 결국 원하는 것은 둘 다 돈이다. 영길리를 쫓아낼 방도가 없는 이상 이이제이(以夷制夷). 반동 여진의 황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영길리국에게는 항구로, 아라사에게는 연경의 육로로 상행(商行)을 터 주면 저들은 서로를 헐뜯기 위해 중화 혁명당을 함부로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시준이 말했어.”
기랑이 쓴 호칭에 송주령이 유의하는 동안 임칙서가 뜨겁게 부르짖었다.
“장사한답시고 들어와 저지르는 영길리국의 행패는 중화 혁명당이 일어나게 한 소이(所以) 중 하나다. 그걸 두 배로 늘리라는 말인가!”
“그래서 아라사를 끌어들이라는 거야. 서양 열국에 이 소문이 나면 영길리도 함부로 독한 약을 팔거나 사람을 죽여대지는 못해. 아라사가 끼어들게 되면 영길리가 아라사와 전쟁을 하지 않는 이상에야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거든.”
“그리고 우리는 영길리를 ‘말려’ 준 아라사에게 더 많은 것을 줘야 하겠지? 남의 힘을 빌린 자 남의 힘에 망할 뿐이다. 아라사는 고려와 달리 수평한 공화국도 아니지 않은가.”
요 며칠 체면을 좀 구기기는 했지만 임칙서는 중화 혁명당의 수령이며 불굴의 혁명 기수다. 류큐의 고종 같은 어느 왕보다는 훨씬 현명한 임칙서의 경계에 기랑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의외의 인물이 기랑을 도와주었다. 송주령이 말했다.
“그건 반동 황제의 정치다. 우리가 반동을 뒤집어엎고 나면 마땅히 고려처럼 일신하여 군병과 함선을 새로 배비해야지. 오족공화의 이 중국을 계속해서 두 나라 눈치나 볼 만큼 약하게 만들 거라면 혁명 따윌 왜 하는가?”
임칙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송주령을 바라보았다.
“동지는 자주(自主)를 주장하지 않았소?”
“자주독립한 고려국도 영길리의 배와 총포를 사들이지 않았는가. 길쌈하지 않고 장에 가서 비단옷을 사 온다 해서 내가 포목점의 종인 건 아니야.”
고려라는 실례가 있으니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다. 그렇게 임칙서를 납득시킨 송주령은 기랑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라사에게 줄 땅은 정해져 있겠군.”
오족공화에 참여한 어느 족속도 자기 터전을 서양 오랑캐에게 떼 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반동 여진의 고향…… 만주 중에서 흑룡강(黑龍江) 주변은 인민의 이름으로 마땅히 몰수해야 한다. 그 후에는 비싼 값을 받고 아라사에게 넘길 수도 있겠지. 시준은 그렇게 권했지만, 따를지 말지는 중화 혁명당에서 정해.”
송주령은 재미있다는 표정이 되었다.
“남쪽은 얘기하지 않는군. 여진족의 진짜 고향이라면 흑룡강이 아니라 성경부에서 영고탑에 이르는 봉금지가 아닌가.”
기랑은 송주령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 여자의 시선이 부딪쳤다.
“혼자서 여진족을 이길 수 있어? 아라사는 많은 군대를 보내지 못해. 영길리 또한 공화국에 많은 빚을 졌을 정도로 나라가 피폐하고 무엇보다 중화 혁명당을 애써 도와줄 의리도 없어. 결국 우리뿐이지.”
임칙서는 그 말이 전제하는 바를 듣고 크게 놀랐다.
***
시준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정시준이 이런 확장주의적 정책을 편다는 사실을 믿지 못할 것이다.
유감스러운 점은 공화국 정부에 시준의 이해자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강회가 보내온 유구의 첫 사탕(설탕)을 정치국 회의 탁자 가운데 놓은 채, 다들 수평하게 한 숟갈씩 맛본 정치국 위원들은 다투어 발광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쪽 유구를 평정, 아니 해방하여 언제나 이기시는 천출명장 정시준 주석 동지의 위엄을 떨쳤으니 그다음은 명백하오!”
