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78. 류큐 해방(2)
인간은 언제 정의를 찾는가?
정의는 가장 강력한 힘이며, 따라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약할 때 정의를 찾는다.
육상과 해상 양쪽에서 뭘 해보지도 못하고 원정군을 전멸시켜 버린 사쓰마가 그러했다.
사실 사쓰마의 국력이 고려에 반항도 못 해 볼 정도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사쓰마는 류큐만 상대할 생각이었다. 류큐에 거류하는 사쓰마인도 많았던 만큼 이건 시게히데의 말마따나 ‘처벌’이었지 ‘전쟁’이 아니었다.
반면 고려는 처음부터 전쟁, 아니 유구 해방의 대의를 시종일관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각오의 차이였던 셈이다.
물론 시마즈 시게히데는 류큐를 신속하게 장악하기 위해 최신 군함과 정예 병력을 보냈다.
그가 정말 류큐 근해에 어떤 위협도 없으리라 확신할 정도로 낙관적인 멍청이는 아니었다. 시게히데는 분명 영국까지는 가상 적국으로 상정해 두었다.
허나 영국이 정말 싸우러 온다면 어차피 얼마를 보내든 해상전에서의 결과는 같다. 규모를 줄여 재빠르게 류큐에 침투하는 게 더 중요하다.
결국 시게히데가 가진 정보로 보았을 때는 나쁘지 않은 전략이었다.
그러나 쇼코 왕이 이토록 대담하게 나라의 문을 열어젖힐 줄은 몰랐다.
아직까지 군주도 없어 나라가 대혼란 와중이라고 생각했던 고려가 나선 것은 뜻밖이라는 말 정도론 표현할 수 없는 사태였다.
손실이 거의 없으리라 예상했던 핵심 전력을 고려의 기습으로 다 말아먹고 나자, 사쓰마는 이제 진짜로 힘이 없어졌다.
이강회가 끌고 온 함대는 프리깃만이 아니다. 나머지 여남은 척은 대부분 영국 무장상선이거나 조선 전선 개조형이고, 이들은 충분히 병사를 싣고 있었다.
수병들은 곧 류큐 여기저기 정신없이 흩어진 사쓰마 병사를 찾아냈다. 여기에는 19세기의 허리놀림이 어떤 것인지 새 지평을 보여준 나가사에몬의 공이 컸다.
함대 중추가 박살 나고 지휘자도 없이 표류하던 사쓰마 배는 대부분 전투도 필요 없이 항복했다.
그 병사들은 아무래도 반동의 밑에 오래 있다 보니 노동교화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꼭 증거 인멸을 위해서는 아니고, 사람은 배워야 한다.
이강회는 이제 항구 비슷한 꼴을 갖추기 시작한 덕원진(원산)에 그들을 수송하도록 명했다.
새로 바뀐 공장영선부장 서유구의 효율적 지휘로 아오지 탄광의 석탄 채굴량이 날로 늘어나는 중이라 일손이 부족했다.
부수입도 있었다. 고려가 조슈에 팔았던 총 상당수가 그대로 다시 돌아왔다.
시마즈 가문이 조슈에서 밀수까지 해 가며 길러낸 총병이 혁명군의 손에 떨어진 탓이다.
물론 이 비자발적 반품에 대해 고려가 딱히 환불을 해 주진 않았다.
그러고 나니 시마즈 가문은 그 긴 역사 동안 한 번도 돌아본 적이 없던 ‘도덕과 이치’에 갑자기 호소하기 시작했다.
사쓰마가 영국과 고려, 그리고 막부에 애타게 보낸 문서며 전령을 다 열거하는 일은 쓸모가 없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소…… 솔직히 류큐는 사쓰마 땅이 맞다고 생각해요……. 남의 땅을 가, 강제로 빼앗으면 안 되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니, 시마즈야?’
아무도 사쓰마에게 류큐를 돌려줄 생각 따윈 없었다.
심지어 막부마저도 그러했다.
