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77. 폭풍과 가랑비(3)
시준의 파견은 위태한 줄타기다.
그의 성격으로 봐서 영국 정부에도 비공식적인 내락은 받았겠지만(정확하다), 영국은 중국 내란의 격화는 참아 넘겨도 러시아의 남하는 참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러시아의 도움이라도 없다면 중화 혁명당은 그대로 짓밟힐지도 모른다. 정약용은 시준의 답답한 처지가 안타까웠다.
분명히 주 런던 고려인민공화국 특명전권공사로서 정약용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고심했다. 어떻게 영국의 정강이를 호되게 쳐서 동쪽은 돌아볼 여유도 없을 만큼 팔짝팔짝 뛰게 만들어줄 수는 없을까?
그러던 중, 로스차일드가 투덜거리면서 들어왔다.
그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사환에게 겉옷을 맡겼다. 둘도 없는 ‘패밀리’인 만큼 정약용도 그의 무례를 탓하지는 않았다.
“이거 원.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공사 각하.”
“무슨 일이 있었소?”
“내 마차가 호화로운 것을 보고 굶주린 빈민들이 사납게 둘러싸더이다. 동전 몇 푼 던져 주는 걸로는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는데, 내가 지금 친구인 고려 공사에게 가는 길이라 하니까 또 순순히 돌아가더군요. 구호소를 차리셨단 말은 들었습니다만 이 짧은 시간에 이토록 인심을 얻으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네이선은 말을 끝내고 나서야 그게 정약용에게 불쾌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 거지 왕초라고 부르는 것 같잖은가 –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그런데 저를 왜 찾으셨습니까? 어디 또 투자할 만한 게 있나요? 각하께 의장 정시준의 계시가 또 내려왔다면야 저는 뭐든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각하 덕에 선물로 산 곡식은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팔 지경이죠.”
“허허. 지금은 아니오. 당장 주린 자가 많은데 곡식을 너무 비싸게 팔면 사람들이 백안시할 수 있으니 천천히 이득을 보고, 내년에는 또 다른 것으로 같이 사업해 보시지요. 오늘 오시라고 한 건 차나 한잔하면서 한담하기 위해서요. 긴히 부탁드릴 것도 좀 있고.”
네이선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 사람은 돈을 버는 데에 있어 도덕적 인상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한두 번 대박을 쳤다고 계속해서 돈을 긁어모으려 드는 건 삼류나 하는 짓. 이미 대부호인 네이선이나 국가인 고려는 그것보다 더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정시준은 내 인생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
네이선은 정말 자기 손자 대쯤엔 이스라엘의 재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인도 주둔군에 ‘사소한 부탁’을 전달해 달라는 정약용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쯤이야 일도 아니다.
그리고 천재 정약용에게 듀얼코어 프로세스 정돈 평범한 일에 속했다. 네이선이 심부름이나 한다는 인상을 받지 않도록 목적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면서, 정약용은 전혀 다른 구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윌리엄 자딘이 말하고 방금은 네이선이 언급한 빈민들, 다시 말해 조지당의 활용에 대한 생각이었다.
***
그러나 정약용은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리 영국 견제의 필요가 있다고 한들, 갑자기 도당을 꾸려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건 너무 부자연스럽고 가능할지도 의심스러웠다.
정약용은 폭풍이라기보다 가랑비처럼 일을 추진했다.
런던 경찰은 정약용을 감시했지만 그의 신분이 높은 데다 표면상으로는 성경 강독과 구호이니 트집을 잡기 힘들었다. 이단적 경전 해석을 물고 늘어지기에는 지금 영국의 종교계가 정말 민감해서 그쪽은 외면해야 했다.
게다가 정약용은 월간 대혁명을 마구 배포한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간 왕 첸 약방에서 음성적으로 나간 건 꽤 되지만 – 그리고 그거 읽은 영국 노동자들이 러다이트 운동을 한층 열정적으로 전개하고 있지만 – 그래도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남의 나라 폭동을 사주하는 일은 아무리 전권공사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약간의 변용이 필요했다.
원 역사의 정약용이 인생 후반기에 평생 하던 일이 무엇인가. 성현의 책을 목적에 맞게 발췌하고 엮어 정리하는 작업이다. 조선 선비의 흔한 교양사업이기도 했다.
그런 정약용이니만큼 이 삐라 제작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즐거운 축에 속했다.