“옳소! 생각해 보면 인민의 총의로써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했을 때부터 다 정해진 거요. 옛 고려의 땅을 회복하자는 인민의 뜻을 외면할 수야 없소. 남쪽으로 번져간 혁명이 다음에 불꽃을 일으킬 곳은 바로 북쪽이오!”
“땅을 얻는 일이야 둘째 치더라도, 반동 여진족의 치하에서 신음하는 중화 혁명당 동지들을 어찌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주석께서 저 김조순에게 창날을 겨누며 말씀하신 ‘세계공의(世界公議, 인터내셔널)’로 보아도 안 될 말이외다!”
시준은 전생에서 생애 처음 초콜릿 케이크를 맛보고 슈거 하이(sugar high, 당분으로 인한 신체, 정신적 고양 효과) 상태가 되어 온 집안을 뛰어다니던 네 살배기 조카가 생각났다.
그때와 같이, 시준은 지금도 이 광기를 막을 수 없었다.
작년 초여름 정치국 회의에서 중화 혁명당을 지원할 방안을 토의하던 중, ‘적당한 시점’에 청의 뒤를 쳐서 중화 혁명당의 에움을 풀어 주는 것도 분명 논의되었던 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랑이 지금 한중에서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시준이 드넓은 만주 벌판에 대한 이상성욕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고구려의 옛 땅이니 하는 소리도 시준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준의 생각에도, ‘기회가 있다면’ 압록강 북쪽으로의 확장은 필요한 정책이었다.
무슨 석유가 난다거나 넓은 농토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로는 시준을 움직일 수 없다.
시준은 조선을 강대국으로 굴기하게 하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게 아니다. 그가 조선에 오게 된 건 그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야 마땅한 저승사자의 실수 때문이다.
시준의 행보가 다 그랬듯, 북방 확장 역시 생존을 위해서였다.
혁명의 물결 때문에 한양군이 되어 버렸지만 그곳이 한반도의 모든 정치 세력에게 수도로 고려되었던 이유가 있다.
수도는 국경에서, 그것도 강대국과 마주한 국경에서 충분히 멀어야 한다.
적어도 왕이 도망칠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의주대로를 따라 점재하는 산성과 안변도호부, 평양부 등지에서 중국의 공세를 몸으로 받아내는 동안 왕이 허리를 유연하게 풀어 놓는다는 조선의 전통적 대중국 방어 전략은 수도가 이전된 탓에 크게 수정되어야 했다.
그건 한마디로 국경 절대사수. 군사력에 조금 더 자신이 있었던 조선 초중기, 공포군주 세종의 유산이 아직 남아 있던 시절로의 회귀였다. 정치적 수도가 평양인 이상 공화국은 의주 하나조차도 양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압록강을 따라 배치된 혁명군 영대가 청국의 사력을 다한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의문이다.
군사의 정예도나 장비라면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여기에서 중국의 혼란을 이용하여, 만주를 차지하고 국경선을 요동까지 확장시킬 수 있다면 평양의 안보는 크게 확보된다.
단지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다. 북경에서 압록강까지는 애초에 그리 멀지도 않다.
게다가 요동의 뻘밭을 제외하면 지형 장애물이 별로 없고, 그마저도 19세기에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당장 시준이 중국 갔을 때도 정약용과 같이 편하게 나무다리로 건넜지 않은가.
요동까지의 국경 확대로 얻는 ‘거리’는 단지 압록강에서 요동까지의 거리만이 아니다.
만약 공화국의 만주 정복이 실현된다면 중국은 그게 청이건 중화 혁명당이건 수도를 옮겨야 한다. 말로 달려서 하루밖에 안 되는 거리에 외국 국경이 있는데 거기에 수도를 둘 수는 없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중국’의 핵심 군사력은 보이는 것보다 엄청나게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시준의 안에서는 예전에 자기 자신에게 몇 번 대었던 핑계 또한 자라나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나중에 중국이나 영국, 러시아, 일본 중 하나라도 상대하려면 조선 인구 가지고는 부족하지. 좀 더 있어야 하지 않겠어?’