쟁점은 사쓰마가 외국과 독단으로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막부가 안 도와주는데 그럼 무슨 다른 수가 있느냐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만, 원래 아랫사람에게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한 다음 일 잘못되면 책임 다 뒤집어씌우는 게 이 바닥 규칙이다.
게다가 사쓰마가 고군분투하는 사이 이미 그물은 완성되어 있었다. 고려인민공화국 주석 정시준은 조슈를 통해 막부에 정중한 항의 서한을 보냈다.
‘평화적 무역을 위해 류큐에 보낸 우리 배를 사쓰마 무뢰배들이 습격했다! 어어, 이거 봐라. 어깨가 부러진 것 같은데. 이거 어떻게 해 줄 거냐? 사무실에 가서 얘기하자. 성의를 보여라.’
확실히 혁명해군은 일본 본토로는 접근도 하지 않았다. 북 치고 장구 치며 무사와 군함을 모아 남쪽으로 떠난 건 사쓰마다.
시마즈 가문은 류큐의 내통을 목 놓아 외쳤으나, 그걸 증언해 줄 류큐의 귀족이나 사쓰마인 거류자들은 밀물이 한 번 들어왔다 나가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강회는 그들을 구덩이에 놓고 와버린 해병대의 ‘깜박했다’는 변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처벌도 하지 않았다. 쇼코 왕의 진노 따윈 해병대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그리고 영국까지 ‘영국 개항장인 대만에 대한 위협이 우려’된다며 이 사태의 ‘평화적 중재’를 맡겠다고 나섰다.
막부는 고려까지는 별로 두렵지 않았다. 조선 망하는 혼란기 때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아 가만히 내버려 뒀더니 많이 컸다는 정도가 막부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나선 시점부터, 막부는 삐끗 잘못하면 성기가 되겠다는 직감을 느꼈다.
11년 전 소규모에 불과한 러시아 도적 떼가 강대한 마쓰마에 번과 모리오카 번을 먼지 나게 털어버린 일을 막부는 기억하고 있다.
3천 명의 무사가 소집될 만큼 긴장이 흘렀으나 결국 그 무사들은 소집에 응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마음껏 약탈하다 황제의 명으로 돌아갔다. 억울한 건 협상한답시고 보내졌다가 러시아인이 쏜 총에 영 좋지 않은 곳을 관통당한 통역사 가와구치 요스케였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의 일이나 여러 방면으로 입수한 정보로 판단해 보면, 영국은 러시아보다 강하다. 전력과 악의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그러하다.
도쿠가와 막부 삼백 년 태평성대는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절대로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았다. 많은 통치자가 본받아야 할 자세다.
게다가 ‘충신’ 조슈의 사전 작업 덕에 사쓰마 버렸다고 막부를 경원시할 번주는 많이 줄었다.
특히 사이코쿠(서국)의 많은 번은 류큐를 상실하고 내리막길을 걸을 사쓰마의 꼴에 내심 통쾌해하는 중이었다. 사쓰마가 류큐에서 착취하는 부는 여러 영주의 질투를 사고 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고려 역시 쓸데없는 원한을 사는 일을 삼갔다. 현재 공화국 상황으로 일본 전체와 싸울 수는 없다.
그래서 원정군 총대장인 시마즈 타다아츠는 정중히 사쓰마로 돌려보내졌다. 포격 맞고 박살 난 배의 잔해에서 판자 붙잡고 허우적대다 구조된 덕에 가능했으니 양국 모두에 운이 좋았다.
뭔가 심한 꼴을 당했는지 계속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며 정신이 나가 있기는 한데, 매 맞은 자국도 없고 어디 잘린 데도 없으니 뭐라고 트집 잡기는 힘들었다.
타다아츠는 일단 정신 돌아오면 배를 가르든지 하기로 하고 치워 둔 시게히데는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라면 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아들 나리노부는 자기 측근 창자를 끄집어내고 자길 가둔 아버지에게 결코 좋은 감정이 없을 터. 잘못하면 절에 유폐되어 그대로 등신불이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선제공격. 조선 과학군주 영조처럼 자식을 상대로 물리학 실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리노부는 사도세자와 달랐다. 그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도 않았고 아버지를 쑤셔버리겠다고 호언하지도 않았으며 성적 지향성을 가리지 않는 음란소설을 섭렵하고 그 목록을 작성하지도 않았다. 은거해 있었으니까.
