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79. 다시 번지는 혁명의 불길(1)
박득출이 추천한 인재이자, 영국 해군에 음성적인 인신매매 서비스를 제공하려다 실패한 야심 찬 상인 제임스 메디선은 본래 인도에서 숙부 따라 장사하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숙부가 어느 날 실어 놓으라고 시킨 화물을 깜박한 게 그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숙부는 제임스를 만리타향에서 그냥 내쫓아 버린다. 숙질간의 아름다운 의리가 마치 단종과 수양대군을 보는 듯했다.
어찌어찌 중국으로 흘러들어 온 제임스 메디선은 윌리엄 자딘과 의기투합하여 회사를 차렸다. 마약, 무기 등을 밀수하며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던 이 회사는 21세기에도 홍콩 최대의 금융사 중 하나다.
그리고 역사가 바뀐 현재에도, 그의 행보는 윌리엄 자딘과 동업자가 아니라 그의 부하 간부라는 것만 빼고 비슷했다.
벵골군 사령부에 갔다가 돌아온 제임스 메디선은 표범 가죽을 벗기고 있는 공화국 사람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 겨울 동안 많이 봤던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광고에 열심이시군. 좋아, 당신들 뜻대로 됐어. 옥털로니(Ochterlony, 당시 동인도 회사 인도 방면군 지휘관 데이빗 옥털로니) 장군은 겨울 동안 콜카타 맹수들의 씨를 말렸다는 그 총과 총알에 관심을 보였소.”
이 뜻 모를 말은 지난겨울 기랑과 고총련 특작부대가 인도에서 그저 놀고 있던 게 아님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류큐 해방’이 꼴을 슬슬 갖춰갈 시점에도 기랑은 아직 중국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적어도 만춘이 되기 전엔 히말라야 산맥을 넘기 어렵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등산 준비 하다가 도착한 정약용의 서신 탓이 더 컸다.
정약용은 봄이 올 때까지 기다리며 해야 할 일을 일러주고 적지 않은 자금 또한 보냈다.
본래 정치국 결정에도, 시준이나 기랑의 의도에도 인도에서 무얼 할 계획은 없었다. 인도는 그저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한 통과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기랑이 별생각 없이 ‘삼수갑산보다 좀 더 힘든 정도인가?’ 하며 히말라야 넘으려 하고 있을 때 도착한 정약용의 전갈은 그녀를 인도에 약간 더 붙잡아 두었다.
이 겨울에 구르카족의 계곡을 탈 생각이라면 난 그냥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드러눕던 제임스 메디선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정치국 회의 결과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시작된 정약용의 사고는 시간을 앞질렀다.
그는 기랑이나, 심지어 시준마저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도에서의 사업’을 구상했다.
***
정약용은 영국 공사 하는 동안 영국군을 관찰할 기회가 자주 있었다.
그 전 교대자였던 이강회는 주로 공화국 혁명군이 배울 점을 중심으로 해서 영국군을 보았지만 정약용은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했다.
영국의 배는 크고 총은 우수하며 병사들은 절도가 있었다. 프랑스인이나 프로이센인은 비웃겠지만 어쨌든 조선군에 비교하면 그랬다.
그런데 영국군도 한 가지 아직 갖지 못한 게 있었다.
그들은 제식 소총으로서의 강선 머스킷이 없었다.
유럽에 강선 팔 기술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라이플은 오래전부터 유럽인도 썼다.
다만 전장식 라이플에 총알 장전하기도 쉽지 않고 다른 이런저런 문제도 있어서 실제 전장에 활용하기 어려웠을 뿐이다.
그래서 군대에는 일부만이 채용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공화국의 경우, 혁명군의 상당수가 강선을 판 브라운 배스 머스킷을 쓰고 있다. 그들에게는 총열 안에 집어넣기 쉬운 주석탄이 있었다.
물론 영국도 고려와의 교류 와중 그것을 보았다.
공화국이 빼돌리는 게 많아서 그렇지 삼화부 공창은 애초에 영국군에 대한 보급을 목적으로 세워진 공장이다.
관계란 항상 상호적인 법. 공화국 장인들과 ‘조지’들의 우정이 이미 오래되었는데 그 반대로는 유출이 안 되리라는 공상은 시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점을 활용해서, 유럽 국가들처럼 어느 정도의 누수를 감수하고라도 기술 교류를 활발히 트는 편이 나았다.
그런데 영국군은 유출해갈 생각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시준은 ‘미래인의 우월한 지식’이 틀림없는 미니에 탄을 팔아먹고 싶었다. 하지만 영국이 그것을 바로 채용하기에는 시대적, 정치적, 기술적으로 여러 저어되는 요소가 있었다.