600년 전의 에코-파시즘 일족과 유사한 사고방식이다. 그들도 ‘뭐? 옆 동네에 비단과 금은이 더 많다고? 나온 김에 거기까지만 갔다가 돌아가자!’ 하다가 세계를 정복했다.
외교 측면에서 봐도 명분은 있다. 공화국이 끝까지 웅크리고 있어서야 중화 혁명당의 신뢰를 얻기 힘들다. 중화 혁명당이 ‘하나의 중국’을 진정 달성한다면 고려는 그들과 척져서는 곤란하다.
그런저런 사정 끝에, 시준은 만주 공격도 고려 사항에 넣어 둔 것이다.
***
하지만 시준이 생각한 것은 말 그대로 ‘적당한 시점’이었고, 지금은 결코 그 시점이 아니었다.
반란 진압 때문에 청의 군사력은 양적으로는 줄어 보여도 질적으로는 비대해져 있으며, 그 줄어든 양조차도 공화국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대군이다.
좋게 말해 안전제일주의자, 나쁘게 말하면 얍삽한 시준의 머리가 그런 데 정면으로 들이받는 짓을 허락할 리 없다.
중화 혁명당의 공세, 러시아의 개입, 그리고 각지 반란이 겹쳐 청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됐을 때 들어가 마지막 진한 국물을 가로채는 것이 시준의 ‘적당한 시점’이었다. 양친이 없는 녀석다운 킬딸질에 대해 준엄한 심판이 필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안 된다. 이렇게 되면 거꾸로 공화국이 청을 받아내는 동안 중화 혁명당이 이득을 챙기게 된다.
하지만 정치국 위원들은 평생 못 먹어본 양의 설탕을 한 번에 먹느라 정신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혁명의 심장은 평양! 혁명의 단전은 계룡산! 그렇다면 혁명의 머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동지의 말씀이 매우 합당하오. 어쩐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혁명이 완성 안 된 기분이 들더라니, 이야말로 불상에 머리를 달지 않은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경부가 혁명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고 본 위원은 극력 주장합니다!”
“내가 영길리 사람에게 삼위일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게 바로 그 말이었구먼!”
“크으, 역시 부장 동지께서 견문이 넓으시오!”
시준은 이쯤에서 이 흐름을 끊으려 했다. 지금 먹을 것도 별로 없는데 무슨 전쟁이냐는 극히 지당한 온건론이 그의 무기였다.
그러나 공화국의 살림을 책임지는 총괄서결부장 정약전이 시준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경애하는 주석 동지의 신묘한 예지로 작년의 냉해는 잘 막았으며, 올해 농사도 잘 될 듯하오이다. 반동의 치세에 드리웠던 오랜 흉년은 이제 혁명의 비가 내리자 여지없이 잦아들었소. 지금까지는 우리 살기 급급했다 하여도 이제는 다른 나라의 동지들을 돌아볼 때가 되었지요.”
원래 역사대로라면 작년에 죽었어야 하나, 높은 자리에서 잘 먹고 잘살아서 그런지 아직 건강에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워낙 흉년에 익숙한 탓에 올해도 흉년 아니냐고 물을 뻔했던 시준은 자기가 받았던 보고를 떠올리고 입을 다물었다.
탐보라 화산이 터져서 유럽은 망했지만, 거꾸로 조선은 약간의 냉해와 수해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년작이었다. 강철군주 치세 종반부부터 이어진 7년 흉년에 비하면 넉넉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조제프 푸셰는 이 상황을 ‘주석 동지의 연임으로 인한 혁명적 성과’로 선전했다.
<곡산 제3협동농장, 전주 제22협동농장에서는 알곡 생산계획을 2할이나 차 넘쳐 완수했다!>
<대구 제4마포농장은 야학 학생들의 혁명적인 속도전으로 기존 고려담배를 많이 만들던 남양도호부를 초월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제 흉년은 반동의 옛말이 되었다. 주석 동지와 정치국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소출은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전 인민의 하나 된 투쟁으로 내년에도, 후년에도 공화국 곳곳에 대풍년의 노래가 울리게 하자!>
그냥저냥 평년작에서 약간 못 미치는 소출이 삽시간에 대풍년이 되었다. 작년 가을 공화국 곳곳에는 농장원들이 볏짚을 한 아름 안고 하늘에 떠 있는 주석 동지의 얼굴을 가리키는 환장할 그림이 내걸렸다.