월간 대혁명에서 트집 안 잡힐 내용만 뽑고 엮어서, 마치 학술 전단처럼 꾸며 한 장으로 요약하는 일은 마치 옛날 희만당에서 평화롭게 공부하던 시절마저 떠올리게 했다.
더 타임스의 사장 존 월터는 기꺼이 인쇄 시설을 빌려주었다. 런던에서 유일하게 왕 첸 리딩방에 대한 독점 취재를 허락받아 생기는 이득을 고려하면 그까짓 거야 그냥 줄 수도 있었다.
그런 전차로, 베이커 가 빈민 구호소에서 나눠주는 뜨거운 죽그릇 아래 손 데지 말라고 깔아 주는 종이는 내용이 슬쩍 바뀌게 되었다.
본래는 굴뚝 조지가 받은 것처럼 정시준의 초상화였다. 원래 의도는 정말 순수하게 공화국과 시준에 대한 인식 개선 및 홍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영어로 몇 마디가 적히게 되었다.
영어이니만큼 교회에서 읊어대는 라틴어보다는 훨씬 알아보기 쉬웠다. 곧 빈민들은 그 종잇조각을 외워 오는 자에게 뭔가 고깃조각이라도 하나 더 퍼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용은 매번 달랐지만 뜻하는 바는 비슷했다.
‘너희의 비참함은 너희의 잘못이 아니다.’
부자들은 너희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하다 말하지만, 깨어 있는 시간 전부를 일하는 데에만 쓰는 너희는 결코 게으르지 않다.
나태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며 가죽 벨트와 채찍을 휘두르는 공장 주인이 너희의 반이라도 일을 하는가?
게으른 자가 돈을 번다. 부지런한 자는 평생을, 그리고 자손 만대로 가난하게 산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조지당원들은 곧 자신이 그 글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기가 죽 한 그릇 더 먹기 위해 외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품위에 도움 되는 일이다. 예수를 따른 5천의 사람들이 물고기와 빵 먹으려고 간 건 아니지 않는가.
‘이 말이 옳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 ‘뭔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지만, 왜 잘못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대강 의견이 일치했다.
결국 이것은 그들을 빼놓고 정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원래 역사라면 노동자들이 이 개념을 구체화하는 데에 앞으로 십여 년이 더 걸린다.
허나 이번에는 본보기가 될 곳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은 더욱 쉬웠다.
그 나라의 사람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는 나라가 이미 있다.
미국? 장난하는가? 아무리 빈민들이 못 배워도 미국이 야만적 노예제도를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음은 잘 안다.
조지 중에는 왕년엔 먹고 살만 해서 글줄 읽은 조지도 꽤 많았다. 공화정 로마도 그 정도 민주주의는 했다. 똑같이 노예도 있었다.
자기들 같은 노예는, 미국에서건 로마에서건 영국에서건 시민이 될 수 없었다.
모범으로 삼을 나라라면 역시 한 군데뿐이다.
런던에 폭증한 조지들은 곧 옛 혁명 열사 김유근의 노랫가락을 남몰래 흥얼대기 시작했다.
“다시는 노예처럼 살 수 없다 외치는 소리[It is the music of a people who will not be slaves again]!”
그러나 당장 폭동이나 무장 봉기는 없었다.
정약용은 사람들에게 부채질만 했지 불꽃을 튕기지는 않았다. 왕을 칼질 연습하기 좋은 재료로 취급하는 월간 대혁명의 논조는 그의 삐라에서 모두 빠졌다.
그해 겨울, 시준이 류큐 침공을 위한 함대를 거의 완비하고 고총련이 인도에 도착했을 때에도 영국에서는 그리 가시적인 변화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멀리 인도 북부에서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
기랑을 따라온 평안도 포수들은 조용한 눈길로 여기저기를 훑어보거나 콜카타(캘커타)의 메마른 땅에 침을 찍 뱉었다.
고려에서 인도까지의 기나긴 항해는 그 자체로 고문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땅에 뻗어서 사흘은 안 일어나고 싶으련만, 신음 하나 내는 자가 없었다.
그중 한 명이 굳은 어깨를 요란하게 풀었다. 섬뜩한 뼛소리가 울렸다.
“회장, 여기가 중국입니까?”
기랑은 목소리를 그다지 숨기지 않고 말했다.
“아니.”
“그럼 며칠이나 걸어야 합니까?”
“안내할 사람이 올 거다. 얌전히 기다려.”