개인적 명분보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영조가 과학군주의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가 왕이고 상대가 세자였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조선의 강력한 중앙집권’이란 개념이 이것이다.
권한은 휘둘러도 책임은 안 지는 것이 흑막의 이점이라 하나, 막후정치가 그리 좋기만 했으면 모든 나라에서 일본의 정치를 본받았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번주가 아닌 시게히데가 아들에 대한 처형을 사적으로 집전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단점이 있으면 장점도 있는 법. 막후정치의 단점에 대해 고민하던 시마즈 시게히데의 머릿속에는 곧 장점이 떠올랐다.
시게히데는 전후 처리와 외교에 관해 가신들이 가져오는 모든 안건을 물리쳤다.
“왜 그 일을 자꾸 내게 묻느냐? 나는 불도에 귀의하여 은거한 늙은이일 뿐. 속세의 일은 모른다. 모든 결재는 가주인 나리오키가 가로들과 의논하여야 할 것이다.”
사시미의 나라인 일본 사회 특성상 정책 결정자는 명목상으로라도 전부 칼잡이다. 그들은 그 순간 진심으로 시게히데를 한칼에 베어 버리고 싶었다.
시마즈의 가신 중 일부는 서로 비밀스러운 눈짓을 교환했다.
‘옆 나라 고려에 혁명작두라는 게 있다던데…….’
하지만 아직 사쓰마에 수평도가 퍼지려면 멀었다. 결국 가신들은 터덜터덜 젊은 당주 나리오키에게 갔다.
그러나 여태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일 안 해본 당주가 뭘 알 리가 없다. 나이로 치면 시준과 비슷하고, 신분에선 비교할 수가 없으나 그는 여태 옷 한 벌도 자기 손으로 사 본 적이 없었다.
나리오키는 ‘혹시 이것은 할아버지가 나를 시험하려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갈팡질팡했다.
은거한 나리노부는 뒤주에 들어가기 전에 빨리 북방의 얼음칼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시게히데가 영조의 위업을 이룰 수는 없었지만 그의 아들과 손자는 대충 사도세자와 정조 꼴이 되어갔다.
그러는 사이 사쓰마의 대응은 그야말로 무너지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사쓰마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 못하자, 막부와 영국과 고려는 순조롭게 류큐의 완전 독립에 합의했다.
이번 사안은 막부가 묵인하되, 영국과 고려가 사쓰마의 무력 행동에 대해 차후 어떤 대가도 막부에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막부가 호구라서 그런 건 아니다. 도쿠가와도 생각이 있었다.
에도 막부가 이번 사태에서 예전 러시아의 남하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영국과 막부의 비밀 접촉에서 막부는 영국도 러시아의 팽창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중에 러시아에게 대항하려면 그깟 자기 것도 아닌 작은 섬 하나 내어 주고 우호를 쌓는 게 나았다. 주중 영국 공사 조지 스턴튼 또한 러시아에 대항할 방패를 마련한다는 구상이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류큐는 일본인의 통치에서 해방되었다.
***
쇼코 왕은 어느 모로 보나 류큐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었다.
21세기까지도 일본에서 독립하지 못하는 류큐를 2백 년 앞서 (영국이) 독립시켰으며, 거슬리던 토착 귀족들도 (고려가) 매장했다.
게다가 영국과 고려 어느 쪽도 (당장은) 사쓰마 대신 류큐를 차지하겠다고 덤벼들지 않았다.
고금의 어떤 군주가 이토록 불리한 조건에서 이와 같은 성과를 이루어내었는가?
그 성과에는 마땅히 찬송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류큐의 신하들은 위대한 왕 앞에 늘어서서 경하를 드렸다.
그런데 그 신하들 중에는 쇼코 왕이 아는 얼굴이 별로 없었다.