정치국 위원들이 그냥 주둥이에서 마구 나오는 대로 외치는 건 아닌 셈이다.
주석 동지의 영도로 나라 살림은 튼튼해졌고, 인민들도 먹고살 만해졌다. 게다가 공화국 최초의 외정 성공으로 천하 최강의 강국이라는 영길리에도 밀리지 않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렇다면 이제 뭘 해야 하겠는가? 혁명은 멈추는 순간 그대로 썩는다.
전 세계 동시 인민 혁명의 기치를 높이 올리는 것 말고는 답이 있을 수 없다.
이건 단순히 이념과 구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체제 유지에 관련된 문제다.
시준이 미친 것 같은 정치국 위원들을 간신히 제어하고 혁명군의 확충만을 허락하는 타협안으로 정치국 회의를 끝낸 뒤에, 내밀히 모인 두 사람의 회동은 그 사실을 잘 말해 준다.
평양성 모처에서 모인 두 사람은 정시준 연임의 두 주범인 정약전과 조제프 푸셰였다.
“오늘의 발언은 아주 절묘한 시점이었소.”
푸셰는 조선식으로 잔을 권하면서 프랑스어로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두 사람이 오늘도 보람찬 혁명을 마치고 피로를 풀고 있다 여길 것이었다.
정약전은 약간 텁텁한 표정으로 그 잔을 마셨다. 역시 나이를 이기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위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찬동하는 것을 보고 알았지요. 모두 선전선동부장 동지께서 먼저 바람을 넣으신 게지요?”
“그렇소.”
푸셰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건 그가 정약전을 얼마나 존중하는지 잘 보여주는 태도였다.
“하지만 총괄서결부장 동지라면 내 뜻이 사욕에 있지 않음을 아실 테지요.”
그렇지는 않다. 푸셰는 항상 사욕만으로 움직이던 인간이다. 다만 이제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그의 사욕과 공화국의 국익이 일치할 뿐이다.
푸셰는 그것에 대해 설명했다.
“그 무엇 앞에서도 물러설 줄 몰랐던 붉은 사제(le curé rouge) 자크 루(Jacques Roux)는 이렇게 말했소. 대혁명을 굳세게 결속시키는 유일한 수단은 전쟁의 분노로써 귀족파와 온건파를 분쇄하는 것이라고.”
내부를 다스리려면 외부의 적을 만들어라. 케케묵은 정치학이다.
프랑스 혁명기 상퀼로트와 시민들의 기세는 난폭하다는 말 정도로는 표현이 안 된다.
당장 죽여 버릴 적을 주지 않으면 자기들끼리 찔러 죽일 태세였다. 실제로 많이 그러기도 했다.
결국 혁명의 지휘자들은 그 에너지를 외부로 돌렸고, 그 선택은 멋지게 성공했다.
나폴레옹 이전에도 프랑스 혁명군은 그 조잡한 장비와 부족한 재정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과를 올리며 유럽을 휩쓸었다.
너무 단결이 잘된 프랑스 사람들이 전제 군주국으로 되돌아간 것만 빼면, 단결 자체는 성공이었다.
정약전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동감이오. 단전성에서 이제초 동지가 힘을 쓰고는 있지만, 삼남의 옛 사림과 지주들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소. 혁명의 나팔 소리가 끊어진다면 금세 또 슬그머니 딴생각을 할 거요. 작년에 흉년이 좀 수그러들자마자 벌써 여기저기에서 징조가 보이고 있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지금의 공화국은 사실상 정시준 개인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국가다.
정약전과 조제프 푸셰는 동서 양극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이 많았다.
각자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거의 최고로 학문을 쌓은 엘리트였고, 정치적 풍파를 많이 겪었으며, 그래서 철저하게 현실주의자였다.