미니에 탄이 그저 작은 원추형 총알의 뒤쪽을 파놓는다는 간단한 개념만으로 완성되는 물건은 아니다.
시준의 어설픈 지식이 다 그렇듯 주석탄도 초반에는 영 써먹을 수 있는 물건이 못 되었다.
본래 단련된 무사였던 양시위가 홍경래 군에 있을 때, 시준의 야매 총알 잘못 맞고 시준의 야매 수술을 거친 끝에 지금 청바지나 개고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탄도 통제가 잘되지 않았다.
원래 역사에서도 확장이 잘 안되거나, 총 안에서 터져 버리거나, 너무 비싸다거나 하는 이유로 확장탄의 실전 배치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특히 마지막 이유가 컸다. 총알만 비싼 게 아니고 강선총 자체도 활강총에 비해 많이 비싸다. 군대의 종교는 가성비이며, 영국은 아직 산업혁명이 전성기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이런 단점은 공화국에도 고스란히 작용했다. 주석 동지의 영도에 대한 신앙적 추종이 없었다면 벌써 조선 인민 해방전쟁 초반에 군대에서 폐기되었을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집단인 군대에서 탐낼 만한 기술이 아니었다. 콩그리브 로켓처럼 실제로 뜨거운 맛을 보지 않고서는 별다른 동기가 없었다.
그렇다 보니, 전쟁 때 초고속으로 사라지는 국고 채우려 주석탄 영업했던 시준의 노력도 별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영국군은 시큰둥했다. 하여간 시준의 이세계 용사 프로젝트는 제대로 되는 게 거의 없었다.
정약용이 주목한 것은 이 부분이었다. 그때와 달리 이제 주석탄도 충분히 발달해서 외국에 팔아먹을 만했다.
중국과 인접한 지역의 일이다 보니, 정약용은 구르카 전쟁의 경과를 여러 경로로 입수했다. 많은 친구들이 정약용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티베트 환상의 도시 샹발라(Shambhala, 香巴拉)에 무진장하게 쌓여 있다는 금은보화 소문을 들은 동인도 회사와 영국은 네팔을 침공한다. 티베트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네팔 사람들은 그 길이 쓸모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자기들이 지난 세기 라싸를 약탈해서 귀물을 다 털어왔기 때문이다.
영국인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히말라야의 알렉산드로스를 꿈꾸던 젊은 국왕 거번 유다 비크람 샤(Girvan Yuddha Bikram Shah)는 그 길을 막아섰다. 이게 1814년부터 1816년까지 이어진 구르카 전쟁이다.
허나 구르카족이 영국의 압도적 침공에 맞서 외롭게 산에서 저항하다가 끝내 영국군도 존경을 표할 분투 끝에 진압되었다는 그림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이때의 네팔은 ‘구르카 제국’으로 불릴 만큼 방대한 영토를 북동 인도에 갖고 있었다. 사실 전쟁의 명분도 따지고 보면 인도 동북부를 마구 침략하던 구르카족이 만들어 준 거나 다름없다.
산야의 소수민족이 아니라 일대를 호령하던 강국이었다는 얘기다. 영국은 결국 구르카인을 격파하고 국토의 삼분지 일을 뜯어내지만 상당한 고전을 피할 수 없었다.
얼마나 고전했는가 하면 획득한 영토 중 상당 부분을 옆 동네 아와드(Awadh)의 영주에게 양도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전비로 현지에서 낸 빚을 갚을 방법이 없었으니까.
영국 정부의 채권자 정약용은 빚 함부로 쓰는 영국인의 못된 습성에 대해 다시 혀를 찼다.
그러고는 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요소, 그러니까 산악지대의 험악한 지형을 고찰했다.
‘그렇다면 산척포수들의 총이 필요할 것이다.’
비어고의 저술자인 정약용은 지형과 총기 발달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선의 화포 전술이 정확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달한 이유 중 하나는, 조선이란 곳이 기본적으로 대규모 회전에 걸맞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산지가 대부분인 조선의 지형에 기인한다.
대군이 움직이기 어려운 좁고 험한 길에서 같은 밀도의 화력을 투사하려면 비용을 감내하고라도 사거리와 정확도를 늘릴 수밖에 없다.
정약용은 인도 주둔 영국군에 주석탄과 강선총 운용법을 판매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당장의 소소한 수입뿐만 아니라, 공화국과 영국 관계에 우호적 무역의 끈을 하나 추가하여 향후 시준의 ‘하나의 중국’ 혁명에 기여하는 포석이 된다.