왕은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갑자기 첩을 늘리고 싶었다.
백사장 아래 묻혀 버린 기존 고위 관료들 대신, 영국과 고려는 각자의 방식대로 ‘귀국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를 추천했다.
영국의 방법은 자칭 보편 제국답게 보편적이었다. 그들은 탐험가 바실 홀을 단장으로 하는 ‘외교 고문단’을 꾸려 보냈다.
그 고문단의 구성원은 대부분 동인도 회사의 기술자와 장사꾼들이었다.
그들은 섬 곳곳에서 설탕 농장을 찾아다니며 어떻게든 몫을 확보하기 위해 분투 중이었다. 다만 웬만한 곳은 공화국 해병대가 이미 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문화권이 다른지라 영국보다는 조선인이 훨씬 류큐 사람에게 친숙했다. 암묵적이고 음성적인 소통이 잘 안 되는 바람에 영국인들은 항상 한발 늦었다. 무엇보다 이강회는 문순득과 오랜 지우이며 문순득은 류큐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바실 홀의 활약 끝에 간신히 류큐 현지 동조자를 몇 명 구하고 류큐 왕부에 편입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어쨌든 보편적인 방법이란, 어디 꼭 들어맞지는 않아도 대체로 먹힌다는 점이 높게 평가된다.
고려도 영국과 류큐를 두고 충돌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지 스턴튼이 본국에 그럭저럭 체면 차릴 만한 보고서를 쓸 정도의 이권은 영국 역시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려의 경우 주석 동지의 혁명사적을 본받았다. 오래된 이름이 류큐에서 부활했다.
왕의 자문에 겸손하게 답하는 ‘유구국 근문소’가 슈리 성 어느 고관의 저택을 빼앗아 세워졌다.
그 근문소의 위원장으로 당연하게도 추대된 이강회는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유구에는 의외로 친고려파가 있었다. 정확히는 요 며칠간 좀 생겼다.
절대 해병대가 두들겨 패서 친고려파로 만든 게 아니다.
친목의 목록에서 증오스러운 압제자 사쓰마인의 무리인 일본 사람은 일단 제외된다.
그리고 영국은 그냥 당연히 제외된다. 그러고 나면 고려밖에 안 남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 친고려파가 두둑한 ‘자문료’와 함께 위원으로 초빙되었다.
허나 이들이 돈에 혹해서 모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유구국 근문소 위원’들 역시 모두 나름대로 류큐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세상살이나 사람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21세기 정부 자문위원이 돈만 받고 원고 써 주는 사람들이었다면 정권 바뀔 때마다 자문위원이 물갈이되지는 않을 것이다.
돈도 좋지만, 무엇보다 정당성을 주지 않고서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강회는 그것을 주었다.
시준이 의주에서 근문소 만들며 돈이 아니라 명예를 사용해 뇌물을 주었던 일과 같았다.
서양인들에게 맞서 ‘동양’ 사람들을 수호할 자는 같은 ‘동양’ 나라뿐이며, 그중에서도 실제 악적 사쓰마를 물리친 고려야말로 진정한 류큐인의 동지라는 어디서 많이 본 선동이 이강회에 의해 부채질되었다.
“많은 유구 사람들이 고려를 의심하고 있소. 저 살마국의 악적이 횡행하던 슬픈 지난날로 인해 유구 사람들의 눈에 드리워진 검은 안개는 매우 두터우나, 이를 걷어내고 양국의 우호선린에 앞장서 노력할 사람들이 바로 존경하는 위원 여러분인 것입니다!”
근문소에서는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특기할 만한 점은, 영국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신녀(神女)들 또한 위원으로 대거 참가했다는 것이었다.
류큐 사람들의 영적 지주라 할 수 있는 신녀들은 지금도 여전히 존경받는 계층이었다.
비록 200여 년 전 사쓰마의 침공 때는 신의 힘으로 군사를 막아보겠답시고 죽 끓여 강에 붓는 짓이나 하고 있었다 해도 그 존경은 쇠하지 않는다.
허나 현실 정치에 나오라는 요구에는 신녀 자신들도 놀랐다.