놀랍게도 그들은 여자 한 명의 명령에 잠자코 복종했다. 다른 데 가서라면 염라 태수 앞에서도 무례를 포기하지 않을 듯한 인상들이었지만 지금은 한 사람도 불평하는 자가 없었다.
기랑은 그것에 대해 그다지 감동받지 않았다. 그럴 만한 자들만 골라 왔으니까.
시준이 몰라서 그렇지, 이 5년간 시준 혼자만 공화국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다.
같은 기간 기랑은 고총련을 쌓아 올렸다. 이제 바지사장이 아니라는 정도로는 그녀의 지배력을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기랑은 이번에 데리고 온 특작부대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의심한다면 그것은 여기 있는 영국인 쪽이었다.
잠시 후 껄렁대고 나타난 영길리 놈의 가벼운 인상은 그것을 더욱 부채질했다. 기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
기랑이 자딘 조선 메디컬 컴퍼니의 안내자 제임스 메디선을 성공적으로 접선했을 때, 혁명해군 별기함대의 흑선도 사쓰마 함대를 성공적으로 접선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사쓰마는 막부의 지원 없이 단독 출정해야 했다.
고려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쇄국 하의 일본에서 외국 소식을 받아들이던 창구는 네덜란드 말고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사쓰마번이다.
사쓰마번의 위치로 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웠다. 일본 열도에서 남쪽 대해로 툭 튀어나온 그들은 200년 전 류큐 침공을 비롯해 활발한 해상 활동을 이어왔다.
어떤 의미에서 쇄국은 개국만큼이나 바깥에 대한 적극성을 필요로 한다. 제대로 막기 위해선 외부가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하며, 따라서 선별적인 정보 수집과 교류는 오히려 개항보다 쇄국 시에 더 중요하다.
물론 그건 말처럼 쉽지 않다. 외국의 움직임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 군주의 믿음은 경제 활동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는 공산주의자의 믿음과 비슷하다. 제한된 경로는 제한된 결론만을 불러온다.
언제 어느 시간이든 그런 믿음은 깨졌다. 그래서 미래의 고종과 현재의 쇼코 왕이 실수하였듯, 과거의 일본 막부도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1676년, 명나라 부흥 정권의 ‘우리 대명은 중국의 반을 차지했다’는 허풍을 믿고 류큐를 통해 유황 2만 근을 제공한 바보짓이 그것이다.
막부는 ‘중국이’ ‘자원을’ 요청하는 시점에서 그놈들 볼장 다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야 했다.
다행히 강남을 진압한 청은 일본에 바로 칼끝을 돌리지 않았다. 하마터면 인조식 요가(인도식 요가가 아니다)를 배워야 했을 뻔한 막부로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이 일을 흑역사로 묻어 두었다.
그때 류큐에서 소식 받고 그것을 덜렁 막부에 전해, 이 흑역사의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게 누구이겠는가. 바로 류큐의 주군이자 막부의 신하였던 사쓰마번이었다.
아무리 잊고 싶은 역사라 해도, 과오를 후세에 전하여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지 않으려는 현자는 일본에도 많다.
당대 중국의 급변과, 이에 따라 중화가 없어진 동아시아에서 중조(中朝)의 역할을 자임하는 일본이 나아갈 길을 면밀하게 고찰한 『화이변태(華夷變態, 카이헨타이)』 같은 명저에는 그 쪽팔린 사태가 다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시준의 뇌물을 받은 조슈 사람들이, 거기서 자기 수수료 떼고 나머지를 다시 에도에 갖다 바치며 쑤석거리는 데에도 면밀한 학문적 근거가 있었다.
‘제 신하들도 단속을 못 해서 과거 민망한 일을 낸 사쓰마 원숭이 놈들이 이번에는 또 이기리스와 사달을 일으켰다. 지금 다시 사쓰마의 구원 요청이니 뭐니에 멍청하게 동조한다면, 천하에 막부가 호구라는 것을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사쓰마는 대체 언제 적 일을 들고 오냐고 격노했다.
그러나 옛일을 거울삼기에 역사를 감(鑑, 거울)이라 부르며 존중하는 것이다. 막부의 현자들은 모두 과거를 살펴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았다.
사쓰마는 조슈가 무기 밀무역을 한 정황이 있다고 반격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 위험천만한 시도는 사쓰마 내부에서 봉쇄되었다.
‘야, 그 총 지금까지 다 사들인 게 우리잖아!’