무엇보다 이 공을 고총련에 넘기면 시준도 기랑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
기랑 역시 대체로 그 관점에 동의했다.
인도에서의 사업은 예정되지 않은 추가적 성과다.
그렇다면 시준은 기랑에게 추가적 보상을 해 주어야 마땅하다.
그 보상이 무엇인지는 여러 즐거운 상상이 가능했다.
기랑은 시준이 책임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가진 감정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과 시준이 괘씸하다는 것은 별개이므로 기랑은 시준을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 희망은 기랑에게 의욕을 주었다. 그녀는 시준도 생각하지 못할 방식의 고총련식 마케팅 전술을 발휘했다.
인도에서 중국 가는 대신 맹수 사냥에 매진한 겨울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제임스 메디선이 가져온 ‘같이 게임하러 가자’는 제안에 영국군은 의아해하면서도 받아들였다.
전쟁 끝나서 긴장을 풀 컨텐츠도 필요했기에, 옥털로니 장군 또한 이것이 국가 간의 아름다운 외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벵골의 동물 친구들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행사가 다 그렇듯 경쟁이 빠질 수 없다. 영국군 장교들은 조그만 아시아인 따위 인도의 무서운 맹수를 보기만 하면 달아날 것이라며 코웃음 쳤다.
허나 그들은 곧 열등감에 이를 갈아야 했다.
장교들은 도저히 평안도 사냥꾼의 추적과 몰아넣기 솜씨가 영국 귀족의 유구한 사냥 전통보다 더 우월하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공화국 의회 의원이자 총기협회 대표가 영국군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못 따라갈 명사수라는 사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헷갈리는 기랑의 외형은 털북숭이 근육질 거한을 사내다움의 표상으로 치던 유럽인에게 도저히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국군은 산더미처럼 쌓인 고총련의 멧돼지와 표범 옆에 비교하듯 놓인 자신의 초라한 성과를 보고 열심히 고민했다.
결국 그들은 ‘이성적인’ 유럽인답게 ‘합리적’ 설명을 찾아냈다.
‘저 고려 호랑이 사냥꾼(Korean Tiger hunters)들이 쓰는 총기와 총탄은 저격과 사냥에 특화된 것이다. 애초에 장비부터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패배자가 품위를 잃지 않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상대를 추켜세워 주는 것이다.
곧 장교들에 의해 고려 총에 대한 재평가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원래 그게 브라운 배스 복제품이라는 사실은 다들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장교들의 태도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총지휘관 옥털로니 장군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
제임스 메디선은 승전보를 전하듯 떠들어댔다.
“지난 전쟁의 바보짓을 변명하려면 구르카족의 위험을 과장하는 수밖에 없고, 그럴 정도의 상대라면 당연히 후속 보강 조치가 있어야 하지. 이를테면 신무기라든가. 잘 될 것 같소. 프레이저(Fraser, 당대 벵골 지역 실무 총책을 맡았던 윌리엄 프레이저를 말한다) 서기관도 그렇게 말하더군.”
“알았어.”
기랑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원래 과묵한 그녀의 성격 때문이다.
반면 제임스 메디선은 말이 궁해졌다. 그가 딱히 말을 잘못한 것은 아니고, 원래 까불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그제야 봤다는 듯이 표범 사체를 가리키며 코를 감싸 쥐었다.
“당신들의 활동이 사업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 드리게 돼서 기쁘지만, 제발 그놈의 냄새 나는 짐승을 뒷마당에서 해체하는 짓은 그만두면 안 되오?”
“네가 더 냄새나.”
그렇게 메디선의 입을 닥치게 만들어 놓은 기랑은 곧 다음 지시를 내렸다.
“가죽은 잘 갈무리해 둬라. 영길리 장군에게 선물해야 한다.”
“예에?”
고총련 회원들은 이 표범 가죽을 ‘회장이 더욱더 총애받기 위해’ 주석 동지에게 바치는 줄 알고 있었다.
이전의 다른 사냥감들과 달리, 회장 동지가 일신의 무공을 극한으로 발휘해 정확히 항문을 꿰뚫어 놓을 만큼 가죽 보존에 정성을 들였으니 용도는 그 외에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신나게 무두질 준비를 하던 참에 떨어진 기랑의 지시는 꽤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기랑은 사실상 고총련을 일구어내어 천대받던 포수들을 공화국의 중심 계층으로 추어올린 사람이다.
그녀가 가진 강력한 권위는 반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회원들은 그저 아쉬워하면서 아까보다 훨씬 덜 열성적인 동작으로 가죽을 다룰 뿐이었다.