그래서 그 둘은 공화국의 영속성을 담보하기 위해 이상 체제의 건설에 전념하자는 환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정시준의 영속성을 유지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정약전은 다시 한번 잔을 들이키고 그것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미안하지만 주석 동지는 큰 사업을 계속 이끌어 주어야 되겠소. 팽이는 도는 동안 쓰러지지 않지만, 멈추면 쓰러지는 법. 팽이 끄트머리가 땅을 파고들어 가서 단단히 설 만큼 돌려면 아직 한참 남았소.”
“실로 그 말씀이 옳소이다. 혁명의 불은 땔감을 다 태워 버리고 꺼지기 전에 계속해서 번져야 하오. 중국에서의 혁명 사업은 일이십 년은 잡아야 할 테니 그 정도라면 충분하겠지요.”
정약전의 얼굴에 문득 그늘이 졌다.
“자기 죽은 뒤의 일까지 다 재단해서 앞날 창창한 젊은이들에게 떠넘기다니, 우리 늙은이들의 죄가 많구려.”
그러나 푸셰는 그 그늘을 씻어내듯 청주를 한 잔 따라 주었다.
“우리를 여기로 이끈 주석 동지만 하겠소? 영국과의 교묘한 외교로 나를 프랑스로 가지 못하게 하고, 부장 동지를 섬에서 끌어낸 사람이 누구인데 불평할 수는 없을 것이외다.”
합리화도 기술이라면 조제프 푸셰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손에 꼽을 만한 달인이다. 정약전마저 넘어가서 파안대소했다.
“하하하! 그거 옳은 말이오. 이를 업보라고 하던가.”
정교한 논리로써 그들의 양심을 술잔에 녹여버린 두 사람은, 그것을 기꺼이 뱃속에 털어 넣어 소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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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공동’이라는 말은 개항기부터 쓰이기 시작한 단어입니다(중국, 조선 모두). 작중에서는 ‘공화’라는 말이 고려에서 개발되어 먼저 쓰이는지라, 유사한 뜻으로 ‘공동’이란 어휘를 대체하였기에 공동위원장이 공화위원장이 되었습니다.
2. 푸셰의 선전 중 ‘알곡생산’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쪽은 조금 더 복잡합니다. 생산이라는 말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는데, 농업 생산이나 출산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현대 북한에서는 농업 산출도 ‘알곡생산’이라고 합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공업화를 중심으로 돌아간 사회주의 국가의 용어가 다시 농업 생산에도 돌아와 명명된 것이고, 작중 역사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생산이라는 말이 그대로 농업에 쓰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당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다 된다’도 노동신문에서 흔히 쓰는 레퍼토리지만 작중 공화국은 북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3. 흉노 묵돌 선우의 편지는 한고조 유방의 부인인 여후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자기가 아내와 사별했고 너도 남편이 죽었으니, 우리가 ‘각기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서로에게 없는 것을 메워 보자’는 음란 메시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침대에서 보자는 건 아니고, 일종의 협박이죠.
여후의 여러 일화로 보면 상상이 안 가지만, 이때 한나라는 외부와 내부 모두 흉노에 대적할 형편이 안 되었던지라 ‘우리 불쌍한 나라에 장난 그만 치세요. 뭐라도 좀 챙겨 드릴게요’ 하며 벌벌 깁니다. 묵돌 역시 그렇게 한나라를 밟아 놓는 선에서 그쳐서 그 이상의 일로는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4. 붉은 사제 자크 루는 혁명 이전에는 엄청나게 엄격한 신학교 교사로, 그리고 혁명 후에는 엄청나게 극단적인 무정부주의자로 명성을 떨쳤습니다(이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할지, 아나키스트로 규정할지는 여러 이설이 있습니다). 사유 재산과 계급의 철저한 폐지를 주장하고 외국과 온건파에 대해서도 철저히 강경론자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개 그랬듯 명줄이 길지는 못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 치하에서 숙청되어 감옥에 있다가 재판 소식을 듣고 자결하죠. 이때의 파리 목숨들을 보면 볼수록 조제프 푸셰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