결국 방법이 없었다. 사쓰마는 자력갱생에 도전해야 했다. 삿쵸동맹 대신 죠죠동맹이 들어선 이 세계에서 사쓰마는 외로웠다.
현재 사쓰마를 통솔하는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는 엄밀히 말해 영주가 아니었다.
일본이 대개 그렇듯 나이가 들자 그도 종교에 귀의하고 가독의 자리를 물려준 채 막후에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면 아들 나리노부[斉宣]가 번주인가 하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감히 번의 재정을 긴축하여 아버지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뒷받침하지 못한 죄로 나리노부의 측근들은 배를 가르고, 나리노부 역시 은거(수동태) 중이었다. 따라서 지금의 번주는 어린 손자 나리오키[斉興]다.
그리고 이상의 정보는 하등 쓸데가 없다. 막부와 천황까지 하면 사쓰마는 5중 간접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지만 그건 일본인들에게나 의미 있는 체제다.
시마즈 시게히데가 사쓰마 대장이라는 것만 알면 충분하다.
시게히데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피후견인인 손자를 대신해 명령했다.
“감히 위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서양인을 접견하여 내통한 류큐 국왕의 죄를 묻겠다. 배를 모으고 무사들을 집결시켜라!”
쇼코 왕은 숨긴다고 숨겼지만 그게 될 리가 없다. 쇼코 왕을 내쫓고 싶던 삼사관 이하 류큐의 권신들이 이미 사쓰마에 일러바친 뒤였다.
삼사관은 눈엣가시인 쇼코 왕을 내쫓을 생각이었고 시게히데 역시 동의했다.
다만 삼사관으로 대표되는 류큐 토착 호족도 같이 쓸어버릴 생각이라는 점이 달랐다.
시게히데는 우선 류큐를 깨끗이 정리하고 아예 직할 통치하여, 막부에 사쓰마의 힘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류큐의 자원을 동원해 영국을 막아볼 구상을 마쳤다.
이때 일본은 아직 영지별로 증기선을 만들어대던 막말 시대보다 훨씬 이전이다.
에도 막부는 각 영주들에게 대형 선박의 건조를 금지했고, 일본의 배는 크기와 무력보다는 내부 해운의 안정성과 속도를 중점으로 발달했다.
물론 막부가 야심차게 추진한(그리고 몇 년 쓴 뒤 풍랑에 부서져 버린) 산고쿠마루[三国丸]등 외래 기법을 도입한 대형 회선(廻船 : 화물선)도 없는 건 아니나, 그런 것이 일본 전체에 보편화되었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21세기 말로 하면 서양 덕후, 이때 말로 난벽(蘭癖) 영주였던 시게히데는 최근의 새로운 긴장 상황을 반영하여 여러 척의 배를 건조해 두었다.
네덜란드인의 도움을 얻고, 또 이 시기 활발히 이루어진 중국 배의 답습도 활용하여 당대 사쓰마인이 보기에는 그럴싸한 포함이 몇 척 갖추어졌다.
수상하리만치 정보가 시원시원하게 들어오는 류큐의 소식통에 따르면, 영국은 이미 온후한 신규 총독(공사)의 정책 때문에 류큐 근해에서 해군을 철수시켰다고 들었다.
영국 함대가 아니면 문제없다. 류큐나 중국의 배 정도는 깨뜨릴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사쓰마의 진정한 힘은 배 따위가 아니다.
실제로 시게히데가 중점을 두는 것도 류큐 상륙 후의 정복과 (영국에 대항할) 요새화였지 해상 함대전이 아니었다. 이순신 트라우마가 있는 일본인들은 그런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쓰마 원정군의 주력은 칼을 다루는 일본 특유의 검병 겸 장교, 사무라이들이었다.
사실 사쓰마 무사들은 (사실상) 번주 시게히데에게 불만이 좀 있었다. 양총을 자꾸 들여와 서양 군대를 만들려고 하는 것 때문이다.
옛날 맘루크도 그랬고, 지금 영국의 러다이트도 마찬가지지만 신식 기술이고 문명개화고 간에 자기 밥줄 끊는다는데 좋아할 인간은 하나도 없다.
다만 맘루크처럼 신식 군대를 들이쳐 화끈하게 다 죽여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절대로 질 것 같아서는 아니고, 주군의 재산을 해치는 일은 사도에 어긋나서다.