***
정약용의 생각대로 이 시점의 주석탄이라면 충분히 외국에도 팔아먹을 만했다.
원래 역사의 유럽과 달리 공화국의 경우는 미니에 탄의 실용화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비결을 말하자면 역시 혁명의 드높은 신심이었다.
공창의 장인들은 이 거지 같은 총알의 원인이 주석 동지의 짧은 지식이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시준의 예술영도를 완성하기에 모자란 자신들의 손재주를 탓했다. 그러면서 혁명적인 개선안을 계속해서 내놓았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혁명군은 조선 인민 해방전쟁이 끝날 때쯤 원래 역사의 미니에 탄과 상당히 유사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눈물겨운 정신력의 승리라고 해도 좋다.
영국군이 그간 ‘완성된 주석탄’을 잘 알지 못한 이유 중 하나다. 이후로 류큐 해방전쟁 이전까지 혁명군이 전쟁을 하지 않았다 보니 무기가 나돌 일도 적었다.
옥털로니 장군은 이 탄이 잘 미끄러지도록 하기 위해 페이퍼 카트리지에 기존보다 훨씬 많은 기름을 발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다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영국인들이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금기를 몰라서는 아니다.
영국은 의외로 인도 카스트 제도에 대해 겉핥기나마 이해하고 있었고 통치에도 나름대로 적용했다.
하지만 어차피 어느 총이든 기름으로 손질하는 것은 같다. 그 전에도 세포이들은 동물 기름 바른 총 잘만 썼다.
이제 와서 기름이 ‘약간 더’ 들어간들 무슨 큰 관계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장군의 생각이었다.
기랑이 가져온 총탄의 상당수가 영국군에 양도되었다. 중화 혁명당은 지금 주석탄이고 그냥 총알이고 가릴 처지가 아닌 데다 강선총도 없는지라 이쪽이 오히려 더 적합한 시장이다.
영국군이라면 금방 분석해서 복제할 수 있겠으나, 그건 지금 런던에서 특허 출원하고 있을 정약용이 어느 정도 막아 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옥털로니 장군은 기랑의 요구대로 네팔과 협상에 들어갔다.
기랑은 티베트로 향하는 길을 답사하여 영국에게 알려주고, 대신 영국은 외교적 부담 없이 ‘민간인’ 제임스 메디선과 ‘외국인’ 고려 사람들만 들여보내는 방식이었다.
네팔에서도 영국의 시커먼 속셈을 모를 리는 없었지만 그들의 사정이 좋지 않았다.
우선 비크람 샤는 기랑이 맹수 사냥 한창 하고 있을 때 죽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정복을 방불케 했던 그의 영토 확장은 알렉산드로스와 같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영토는 잃고 본인은 요절한 것이다.
후계자는 매우 어렸고, 네팔은 상당한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이럴 때 뒤를 봐 달라고 조공까지 보냈던 청나라는 지금 연락도 안 된다.
결국 네팔은 우호 선린의 기치 아래 장군의 제안을 수용했다. 그해 늦봄, 기랑이 이끄는 고총련 특작부대는 마침내 국경을 넘어 티베트 지역으로 진입했다.
***
중화 혁명당의 젊은 수장 임칙서는 불을 켜고 싶었다. 그러나 여러모로 그러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누운 채 말했다.
“아까는 말을 못 했는데, 토번의 홍교(紅敎) 사람들을 통해 밀서가 왔소. 정시준이 보낸 원병이 도착했다 하오.”
홍교란 티베트 불교의 한 일파인 닝마빠를 말한다.
붉은 모자를 썼다 해서 홍교라 불렀는데 티베트에서도 가장 원시적이고 오래된 교파였다.
달라이 라마를 내세운 겔룩빠, 즉 황교(黃敎)는 비교적 신흥 종파였지만 청 제국과 성공적으로 결탁하였다.
건륭 치세 내내 청은 겔룩빠를 지원하며 닝마빠를 탄압했고, 이런저런 핑계로 티베트에 들어온 청 군대는 티베트 주민들까지 덤으로 괴롭혔다. 청의 티베트 지배는, 청 황제와 붙어먹은 티베트 불교 상층부를 제외하면 결코 평화적인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과거 공화국 해병대가 라마승인 척하고 저지른 여러 테러 때문에 지금은 도광제의 군대가 행패를 부리는 중이었다.
그들은 사람을 폭행하고 가옥과 재산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사원 근처에서 가축을 도살하여 피를 흘려보냈다. 티베트 사람들은 분노했다.