이들을 정치에 끌어들이기로 결정할 수 있는 나라는 현 지구에서 수평도가 정착한 고려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왕실 전용 여사제라 할 수 있는 노로(ノロ)는 반동의 기운이 너무 강해서 거의 제외되었다. 민간 여사제인 유타(ユタ)가 주된 초빙 대상이었다.
유타가 노로의 기득권을 마땅찮게 생각한다는 것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유타는 류큐 왕실에 반기를 든 적도 있다.
그리고 혁명은 언제나 그런 자들의 편이다.
다만 노로가 가지고 있는 장점, 그러니까 전 류큐에 걸친 종교-행정 결합 형태의 체계적 지배권을 포기하는 것도 이성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강회는 류큐 노로의 최고 우두머리이자 왕족 여성만이 임명되는 치피진(チフィジン, 聞得大君)의 자리를 ‘수평하게’ 유타에 양보해야 마땅하다고 권고했다.
쇼코 왕은 벌컥 화를 내려다 멈추었다.
자기보다 먼저 화를 냈던 기존 고위 노로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는 사실이 떠올라서였다.
고려와, 고려에 붙어먹은 신녀들의 말은 노로의 전통적 독점 권한인 바다뱀 채집을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바다뱀 잡으러 나가는 데 큰 항아리와 횟가루를 쓸 일은 없다.
“그건 신의 일이므로 나의 소관이 아니다. 신을 모시는 무녀들이 찬동한다면 나 또한 허락하겠다.”
왕의 고모이자, 현재 치피진의 자리를 맡고 있는 쇼씨 법운(法雲) 등 다른 고위 노로들은 여자 뒤에 숨는 왕의 작태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반면 이강회는 벌써부터 (선택적으로) 수평도를 적용하는 왕의 지혜를 칭송했다.
게다가 이강회는 본국에서 전향서 썼던 신라 화랑들을 데려와 노로나 유타들과 짝지어 주었다.
조선 무당이 그렇듯, 류큐의 여성 사제는 딱히 결혼이 금지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화랑들은 영국인마저 탐냈던 미모다. 혁명적 미남계는 잘 먹혔다.
그리고 가정을 구성함으로써 어느 정도 독립적 생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 고려 편의 무녀들은 더욱 왕가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그 말은 곧 공화국과 더 친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유타와 노로는 류큐 신민의 일상생활과 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영국은 공화국과 류큐 왕부에서만 경쟁하면 된다고 여기겠지만, 공화국은 수평의 대의에 따라 ‘아래’에 있는 신민들에게 훨씬 깊숙하게 침투하고 있었다.
***
별로 관련이 없을 것 같은 두 나라지만, 인도와 조선 역시 찾으려면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이 시대 두 나라는 모두 맹수와 사람이 같은 생활권에서 뒹굴었다.
원 역사 조선의 경우 자의는 아니지만 맹수를 완전히 말살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지금의 고려인민공화국도 몇 년간 해 온 해수구제사업이 꽤 성과를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벗겨낸 가죽은 고총련의 성장에, 사냥으로 얻은 경험은 혁명군의 단련에 큰 역할을 해 주었다.
그러나 인도는 그 자연의 규모에서 조선과 크게 다르다.
인구의 규모도 크기는 하지만 자연은 더 크다. 보통 사람들이 ‘그거 세렝게티 공원에나 있는 놈들 아냐?’ 하는 맹수는 거의 인도에도 있다.
게다가 인구 밀도가 낮은 사바나와 달리 보통 그 근처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면에서 체감은 더 확실하게 다가온다.
21세기까지도 이 지역에는 도시 한가운데에 표범이 무슨 길고양이처럼 돌아다니고 있으니 19세기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콜카타 시내에 출몰한 암표범 하나가 지독한 사람 냄새와 허기에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표범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 또한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머무르고 있는 공화국 사람들은 여상한 표정이었다.
“날씨가 풀리니 짐승이 마을까지 내려왔나 보오이다.”
“어디나 짐승들은 똑같지.”