사쓰마 무사들이 선택한 것은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단체 행동을 통해 가로들을 압박하여 이번 원정에 대거 참여한다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흐름을 이끈 사람은 야심만만하면서도 그 야심에 어울리는 검술을 갖춘 사쓰마 (아마)최강의 검객 야쿠마루 나가사에몬[薬丸長左衛門]이었다.
왠지 고강한 실력을 가졌을 것 같은 이름이다. 하긴 당시 일본인이 흔히 그렇듯 애비가 두 명, 이름이 3개나 되니 그 정도 위세가 안 나 주면 곤란하다.
그러나 나가사에몬을 허세만 부리는 사람이라고 취급하기는 힘들다.
그는 사쓰마에서 식객 노릇 하는 일개 칼잡이가 아니다. 엄연히 막부의 관리로서 이 분쟁이 일어난 류큐 코앞의 섬인 도쿠노시마[徳之島]의 대관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적으로도 이 전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사적으로 보아도 나가사에몬은 사쓰마의 검사들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 양부가 창시한 야쿠마루 지겐류[薬丸自顕流] 검술을 종가 지겐류[示現流]에서 독립시킨 사람이 바로 나가사에몬이다.
일파의 개조를 자처하고, 또 자기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지겐류 사람들의 다양한 비합법 제재를 방어하려면 보통 실력으로는 되지 않는다. 목검으로 투구를 박살낸다는 그의 완력과 소태도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 기예는 따라올 자가 많지 않았다.
따라서 나가사에몬은 상당히 많은 세력을 모을 수 있었고, 그 세력을 존중한 영주 시마즈 시게히데 역시 그를 이 원정대에 포함시켰다.
나가사에몬은 흔들리는 배 위에서 무사들을 독려했다.
“농민 따윈 양총을 들건 대포를 들건 전쟁에서는 쓸데가 없다. 도리도 절개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은 적을 마주치기만 하면 다 내던지고 도망갈 게 뻔해! 이기리스 놈들이건 류큐 놈들이건 이 치솟는 의분을 흰 칼빛으로 바꾸어 일도양단할 뿐이다!”
저쪽에서 그 ‘농민 무리’가 이쪽을 건너다보는 듯했지만, 그리고 그들은 총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사족이 아랫것 눈치를 봐서야 어디에 바른 도리가 올곧게 서겠는가. 무사들은 거침없이 환호했다.
“오오!”
군데군데 심상찮은 외침도 들렸다.
“사쓰마 건아의 기개를 보여주자!”
“비겁한 막부는 나중에 단단히 후회할 것이다!”
막부의 도쿠노시마 대관으로서 마땅히 이 흐름은 말려야 하건만, 나가사에몬 역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최근 종가 시현류 사람들 일부를 회유해 충성 맹세를 받은 것 때문에 막부는 쓸데없는 분란 만든다며 나가사에몬의 관직을 반납시킬 태세였고 나가사에몬도 그게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여러모로 공을 세워 입지를 다져야 할 시점이었다.
그래서 잠시 후, 파수꾼의 절망적인 외침이 들려왔을 때도 나가사에몬은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이기리스 배입니다! 저놈들이 나하[那覇] 코앞에 아주 대놓고 정박해 있습니다!”
배를 몰던 선두(船頭, 선장)이며 타공들이 동요했다.
“그놈들은 류큐를 떠났다고 했잖은가!”
“잠깐, 저놈들이 이기리스 놈들이 맞아? 깃발이 다르게 생긴 것 같은데? 저건 시뻘겋잖아!”
“조슈 쪽에 저런 깃발 단 배가 드나든다고 들은 것 같은데…….”
“뭐가 됐든 배가 서양 대선이라는 건 똑같잖아! 이건 말이 다르다고!”
나가사에몬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으로 저 농민병 따윈 완전히 겁을 집어먹었을 터. 벌써부터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기에서 앞에 나서 무지한 백성을 이끄는 것이 바로 사족이다. 나가사에몬은 뱃전에서 칼을 뽑아 들고 외쳤다.
“서양 대선이 다 무엇이란 말이냐. 애초에 오면 오는 대로 모두 한 칼에 베어줄 각오였느니라. 내 이름을 모르느냐. 내 창과 검은 하늘도 끊는다! 겁먹지 말고 나아가거라!”
돛 다 접고 키 돌릴 태세였던 사쓰마 배는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서른 척에 달하는 배의 모든 승무원이 나가사에몬의 의기에 감동해서는 아니다.