이미 암반(Amban, 청이 티베트에 설치한 일종의 정치 고문관) 한두 명이 살해당할 정도로 티베트의 민심 이반은 극심했다.
그리고 이는 중화 혁명당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사천과 한중에 자리 잡고 난 이후로 티베트 홍교와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었다.
오족공화의 이름을 이미 들었던 이들은 기꺼이 기랑의 밀서를 전해 주었다.
제임스 메디선과 기랑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할 일이었다. 만약 티베트 사람들의 반응이 안 좋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벵골로 튀어야 했으니 말이다.
염군의 우두머리이자 중화 혁명당의 군사 책임자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송주령은 임칙서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임칙서는 그렇다고 느꼈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도 들었소. 허나 원병이라고 해 봐야 정시준의 심복 한 명과 서른도 안 되는 사냥꾼 무리이지 않은가.”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오. 그들은…… 윽!”
송주령은 몸을 약간 트는 것만으로도 임칙서의 말을 끊어버렸다. 그녀는 임칙서의 반응을 즐기며 고개를 숙였다.
임칙서의 귓가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이 맞아.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항상 사람 놀라게 하는 정시준인 만큼 총 몇 자루 들고 와서 끝나지는 않겠지. 분명 그자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것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결속을 단단히 다져야 하는 거야.”
하긴 지금 혁명당 세력과 염군 세력은 양 대표자에 의해 다시없는 ‘결속을 다지고’ 있는 중이기는 했다.
임칙서는 모두가 당을 위한 일이라고 자신을 다잡았으나 그의 몸은 자꾸 주인을 배신했다.
송주령은 임칙서의 코끝을 입술로 내리눌렀다.
“차라리 다른 계집 생각을 한다면 모를까, 이 와중에도 다른 사내 생각에 골몰하나? 흐음…… 역시 혁명의 기수가 다르긴 다르군.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지금 봐야 될 건 나야.”
송주령은 진부한 유혹의 대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미인계(美人計)까지 썼는데, 내일 당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에서 나 말고 웬 얼간이가 염군을 가로채도록 놔둘 생각이라면 오늘 밤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
그런 건 보통 미인계가 아니라 협박이라고 부른다.
임칙서가 그러한 취지로 반박하려는 순간, 기가 막히게도 이 어두침침한 누옥 안에 달빛이 비쳐들었다.
창문이 제대로 안 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우두머리의 방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밖에 마련하지 못하는 것이 현재 혁명당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임칙서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지금 배 위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는 염군 총대장의 무서운 미소와, 그녀의 나신을 따라 미끄러지는 달빛은 그로 하여금 감히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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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기름 먹인 페이퍼 카트리지가 문제가 된 건 1853년형 엔필드 소총의 인도군 보급 때부터입니다. 작중 시점에서 한참 뒤죠.
영국군이 힌두교와 무슬림의 금기를 알면서도 해당 카트리지를 차용한 과정은 작중 서술이 역사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지난화에서도 언급했지만 세포이 항쟁의 원인은 훨씬 복잡다단해서… 아마 뒤에 다시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2. 비크람 샤는 2살도 안 되어 왕위에 올라 19살에 죽었기에 그가 실제 통치를 얼마나 했는지는 의문입니다. 네팔의 공격적 영토 확장은 그의 치세에도 많이 일어나긴 했지만, 대부분 섭정이었던 총리 빔센 타파와 장군 아마르 싱 타파 등의 공적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한편 동인도 회사 역시 당시 자금 흐름이 영 좋지 않아(그래서 이웃 인도 영주에게 돈을 빌렸음) 티베트 황금향에 대한 소문에 기대를 걸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 네팔이 (동인도 회사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도 북동부 촌락을 닥치는 대로 합병하자 전쟁이 터진 거죠.
3. 청의 티베트 지배는 단순히 판첸 라마나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모셔서 끝내는 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갈등과 억압이 있었죠.
작중 나온 것 말고 특이한 예를 들자면 건륭제 필살의 서북공정이 있습니다. ‘청 황제는 문수보살의 화신이다. 왜냐? 문수보살은 동방을 수호하며, 문수는 만주와 발음이 비슷하니(진짜 이랬습니다) 만주의 유래 자체가 문수다. 청이 티베트를 지배하는 것은 예정되어 있던 운명이다’라는 어디의 소머리 같은 논리를 폈습니다. 이런 무리수가 필요할 정도로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작중 티베트 관련 역사적 상황이나 용어는 김한웅, 2006, <淸 기록에 나타난 18세기 티벳 역사상의 비판― 포하네 관련 淸實錄의 내용을 중심으로 ―>외 여러 문헌을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