“허나 이 동네 범은 우리 고향과 무늬가 달라 진귀하군요. 벗겨다 바치면 필시 주석 동지께서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시끄러워.”
동료들과 함께 어느 집 지붕 위에 선 기랑은 총을 세워 들었다.
그 지붕 아래의 장식은 기묘했다. 뾰족하고 위협적인 장식이 된 문설주는 어떤 종교적 전통 같았다.
그러나 이는 신앙이나 문화와 전혀 관계없는 철저한 실리의 산물이다.
이렇게 해 두지 않으면 코끼리가 문을 수수깡처럼 뜯어내고 곡식을 털어 간다. 코끼리는 그 부드러워 뵈는 코의 힘만으로도 집을 부수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 크기는 코끼리를 상대하는 것인 만큼 만만찮았고, 대문 위쪽에 어느 정도의 사각을 만들 정도도 되었다.
평범하게 서 있는 것 같은 기랑과 평안도 포수들은 자연스럽게 그 안에 스며든 상태였다.
포수들이 숙련자 특유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총을 세워 들었다. 그러나 기랑은 손을 내저었다.
표범이 총 설맞고 발작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긴 코끼리도 아니고, 표범 하나쯤이야 기랑 혼자서도 충분하다.
다만 기랑의 의도를 오해한 포수들은 히죽 웃었다. 그들은 ‘주석 동지에게 자랑할 공’을 회장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그런 괘씸한 생각을 알 리 없는 기랑은 말없이 약포를 꺼냈다.
페이퍼 카트리지는 기름에 흠뻑 젖어 투명했다. 안으로 햇빛이 뚫고 들어올 정도였다.
그녀는 ‘멀리 고향의 그 사람도 이 햇살을 맞고 있을까?’라는 복잡한 심상을 한 단어의 건조한 중얼거림으로 표현했다.
“봄이네.”
기랑의 송곳니가 약포를 물어 찢었다. 돼지기름 냄새가 확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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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사도세자의 소설 리뷰집 얘기는 근래 사도세자의 저서로 밝혀진 ‘중국소설회모본’입니다. 유명 중국 소설에 대한 정리인데… 처음엔 삼국지, 열국지 같은 것으로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금병매’, ‘염정쾌사’(염정(艶情)은 연애감정이라는 뜻인데, 이건 돌려 말한 거고 내용은 짐작하시는 대로입니다), 그리고 작중에도 주요한 소재가 되었던 ‘변이채’도 나옵니다. 아마 읽은 것 같습니다.
2. 류큐의 신녀(신조)는 특별히 결혼이 금지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쓰마 번 지배기나 근현대 전환기의 몇몇 시도를 제외하면 류큐 신녀의 결혼에는 제약이 없었습니다. 이 ‘시도’는 신녀의 생계를 약화시켜 류큐를 종교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도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 말하자면 길고, 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미야기 에이쇼, <沖縄の神女の婚姻制について(오키나와 신녀의 결혼 제도에 대해서)>를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별다른 근거 없이 오키나와 무녀가 금혼집단이라는 인식이 있다고 이 글에서도 언급하고 있지요.
3. 세포이 항쟁의 촉발 원인으로 알려진 ‘기름 약포’는 19세기 중반 확장탄과 강선총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쟁점이 된 것입니다.
그 전의 총도 기름을 쓰기는 했는데, 미니에 탄이나 (그걸 쓰지 않았던) 영국의 비슷한 확장탄은 강선총에 맞물리게 하기 위해 기름이 많이 필요했거든요. 따라서 1817년 현재의 인도에서 최소한 그 일로 난리가 날 가능성은 적습니다.
다만 세포이 항쟁이 꼭 그 총알 문제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긴 하죠.
4. 인도는 현재에도 작중 서술된 것과 비슷한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다큐멘터리로도 몇 번 나왔습니다만, 대도시 한가운데에서 대낮에 날뛰며 사람을 습격하는 표범은 정말 끔찍하죠. 그렇다고 21세기에 대규모 무차별 사냥이나 서식지 파괴를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