척 봐도 배의 크기가 차이 나는 이상 바다에서 결전을 치르기보다 저들을 피해 상륙하는 편이 낫다. 곧 선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그리고 이강회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다. 망원경을 가지고 있기에 훨씬 전부터 사쓰마 배를 똑똑히 알아본 이강회는 곧 지시를 내렸다.
“왜놈들이 섬에 몰래 내리려 한다. 동지들. 멸적의 포문을 열어라!”
원래 이름 HMS 오로라, 지금 이름 유화(柳花)인 고려인민공화국 혁명해군 원정대의 기함은 38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공화국은 기존에 쓰던 32파운드 캐로네이드는 물론 18파운드 롱 건, 8파운드 롱 건까지 조잡하게나마 만들어낼 수 있었다.
물론 시준이 재료공학이나 무기공학을 알아서는 아니고 예전 그 조지를 비롯해 많은 ‘프렌드’가 도와준 덕분이다.
그렇게 빈 곳마다, 혹은 비지 않은 곳에도 또 대포를 달아댄 유화의 화력은 현재 44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포가 사쓰마 함대를 사정권 안에 넣은 상태였다. 여기 온 나머지 2척의 프리깃 또한 대동소이했다.
제독의 명이 떨어지자 영국 해군의 수기신호를 모방한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그리고 정작 이곳 주인인 류큐 사람들은 멍하니 지켜보는 동안, ‘반동 왜놈’의 머리 위로 혁명의 무자비한 불소나기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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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1. 명청 교체는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소중화 의식을 일으키는 한 계기가 됩니다(물론 이것만 있는 건 아닙니다). 일본도 여진족 따위가? 중화? 라고 생각하던 것은 같은지라…
이 ‘중조(中朝)’ 사상은 조선 소중화사상만큼이나 오래되고 많은 사람에게 연구되던 것이며, 일본 특유의 독립적 위치까지 합쳐져서 후일의 존황사상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화이변태’는 책 이름이면서 동시에 이 정세변화를 일컫는 총칭이기도 했습니다.
2. 이때 유황 2만 근은 정씨 정권이 류큐에 요구한 것이고, 엄밀히는 일본은 ‘그것을 허가’ 한 것입니다. 어쨌든 일본이 곤란하게 되었다는 점은 같으나, 이 일로 청이 일본에 무슨 행동을 개시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만도 못 깨고 있는 판에 일본까지 어쩌긴 어려웠겠죠.
여담으로, 이때의 논리 회로는 이랬습니다(류큐 왕부가 도출해서 보고한 결론입니다).
1. 명나라가 유황 요구하는데 안 주면 나중에 곤란해질 것이다.
2. 만약 대청의 천하가 될 경우, ‘어떻게든’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라는 질문이 나올 타이밍인데, 이는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 아마 위에 서술했던 ‘명이라면 몰라도 청은 일본까지 못 쳐들어온다’ 정도가 아니었나 싶네요.
3. 16세기 초의 맘루크 술탄 무함마드는 총기를 동원한 신식 군대를 꾸리려다가 (무예로 먹고 사는 집단인) 맘루크가 그 군대를 습격해 살해하는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실패합니다. 강도와 형태는 다르나, 예전 한 번 나왔던 대로 이런 ‘군인판 러다이트 운동’은 총기와 화약 도입 과정에서 여러 문명에서 피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4. 야쿠마루 자현류를 독립시킨 사실상 개조 야쿠마루 나가사에몬에 대한 서술은 모두 역사와 같습니다. 다만 작중의 류큐 전쟁 시점은 1817년이고, 이 사람이 시현류와의 갈등으로 대관 자리 내놓고 에도로 가는 것은 1815년입니다. 이 부분은 그간 작중 암허스트가 일으킨 사쓰마와 막부의 갈등 때문에 막부가 시현류 편을 드는 것을 미뤄 놓았다는 설정으로 늦춰졌습니다.
5. HMS 오로라는 원래 프랑스 40문 프리깃을 영국군이 노획한 것입니다. 공화국에서 특별히 과잉 무장을 한 건 아니고, 정규 무장은 38~40문인 배에 42, 44문 때려 박는 일은 원래 영국 해군에서도 자주 하던 짓입니다.
6. 나하는 류큐 왕국의 대표적 항구입니다. 좀 북쪽의 운텐 항과 함께 중요한 두 무역항이지요.